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7일간 입원 치료를 마치고 영양제로 간신히 기력을 회복한 지수는 배아 이식을 끝내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도진에게서는 단 한통의 연락도 없었다.지숙 역시 먼저 손을 내밀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적막하고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거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지수의 귓가에 가정부의 은밀한 전화 통화 소리가 드려왔다.
"네 사모님 진짜라니까요. 그 여자가 일주일이나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분명 다른 남자가 생긴거에요.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사장님은 방치할수는 없는 거죠 . 네 ,맞아요 제가 어떻게 사모님께 거짓말을 할 수 있겠어요. 네 . 네. 알겠습니다. 또 연락 드릴께요."
가전부는 상전이라도 된 듯 쇼파에 깊숙이 기대앉아 과자를 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지수와 눈이 마주친느 순간, 그녀는 미안해하기는 커녕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며 TV 채널을 돌려버렸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지수의 휴대폰이 요란하가 울렸다, 시어머니 '김미자'였다.
"네. 어머..."
"야! 너 어디야! 당장 본가로 와"
지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카로운 호통이 쏟아졌고, 전화는 일방적으로 끓겼다. 도진의 모습이 떠올라 설핏 웃음이 났다. 이 전화 매너 시모에게서 도진에게로 전달 된듯하다. 평소의 지수였다면 앞뒤 잴것 없이 시댁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병원에서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드는 경고도 있었지만 더 이상은 이 집안에 끌려 다닐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아줌마 나 점심 전이에요. 소화가 잘 되는 부드러운 음식으로 준비해주세요."
지수는 차가운 시선을 뒤로한 채 욕조에 물을 받아 몸을 씻고 나왔다. 하지만 식탕 위에 차려진 것은 지수가 먹기 힘든 자극적이고 기름진 음식뿐이었다.
" 사모님 반찬 남은게 이것 뿐이네요. 그냥 드세요" 그말을 남기고 가정부는 다시 쇼파로 돌아갔다.
지수는 조용히 울음을 삼키며 다짐했다.
'이제 14일 남았어. 14일 뒤에 결과가 나오면 달라질꺼야. 임신이 된다면 도진씨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 올꺼고 그러면 이런 부당한 대우도 달라질꺼야. 하지만... 만약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그때는 정말 이 손을 놓을거야'
지수는 독이 든 성배를 치우듯 음식을 쓰레기통에 비워버리고 직접 국수를 삶기 시작했다.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다면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했으니까.
지친 몸으로 겨우 잠이 들었을 무렵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배려없는 발소리와 함께 서늘하게 누워있는 지수를 내려다보는 도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지수는 눈을 감은 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일주일동안 어디 있었어! 오늘 어머니가 불렀는대로 안 갔다며! 대체 당신 뭐하자는 거야! "
도진의 고함이 고요한 방안을 난도질 했다.
"결혼해서 당신이 한게 뭐야 집안일은 아주머니가 해주시고 당신은 놀고 먹고 있으면서 임신도 못해 치료 받는다면서 결과는 없고 이젠 당신 성질 받아주는 것도 지친다. 진짜!"
답답하다는 듯 넥타이를 풀어 던진 도진은 대답 없는 지수를 차갑게 쏘어본 뒤 친구 민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애들 불러 기분 더러워 술이나 마시자 ."
다시 뒤돌아 나가는 도진의 뒤로, 멀리서 그의 페라리가 거칠게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걸까? 내가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할 정도야? 내가 사랑했던 강도진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말라버진 줄 알았던 눈물이 지수의 눈가에 다시금 고였다.
