Masuk퇴근 후 다시 병원을 찾은 도진은 비상계단 철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발을 멈췄다. 평소의 나긋나긋하고 애교 섞인 어투가 아니었다. 낮게 가라앉은 채 상대방을 다급히 진정시키려는, 절박하면서도 서늘한 음성. 그것은 분명 수진의 것이었다.
“지금은…… 안 된다고 했잖아. 제발, 말 좀 들어.”
무거운 철문이 소리를 뭉개버린 탓에 문장들이 파편처럼 끊겨 들려왔다. 상대방이 무언가 거칠게 요구하는지, 수진의 거친 숨소리가 문틈 사이로 비릿하게 새어 나왔다. 그녀는 밖의 동태를 살피는 듯 목소리를 더욱 죽이며 간절하게 속삭였다
“……나 너무 무서워. 여기서…… 끝이야. 그러니까 제발, 이번 한 번만 내 말 들어. 응? ....은 내가 잘 돌볼게. 나중에, 나중에 내가 연락할 테니까…….”
누군가에게 처절하게 매달리는 듯한 목소리에 도진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갔다. 자신이 아는 수진은 늘 해사하게 웃으며 그를 반기거나, 보호
화려한 조명이 꺼진 늦은 밤, K국 오닉스 본사 최상층 대표실.적막이 내려앉은 공간 속에서 슬비는 탁자 위에 놓인 책자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운 재단 자선 경매의 최고 기밀 브로셔. 그 두꺼운 종이 재질의 메인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기묘한 광채를 내뿜는 50캐럿짜리 ‘블랙 다이아몬드’였다.그것은 단순한 보석이 아니었다. 오만함에 눈이 먼 강도진을 단숨에 파멸의 늪으로 끌어당길, 가장 치명적이고 매혹적인 미끼였다.지현의 비서로 오랜 시간 그의 가장 가까운 곁을 지켜온 슬비였다. 그렇기에 지현이 일 처리 하나만큼은 칼날처럼 정확하고 유능한 남자라는 사실은 이미 그녀에게 숨 쉬듯 당연한 일상이었다. 빈틈없고 완벽한 그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짝사랑하며 혼자 가슴앓이했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서류를 한 장씩 넘기는 지현의 손길은 평소와 다름없이 냉철하고 거침없었다."성운 재단 쪽에 밑작업은 이미 완벽하게 끝났어. 제이아우라는 이 판에서 완전히 배제했으니, 강도진 그 인간도 아무런 의심 없이 덥석 물 거야. 오직 나와 진우 씨, 그리고 아스테리아의 이름으로만 움직인다."비서로서 그의 곁에서 묵묵히 서포트하던 슬비는, 문득 가슴속에 맴돌던 의문이 떠올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그런데 대표님, 이 정도 크기와 퀄리티의 블랙 다이아몬드는 구하기 정말 어려우셨을 텐데…… 혹시 지수가 예전에 흘리듯 한 말을 기억하고 계셨던 거예요?"그 질문에 서류를 보던 지현의 손길이 멈추었다. 그리고 이내, 지현의 서늘했던 눈빛이 봄눈 녹듯 부드럽게 풀렸다. 냉혹한 비즈니스맨의 가면을 완전히 벗어던진 채, 오직 동생 지수만을 생각하며 짓는 무조건적이고 다정한 미소였다."당연하지. 우리 지수가 지나가면서 예쁘다고 한마디 했던 건데, 오빠가 되어선 당연히 기억해야지. 그리고 애초에 그 아이가 원하는 보석을 마음껏 구해주기 위해 만든
강도진이 눈앞의 적자를 메우기 위해 CB 그룹의 명예를 시장 바닥에 사정없이 내던지는 동안, 박진우의 움직임은 지독할 정도로 고요하고 신속했다."대표님, 예상대로 강 대표가 대대적인 할인전을 감행했습니다. 당장 급한 불을 끌 현금은 돌기 시작했겠지만, 시장의 신뢰는 완전히 바닥을 쳤습니다. 백화점 매장 철수설까지 돌면서 오늘만 주가가 또 8% 추가 하락했습니다."진우는 비서가 올린 주가 그래프를 보며 낮게 읊조리듯 실소를 터뜨렸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거대한 짐승을 숨죽여 기다리던 하이에나의 잔인한 미소였다."멍청한 새끼. 