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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빈티지의 거짓말 ​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29 15:26:52

제4화. 빈티지의 거짓말

상류층 자녀들의 사교 모임이 열린 곳은 한남동의 프라이빗 와인 바였다.

조 실장은 하늬를 차에서 내보내며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상무님. 오늘 모임은 단순한 술자리가 아닙니다.

그들의 인맥과 정보가 오가는 전쟁터죠. 모르면 웃으세요. 우아함은 침묵에서 나옵니다."

"네. 알겠어요. 조실장님"

"그리고...모든 우아함은 자신감에서 나옵니다. 내가 강서연 상무라고 여기시고 하십시요."

"네...고마워요."

하지만 그 조언은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무용지물이 되었다.

"서연아! 너 이번에 옥션에서 낙찰받은 르 루아(Le Leroy) 68년 빈티지, 벌써 오픈한 건 아니지?"

"누구?"

화려한 트위드 셋업을 입은 여자가 하늬의 팔을 붙들며 물었다.

하늬는 당황했다.

'르 루아? 68년?' 하늬에게 와인이란 편의점에서 만 원대에 파는 빨간 술, 혹은 엄마가 가끔 요리에 쓰던 시큼한 액체일 뿐이었다.

"아... 그게, 아직은 아껴두고 있어. 특별한 날에 마시려고."

"뭐? 아껴? 너가 왠일이야. 최고급이 아니면 취급도 안하던 네가?"

'도대체..이 강서연이라는 여자는 어떻게 살아온거야??'

하늬는 서연 특유의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간신히 대답했다.

하지만 대화는 하늬의 상상을 초월한 속도로 흘러갔다.

"역시 서연이네. 하긴, 요즘 테루아(Terroir) 상태가 안 좋아서 09년 산들도 예전만 못하더라고.

너 저번에 부르고뉴 갔을 때 그 도원(Domaine) 주인이랑 계약한 건 어떻게 됐어?"

"뭐? 부르고뉴? 도원?"

"그래? 그 계약한 건 말이야. 뭐야 까먹은거야??"

하늬는 입안이 바짝 말랐다.

테루아, 도원, 빈티지... 단어들은 허공을 떠다니는 기호 같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잔을 흔들며 아로마니, 부케니 하는 생소한 단어들을 쏟아냈다.

하늬는 그들이 건네는 와인 잔을 받아 들었지만, 한 모금 마시는 것조차 겁이 났다.

혹시라도 잔을 잡는 법이 틀리진 않았을까, 맛을 보고 내뱉는 감탄사가 천박해 보이지는 않을까.

"서연아, 왜 말이 없어? 너 와인 하면 사족을 못 썼잖아.

저번에 샤토 마고 수직 테이스팅 할 때 네가 제일 신나 했으면서."

"...내...내가?"

주변의 시선이 하늬에게 쏠렸다.

하늬는 침묵이 길어질수록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지금 수천만 원짜리 와인 향이 가득한 방에서 가장 저렴한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냥... 요즘은 좀 가벼운 게 좋더라고. 입맛이 변했나 봐."

하늬의 대답에 주변에서 미묘한 웃음이 터졌다.

"서연이가 가벼운 와인을? 세상에, 태양이 서쪽에서 뜨겠네."

"그러게. 도도하신 천하의 이 강서연님이 말이야. 호호호"

누군가의 비아냥 섞인 농담에 하늬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화려한 조명 아래서 그녀의 드레스는 눈부시게 빛났지만, 그녀의 내면은 소외감으로 검게 타들어 갔다.

그때, 소파 구석에서 조용히 대화를 지켜보던 승준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와인 잔을 든 채 하늬의 곁으로 다가왔다.

"강서연이 와인 대화에 끼지 못하다니.

프랑스 유학 시절 매일 밤 와이너리를 누비고 다녔다는 소문은 다 헛소문이었나?"

"네?"

승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뼛속까지 파고드는 차가움이 있었다.

그는 하늬의 잔에 담긴 와인을 빤히 쳐다보더니, 자신의 잔을 하늬의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챙, 하는 맑은 소리가 하늬의 고막을 때렸다.

"아니면, 그 대단한 미각이 어디로 사라지기라도 한 건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말이야."

승준의 눈빛이 하늬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집요하게 쫓았다.

하늬는 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사람들 틈에서 그녀는 연기를 하는 배우가 아니라, 정체를 들키기 일보 직전의 범죄자처럼 느껴졌다.

