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주는 절망에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봤지만 구승훈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임희주를 내려다보며 시계를 확인했다.“아참, 깜빡했네요. 오늘 10시 전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하리가 문을 잠근다고 해서 9시까지밖에 못 기다려요. 내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알려주는 거예요.”이 말에 임희주가 눈을 부릅떴다.‘강하리? 문을 잠근다는 말이 무슨 말이지?’임희주는 전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그 정도로 틀어졌는데 다시 화해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승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임희주가 다시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턱이 빠져서 그런지 발음이 새고 침이 마구 아래로 흘렀지만 구승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 놓인 의자에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침대를 세 번 두드려요. 내가 들으려는 말이 아니면 다음엔 턱만으로 부족할 거예요.”침대를 두드리려던 임희주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구승준을 노려봤다. 그 눈빛에는 분노와 원망이 함께 섞여 있었다. 하지만 구승훈은 마치 그 눈빛을 보지 못한 듯 멀리 앉아서는 때때로 시계만 확인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임희주는 협박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슬픔을 감췄다. 발버둥 치는 것도 포기한 걸 봐서는 이제 더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때 구승훈이 옆에서 웃음을 터트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임희주에게로 다가가 오만한 표정으로 몰라보게 달라진 임희주를 내려다봤다.“아참, 오는 길에 아는 사람을 한 명 만났지 뭐예요. 아마 임 선생도 아는 사람일 거예요.”임희주는 마치 잠에 든 것처럼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꼭 쥔 주먹이 그녀의 불안함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었다. 구승훈이 웃으며 그 이름을 내뱉었다.“임명우.”세글자가 나오자 임희주의 몸이 그대로 굳었고 아무리 주먹을 움켜쥐어도 몸이 파르르 떨리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구승훈은 그런 임희주의 반응을 다 봤으면서 딱히 다그치지 않고 묵묵히 임희주의 침대맡에 서서 그녀가 항복하기를 기다렸다.그렇
“형, 저 임명우 정말 임희주를 죽이려 했던 거 맞아?”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임희주의 방문을 열었다. 방안에는 기골이 장대한 남자 몇 명이 임희주를 꾹 누르고 있었고 금방 잠에서 깨어난 임희주가 미친 것처럼 발버둥 치는 바람에 남자들도 겨우 잡고 있었다. 구승훈이 안으로 들어가자 임희주가 잠깐 멈칫하는 듯 싶더니 더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옆에선 노민준이 구승훈을 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약물이 예상한 효과를 내지 못했어. 깨어나긴 했지만 너도 봤듯이 완전히 미쳐버린 상태야. 이성을 조금 유지할 수는 있지만 미친 정도가 예전의 너랑 비겨도 전혀 손색이 없어.”구승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놓인 트레이에서 장갑을 꺼내 착용하고는 옆에 선 노민준에게 당부했다.“묶으면 돼. 진정제만 투여해 주고 일단 나가 있어.”노민준이 임희주를 침대에 단단히 묶었다. 발버둥 치고 싶지만 행동이 제한되자 임희주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구 대표님, 제발 나 좀 놓아주세요. 네? 제발 부탁 좀 드릴게요.”구승훈이 차갑게 웃더니 임희주의 턱을 꽉 움켜쥐었다. 차가운 장갑이 턱에 닿자 임희주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고 뒷걸음질 치려는데 밧줄에 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구승훈이 온몸으로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는 걸 보고 임희주가 드물게 이성을 조금 찾았다.“나, 나 다 알아요. 구 대표님이 뭘 알아내려는지 아는데 말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부탁이에요. 이제 그만 나 좀 놔줘요.”임희주가 눈물을 뚝뚝 떨궜다. 이 남자가 얼마나 매정한지는 진작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이 되어서야 그가 자신을 이용했다는 걸 알아챘다. 순간 임희주는 슬픔이 물밀듯 몰려왔다.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끼리 동정이라도 좋으니 일말의 감정이라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틀렸다. 이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신경 쓴 적이 없었다.구승훈이 콧방귀를 뀌며 손에 힘을 주자 당장이라도 턱뼈가 부러질 것처럼 너무 아팠다.“그래요? 죽는 게 그렇게 두려우면 더 말해야
