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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가면의 서막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29 15:26:31

제3화. 가면의 서막

비밀 안가 훈련을 통과한 하늬가 강 회장의 본저택에 '상무 강서연'으로서 처음 발을 들인 첫날 아침.

저택의 식당에는 팽팽한 살얼음판이 깔렸다.

강서연의 전담 프라이빗 셰프이자, 서연이 태어날 때부터 음식을 전담해 온 '장 셰프'가 아침 식탁을 들고 들어온 것이다.

강 회장의 충신이자 사람을 떠보는 데 도가 튼 장 셰프는 서연의 실종과 복귀 과정에 깊은 의구심을 품고 있던 인물이었다.

"상무님, 긴 외국 생활로 기력이 많이 쇠하셨을 듯하여, 상무님이 가장 사랑하시던 특별식으로 준비했습니다."

장 셰프가 뚜껑을 열자, 버터 향이 진하게 풍기는 전복 비스크 소스 요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식탁 맞은편에서 신문을 보던 강 회장의 눈길이 슬쩍 식탁으로 향했고, 뒤에 선 조 실장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조 실장의 교육 자료 어디에도 '서연이 가장 사랑하던 특별식'의 구체적 메뉴는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늬는 은빛 포크를 쥐었다.

하지만 소스 위를 장식한 초록색 허브를 보는 순간, 하늬의 뇌리에 강서연의 비밀 의료 기록이 스쳐 지나갔다.

[환자 강서연: 갑각류 알레르기 없음. 단, '딜(Dill)' 허브 섭취 시 가벼운 피부 발진]

'시험하는 거야.'

순간 하늬는 직감했다. 이것은 시험이라는 것을.

장 셰프는 진짜 서연이라면 결코 입에 대지 않을 허브를 소스에 듬뿍 얹어 떠보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하늬가 아무것도 모른 채 덥석 먹는다면 알레르기 유무를 떠나 '가짜'임이 들통나고,

그렇다고 당황해하며 물리면 미숙함을 들키게 된다.

하늬는 포크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장 셰프를 올려다보았다.

"장 셰프."

"예, 상무님."

"내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의 헤드 셰프조차 내 접시엔 '딜' 한 잎도 올리지 않았어.

그런데 20년을 내 곁에 있던 당신이... 내 접시에 이 역겨운 풀잎을 태연하게 얹어?"

"네?"

식당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장 셰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것이 아니라... 오랜만에 귀국하셔서 미각의 변화가 있으신지..."

"미각의 변화?"

하늬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접시 가장자리에 놓인 은빛 포크를 들어 소스 한가운데를 가차 없이 갈라버렸다.

"내 취향이 변한 게 아니라, 당신의 충성심이 무뎌진 거겠지.

회장님 밑에서 너무 오래 대접받다 보니, 상전의 혀끝조차 잊어버린 모양이야. 치워. 오늘 아침은 굶겠어."

하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이닝 룸을 빠져나갔다.

식당 안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장 셰프는 식은땀을 흘리며 접시를 치웠고, 신문 뒤에 숨어 있던 강 회장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조 실장."

"예, 회장님."

"서연이가 파리에서 아주 독해져서 돌아왔군. 마음에 들어."

방으로 돌아온 하늬는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스르르 주저앉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은빛 포크를 쥐었던 손끝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방심하는 순간 죽는 밀림이었다.

하늬는 거친 숨을 고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날이 왔다

한주 그룹과의 만찬이 열리는 성진 그룹의 영빈관은 그야말로 별들의 잔치였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로 정갈하게 차려입은 서버들이 움직이고, 공기 중에는 최고급 샴페인의 향취가 감돌았다.

하지만 그 화려한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하늬는 차마 그 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하늬는 영빈관 뒤편, 인적이 드문 발코니 구석의 낡은 나무 의자에 주저앉았다.

수억 원을 호가하는 실크 드레스가 구겨지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은 채였다.

꽉 끼는 구두를 벗어던지고 싶은 욕망과, 엄마의 생명을 담보로 누군가의 인생을 훔치고 있다는 지독한 자괴감이 그녀를 덮쳤다.

'나는 지금 누구를 연기하고 있는 걸까. 이하늬인가, 아니면 죽은 듯 살아가는 강서연인가.'

하늬는 화려하게 치장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연극 무대 위에서의 대역은 커튼콜이 지나면 끝이었지만, 이 연극은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었다.

그녀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 순간은 성진 그룹의 상무 강서연이 아닌, 그저 삶의 무게에 짓눌린 스물일곱 살 청년 이하늬의 민낯이었다.

"거기서 뭐 하는 거지? 강서연답지 않게."

"...? 누구?"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하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실루엣, 조각 같은 옆선 위로 달빛이 비치는 남자. 한승준이었다.

승준은 의자에 구겨지듯 앉아 있는 하늬를 의아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그가 알던 강서연이라면 이런 구석진 곳에서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사람들 한가운데서 오만한 빛을 내뿜어야 했다.

"승준... 씨?"

하늬는 얼른 자세를 고쳐 잡으며 일어섰다.

조 실장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교육했던 '강서연의 자세'를 본능적으로 취했다.

턱을 치켜들고, 시선은 차갑게.

하지만 승준의 눈에는 방금 전 그녀가 보여준 그 처연한 실루엣이 잔상처럼 남았다.

"상견례 날짜 잡히고 나니 갑자기 안 하던 반항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

승준의 목소리에는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그는 하늬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하늬는 숨을 들이켜며 뒷걸음질 쳤다.

"반항이라니요. 잠시 바람 좀 쐰 것뿐이에요. 들어가죠, 다들 기다리실 텐데."

하늬는 서둘러 그를 지나쳐 영빈관 안으로 향했다.

승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깊게 응시했다.

승준이 느끼기에 분명 외모도, 목소리도 강서연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 의자에 앉아 있던 그 여자의 등에서는 그가 알던 서연에게서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사람 냄새'가 났다.

만찬장에 들어서자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하늬는 강 회장의 곁에서 완벽한 얼음 공주로 변신했다.

우아한 손짓으로 와인 잔을 들고, 정략결혼을 축하하는 이들에게 형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승준의 시선이 시종일관 하늬를 향해 있었다.

하늬는 그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손바닥에 땀이 뱄다.

승준은 평소처럼 냉철하게 비즈니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이따금씩 고개를 돌려 하늬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것은 탐색하는 눈빛이었다.

아직 그녀가 가짜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무언가 '어긋나 있다'는 미묘한 위화감을 즐기는 듯한 눈빛.

하늬 역시 지지 않으려 승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만찬장의 화려한 소음 속에서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하늬에게는 '정체를 들키면 끝장'이라는 공포 섞인 긴장감이었고,

승준에게는 '독기 서린 장미인 줄 알았더니 다른 꽃 향기가 난다'는 호기심이었다.

"서연아, 승준 본부장이 묻지 않느냐. 다음 주 파티 테마는 네가 정하기로 했다면서?"

"네? 파티요?"

강 회장의 목소리에 하늬가 정신을 차렸다.

"아... 네. 생각 중이에요. 승준 씨 취향도 고려해야 하니까요."

하늬가 승준을 향해 살짝 고개를 까닥이며 미소 지었다.

승준은 잔을 들어 입술에 갖다 대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기대하지. 네가 보여줄 새로운 모습들을."

그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하늬에게는 "어디까지 연기할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는 선전포고처럼 들렸다. 이제 첫 대면은 끝났다.

아직 정체의 균열은 보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운명은 이미 엉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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