품평회장의 조명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긴장감이 팽팽하게 고조되었다. 중앙 무대 위, 장막으로 가려진 두 개의 마네킹을 향해 클로이 벤넷과 글로벌 패션 커미션 심사위원단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그럼, 글로벌 브랜드 선정을 위한 2차 실물 샘플 품평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CB 디자인실의 작품부터 공개합니다."사회자의 신호와 함께 CB의 마네킹을 덮고 있던 패브릭이 부드럽게 거두어졌다."아……!"심사위원단 사이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CB가 선보인 드레스와 주얼리는 대중이 '클로이 벤넷'이라는 클래식한 대형 스타에게 기대하는 완벽한 가치 그 자체였다.쇄골과 팔라인을 부드럽게 감싸는 섬세한 시스루 롱 슬리브 위로 은사 레이스가 정교하게 얹힌 슬림한 머메이드 드레스. 그 백미는 드레스의 쇄골 라인을 타고 흐르는 강도진의 메인 하이주얼리 세트였다.백금으로 세공된 커다란 하트 프레임 안쪽으로, 최상급 콜롬비아산 에메랄드들이 정교하게 세팅된 목걸이. 마네킹의 미세한 진동에 맞춰 펜던트 하단의 에메랄드가 물방울처럼 흔들리며 초록빛 광채를 사방으로 흩뿌렸고, 귀 밑으로는 동일한 그린 빛깔의 에메랄드 드롭 귀걸이가 길게 떨어져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다. 대중성과 정밀함, 그리고 정통 하이주얼리 세트의 극치였다.강도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찰스와 눈빛을 교환했다. 실수 없는 배수진 속에서 0.1mm 단위의 재단과 세공으로 완성해 낸 정교함, 대중이 완벽히 환호할 만한 상업적 화려함의 정석이었다."이어서, 제이아우라의 작품을 공개합니다."두 번째 장막이 슬르르 내려앉은 순간, 품평회장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CB의 슬림한 머메이드 라인과 완벽히 대조를 이루는, 압도적인 볼륨감의 클래식 볼가운(Ball Gown) 드레스였다. 깊은 브이넥 상체에는 입체 꽃 모티프가 피어올라 있었고, 허리 라인을
CB 디자인실의 작업대 위에는 은빛 광택이 흐르는 최상급 실크 원단이 펼쳐져 있었다. 강도진 대표가 인맥을 총동원해 해외에서 어렵게 구해온 원단이었지만, 그 양은 딱 드레스 한 벌을 간신히 제작할 수 있는 '소량'에 불과했다. 여분 원단은 단 1cm도 없었다.하지만 다행히도 원단을 제외한 나머지 부자재들은 사정이 달랐다. 도진이 최고급 실과 특수 안감, 은사 레이스, 그리고 드레스 장식에 쓰일 최고급 진주와 멜리 다이아몬드를 아낌없이 지원해 준 덕분이었다.문제는 단 하나, 겉감을 이루는 주 원단 재단칼 끝이 1mm만 어긋나거나 바느질 한 땀에서 실수하는 순간 2차 제출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배수진이라는 사실이었다."모두 들었겠지. 부자재는 원하는 만큼 쓰되 메인 원단 여분은 없다. 가위질 한 번, 바느질 한 땀에도 실수하는 순간 이번 프로젝트는 그자리에서 끝이야."강도진의 낮고 무거운 경고에 디자인실 전 팀원의 얼굴이 바짝 경직되었다.찰스가 가위와 패턴지를 들고 재단판 앞에 섰다. 평소의 오만하던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손가락 마디마디에 핏줄이 서설 정도로 긴장감이 팽팽했다. 메인 패턴사와 디자이너들 역시 마른침을 삼키며 원단 끝을 다치지 않게 가만히 눌러 잡았다. 시침핀 하나를 꽂는 위치조차 세 사람이 달라붙어 수평계를 대듯 0.1mm 단위로 확인을 거듭했다.스윽, 사악—서늘한 칼날 소리와 함께 살얼음판을 걷던 메인 원단 재단이 끝나자, 디자이너들의 정교한 손길이 드레스 세부 공정으로 일제히 뻗어 나갔다.선임 디자이너들은 재단된 실크 겉감 아래 최고급 수입 안감을 대고, 0.5mm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섬세한 시침질로 원단의 핏을 잡아 올렸다. 그 위로 은사 레이스가 미세한 간격으로 결을 따라 올려붙여졌다. 디자이너들은 루페를 눈에 대고 바늘 끝을 오가며 은사 레이스 결 사이에 은빛 광택의 진주와 영롱한 멜리 다이아몬드를 한 땀 한
원단과 원석 수급 문제로 난항을 겪던 CB였지만, 2차 실물 샘플 제작이 본격화되자 디자인실과 세공실의 공기는 급격히 달라졌다.강도진 대표는 아스테리아의 신규 원석 공급이 막히자 결국 CB 지하 보석고에 오래 묵혀두었던 비축 원석들을 풀기로 결정했다. 비록 최근 트렌드에 맞는 최상급 컬러의 원석은 아니었지만, CB의 수석 원석 가공사인 채준영의 눈빛에는 오히려 오만하고 진한 자신감이 일렁였다.과거 블랙 다이아몬드 대결에서 지수에게 완패하고 김인식 장인에게 제자 타이틀마저 박탈당했던 굴욕을 기억하는 그였지만, 그렇기에 이번 2차 실물 제작 판은 준영에게 더없는 기회였다."대표님, 걱정하실 필요 전혀 없습니다. 이번에 보석고에서 풀린 원석들은 지난 수년간 제가 성질을 완벽히 파악하고 손에 익혀온 녀석들입니다. 결이 어디로 터지는지, 어느 각도에서 깎아야 빛을 가장 크게 받아들이는지 제 손끝이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채준영은 돋보기를 눈에 매고 원석의 단면을 훑으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덧붙였다."