요양원.구승훈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고통에 몸부림치는 여자의 비명을 들었다. 그 소리가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소리 같아 구승훈이 우뚝 멈춰 서는데 안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남자는 여전히 온몸으로 꺼림칙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임명우가 걸음을 멈추고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오랜만이네요. 구 대표님.”구승훈이 임명우를 아래위로 훑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었다.“확실히 오랜만이네요. 임 대표님은 늦은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에요?”임명우가 느긋한 표정으로 구승훈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친구 좀 만나러요. 구 대표님은요?”대수롭지 않은 말투가 마치 오래된 친구와 수다를 나누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임명우를 얕잡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임명우는 독사와도 같아 언제 어디서 혀를 날름거리며 이빨을 드러내고 물어버릴지 몰랐다.“나도 친구 만나러 왔어요.”임명우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 짙어졌다.“그래요?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구 대표님은 누구 만나러 왔는데요? 어쩌면 같은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그 정도로 기막힌 우연은 아니에요.”구승훈이 가식적으로 웃으며 말했다.“내가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임 대표님이 만날 수 없는 사람일 거예요.”임명우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돌려 복도 끝에 보디가드들이 지키고 있는 병실을 바라봤다. 처절한 곡소리는 바로 그 병실에서 전해지고 있었다.“구 대표님, 저기에 여자라도 숨겼나 봐요? 강 대표님은 알고 있어요?”임명우도 딱히 짜증 내지 않고 말로 구승훈을 자극했다.“내가 한번 맞춰볼까요? 안에 있는 사람 설마 임희주예요?”“쯧쯧. 구 대표님 여자에게 인기 많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렇네요. 오전에는 강 대표님을 위해 몸을 던지고 저녁에는 요양원에 숨겨둔 애인 만나러 오고.”“강 대표님이 알면...”구승훈이 걸음을 옮겨 임명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걸려있었고 아래로 축 늘어트린 눈꺼풀이 눈동자로
구연정이 바닥에 흐트러진 장난감을 정리하고는 구승훈의 팔을 잡아당겼다. 강하리는 한눈에 구승훈이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알아채고 구연정을 불렀다.“연정아, 엄마한테 와.”하지만 구연정은 입을 삐쭉거리며 구승훈의 손을 잡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연정이 착하지. 아빠가 다음에 다시 보러 올 거야.”구연정은 구승훈이 가는 게 싫어 눈물을 뚝뚝 떨궜다. 한번 가면 언제 올지 모르는데 구승훈이 예전처럼 두 사람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아빠, 가지 마요.”구연정이 고개를 들고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구승훈에게 말했다. 전화를 끊은 구승훈이 강하리를 힐끔 쳐다보더니 몸을 숙여 강하리를 번쩍 안았다.“아빠가 일 끝나며 바로 올게. 응?”“싫어요.”구연정이 구승훈의 목을 끌어안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강하리는 그런 구연정을 보며 마음이 착잡해졌지만 이내 그 감정을 떨쳐내고 다소 엄숙한 표정으로 구연정을 바라봤다.“연정아, 엄마한테 와.”강하리가 얼굴을 굳히면 구승훈도 무서워할뿐더러 구연정도 무서워했다. 구연정은 어쩔 수 없이 구승훈의 손을 천천히 풀어주고는 억울한 표정으로 구승훈의 옷깃에 눈물을 닦아냈다.“그러면 꼭 연정이 다시 보러와야 해요.”구승훈은 너무 마음이 아파 손으로 구연정의 곱슬머리를 쓰다듬었다.“아빠 꼭 다시 돌아온다고 약속할게.”구연정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구승훈의 품에서 내려오더니 강하리에게로 걸어갔다. 구승훈이 강하리 옆으로 다가가더니 이렇게 말했다.“일처리하고 바로 올게.”강하리는 그저 구연정의 눈물을 닦아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구승훈은 더 지체할 시간이 없어 얼른 밖으로 나가는데 강하리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저녁 10시가 돼도 돌아오지 않으면 아래 쓰레기통에서 짐이나 찾아가.”구승훈이 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입꼬리를 올렸다.“그래,여보.”강하리가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봤다.“난 그저 승훈 씨가 돌아오지 않으면 연정이가 잠에 들지 않고 칭얼거릴까 봐 그런 거야. 오해하지 마.”그러자 구
