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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이름 없는 대역
프랑스 니스의 아침은 잔인할 만큼 눈부셨다.
지중해의 푸른 바다가 창틀 너머로 넘실거렸지만,
그 화려한 풍경이 무색하게 '성진 그룹'의 전용 별장은 유령이 지나간 듯 고요했다.
강 회장의 특명을 받고 급파된 조 실장이 서연의 방 문을 열었을 때, 그를 맞이한 건 사람의 온기 대신 서늘한 바닷바람뿐이었다.
화장대 위에는 수억 원을 호가하는 다이아몬드 약혼반지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옆에 놓인 구겨진 메모 한 장.
[찾지 마세요. 저는 이제 '강서연'이 아니라 그 사람의 여자로 살기로 했어요.]
조 실장의 눈등이 파르르 떨렸다.
대한민국 재벌 순위 5위권의 성진그룹과 1위 한주그룹의 합병이 달린 정략결혼이었다.
일주일 뒤면 양가 상견례가, 한 달 뒤면 세기의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신부가 사랑을 찾아 도망쳤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성진 그룹의 주가는 폭락할 것이고 강 회장의 분노는 대지를 태울 듯 거세질 터였다.
조 실장은 떨리는 손으로 한국에 있는 강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 회장의 목소리는 예상보다 낮고 차가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채워 넣어. 그 자리가 비어 있으면 성진의 미래도 없다.
서연이가 아니어도 좋아. 아니, 서연이어야만 해."
"회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서연이를 닮은 아이를 찾아. 최대한 닮아야 한다. 조 실장"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대학로의 막다른 골목, 낡은 소극장의 조명은 언제나 그렇듯 위태롭게 깜빡거렸다.
무대 위에서 하늬는 화려한 중세풍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사실 그것은 곳곳이 해지고 실밥이 터진 가짜였다.
“공주님, 이제 떠나야 할 시간입니다.”
상대 배우의 대사에 하늬는 눈물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관객이라곤 고작 다섯 명뿐인 소규모 연극이었지만,
하늬는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라 믿었다.
하지만 막이 내리고 조명이 꺼지는 순간, 그녀는 다시 차가운 현실로 내동댕이쳐졌다.
분장실로 돌아온 하늬를 기다리는 건 박수가 아닌 빚 독촉장이었다.
“이하늬 씨, 벌써 석 달째예요. 이번 주까지 대관료 안 빠지면 극단 짐 다 뺍니다.”
극단이 근근히 운영되어 온 건 하늬가 공연장주에게 계속 읍소해와서 버텼으나,
그 마저도 지금 한계에 이른 것 같았다.
공연장주의 매정한 외침 뒤로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이번엔 병원이었다.
[이하늬 님, 어머니 이영순 님의 수술 대기 순번이 돌아왔으나 미납된 입원비로 인해 취소될 예정입니다.]
하늬는 떨리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연극 배우라는 꿈은 사치였다.
그녀에게 남은 건 밀린 월세와 엄마의 가파른 숨소리, 그리고 굶주린 현실뿐이었다.
그녀는 지워지지 않은 무대 화장을 한 채 터벅터벅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때였다. 좁은 골목을 가득 메운 검은색 세단 석 대가 하늬의 앞을 가로막았다.
차 문이 열리고, 한눈에 봐도 이질적인 고급 정장 차림의 사내가 내렸다. 조 실장이었다.
“이하늬 씨, 연기력이 훌륭하시더군요. 방금 무대에서의 모습, 인상 깊었습니다.”
하늬는 경계 어린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누구시죠? 전 부를 사람 없는데요.”
조 실장은 대답 대신 태블릿 PC 하나를 건넸다.
화면 속 여자를 본 순간, 하늬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이게··· 저라고요?”
“아니요. 강서연 상무입니다. 성진그룹의 막내딸이죠.”
화면 속 여자는 하늬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은 오만했고 걸친 옷차림은 하늬의 평생 수입보다 비싸 보였다.
“서연 상무가 현재 도주 중입니다.
상견례와 결혼식을 앞두고 말이죠.
