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내달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한 무리 사람들이 그쪽으로 쫓아갔다.앞장선 사람은 진용철이었는데 얼굴에 난 칼자국 흉터가 너무 흉측했다.강하리는 허둥지둥 112에 신고했다.하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서 그런지 잠시 기다려달라는 안내음만 들렸다.강하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녀는 얼른 전화를 끊고 구승훈에게 걸었다.그러나 들려오는 건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차가운 안내음뿐이었다.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무 절망적이었다.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다행인 건 구승재가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었다.“강 부장님,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일이시죠?”“승재 씨, 살려주세요. 명인 병원 밖인데 누가... 아악!”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따라온 사람에게 머리채를 잡혔다.“미친년이 달리기는 잘하네.”그러더니 바로 손을 들어 강하리의 뺨을 후려쳤다.“왜 더 달려보지? 어? 더 달려보라고!”강하리는 갑자기 들어온 싸대기에 귀에서 윙 하는 소리가 들렸다.그래도 태연한 척 한마디 했다.“이미 신고했어. 곧 경찰들이 몰려올 거야. 지금 나를 놓아준다면 책임을 묻지는 않을게.”그러나 그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질질 끌더니 길가에 세워진 밴으로 향했다.강하리는 온 힘을 다해 차 문을 잡고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차에 앉은 누군가가 호통쳤다.“뭐 해? 뜯어내지 않고.”강하리는 그제야 차에 앉은 사람이 구승현임을 발견했다.“뭐 하자는 거예요?”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지만 목소리가 평소보다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저는 구승현 씨와 원수진 거 없는 거 같은데.”구승현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저랑은 원수진 거 없지만 당신이 따르는 남자가 나한테 원수졌거든. 일단 손발 묶고 입에 테이프 붙여. 그리고 사진 찍어서 구승훈에게 보내줘.”강하리는 씁쓸하게 웃었다. 목소리가 여전히 파르르 떨렸다.“구승훈을 협박할 방법이 저예요? 쓸모
“미쳤어? 뒤에 따라오는 차 정계 고위직 전용 차량인 거 안 보여? 산 아래로 떨어트려? 이제 다 살았다 이거지?”진용철은 그런 건 아예 몰랐다. 그저 기분이 더러울 뿐이었다.하지만 구승현은 너무 잘 알았다.어릴 때부터 날라리로 소문났지만 정계에 일어나는 일은 꿰고 있었다.저 정도 차량이면 발만 굴러도 전국이 흔들릴만한 사람이 타고 있을 것이다.그저 구승훈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을 뿐 죽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그는 고개를 돌려 손발이 단단히 묶인 여자를 힐끔 쳐다봤다.‘이 여자가 저런 인물을 어떻게 아는 거지?“그럼 어떡할까요?”진용철은 점점 인내심을 잃어갔다.뒤에 차를 따돌리는 건 영 현실성이 떨어졌다.구승현이 밖을 내다보더니 말했다.“벼랑 끝에 도착하면 저 여자 바로 던져버려.”강하리는 충혈된 눈으로 구승현을 바라봤다. 눈빛으로 구걸하고 있었다.죽고 싶지 않았다.정말 살고 싶었다.그녀의 인생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인생을 마음껏 즐겨보지도, 정서원이 깨어나는 것도 보지 못했다.그래서 너무 살고 싶었다.하지만 구승현은 그런 것 따위 상관하지 않았다.벼랑 끝에 도착해 차를 세우더니 강하리를 그대로 던져버렸다.강하리는 지금 이 순간 어떤 기분인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절망, 또는 해탈이었을 것이다.이런 생각까지 들었다.아, 이제 더는 구승훈과 엮일 일은 없어서 좋네.실망할 필요도, 마음 아파할 필요도 없었다.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구승훈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강하리는 눈을 감고 그대로 차가운 바닷속으로 빠졌다....구승현과 진용철은 강하리를 던져버리고는 얼른 차를 타고 도망갔다.주해찬과 진태영은 벼랑 끝에 차를 세웠다.뒤따라온 차가 한 대 더 있었다.구승재가 창백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강 부장님은요?”주해찬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그는 입을 뻐끔거리더니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아래로 던져졌어요.”구승재가 멈칫하더니 바로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아래는 바다에요. 내려가서 찾으면, 찾으면 분