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그래요. 잘 알았어요.”통화가 끝나자 바깥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줌마가 채소가 가득 담긴 장바구니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 옆으로 구연정이 구승훈의 품에 안겨 흥분한 목소리로 연신 아빠라고 불러댔다.“아빠, 뽀뽀. 아빠, 뽀뽀. 아빠, 연정이 안아줘요. 연정이 아빠랑 같이 놀 거예요.”구승훈이 구연정을 안고 마구 뽀뽀하자 구연정이 깔깔 웃어댔다.“연정이 아빠 보고 싶었어요.”구승훈이 턱을 구연정의 얼굴에 마구 비비더니 말했다.“응, 아빠도 연정이 보고 싶었어.”“아빠, 집으로 가요.”구연정이 구승훈을 안고 집안을 가리켰다. 구승훈은 어두운 표정을 하고 집안에 앉아 있는 강하리를 보며 마른기침했다.“아빠는 갈 엄두가 안 나는데?”“같이 가요.”“안돼. 엄마가 싫어해.”이건 일러바친 거나 다름없었다. 강하리를 바라보는 구연정의 표정이 웃음에서 울음으로 바뀌었다. 구승훈의 성격을 똑 닮은 구연정은 어린 나이에 어떻게 해야만 강하리의 마음이 약해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강하리가 구승훈을 노려보자 구승훈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사실이잖아.”구연정이 입을 삐쭉거리자 눈동자에 가득 차오른 눈물이 당장이라도 쏟아져나올 것 같았다. 강하리는 어쩔 수 없이 미간을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들어와.”구승훈을 돌아본 구연정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구연정은 큰 눈을 예쁘게 깜빡이더니 구승훈의 어깨에 기대 움직이지 않았다. 구승훈이 멈칫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누가 내 딸 아니랄까 봐.’구승훈이 한 손에 구연정을 안고 다른 손으로 캐리어를 끌며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강하리가 이렇게 말했다.“사람만 들어오라고 했지 짐까지 들고 들어오라고 한 적은 없는데.”구승훈이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짐 밖에 두면 잃어버려.”하지만 강하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구승훈이 구연정을 돌아보자 구연정도 구승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실 구연정은 짐을 밖에 두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아빠가
구승훈이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자리에 서 있었다.“이미 세 시간이나 지났어. 약 발라야 해.”강하리가 미간을 주물렀다.“승재 씨랑 준봉 씨는 상처 치료할 줄 모른대요? 아니면 간병인이라도 찾아줘요?”구승훈이 벽에 기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싫어. 꼭 네가 발라줬으면 좋겠어. 못 들어가게 한다면 어쩔 수 없지. 복도에서 이부자리 펴고 집 지켜주면 돼. 그래야 네가 이상한 남자들 집에 안 들이지.”강하리가 발끈했다.“승훈 씨, 이러는 거 재밌어?”“재미없어.”구승훈이 말했다.“그래도 오늘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건 앞으로 더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거잖아. 걱정돼서 그래.”강하리가 구승훈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걱정할 거 없어. 내 안전은 승훈 씨와 아무 관계가 없으니까 이상한 책임감 가질 필요 없어. 그리고 나는 승훈 씨에게 빚지는 거 싫거든.”구승훈이 미간을 찌푸렸다.“하리야, 난 그저 너를 보상해 주고 싶어서 그래.”“허.”강하리가 고개를 들어 구승훈의 눈빛을 마주했다.“보상한다고 될 것 같아?”구승훈의 목젖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보상이라는 단어는 내뱉기 쉬울뿐더러 제일 가치가 없는 말이었다. 게다가 강하리는 보상 따윈 필요 없었다.‘하긴 강하리가 지금 부족한 게 뭐라고 그까짓 보상을 받자고 수모를 마다하겠어.’이렇게 생각한 구승훈은 몹시 난감했다.“보상이 싫으면 그냥 내가 파렴치한 걸로 하자. 이렇게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잖아.”강하리가 콧방귀를 뀌더니 문을 열었다.“뭐 여기서 이부자리를 펴도 좋다면 그렇게 하든지.”문이 닫히자 벽에 기댔던 구승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적어도 경찰에게 신고하거나 관리사무소에 전화해 내쫓지 않았다는 건 좋은 현상이었다.구승훈이 정말 복도에 살림을 차릴 것 같다는 생각에 강하리는 마음이 착잡해지기 시작했다. 어젯밤 구승훈이 악몽을 꾸다가 깨는 걸 봤는데 오늘은 구승훈의 보호까지 받았다. 빨갛게 물든 셔츠와 화상으로 부어오른 등, 구승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