당신이 한 달만, 아니 딱 세 달만 강서연이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미쳤군요. 이런 연극은 안 합니다.”
하늬가 돌아서려 할 때, 조 실장의 낮은 목소리가 발길을 잡았다.
“어머니의 수술, 저희 회장님께서 직접 주관하시는 병원에서 진행될 겁니다.
입원비는 물론, 퇴원 후 요양까지 성진이 책임지죠.
배우에게 이보다 더 큰 무대와 출연료가 있을까요?”
"뭐라구요? 그걸 다 해준다구요?"
하늬의 발이 멈췄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았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검은 하늘 아래서, 그녀는 자신의 영혼을 팔기로 결심했다.
다음 날, 하늬는 안개 낀 산속에 자리한 성진 그룹 강 회장의 본가로 향했다.
거대한 성벽 같은 저택 안으로 들어선 하늬는 숨 막히는 압박감을 느꼈다.
서재 안쪽, 깊은 어둠 속에 앉아 있던 강 회장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강 회장은 하늬의 얼굴을 보는 순간, 들고 있던 찻잔을 미세하게 떨었다.
“똑같구나. 그 아이와···.”
그의 목소리엔 분노보다는 기이한 그리움이 서려 있었다.
하늬는 그가 말하는 ‘그 아이’가 서연인지, 아니면 자신의 엄마인지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 남자가 단순히 딸의 대역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부터 네 이름은 강서연이다. 사소한 습관 하나까지 그 아이가 되어야 해. 특히···.”
강 회장이 하늬의 왼손을 가리켰다.
“서연이는 어릴 적 사고로 쇄골 아래 작은 상처가 있었다.
넌 그게 없으니 남들 앞에서는 절대로 몸을 보이지 마라.
그리고 피아노. 서연이는 사고 이후 피아노를 증오했다.
절대 건반 앞에 앉지 마.”
"...네?...네"
하늬는 자신의 깨끗한 살결과 엄마에게 배운 피아노 실력을 떠올렸다.
강 회장이 금지한 것들이 사실은 하늬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들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연극은 시작됐다. 무대에서 내려오는 날, 넌 세상에서 가장 풍족한 사람이 될 것이다.
하지만 들키는 날엔··· 무대 밑바닥으로 떨어지게 되겠지.”
강 회장의 서늘한 경고를 들으며 하늬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보석과 명품 드레스로 덧칠된 자신의 모습은 더 이상 이하늬가 아니었다.
‘엄마만 살릴 수 있다면, 악마의 딸이라도 되겠어.’
하늬는 서연 특유의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성진 그룹 재벌가 저택의 거대한 철문이 하늬의 뒤로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끝났다.
이제 그녀에게 돌아갈 길은 없었다.
가짜 강서연으로 사는 수 밖에. 최대한 들키지 않고 말이다.
제13화. 박제된 공주의 반격성진 그룹 회장 자택에 있는 강 회장 서재의 불빛은 새벽이 깊도록 꺼지지 않았다. 강 회장은 조 실장이 가져온 치앙마이의 사진을 아주 천천히, 한 장씩 넘겼다. 그의 표정은 호수처럼 고요했지만, 사진과 서류를 쥔 손끝에는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그리고, 한장의 사진을 들어올렸다.이하늬와 판박이로 닮은 이가 망원렌즈로 찍혀 있었다."서연이가... 서연가 살아 있었군."강 회장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다. 분노보다는 허망함, 그리고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핏줄에 대한 지독한 원망이 서려 있었다.어렸을때부터 해달라는 것은 무조건 해주었다.해를 따달라면 해를 따오고, 달을 따달라면 달을 따오고...그랬던 것이 서연이를 망친 것 같아, 독이 된 것 같아 심한 자괴감이 드는 강 회장이었다.차곡차곡 그룹의 일을 맡겼다면, 이렇게 무책임한 아이가 안되었을 것을...'내가...너를...이리 만들었구나...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다음날 성진 그룹 회장실에 출근한 강 회장이 조 실장을 불렀다.강 회장은 한동안 창밖을 초점없는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긴 침묵이 흘렀다.