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전날 시어머니에게 수모를 당하고 돌아온 지수는 K국에 있는 오빠 이지현에게 연락을 했다.
" 오빠~ 잘 지내? 너무 오랫만에 연락했지? 실은 나 부탁하고 싶은게 있어서 ...."
지금 K국은 아침 6시였다. 지현은 시차도 잊은 채 걸려온 동생의 목소리에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다정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 공주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 줘야지. 무슨 일인데. 말만해. 오빠가 다 처리해 줄께."
여전히 자신을 아껴주는 오빠의 음성이 지수는 목이 메었지만, 간신히 감정을 억눌렀다.
" 오빠 나 아이가 생기면 혼자서 회사를 운영하기 힘들것 같아서 대리인이 필요해. 지금은 김실장이 해주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잖아. 사람 좀 소개시켜줘."
지현은 동생의 목소리에 담긴 미세한 떨림을 느끼며 다시 심각하게 물었다.
"진짜 그게 다야? 다른 문제가 있는건 아니고? 혹시 도진이가 너 힘들게 하니?"
"아니야 진짜 그게 다야. 도진씨 나한테 잘해줘. 오빠는 걱정이 너무 많아 "
지현은 어쩌면 지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지수의 말을 빋어주기로 했다.
"알았어 내가 A국에 괜찮은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보고 연락할게. 무슨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부모님한테 못하겠으면 나한테라도 해야해. 이 세상에서 너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건강챙기고 "
통화를 마지고 지현은 바로 그의 수석비서이자 지수의 절친인 슬비를 불렀다.
"박비서님 혹시 최근에 지수한데 이야기 들은것 없나요?"
슬비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대답했다.
"아니요 지수랑 연락 못 한지 한달 정도 되었습니다. 혹시 지수한테 무슨일이 있나요?"
"아닙니다. 대신 K국에 지수를 도와줄 인재를 찾아주세요. 그리고 지수의 남편 뒷조사를 부탁드립니다. 물론 지수에게는 알리지 마세요. " 지시를 마친 지현이 다시 서류를 살폈다.
슬비는 빠를게 메모하고 지수에게 연락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사무실을 나왔다.
지수는 오빠 지현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너보다 중요한 건 없어. '
오랫만에 듣는 가족의 애정에 지수의 황량하던 마음에 작은 씨앗이 하나 떨어진것 같았다.
오후가 되자 하수진의 SNS에 새로운 게시물이 올라왔다는 알람이 울렸다.
[8년만에 다시 만난 사람. 날 잊지 않아줘서 고마워. 함께 해줘서 고마워]
그 사진속 두 사람이 맞잡은 손에는 지수의 결혼반지와 소름 끼키도록 비슷한 디자인의 커플링이 끼워져 있었다.
지수는 헛웃음을 삼켰다. 수진은 분명 가정이 있고 5살 3살 두아이를 둔 엄마였다. 그런 여자가 남편가 아이들을 내팽개치고 도진과 밀월 여행을 즐기는 그 당당함에 소름이 돋았다.
그 시간 도진은 수진이와 M시의 바다가 보이는 H호텔 스위트 룸에 있었다. 도진은 수진과 함께 쇼파에 앉아서 내일 열릴 경매의 물품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곳은 지수와 결혼기념일마다 찾던, 추억이 갓든 장소였다.
"도진아 진짜 내가 사달라는거 다 사줄꺼야? "
"당연하지 너를 만나지 못했던 8년동안의 시간동안 챙겨주지 못한 생일선물이야. 받아 줄꺼지?"
수진은 감동한 눈빛으로 도진의 품에 안기며 가식적인 걱정을 내비쳤다.
"나는 너무 좋지. ... 지수씨가 알면 화내지 않을까? 내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다고 너의 결혼 생활까지 불행하게 하고 싶지 않아. 나는 그냥 이렇게 니 옆에만 있어도 행복해."
그말을 들은 도진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수진에게 깊은 키스를 하고 대답했다.