어두운 아우라가 구승훈의 몸 전체를 감싸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고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그는 심지어 서두르지도 않고 천천히 부재중 전화 기록까지 확인했다. 그러다 강하리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를 보고 스크롤을 내리던 손가락을 멈췄다.강하리의 전화는 구승현이 보낸 사진보다 몇 분 정도 일찍 와 있었다. 즉 강하리는 납치를 당하기 전에 그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그는 핸드폰을 쥔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을 꽉 주었다.바로 이때 다시 한번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무거운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형, 강 부장님한테 문제가 생겼어.”구승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구승훈은 눈을 내리깔면서 두 눈에서 쏟아지는 싸늘한 기운을 숨겼다.“지금 상황은 어때?”구승재는 몇 번이나 입술을 움찔거리더니 겨우 말을 이었다.“지금으로서는 생사가 불분명해.”“뭐라고?”순간적으로 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렸고 심지어 자기 귀를 의심했다.“생사가 불분명하다는 게 무슨 말이야? 누구의 생사가 불분명하다는 거야? 구승재 너 똑바로 말해.”“형, 그놈들이 강 부장님을 절벽에서 떨어트렸어. 우리가 지금 찾고는 있는데 강 부장님이 살아있을지 모르겠어...”아직 찾고는 있었지만 구승재는 더 이상 큰 희망을 품을 수가 없었다.강하리의 양손은 묶여 있었고 입에는 테이프가 붙어 있는 채로 떨어졌다. 이렇게 높은 절벽에서 떨어졌다면 즉사하지 않았더라도 익사했을 가능성이 컸다.구승훈은 머리가 윙윙 울렸다.구승훈은 구승현이 기껏해야 그를 협박하기 위해 강하리를 납치했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구승훈은 자기가 나타나기 전까지 강하리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그러나 지금...구승훈은 핸드폰이 부서질 정도로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는 머릿속에 있던 마지막 한줄기 선이 갑자기 끊어지는 것처럼 온몸이 극도로 경직되었다.그 뒤로 구승재가 뭐라고 말했지만 그는 거의 듣지 못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구승훈은 갑자기 정신을 차리더니 밖으
수십 미터 떨어진 바위 위에 하얀 형체가 보였고 구승훈은 그쪽을 향해 헤엄쳐갔다. 가까이 도착한 그는 갑자기 속도를 줄였다. 바위 끝에 누워있는 여자를 발견한 구승훈은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어젯밤 그가 떠날 때까지만 해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그런데 지금 호흡을 멈춘 듯 바다 한가운데 놓인 바위 끝에 누워있었다.구승훈은 줄곧 자기 자신을 칼날과 총알이 날아와도 꿈쩍도 하지 않을 만큼 겁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덜컥 겁이 났다.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품에 꽉 안았다. 그녀의 입에 붙어 있던 테이프는 바닷물에 젖어 떨어진 것 같았고 손을 묶고 있던 밧줄도 풀려 있었지만 그녀의 손은 전부 마찰로 인한 상처로 덮여 있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품에 안은 순간 갑자기 싸늘한 느낌을 받았다. 품에 안겨 있는 그녀에게서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강하리를 내려다보는 구승훈의 창백한 얼굴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력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떨리는 손가락을 겨우 들어 올려 그녀의 호흡을 확인했다.싸늘했다.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있던 구승훈의 두 눈은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는 강하리를 바위 위에 올려놓은 뒤 필사적으로 구조를 시작했다.잠시 뒤 도착한 사람들은 눈 앞에 펼쳐진 장면에 모두 표정이 일그러졌다.구승재는 바닷물 속에서 지켜보며 온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시간은 일분일초가 흘러갔고 사람들이 이제는 희망을 포기하려는 순간 강하리가 갑자기 쿨럭하고 기침을 뱉어냈다.구승훈은 깜짝 놀라며 손을 들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하리야...”강하리의 의식은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귓가에는 아직도 출렁이는 바닷물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또다시 무력감이 그녀를 덮쳤다. 어쩌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분명 그녀에게는 아직 아름다운 인생이 남아 있는데 이