제 손으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랐군."보석 브랜드의 생명은 고결함과 희소성이다. 한 번 싸구려 이미지로 낙인찍힌 브랜드는 정재계 VIP들의 폐쇄적인 사교계에서 두 번 다시 살아남을 수 없다. 강도진은 당장의 퇴출과 부도를 면하기 위해, 가문의 미래를 통째로 팔아치운 꼴이었다.진우가 서늘하게 명령했다."돌아다니는 CB의 유통 주식, 그리고 사외이사들이 겁을 먹고 던지는 투매 물량까지 단 한 주도 남기지 말고 긁어모아. 강도진이 제 발밑의 땅이 꺼지는 걸 눈치챘을 때는, 이미 내 허락 없이는 숨도 못 쉬는 상태여야 하니까.""네, 알겠습니다."진우는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댄 채 차가운 눈빛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한수진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바라보던 도진의 화려한 성은, 이미 밑바닥부터 진우의 거대한 자금력에 잠식당하고 있었다.같은 시각, A국 패션계와 상류층의 시선은 완전히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CB의 처참한 타락을 비웃듯, 제이아우라는 보석 시장의 완벽한 세대교체를 선언하며 무서운 기세로 비상하고 있었다.지수가 선택한 전략은 철저한 '투트랙(Two-Track)'이었다.디자이너 유진의 독창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hope’ 라인이 합리적인 가격과
수진이 제 욕망에 눈이 멀어 있는 사정은 강도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수진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개인사의 추악한 스캔들이 사교계를 뒤흔든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진짜 치명적인 맹독은 강도진이 가장 자신만만해하던 CB 그룹의 심장부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흘러들고 있었다.시작은 인터넷 라이브 방송에서 불거진 '안젤라이트 원석 크랙' 이슈였다. 처음엔 그저 몇몇 까다로운 소비자의 불만 제기 정도로 치부하려 했으나, 여론의 흐름은 도진의 예상보다 훨씬 험악했다. 가뜩이나 대표의 불륜과 가짜 임신 스캔들로 CB라는 브랜드 자체에 극도의 거부감을 느끼던 소비자들이 단체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A국 소비자 규제당국에 CB를 상대로 한 단체 고발장과 전수조사 청원이 접수되었습니다!"비서의 다급한 보고에 도진은 집무실에서 연신 담배를 비벼 껐다. 재떨이에는 이미 장초들이 수두룩하게 쌓여 있었다."규제당국? 고작 보석 표면에 실금 좀 간 걸로 국가 기관이 움직인다는 게 말이 돼?!""그게…… 고발 건수가 이미 만 건을 넘어섰습니다. 당국에서도 사안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오늘 오전, CB의 물류창고와 제조 공장에 대한 엄격한 전수조사에 착수하겠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도진의 미간이 거칠게 좁아졌다. 불길한 예감은 단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A국 규제당국의 칼날은 매서웠고, 조사 결과는 순식간에 CB의 숨통을 조여왔다. 결함의 근본적인 원인은 후처리 공정 이전에, 원석 공급처인 '루체른'에 있었다. 루체른 측이 안젤라이트 원석 자체의 치명적인 경도 결함을 명확히 인지하고도, 자신들의 마진을 남기기 위해 CB 측에 아무런 고지도 없이 결함 가득한 날림 물량을 넘겨버린 것이 당국의 전수조사로 명백히 밝혀진 것이다."루체른 이 개새끼들이…… 우리를 감히 기만해?!"