"냅둬. 그 사람은 그런거 신경 안써. 생기지도 않는 애 만들겠다고 병원다닌다고 바쁘잖아. 그시간에 자기 관리나 하지. 이젠 쳐다보기도 싫어."
도진의 눈에는 정욕과 야망만이 가득했다. 그는 수진을 앉아 들고 침대로 향하며 지수라는 존재를 완저히 지워버렸다.
그날 밤, 도진은 지수가 처음 임신 사실을 알렸던 그날처럼 한 손에는 화려한 꽃다발을, 다른 한 손에는 망고 케이크 상자를 들고 귀가했다. 하지만 도진이 준비한 장미는 붉은색이 아니었다. 거실 스탠드 불빛 아래 놓인 꽃잎은 창백한 노란색이었다. 노란 장미.오랜만에 일찍 들어온 도진은 현관에서부터 집안의 적막을 살폈다. 거실 한쪽, 태블릿 PC의 빛에 의지해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지수의 옆모습이 보였다. 느슨하게 올린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 그리고 고심하는 듯한 오뚝한 콧날. 도진은 그 서늘하고도 우아한 옆얼굴에서 어째서인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집요한 시선을 느낀 지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말없이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비즈 함과 스케치 패드를 정리했다. 도진에게는 무해한 취미로 보이겠지만, 지수에게는 무너진 디자인 감각을 되찾기 위한 필사의 수행이었다.“일찍 올 줄 몰랐어. 저녁 준비 하려면 시간 좀 걸려. 씻고 와.”지수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무감했다. 도진은 가슴 한구석이 찌릿한 불편함을 느꼈지만, 무엇이 달라진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 애써 미소 지었다.“저녁은 됐어. 네가 좋아하는 망고 케이크 사 왔는데, 같이 한잔하자.”도진이 건네는 장미와 케이크를 받아들던 지수의 손끝이 움찔했다. 장미가 노란색인 것을 확인한 지수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지수의 시선을 읽은 도진이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별 의미 없어. 오늘은 노란 장미가 싱싱해서 선
그토록 기다렸던 임신 소식이었지만, 지수와 도진에게 허락된 기쁨은 야속할 정도록 짧았다. 다음날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확신을 유보한 채 일주일 후에 다시 검사하자는 말만을 나겼다. 그 일주닝은 도진과 지수에게 평생보다 긴 지옥이었다. 손끝하나 대면 깨질 것 같은 불안 속에서 부부는 서로를 위로하며 버텼으나, 운명은 그들에게 자비롭지 않았다.일주일 후 다시 마주한 초음파 화면에는 생명의 고동 대신 기괴한 그림자만이 가득했다. " 포상기태 입니다." 의사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 임신유지 호르몬의 과다 분비로 태아를 제외한 부속기관만 비정상적으로 증식하는 질환입니다. 안타깝지만 태아는 자라지 않기때문에 소파술만이 유일한 치료방법 입니다" 순간, 지수의 세상이 암전되었다. 충격으로 정신을 잃어가는 지수를 붙잡으며 도진이 비명 섞인 질문을 던졌다. "검사가 잘 못 되었을 가능성은 없나요?오진일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의사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지수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를 맞이한 것은 하얀 병실 천장과 소독약 냄새였다. 도진은 지수의 손을 붙잡고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지수야, 다른 병원 가보자. 여긴 돌팔이가 분명해. 우리아이가 자라지 않다니, 그게 말이 돼?" 도진의 절규 섞인 슬픔 앞에 지수는 그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후 찾아간 세 군데의 병원에서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마지막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후 지수는 비로소 입을 뗏다. "소파술 받겠습니다." 도진은 경악한 표정으로 지수를 바라보았다. "지수야,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해? 조금만 더 기다려 보면 혹시라도....!" 지수의 눈빛은 단호했고,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나 간호학 전공이야 거기다 부인과에 관심이