수년간 다뤄온 이 익숙함과 세공 속도라면 지수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특히 원석 가공, 그중에서도 에메랄드만큼은 과거 김인식 장인에게도 인정받았던 분야입니다. 찰스 실장님의 디자인에 맞게 세공 단계를 하나 더 늘려서 반짝임을 극대화해 보죠. 제이아우라가 어떤 원석을 들고 나오든, 숙련도와 완성도에서 우리가 압도할 겁니다."채준영의 당당한 장담에 강도진은 그제야 타들어 가던 속을 조금 쓸어내렸다. 비록 최고급 신규 원석 라인을 새로 구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으나, 수석 가공사의 단단한 오기와 숙련된 기술력만큼은 믿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세공실 안에는 휠이 돌아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원석의 가루가 사방으로 흩날리기 시작했다.본격적인 제작에 돌입하자, 유현에게도 비로소 작은 안식처가 생겼다.사람들의 냉담한 시선과 찰스의 은근한 견제로 숨이 턱턱 막
유진의 연락을 전해 받은 동기는 곧바로 유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이아우라의 핵심 디자이너인 유진 선배가 직접 너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수화기 너머 돌아온 유현의 목소리는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고맙지만, 난 안 만날래.”[뭐? 유현아, 유진 선배는 너처럼 디자인 빼앗겼던 경험이 있어서 너한테 정말 도움을 주고 싶어 하셔. 이런 기회가 어디 있다고 그래?]“나 아직 CB 소속 디자이너야. 아무리 억울해도 타사 디자이너를 만나서 회사 내부 일을 이야기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 그리고…… 대표님도 사정이 있으셨을 거야.”자신의 공을 빼앗기고 짓문드러지면서도, 강도진을 향한 미련과 디자이너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는 유현이었다. 동기의 안타까운 설득에도 유현은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밝히고 통화를 끊었다.하지만 전화를 끊고 돌아선 CB 디자인팀 내부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지난 회의실 사건 이후, 유현을 바라보는 팀원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낙하산처럼 들어와 단기간에 전문 분야 디자이너로 승진한 유현을 향한 짙은 시샘과 질투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게다가 실세인 찰스 실장의 눈밖에 난 유현이었기에, 찰스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팀원들은 앞다투어 유현을 은근히 따돌렸다."유현 씨, 이 잡일 좀 처리해 줘. 아, 참. 유현 씨는 이제 '독자적인' 디자이너라 이런 공용 서류 정리 같은 건 안 하나?""찰스 실장님 2차 컨셉안 보조는 저희가 할 테니까, 유현 씨는 그냥 남은 잔업이나 봐요."대놓고 주고받는 뼈 있는 말들과 차가운 외면. 여기에 찰스는 겉으로는 온화한 척 유현의 의견을 묻는 듯하면서도, 막상 유현이 제출한 디자인 보완안은 훑어보지도 않은 채 테이블
CB 내부가 오만과 서러움, 그리고 성과에 눈이 먼 침묵으로 균열을 일으키는 동안, 제이아우라의 프라이빗 회의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화려한 가시적 스케치로 눈길을 사로잡으려던 여느 브랜드들과 달리, 이지수와 총괄 디자이너 지나, 그리고 전담 팀원들은 밤을 지새우며 ‘클로이 벤넷’이라는 한 인간의 생애와 서사를 해석하는 1차 기획안 작성에 사력을 다했다.이번 1차 심사는 완성된 드레스 도안을 제출하는 단계가 아니었다. 클로이 벤넷이라는 아이콘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떠한 비전과 방향성(Mood Board)으로 그녀의 프로젝트를 총괄할 것인지 브랜드의 ‘철학과 감각’을 증명해야 하는 서류 및 비주얼 콘셉트 입찰 단계였다.유진이 수집해 온 클로이의 프라이빗 서사와 지나의 섬세한 텍스처 기획, 그리고 지수의 직관적인 보석 및 스타일링 디렉팅이 톱니바퀴처럼 맞아떨어졌다.지수는 팀원 한 명 한 명의 디테일한 아이디어와 피드백에 일일이 귀를 기울였다. 심지어 막내 디자이너가 클로이의 10년 전 인터뷰 구석에서 찾아낸 ‘어린 시절 어머니의 정원에서 처음 보았던 작은 야생화의 기억’이라는 키워드조차 놓치지 않았다. 지수는 그 야생화를 향후 실물 제작 단계에서 '클로이의 숨겨진 위로'로 구현해 내겠다는 감성적인 서사 콘셉트를 기획서 중앙에 녹여냈다.지나가 완성된 1차 무드보드와 콘셉트 포트폴리오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대표님…… 이건 단순히 클로이의 패션 취향을 분석한 기획서가 아니에요. 클로이가 걸어온 삶의 발자취이자, 그녀 자신조차 잊고 있던 순수함을 일깨워 줄 하나의 서사시예요. 