“구승훈 씨 방금 못 봤어요? 하리는 당신이 만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구승훈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주해찬 씨, 다시 한번 말하는데 강하리 이리 줘요.”주해찬은 여전히 강하리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곧 싸울 것 같은 두 사람 때문에 진태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내가 안을게.”말을 마친 뒤 진태형은 강하리를 안아 들고 성큼성큼 차에 올라탔다.잠시 멍하니 있던 구승훈은 정신을 차린 뒤 재빨리 차에 올랐고 주해찬도 망설임 없이 뒤를 따랐다. 차는 신속하게 병원으로 향했다.강하리는 주해찬에게 안긴 순간부터 다시 혼수 상태에 빠졌다.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그녀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계속 눈물을 흘렸지만 그녀는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구승훈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거기 담요 좀 줘요.”구승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주해찬은 다급하게 담요를 집어 그에게 건넸고 구승훈은 담요를 받아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힘없이 축 늘어진 그녀의 손목을 보고 그는 흠칫했다. 갑자기 마음속에서 숨 막히는 고통이 몰려왔다.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구승현 가만두지 않을 거야.’고통이 몰려오는 동시에 분노도 함께 치밀어 올랐다.“자기 여자를 보호하는 건 모든 남자의 책임이죠. 소중한 사람을 잃은 뒤에 하는 후회는 아무런 소용도 없어요.”진태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침묵을 지키며 진태형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구승훈의 시선은 창백한 강하리의 얼굴에 머물렀고 단 일 초도 떨어지지 않았다.차는 병원 앞에 도착했다.구승훈은 진태형의 품에 있던 강하리를 안아 들고서는 곧바로 응급실로 달려갔다.그녀를 의사에게 맡긴 뒤에야 그는 이 장면이 뭔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한참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구승훈 씨는 어디 있었죠? 왜 그때 하리의 옆에 없었어요?”갑자기 주해찬이 구승훈의 뒤에서 물었다.구승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응급실 문만
사실 구승훈은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그가 당시 작은 어촌 마을에 보내졌을 때 이미 여러 차례 생과 사를 경험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처음 몇 번은 그의 어머니에게 목이 졸려 죽을 뻔했고 그 뒤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어촌 마을에 오고 나서야 그는 조금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졌다. 그 후로 이어지는 치료 때문에 그는 당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하양이’라는 이름은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녀는 그의 구원자였다.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송유라를 내버려둘 수가 없었지만 강하리가 이런 위험에 빠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꽉 잡으며 창백하고 연약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이 너무 답답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그는 아직도 바위 끝에 숨을 쉬지 않고 누워있던 강하리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구승훈은 긴 손가락으로 촉촉한 그녀의 눈가를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리야, 무서워 하지 마. 나 여기 있어.”잠시 후 강하리는 마침내 안정을 되찾았다.구승훈은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손을 닦아주려던 그는 잠시 멈칫했다. 탈골된 손목은 다시 붙였지만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구승훈은 그 상처들을 조심스럽게 피하며 손을 마저 닦아준 뒤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병실 밖으로 나갔다.문을 열고 나오니 마침 구승재가 문 앞에 서 있었다.구승훈은 눈을 감으며 물었다.“둘째는 찾았어?”구승재는 고개를 저었다.“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야. 이 정도로 간이 클 줄은 몰랐어. 대낮에 사람을 납치하다니. 만약 주해찬 씨와 진태형 장관님이 뒤를 따르지 않았다면 하리 씨는 정말 큰일 났을 거야.’구승훈은 차가운 비웃음을 날렸다.“두 사람이 쫓아가지 않았다면 하리는 이런 위험에 처하지 않았을 거야.”구승재는 깜짝 놀라며 잠시 구승훈의 뜻을 되짚어보았다.만약 주해
