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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쿠로2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2 20:11:25

나는 홀로 텅 빈 복도를 걸었다.

내 발걸음에 맞춰 센서등이 하나씩 켜졌다가, 내가 지나가면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끝없이 길게 뻗은 복도에는 끝이 없는 것만 같았다.

문득 저 불빛들이 꼭 내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온기를 조금 얻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음 순간이면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어머니는 나를 낳고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나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

집안사람들은 새어머니의 눈치만 보느라 누구 하나 내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나는 그저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면, 시키는 대로 얌전히 굴면, 누구의 심기도 거스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누군가 나를 사랑해 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됐지?

아버지는 나를 여동생 전용 혈액 창고로 취급했다.

여동생은 내 상속권을 빼앗고, 내 남자 친구까지 빼앗았다.

일 년 동안 사랑했던 남자는 내게 변명 한마디조차 해 주지 않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아무도 내게 희망을 주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이렇게 몇 번이고 실망하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

"어이, 조심해!"

그때 앞쪽에서 낮고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언제 복도 모퉁이까지 걸어왔는지 깨달았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사람과 부딪힐 뻔한 것이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사과한 뒤, 나는 남자를 지나쳐 곧장 내 방으로 향했다.

그가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했지만, 나는 더 이상 신경 쓸 힘조차 없었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뒤돌아 문을 닫고 침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울고 싶었다.

하지만 눈물은 이미 다 말라 버린 것 같았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가슴속에 쌓인 고통을 모조리 토해 내고 싶었다.

그런데 목구멍에 솜뭉치라도 걸린 듯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방 안은 무서울 만큼 조용했다.

나를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신경 쓰는 사람도 없었다.

대체 나는 이 집에서 살아가는 의미가 있을까?

한번 떠오른 생각은 좀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천천히 시선을 돌리자 창가에 놓인 작은 약병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내가 복용하던 약이었다.

의사는 반드시 정해진 용량만 복용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문득 모든 것이 여기서 끝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여동생의 모욕을 견디지 않아도 되고,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될 테니까.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약병을 집어 드는 순간, 방문이 갑자기 거칠게 걷어차이며 열렸다.

"한서연!"

한유진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녀는 내 손에 들린 약병을 단번에 쳐냈다. 약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너 미쳤어?"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왜……."

"왜?"

한유진이 차갑게 비웃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 손목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네가 죽으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아?"

그녀의 손톱이 내 살갗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착각하지 마. 그렇게 쉽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손목을 빼내려 했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한유진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얼굴에 남아 있던 다정한 미소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너 아직 할 일이 많거든."

그녀가 문득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잊지 마. 네 피가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말을 마친 그녀는 내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며 방 밖으로 나갔다.

"따라와!"

나는 그녀가 대체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는지 알 수 없었다.

앞으로 내게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한유진이 아무 이유 없이 나를 막았을 리 없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섬뜩한 미소는 처음으로 내게 진짜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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