그때 조 실장이 말했다.조 실장은 자신을 왜 불렀는지 직감했다.어제 진짜 강서연의 존재를 보고했기에 그와 관련돼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회장님, 당장 경호팀을 보내 실종 신고된 상무님을 모셔올까요?""흠..."조 실장의 물음에 강 회장은 창밖의 무표정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단순히 사랑하는 딸을 찾는 아버지가 아니었다.그는 무너져가는 성진 그룹이라는 제국의 마지막 성벽을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이자 설계자였다.피 보다는 그룹의 생명을 더 중히 여기는 이성론자였다.지금 성진 그룹은 창립 이래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야심차게 그룹의 역량을 총동원한 투자가 몇년째 빛을 못 보고 있는 상황에서,그룹의 자금 유동성이 급격히 악화됐기 때문이다.지금 한주 그룹과의 빅딜이 성사되질 않으면, 성진은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는 위기였던 것
제12화. 조명이 꺼진 무대 위에서 성진 그룹의 승리로 끝난 MOU 기술 협약식 이후, 승준은 차가운 침묵으로 하늬를 대했다. 하지만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예우를 갖추기 위
제11화. 체스의 말, 사냥터의 꽃 성진 그룹 회장실 강 회장의 집무실. 강 회장과 조 실장이 나즈막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제10화. 붉은 연기하늬에게 찾아 온 절체절명의 위기.승준의 손가락 끝에 묻어난 검붉은 파운데이션. 정적이 감도는 대기실 안에서 승준의 서늘한 시선이 하늬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꿰뚫었다. 하늬의 심장은 폭주하는 엔진처럼 날뛰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차갑게 식어갔다. 여기서 무너지면 엄마도, 자신도 끝이었다.“서연아, 설명해 봐. 이 상처가 왜 네 손가락 끝에서 지워지는 거지?”"네? 그건?"승준이 묻어난 검붉은 파운데이션 자국을 보여주며 압박해 왔다. 하늬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마음을 다잡으려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조소와 서러움이 뒤섞인 기이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오히려 승준의 손을 거칠게 쳐내며 찢어진 드레스 자락을 더 크게 찢어발겼다.“후련해? 내 추한 바닥을 확인하니까 속이 시원하냐고! 승준싸”"뭐?"하늬의 갑작스러운 고함에 승준이 주춤했다.하늬는 거울 앞에 놓인 클렌징 워터를 집어 들어 자신의 손목을 미친 듯이 문지르기 시작했다. 반쯤 번져 있던 가짜 흉터가 닦여나가며 매끄럽고 하얀 살결이 드러났다.“그래, 이거 가짜야! 내가 직접 그렸어. 잘 봐.만족해?”"그렸다고?"승준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직접 그렸다니, 그게 무슨···.”“남들은 다 잊었어도 난 못 잊으니까! 거울을 볼 때마다 그날의 비명소리가 들리는데, 내 몸은 너무 깨끗해서··· 그게 더 소름 끼쳐서!”하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승준의 가슴을 밀쳤다.“의사가 그러더라, 이건 몸의 상처가 아니라 마음의 상처라고. 흉터는 사라졌어도 내 뇌가 그 고통을 기억해서 환상통을 만들어내는 거래. 그래서 그렸어! 차라리 눈에 보이는 상처가 있으면 덜 미칠 것 같아서! 내가 미친년 같지? 흉터까지 연기하는 미친년!”"아니. 그게 아니라..."이것은 하늬가 배우 시절 배운 ‘신체 이형 장애(Body Dysmorphic Disorder)’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교묘하게 섞은 고도의 심리 연기였다. 승준