다음 날 저녁.A국 전역에 풀린 CB 그룹의 주가 동향을 날카롭게 살피던 박진우는 현수와 현지의 보모로부터 다급하게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보모의 목소리는 사시나무 떨듯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대,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아이들이…… 현수와 현지가 사라졌습니다!""……뭐라고요?"순간 진우는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 눈앞이 캄캄해졌다.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져 내리는 충격에 숨이 턱 막혔다."아이들 엄마는요? 한수진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사, 사모님께서는 현재 연락이 전혀 되지 않습니다. 전날 무슨 일인지 집안 물건을 집어던지며 크게 소리를 지르시고는 밤늦게 집을 나가셨는데…… 그 이후로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진우는 이가 갈렸다. 제 욕망에 눈이 멀어 아이들을 방치한 수진에 대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진우는 떨리는 손을 움켜잡으며 아이들이 다니는 로얄 유치원에 즉각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전날 약혼식장에서 터진 강도진의 무정자증 진단서와 수진의 불륜 스캔들이 이미 학부모 커뮤니티를 통해 아이들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진 상태였다. 현수와 현지는 유치원에서 '불륜녀의 자식', '엄마가 가짜 임신을 했다'라며 아이들에게 잔인한 놀림을 당했다. 게다가 콧대 높은 학부모들은 유치원 측에 '추악한 불륜녀의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을 한 공간에 둘 수 없으니 당장 내보내라'며 입학 취소 민원을 폭주시키기까지 했다는 것이다.그 어린것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잔인하고 무거운 폭력이었다.진우는 당장 RV의 보안 팀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지금 당장 로얄 유치원 주변 인근 CCTV와 포스트 빌리지 동선을 확인해. 수단 방법 가리지 말
약혼식 겸 베이비샤워가 열렸던 연회장은 그야말로 ‘초토화’라는 단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A국 유통 대기업의 서 대표가 구급차에 실려 나간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대형 스크린에 박제되었던 강도진의 무정자증 진단서는 그야말로 핵폭탄급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A국의 자극적인 타블로이드 찌라시는 물론이고, 상류층의 폐쇄적인 비밀 커뮤니티는 온통 CB 그룹의 해괴한 스캔들로 마비되었다.[CB 강도진 대표, 난임 진단 숨기고 불륜녀와 베이비샤워? 뱃속 아이의 진짜 아버지는 누구인가.]자극적인 헤드라인이 온 인터넷을 도배한 그 시각, 가장 먼저 뒤집어진 곳은 다름 아닌 도진의 본가였다."이게 무슨 소리냐! 이게 대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야?!"도진의 어머니인 김미자 여사는 거실 소파에 주저앉아 호흡곤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과거 지수를 향해 '애도 못 낳는 씨 없는 박', '가문을 끊어먹을 불임녀'라며 온갖 입에 담지 못할 폭언과 천대를 퍼부었던 김미자였다. 그런데 정작 씨가 없는 쪽이 제 금쪽같은 아들이었다니.옆에 있던 부친 강수한 역시 굳은 얼굴로 연신 담배만 태우며 벼락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문의 명예를 목숨보다 아끼는 강수한에게 이번 A국 사교계의 스캔들은 평생 쌓아 올린 명성에 먹칠을 한 수준이었다."강도진이 무정자증에 준하는 상태인데…… 한수진 그 불륜녀 배 속에 든 게 우리 피붙이가 아니라고?! 내가, 내가 남의 집 자식새끼한테 가문의 돈을 쏟아부었단 말이냐!!"김미자는 핏대를 세우며 거품을 물고 쓰러질 듯 악을 썼다. 당장 한수진의 머리채를 뽑아버리겠다며 날뛰는 김미자를 비서들과 강수한이 차갑게 뜯어말렸다. 당장 배를 갈라서라도 친자 확인을 하라며 실성한 듯 부르짖는 어머니를 향해, 초췌해진 얼굴의 도진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어머니, 진정하세요. 아직