"승준 씨가 나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사람 입맛은 변하기 마련이니까."

하늬는 쏘아붙이듯 말하고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채 밖으로 걸어 나왔다.

뒤에 들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마치 자신의 가짜 인생을 비웃는 환청처럼 들렸다.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하늬는 깨달았다.

화려한 상속녀의 껍데기를 입는 것보다, 그들의 세계를 채우는 '공기'를 흉내 내는 것이 훨씬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한승준의 함정 질문을 하의가 배우 특유의 동물적인 순발력과 테이스팅 연기로 한승준의 예리한 테스트를 가까스로 통과한 후, 성진가의 정기 만찬이 열렸다.

성진 그룹 일가의 정기 만찬이 열리는 본저택의 다이닝 홀.

길게 늘어선 대리석 식탁 위에는 은식기와 크리스털 잔이 차갑게 반짝였고, 그보다 더 서늘한 눈빛들이 하늬를 향해 꽂혀 있었다.

강서연의 공백을 틈타 그룹 내 알짜 계열사를 집어삼키려던 서브 빌런,

고모 강혜란 전무와 그녀의 아들 강민우 상무였다.

"서연아, 유학 다녀오더니 얼굴선이 많이 부드러워졌다?

예전엔 턱 끝만 봐도 성깔머리가 보였는데, 마음고생이라도 한 사람처럼 기운이 빠졌어."

"성깔머리요?"

강혜란이 샴페인을 홀짝이며 독을 품은 미소를 날렸다.

옆에 앉은 사촌 오빠 강민우가 비열하게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고모님.

게다가 귀국하자마자 성진물산 복합몰 부지 계약을 단독으로 승인하셨더군요?

거긴 사모펀드랑 엮여서 법적 분쟁이 복잡한 곳인데...

파리에서 그림만 그리다 오셔서 그런 거친 비즈니스의 생리는 잘 모르실 텐데요."

강 회장은 묵묵히 스테이크를 썰 뿐,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하늬가 스스로 이 '하이에나'들을 찢어발기지 못한다면 언제든 버릴 카드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식탁 아래로 하늬의 주먹이 가볍게 쥐어졌다.

'이 인간들, 날 쫓아내고 물산을 통째로 먹으려고 판을 짜놨구나.'

하늬는 포크를 우아하게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그리고 싸늘한 시선으로 강민우를 응시했다.

"강.민.우 오빠."

낮고 또렷한 음성에 식당의 공기가 멎었다.

하늬는 밤새워 머릿속에 통째로 박아 넣은 성진물산의 감사 보고서를 줄줄 읊기 시작했다.

"거친 비즈니스의 생리요?

그 사모펀드, 오빠가 차명으로 운영하는 페이퍼 컴퍼니 '케이프 홀딩스'와 연결된 거... 회장님도 알고 계시나요?"

고모와 강민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뭐, 뭐라고?"

"해외 지사로 물산 자금 40억을 우회 대출해 놓고, 부지 분쟁을 유도해 헐값에 매각하려던 그 완벽한 설계 말이에요.

제가 파리에서 그림만 그리느라 모를 줄 아셨나 봐요?

전 도화지 위의 붓질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는 성격이라서요. 호호호"

"뭐?"

하늬의 말에 벙찐 표정을 짓고 있는 강민우.

하늬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샴페인 잔을 들어 강혜란을 향해 가볍게 기울였다.

"고모님, 제 얼굴선이 부드러워진 게 걱정이 아니라, 고모님 댁 통장 잔고가 부실해질 걸 걱정하셔야겠어요.

제가 이번 주 내로 특별 감사팀 꾸릴 테니까, 식사 맛있게 하세요.호호호. 아주 볼만하겠어요."

"너, 너 이 망나니 같은 기집애가...!"

강혜란이 식탁을 치며 일어섰지만, 강 회장이 나이프를 탕 내려놓자 얼어붙어 입을 다물었다.

강 회장은 파얗게 질린 조카와 여동생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하늬를 향해 굵직한 한마디를 던졌다.

"감사 일정은 네가 직접 지휘해라."

"네. 알겠어요. 아버지."

"그래. 기대하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완벽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먹이를 노리는 독사들의 혀를 뽑아버린 완벽한 완승이었다.

하늬는 고모 모자의 살인적인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속으로 피를 토하듯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재벌가의 정글에서 자비는 곧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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