"기쁘지... 않아?" 수진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도진은 굳어있던 안면 근육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껍데기뿐인 미소가 그의 얼굴에 기괴하게 자리 잡았다. "당연히 기쁘지. 내일 병원 갔다가 아기용품부터 보러 가자. 전에 네가 갖고 싶다던 한정판 가방도 사줄게." 그의 다정한 음성에 수진은 안심한 듯 도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도진은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입안의 쓴 침을 삼켰다. 수진과 밀회를 즐기면서도 잠자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때마다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피임을 챙겼던 자신이었다. '임신이라고?' 머릿속에 의구심이 뱀처럼 똬리를 틀었지만, 도진은 애써 부정했다. 어쩌면 이건, 지수를 주사기 무덤에서 구원해줄 선물이라고 스스로를 속였다."그런건 괜찮아 하지만 우리 아이가 사생아 소리 들을까.... 그게 걱정이야하지만 나는 너와 지수씨를 사의가 나빠지길 원하는 건 아니야." 수진의 자책하는 말투가 평소에는 자신을 향한 애정과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겠지만, 지금의 도진에게는 그저 무거운 납덩어리처럼 다가왔다. 이혼과 사생아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도진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어린 시절 여성편력이 심했던 아버지때문에 힘들어 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 자신은 평생 한 여자만 사랑하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어느덧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단지 도진 자신만이 그 잔인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도진에게 '아내'란, 처음부터 끝까지 지수 단 한 사람 뿐이었다. "그 문제는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아버지는 어머니를 울렸지만, 나는 지수를 울리지는 않아, 지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나는 여전히 지수만을 사랑해.' 도진은 술잔 속에 비친 자신의 비겁한 눈을 피했다. " 너는
그토록 기다렸던 임신 소식이었지만, 지수와 도진에게 허락된 기쁨은 야속할 정도록 짧았다.다음날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확신을 유보한 채 일주일 후에 다시 검사하자는 말만을 나겼다.그 일주닝은 도진과 지수에게 평생보다 긴 지옥이었다. 손끝하나 대면 깨질 것 같은 불안 속에서 부부는 서로를 위로하며 버텼으나, 운명은 그들에게 자비롭지 않았다.일주일 후 다시 마주한 초음파 화면에는 생명의 고동 대신 기괴한 그림자만이 가득했다." 포상기태 입니다." 의사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임신유지 호르몬의 과다 분비로 태아를 제외한 부속기관만 비정상적으로 증식하는 질환입니다.안타깝지만 태아는 자라지 않기때문에 소파술만이 유일한 치료방법 입니다."순간, 지수의 세상이 암전되었다. 충격으로 정신을 잃어가는 지수를 붙잡으며 도진이 비명 섞인 질문을 던졌다."검사가 잘 못 되었을 가능성은 없나요?오진일 수도 있잖아요!"하지만 의사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지수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를 맞이한 것은 하얀 병실 천장과 소독약 냄새였다.도진은 지수의 손을 붙잡고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다."지수야, 다른 병원 가보자. 여긴 돌팔이가 분명해. 우리아이가 자라지 않다니, 그게 말이 돼?"도진의 절규 섞인 슬픔 앞에 지수는 그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후 찾아간 세 군데의 병원에서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마지막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후 지수는 비로소 입을 뗏다."소파술 받겠습니다."도진은 경악한 표정으로 지수를 바라보았다."지수야,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해? 조금만 더 기다려 보면 혹시라도....!"지수의 눈빛은 단호했고,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나 간호학 전공이야 거기다 부인과에 관심이 많아서 제일 열
