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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박제된 공주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29 15:26:19

제2화. 박제된 공주

성진 그룹의 저택은 거대한 무덤 같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은 완벽하게 다듬어져 있었지만,

그 안에서 숨 쉬는 하늬의 일상은 숨이 막힐 듯한 규율로 가득 찼다.

조 실장은 하늬에게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았다.

조 실장은 강서연 상무에 대해 두툼한 사전 지식 자료를 주면서 무조건 암기하라고 했다.

두툼한 사전 지식 자료엔 강서연 상무의 살아온 이야기, 앨법, 취미, 대학생활 등 모든 것이 망라되어 있었다.

오늘은 강서연 상무의 평소 습관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다.

“강서연 상무는 걸을 때 발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척추는 항상 곧게 펴고, 시선은 정면보다 15도 위를 향하십시오.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네. 알겠어요."

"자..자..이렇게..."

조 실장의 지휘 아래, 하늬는 매일 아침 5시부터 자정까지 서연의 삶을 통째로 외워야 했다.

서연이 선호하는 홍차의 온도, 즐겨 찾는 브랜드의 시즌별 특징,

심지어 성진 그룹 가계도에 얽힌 수백 명의 얼굴과 이름까지.

“이건··· 연기가 아니에요. 그냥 기계가 되는 거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벌써 지치신 건가요?"

"그게...아니고.."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하늬가 지친 듯 식탁에 얹은 손을 조 실장이 차갑게 쳐냈다.

“연극 배우시지 않습니까?"

"네?"

"관객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까다로운 VVIP들이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특히 당신의 약혼자가 될 한승준 본부장은 사람의 눈빛만 보고도 피 냄새를 맡는 인물입니다.”

조 실장은 하늬의 왼 손목을 거칠게 잡아챘다.

그리고는 서연의 의료 기록과 사진을 내밀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이 자리, 쇄골 아래에서 손목으로 이어지는 그 작은 흔적들.

당신에겐 없습니다.

샤워할 때도, 옷을 갈아입을 때도 도우미의 손길을 거부하십시오.

누구에게도 당신의 맨살을 보이지 마세요. 그것이 당신의 생명줄입니다.”

"네. 알겠어요. 알겠다구요"

​

신경질적으로 하늬는 대답해버렸다.

하늬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의 깨끗한 살결을 내려다보았다.

흉터가 없다는 사실이 이토록 무서운 죄가 될 줄은 몰랐다.

교육의 하이라이트는 거실 한복판에 놓인 칠흑 같은 그랜드 피아노 앞에서 이루어졌다.

하늬는 무의식적으로 건반에 손을 올리려다, 조 실장의 서늘한 경고에 멈칫했다.

“서연 상무는 12년 전 그 사고 이후로 피아노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피아노 소리만 들어도 발작을 일으키죠.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피아노를 칠 줄 아는 게 아니라, 피아노를 증오해야 합니다.”

"...네."

"반드시 명심하셔야 합니다."

"네. 알겠어요."

하늬는 건반 위로 떨어지는 달빛을 바라보았다.

엄마와 함께 유일하게 행복했던 기억이 피아노였는데, 이제는 그 선율마저 가슴속에 묻어야 했다.

건반을 누르고 싶은 손가락의 본능을 억누르는 것은 고문과도 같았다.

교육이 막바지에 다다른 어느 밤, 강 회장이 하늬의 방을 찾았다.

그는 말없이 하늬의 차림새를 훑어보더니, 화장대 위에 놓인 낡은 사진 한 장을 보았다.

하늬의 생모, 그가 평생을 그리워했던 여자와 닮아 있었다.

“내일이다.”

강 회장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한주 그룹과의 공식 만찬. 승준이가 올 거다.

그놈의 눈을 속이지 못하면, 네 엄마의 수술비는커녕 너희 둘 다 이 집 대문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게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그래. 너의 연기를 기대하지."​

"알겠습니다."