강하리는 여전히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구승훈과 얘기를 나누고 싶어도 강하리가 깨어나면 어떤 태도일지 장담할 수 없었기에 결국 포기했다.하지만 강하리가 깨어난 뒤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도와줄 것이다.강하리가 날이 어두워져서야 깨어났다. 눈을 뜬 그녀는 아직 조금 멍한 상태였다.하지만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누군가 물었다.“깼어?”아주 익숙한 목소리지만 그녀의 마음에 아무런 파장도 일으키지 못했다.“네.”강하리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 내가 가서 의사 불러올게.”강하리는 손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자 방금까지 구승훈이 계속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의사가 와서 진찰한 뒤 말했다.“깨어나긴 했지만 폐의 감염과 몸의 타박상들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어요. 아직 휴식이 필요합니다.”강하리가 대답했다.“네 선생님 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난 뒤 구승훈은 다시 그녀의 침대 옆에 앉았다. 그는 습관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강하리는 조용히 그의 손을 피했다.구승훈의 얼굴은 바로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도 그녀가 지금 화를 내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이해하기에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그저 다정히 물을 뿐이었다.“아직 많이 아파?”강하리는 눈을 감으며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킨 뒤 말했다.“괜찮아요.”사실 그녀는 온몸이 산산조각난 뒤 다시 붙는 것처럼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이 남자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아픔이나 괴로움은 이제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구승훈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정말 괜찮아? 그럼 누가 꿈속에서 계속 아프다고 하면서 내 손을 잡고 놔주지 않은 거지?”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도 그녀의 냉담함을 느낄 수 있었다.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하리야, 미안해.”강하리는 구승훈의 미안하다는 한마
구승훈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 그는 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 내가 여러 번 말했잖아.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넌 끝낼 수 없다고. 구승현은 내가 처리할 거니까 넌 몸부터 챙겨. 소란 피우지 말고.”구승훈의 말을 들은 강하리의 마음은 고통으로 가득 찼다.그녀는 살짝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 같은 인형처럼 침대에 기대어 있었다. 하지만 두 눈에는 단호함이 가득했다.“구승훈 씨, 난 이제 정말 당신 옆에 있고 싶지 않아요. 우리 엄마가 위독하셨을 때 당신은 나를 혼자 남겨뒀고 내 옆에 위험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송유라를 찾으러 갔어요. 난 그 순간부터 당신과 그만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이번에 납치를 당하지 않았더라도 난 당신을 떠날 생각이었어요.”강하리는 말을 마친 뒤 눈가가 살짝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구승훈은 눈앞에 있는 연약한 여자를 바라보자 마음이 아팠다.“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나에게는 널 떠날 수 없게 만들 방법이 많다는 걸 너도 알잖아.”강하리는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들어 눈물이 가득 맺혀있는 두 눈으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네. 나도 알아요. 당신 앞에서 나 강하리는 영원히 하찮은 존재라는 걸. 영원히 반항할 여지도 없다는걸. 당신한테 날 다시 돌아오게 만들 방법이야 많겠지만 이제는 정말 지긋지긋해요. 어떤 방법으로 나에게 강요할 건데요? 위약금이요? 줄게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약금 줄게요. 그것도 아니면 또 우리 엄마로 날 협박하려고요? 만약 구승훈 씨가 더 이상 우리 엄마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거예요. 정말로 다른 방법이 없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엄마를 포기해야겠죠.”그녀는 구승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이제 구승훈 씨는 어떤 방법을 날 막으려고요?”강하리는 말을 마친 후 온몸에 힘이 빠진 듯 종잇장보다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는 침대에 기대었다.구승훈은 관자놀이가 갑자기 지끈거렸다.그는 강하리가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예상했었다.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