슬비를 만나고 잠시 RV에서 현재까지 도진의 회사에 투자된 내역을 훝어보다가 깜박 잠이 들었던 지수는 아랫쪽의 축축한 감각에 번쩍 눈을 떳다. 생리가 시작된 것이다. 이번에도 실패한 것이다. 임신이라는 희망이 이내 절망으로 뒤바뀌는 이 지독한 상실감은, 몇번을 겪어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다.평소와 다르게 일찍 돌아온 도진은 지수를 찾으며 방문을 열었을때 무기력하게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는 지수의 모습을 보았다. 이번 시술은 유난히 지수를 갉아먹었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된 지수를 보며, 힘들었을 순간 곁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도진을 무겁게 짓눌렀다. 도진은 한숨을 삼키며 주먹을 쥐었다가 이내 지수의 곁에 앉아 등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네 번의 시술이 실패할때마다 반복된 광경이었다. 지수를 향한 애정은 이미 빛바랜 지 오래였으나, 그 또한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고 매 번 희망이 사라질때의 절망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도진도 이런 상황에서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지만 지수를 혼자 남겨둘 수도 없었다. "이번에는 병원 같이 못다녀줬었잖아. 미안해. 다음에는 꼭 같이 다니자. 내가 조금 더 신경쓸게"도진의 작은 속삭임에 지수는 본능적으로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 비극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가족이었기에. 하지만 그 온기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수진에게 역락이 왔다. 도진은 지수의 젖은 속눈썹을 잠시 살피다, 진동이 울리는 주머니를 움켜줘었다. 그는 지수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정리해준 뒤 이마에 가벼운 입무춤을 남긴 그는 서둘러 전화를 받으러 방을 나섰다."도진씨 나 이사 끝났어. 아이들 데릴러 갈 껀데 같이 가면 안될까? 오늘 큰애 생일이야. 같이 저녁 먹고 싶어"수진의 말에 눈살일 찌푸리던 도진은 닫힌 방문을 보며 대답했다."오늘은 안 돼. 지수 옆에 있어야해."" 정말 안 돼는 거야? 나 당신한테 할 이야기도 있는데. 중요한 말이야"도진은 알겠다는 대답을 남기고 전화를 끊으
아침에 일어난 지수는 싸늘하게 식어있는 옆자리를 보았다. 몇일 집에 잘 들어오던 도진은 어젯밤 들어오지 않았다.생리가 시작하기 전에 느껴지는 익숙한 배의 묵직한 불편감에 불안감이 든 지수는 자신의 아랫배를 살살 만지며 제발 이번에는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과 편하게 강도진을 떠나기 위해 이번에도 실패하기를 바라는 자신의 양가적인 생각에 웃음이 났다.잠시 후 오랫만에 슬비를 만나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하고 나가던 중 가정부의 통화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이번에는 사장님께서 가출하신 것 같아요. 집에 안들어 오시네요. 아마 작은사모님께 정이 떨어지신것 같아요."가정부의 통화 내용에 웃음을 지으며 고래를 절레절레 흔들고 집을 나왔다.오랫만에 만난 슬비는 예전의 상큼함을 간직하면서 직장인의 당당함을 가지고 있었다. 왜인지 지수는 눈물이 났다.'도진과 결혼만 하지 않았어도 나도 저렇게 당당하고 멋진 모습을 하고 있을까?' 괜한 생각을 떨치며 슬비를 안았다."너무 보고 싶었어" 둘은 점심으로 샤브샤브를 먹고 가까운 카페에서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의 밀린 이야기를 했다. 그 안에는 지수와 도진의 결혼생활 및 도진이 바람핀 이야기도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난 수진은 가만히 조심스럽게 지수를 안아주며 말했다."수고했어... 고생했어... 니가 잘못한건 없어..." 누구나 할 수있는 작은 위로였지만 그 안에는 그 외엔 어떤 말도 위로가 될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슬비의 작은 배려였다. 그 따스한 배려에 지수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렸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큰 보상이 아닌 이런 작은 위로 하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 이제 좀 시원해?"슬비가 건넨 손수건은 이미 지수의 눈물로 푹 젖어 있었다. 지수는 민망한 듯 코를 훌쩍였지만, 눈동자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맑게 빛났다."응. 신기해. 슬비 너를 만나서 실컷 울고나니까, 마음속을 꽉 채우고 있던 돌덩이 하나가 사라진 것 같아."지수는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그 숨에는 오랫동안 묵혀왔던 도진에 대한 미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