강 회장이 떠난 뒤, 하늬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

거울 안에는 대학로의 가난한 배우 이하늬는 없었다.

오직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성진그룹의 얼음 공주 강서연만이 서 있었다.

하늬는 천천히 연습했다.

남을 멸시하는 듯한 차가운 미소,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

“오랜만이야, 승준 씨.”

거울 속의 여자가 하늬의 목소리가 아닌, 전혀 다른 여자의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었다.

이제 연극은 이제 리허설을 끝내고 실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성진 그룹 산하의 외딴 비밀 안가.

햇빛조차 차단된 거대한 거울 방 안에서 하늬는 발끝이 찢어지는 고통에 턱을 악물었다.

12cm에 달하는 스틸레토 힐을 신고 머리 위에 두꺼운 양장본 원서 세 권을 얹은 채,

하늬는 네 시간째 같은 보폭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조 실장이 초시계를 들고 얼음장 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아니.아니.. 지금 보폭이 3센티미터 넓어졌습니다.

어깨 끝의 긴장을 푸십시오.

상무님은 평생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한 적이 없는 분입니다.

하늬 씨의 걸음걸이엔 가난한 연극배우 특유의 '눈치 보기'가 여전히 묻어납니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요? 정말로?"

"당연하죠. 당신은 성진그룹의 강서연 상무란 걸 명십하십시요."

조 실장의 목소리는 채찍처럼 하늬의 자존심을 후려쳤다.

"다시. 처음부터."

"다시."

'다시."

하늬는 이를 악물고 턴을 돌았다.

하지만 피로가 한계에 달한 발목이 꺾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원서들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쏟아졌고, 하늬의 무릎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조 실장은 다가와 손을 내미는 대신, 차가운 눈으로 시계를 보며 펜을 딸깍거렸다.

"일어나십시오. 고작 이 정도 훈련으로 쓰러질 거라면, 당장 어머니의 병원 산소호흡기부터 떼는 게 빠를 겁니다.

회장님이 원하시는 건 완벽한 '강서연'이지, 징징대는 삼류 배우가 아닙니다."

"알겠어요. 알겠다구요."​

하늬는 배우였다. 그것도 자부심이 많은...

'삼류 배우.' 그 모욕적인 단어가 하늬의 뇌관을 건드렸다.

하늬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피가 흐르는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눈물을 닦는 대신, 조 실장을 똑바로 응시했다.

1초 전까지 헐떡이던 여자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고 오만한 흑단색으로 변했다.

"조 실장."

"...?"​

하늬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더 이상 주눅 든 이하늬가 아니었다.

억양의 높낮이, 숨소리의 길이, 서늘하게 턱을 치켜드는 각도까지 완벽한 강서연의 박제였다.

조 실장의 펜 끝이 미세하게 멈칫했다.

"주제넘게 짖지 마.

네가 회장의 충견이라 해서, 내 발목을 물어뜯을 권리까지 준 건 아니야.

넌 그저 내가 진짜처럼 걷는지 시간이나 재는 기계잖아. 안 그래?"

"...? 호?"

"내 말...명심하라구. 조실장"

서늘한 한기마저 감도는 하늬의 완벽한 메소드 연기에 조 실장은 순간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하늬는 피가 맺힌 발을 다시 하이힐에 구겨 넣었다.

그리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거울 방을 가로질러 조 실장의 코앞까지 다가가 섰다.

"조 실장. 시계 봐. 지금 보폭은 어때? 아직도 삼류 배우 같아?"

"흠..."

조 실장은 한참 동안 하늬의 눈을 피하지 못하다가, 비로소 고개를 숙였다.

"...완벽합니다. 다음은 정계 인사들의 가계도 암기입니다."

하늬는 뒤돌아서며 거울 속 자신을 보았다.

발목의 통증보다, 괴물이 되어가는 쾌감이 먼저 느껴지는 끔찍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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