클로이가 이 제안서를 펼쳐 본다면, 가슴이 울컥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지수가 피곤함 속에서도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품평회 기획 회의실을 나선 한유현은 가슴을 짓눌러오는 답답함에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차가운 복도 공기를 허겁지겁 마셔보았지만, 서러움으로 타들어 가는 목구멍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억울함에 입술을 세게 깨물던 유현은 결국 결심한 듯 발걸음을 돌려 강도진의 대표실 앞으로 향했다.똑, 똑.자신을 바닥에서 발탁해 주고 가능성을 알아보아 준 사람. CB의 수장이자 존경하는 스승인 강도진 대표만큼은 자신의 진심을 믿어줄 거라는, 마지막 희망 하나 때문이었다."들어오세요."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무심한 목소리에 유현은 침을 꿀꺽 삼키고 문을 열었다. 그러나 대표실로 들어서자마자 도진의 눈빛에 스치는 깊은 피로감을 유현은 놓치지 못했다.'또 저 어리광을 받아줘야 하나…….'도진은 속으로 짙은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찻잔을 받침대에 내려놓았다. 유현은 떨리는 손을 꽉 쥐며 벅차오르는 목소리로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대표님, 정말입니다. 오늘 찰스 총괄님이 내놓으신 수정안은…… 제가 붉은 펜으로 드레스 실루엣 라인과 자수 위치를 직접 고쳐 그린 제 디자인입니다. 절대로, 절대로 거짓말이 아닙니다!”유현의 눈가에 간발의 차로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그녀의 호소를 듣는 도진의 반응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유현 씨.”도진이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유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나도 유현 씨의 감각을 높게 평가합니다. 하지만 실증적인 물증이나 증거가 없는 이상, 앞으로 수년간 CB를 이끌어 갈 총괄 디자이너 대신 유현 씨의 편을 들어줄 수는 없습니다.”“대표님……!”“그리고 유현 씨. 지난번에도 중요한 초기 디
지수는 도전에게 연락하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119를 불렀다. 하지만 출산이 임막한 임산부처럼 부푼 배때문에 혼자서 움직이는 것조차 무리였다. 지수는 필사적으로 옆방에 잠든 가정부를 불렀다."아줌마 아줌마...! 하아, 남 좀... 도와주세요." 하지만 돌아온 것은 문트에 타고 넘고오는 가정부의 코고는 소리뿐이었다. 이것이 이 집에서 지수의 위치였다. 남편의 무관심 속에 고용인에게조차 무시당하는 철저한 그림자 같은 아내.지수는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연락을 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K국에 있는 부모님이나 오빠에
평번한 여대생이었던 '이지수'의 세상은 '강도진'은 만나고 완전히 변했다.언제나 부모님과 오빠의 과잉보호 속에 기사님이 태워 주시는 차와 가정부의 가사 관리 속에만있던 지수에서 생애 처음으로 모든일은 스스로 하는 생활은 힘들고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큰차가 아닌 작은차에 적응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친구도 만날겸 지수가 타고다니는 경차 동호회에 가입하였다. 그곳에서 지수는 스물둘의 강도진을 만났다. 도진은 185의 훤칠한 키에 다부진 어깨, 오똑한 콧날에 강아지처
"기쁘지... 않아?" 수진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도진은 굳어있던 안면 근육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껍데기뿐인 미소가 그의 얼굴에 기괴하게 자리 잡았다. "당연히 기쁘지. 내일 병원 갔다가 아기용품부터 보러 가자. 전에 네가 갖고 싶다던 한정판 가방도 사줄게." 그의 다정한 음성에 수진은 안심한 듯 도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도진은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입안의 쓴 침을 삼켰다. 수진과 밀회를 즐기면서도 잠자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때마다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피임을 챙겼던 자신이었다. '임
그토록 기다렸던 임신 소식이었지만, 지수와 도진에게 허락된 기쁨은 야속할 정도록 짧았다. 다음날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확신을 유보한 채 일주일 후에 다시 검사하자는 말만을 나겼다. 그 일주닝은 도진과 지수에게 평생보다 긴 지옥이었다. 손끝하나 대면 깨질 것 같은 불안 속에서 부부는 서로를 위로하며 버텼으나, 운명은 그들에게 자비롭지 않았다.일주일 후 다시 마주한 초음파 화면에는 생명의 고동 대신 기괴한 그림자만이 가득했다. " 포상기태 입니다." 의사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 임신유지 호르몬의 과다 분비로 태아를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