제9화. 신의 한 수, 그리고 가면의 균열성진 그룹의 사활이 걸린 의류 신제품 론칭 쇼를 앞두고...메인 모델이 잠적하는 대형 사고가 터졌다. 메인 모델이자 성진의 얼굴이었던 톱배우가 상대 경쟁사의 사주를 받고 행사 직전 잠적해 버린 것이다.그것도 행사 당일날. 대신 섭외할 수도 없는 이 상황을 노린 것이다.이 행사는 단지 의류 신제품 론칭 만이 아니라, 론칭 쇼를 기회 삼아 정재계를 초청해서 성대하게 치뤄지는 행사였다.하객으로 참석한 수백 명의 언론사와 승준을 포함한 그룹 관계자들은 성진의 망신을 기다리며 웅성거리고 있었다.조 실장은 사색이 되어 강 회장에게 보고했다.아마도,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그룹의 이미지를 해칠려는 함정에 걸린 듯 하였다."회장님, 메인 모델이 사라졌습니다. 이대로라면 오늘 론칭 쇼는 물론이고 내일 주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누가 이런 짓을 꾸몄지? 조실장?""아마도...그룹이 흔들리기를 원하는 쪽일 것입니다.""흠...그럼 그 쪽인가? 증거를 찾아내도록 해.""네...알겠습니다. 회장님."강 회장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그때, 분장실 구석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하늬가 천천히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강 회장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제가 나갈게요. 서연 상무가 직접 모델로 나서는 겁니다. '상속녀가 직접 입는 옷'보다 더 강력한 마케팅이 어디 있겠어요?""상무님. 그건?""제가 할 수 있어요. 회장님. 저에게 맡겨 주세요. 기필코 성공 시키겠습니다.""네가 말이냐? 한번도 해보질 않은 네가 말이냐?""한번도 해보질 않았다 해서, 능력이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배우입니다. 철저히 연기처럼 해보겠습니다.""흠...좋아. 잘 해보거라.""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좋아. 기대하마."조 실장이 아직은 그런 큰 행사를 맏길 수 없다며 만류했지만, 강 회장은 도박을 거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할 수 있겠느냐?""네."단호한 하늬의 대답에 강회장은 하늬
제8화. 완벽한 무대장치어느날, 강 회장은 하늬의 능력을 시험해보기로 했다.강 회장은 하늬를 서재로 불러 아주 차가운 미션을 던졌다.그것도 그룹의 난제 중에 난제였던 리조트 사업.아시아 최대의 테마파크로 만드는 리조트 사업이었다.하지만, 몇년째 중단된 문제가 있었으니...리조트 부지에서 제일 중요한 곳에 명문가 종갓집이 있었고, 그 어르신이 꿈쩍도 안한다는 것이었다.그룹의 임원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땅을 매각하라고 설득을 시도했으나, 이룰 수가 없었다.옹고집도 이런 옹고집이 없었다.그 종갓집 땅이 뭐라고. 거액을 준다고 해도 꿈적을 안하다니.그래서, 하늬의 능력을 시험해볼겸 불가능한 미션을 강회장은 생각해내었다. [성진그룹이 추진 중인 리조트 부지의 종갓집 어르신을 설득하라는 것.]그런데 종갓집이 하필 리조트 부지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주변의 땅들은 이미 매입했으나, 오직 종갓집 만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종갓집만 놔두고 개발할 수도 없었다.강 회장의 머릿속을 고약하게 만들고 있었던 해결 불가능한 미션을 주기로 한 것이다.실패하면 하늬의 엄마는 당장 병원에서 쫓겨날 판이었다. 강 회장에게 하늬는 그저 도망간 서연을 대신해 욕받이가 되어줄 '정교한 가짜'일뿐이었다."네가 가진 그 미천한 연기력으로 그 노인을 속여봐라. 아니. 설득해봐.서연이가 하지 못했던 일을 네가 해낸다면, 네 엄마의 생명 연장도 고려해 보지.""약속...약속 하시는 건가요?""그래. 당연하지. 내 말을 못 믿는게냐?""알겠습니다. 회장님. 그 약속 꼭 지키시길 바랄게요."강 회장의 목소리는 비정했다. 강 회장이 말한 해결 불가능한 미션.하늬는 기필코 미션을 성공시켜야 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며칠후, 하늬는 그 모욕감을 삼키며 종갓집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한주 그룹의 승준이 도착해 냉철한 수치로 어르신을 압박하고 있었다.승준은 하늬를 돕기 위해, 먼저 어르신을 설득해보기로 한 것이었다.하늬는 승준과 어르신 사이의 팽팽한 대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