진행자가 매끄럽게 마이크를 이어받으며 장내의 분위기를 전환했다."두 사람과 새롭게 찾아온 고귀한 생명의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다음으로는 강도진 대표님께서 예비 신부 한수진 디자이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선물이 있다고 합니다."도진이 가볍게 손짓하자, 최태준 비서실장이 고급스러운 자주색 벨벳 보석 상자를 들고 단상 위로 올라왔다. 상자가 열리자, 그 안에서 영롱한 광채를 뿜어내는 목걸이가 모습을 드러냈다.도진이 수진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우리 CB의 메인 라인인 '영원한 사랑' 시리즈 뒷면에는 고유의 시리얼 넘버가 각인된다는 거 알고 있지? 이건 그 어떤 VIP에게도 주지 않은 최초의 01번이야. 그리고 이제 내 삶의 1번도 바로 너야.""도진 씨……."도진의 감동적인 고백에 수진의 눈에 결국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도진의 고백에 담긴 진심의 무게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전처인 이지수조차 가지지 못했던 '영원한 사랑'의 01번 펜던트가 마침내 자신의 손에 쥐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지수의 오닉스만큼은 아닐지라도, 수진은 제 인생 처음으로 '강도진'이라는 거대한 배경과 권력을 온전히 손에 넣었다는 확신이 들었다."나도 당신을 위해 아주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어요."수진은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도진을 향해 화사하게 웃었다.이윽고 단상 뒤편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불이 들어왔다. 두 사람의 고등학교 시절 풋풋한 모습부터 비밀리에 만남을 이어오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흘러나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도진은 스크린을 바라보면서도 기묘할 정도로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았다. 자신이 공들여 만들어 놓은 '한수진'이라는 인형이 마침내 곁에 섰건만, 과거에 느꼈던 짜릿한 소유욕도, 승리감도 없었다. 그저 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연극이 일분일초라도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철수와 민철이 올린 프로필을 검토한 지수는 지체 없이 움직였다. 두 사람을 포섭하기 위해 지수가 선택한 약속 장소는, 다름 아닌 아직 가림막이 쳐진 채 공사가 한창인 ‘더 문’ 빌딩 2층의 남성복 라운지 예정 부지였다.임시 테이블과 도면만 덩그러니 놓인 서늘한 콘크리트 현장에 도착한 두 남자는 의구심 가득한 얼굴로 지수를 바라보았다.한 명은 클래식과 파격을 아우르는 독보적인 세공 감각을 가졌으나 자본과의 타협을 거부해 온 남성복의 천재, 테일러 권. 다른 한 명은 정재계 VIP들의 헤어와 스타일링을
거대한 가림막이 처진 ‘더 문’ 빌딩의 리모델링 현장은 자욱한 먼지와 기계음으로 가득했다. 지수는 머리를 깔끔하게 묶은 채, 제 든든한 양팔인 김민철 실장, 그리고 보안담당인 김철수와 함께 공사가 한창인 현장 내부를 천천히 걸었다.콘크리트 골조가 훤히 드러난 거대한 지하 공간에 멈춰 섰을 때, 철수가 태블릿을 펼치며 지수에게 나직하게 설명을 시작했다.“대표님, 요청하신 최첨단 보안 및 동선 제어 시스템 설계안입니다. 맞춤 서비스를 신청한 VIP 고객이 지하 주차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차량 번호와 안
지수의 품에서 한참을 목 놓아 눈물을 쏟아낸 유진은,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제 눈물로 얼룩이 져버린 지수의 고급스러운 실크 드레스를 민망한 듯 쳐다보았다.“괜찮아요. 이제 진정 좀 됐어요?”지수의 다정하고 따뜻한 물음에 유진의 눈가에 다시금 왈칵 눈물이 맺혔다. 지수는 그런 유진의 젖은 눈가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조용히 속삭였다.“그만 울어요. 눈가 짓물러져요.”지수의 다정한 달램에 유진은 간신히 울음을 삼켰다. 그녀는 돌아서려는 지수를 붙잡고, 공방 옆에 위치한 자그마한
경리단길의 후미진 골목, 낡은 공방의 문을 열었을 때 지수를 맞이한 것은 차가운 적막이었다.공방 안쪽, 빛바랜 작업대 앞에 넋을 잃고 앉아 있는 유진의 모습이 지수의 시야에 담겼다. 그곳에는 한때 촉망받던 천재 디자이너의 자부심도, 젊음으로 생기 있게 빛나던 여자의 흔적도 없었다. 오직 잔인한 생활고와 비극에 처참하게 짓밟혀 바스러지기 직전인 아슬아슬한 어머니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한수진은 병원비를 주었다고 생색을 냈지만, 그것은 겨우 가온이가 산소호흡기를 달고 기본 치료만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