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아우라가 구승훈의 몸 전체를 감싸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고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그는 심지어 서두르지도 않고 천천히 부재중 전화 기록까지 확인했다. 그러다 강하리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를 보고 스크롤을 내리던 손가락을 멈췄다.강하리의 전화는 구승현이 보낸 사진보다 몇 분 정도 일찍 와 있었다. 즉 강하리는 납치를 당하기 전에 그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그는 핸드폰을 쥔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을 꽉 주었다.바로 이때 다시 한번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무거운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형, 강 부장님한테 문제가 생겼어.”구승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구승훈은 눈을 내리깔면서 두 눈에서 쏟아지는 싸늘한 기운을 숨겼다.“지금 상황은 어때?”구승재는 몇 번이나 입술을 움찔거리더니 겨우 말을 이었다.“지금으로서는 생사가 불분명해.”“뭐라고?”순간적으로 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렸고 심지어 자기 귀를 의심했다.“생사가 불분명하다는 게 무슨 말이야? 누구의 생사가 불분명하다는 거야? 구승재 너 똑바로 말해.”“형, 그놈들이 강 부장님을 절벽에서 떨어트렸어. 우리가 지금 찾고는 있는데 강 부장님이 살아있을지 모르겠어...”아직 찾고는 있었지만 구승재는 더 이상 큰 희망을 품을 수가 없었다.강하리의 양손은 묶여 있었고 입에는 테이프가 붙어 있는 채로 떨어졌다. 이렇게 높은 절벽에서 떨어졌다면 즉사하지 않았더라도 익사했을 가능성이 컸다.구승훈은 머리가 윙윙 울렸다.구승훈은 구승현이 기껏해야 그를 협박하기 위해 강하리를 납치했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구승훈은 자기가 나타나기 전까지 강하리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그러나 지금...구승훈은 핸드폰이 부서질 정도로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는 머릿속에 있던 마지막 한줄기 선이 갑자기 끊어지는 것처럼 온몸이 극도로 경직되었다.그 뒤로 구승재가 뭐라고 말했지만 그는 거의 듣지 못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구승훈은 갑자기 정신을 차리더니 밖으
수십 미터 떨어진 바위 위에 하얀 형체가 보였고 구승훈은 그쪽을 향해 헤엄쳐갔다. 가까이 도착한 그는 갑자기 속도를 줄였다. 바위 끝에 누워있는 여자를 발견한 구승훈은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어젯밤 그가 떠날 때까지만 해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그런데 지금 호흡을 멈춘 듯 바다 한가운데 놓인 바위 끝에 누워있었다.구승훈은 줄곧 자기 자신을 칼날과 총알이 날아와도 꿈쩍도 하지 않을 만큼 겁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덜컥 겁이 났다.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품에 꽉 안았다. 그녀의 입에 붙어 있던 테이프는 바닷물에 젖어 떨어진 것 같았고 손을 묶고 있던 밧줄도 풀려 있었지만 그녀의 손은 전부 마찰로 인한 상처로 덮여 있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품에 안은 순간 갑자기 싸늘한 느낌을 받았다. 품에 안겨 있는 그녀에게서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강하리를 내려다보는 구승훈의 창백한 얼굴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력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떨리는 손가락을 겨우 들어 올려 그녀의 호흡을 확인했다.싸늘했다.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있던 구승훈의 두 눈은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는 강하리를 바위 위에 올려놓은 뒤 필사적으로 구조를 시작했다.잠시 뒤 도착한 사람들은 눈 앞에 펼쳐진 장면에 모두 표정이 일그러졌다.구승재는 바닷물 속에서 지켜보며 온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시간은 일분일초가 흘러갔고 사람들이 이제는 희망을 포기하려는 순간 강하리가 갑자기 쿨럭하고 기침을 뱉어냈다.구승훈은 깜짝 놀라며 손을 들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하리야...”강하리의 의식은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귓가에는 아직도 출렁이는 바닷물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또다시 무력감이 그녀를 덮쳤다. 어쩌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분명 그녀에게는 아직 아름다운 인생이 남아 있는데 이
“구승훈 씨 방금 못 봤어요? 하리는 당신이 만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구승훈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주해찬 씨, 다시 한번 말하는데 강하리 이리 줘요.”주해찬은 여전히 강하리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곧 싸울 것 같은 두 사람 때문에 진태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내가 안을게.”말을 마친 뒤 진태형은 강하리를 안아 들고 성큼성큼 차에 올라탔다.잠시 멍하니 있던 구승훈은 정신을 차린 뒤 재빨리 차에 올랐고 주해찬도 망설임 없이 뒤를 따랐다. 차는 신속하게 병원으로 향했다.강하리는 주해찬에게 안긴 순간부터 다시 혼수 상태에 빠졌다.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그녀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계속 눈물을 흘렸지만 그녀는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구승훈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거기 담요 좀 줘요.”구승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주해찬은 다급하게 담요를 집어 그에게 건넸고 구승훈은 담요를 받아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힘없이 축 늘어진 그녀의 손목을 보고 그는 흠칫했다. 갑자기 마음속에서 숨 막히는 고통이 몰려왔다.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구승현 가만두지 않을 거야.’고통이 몰려오는 동시에 분노도 함께 치밀어 올랐다.“자기 여자를 보호하는 건 모든 남자의 책임이죠. 소중한 사람을 잃은 뒤에 하는 후회는 아무런 소용도 없어요.”진태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침묵을 지키며 진태형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구승훈의 시선은 창백한 강하리의 얼굴에 머물렀고 단 일 초도 떨어지지 않았다.차는 병원 앞에 도착했다.구승훈은 진태형의 품에 있던 강하리를 안아 들고서는 곧바로 응급실로 달려갔다.그녀를 의사에게 맡긴 뒤에야 그는 이 장면이 뭔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한참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구승훈 씨는 어디 있었죠? 왜 그때 하리의 옆에 없었어요?”갑자기 주해찬이 구승훈의 뒤에서 물었다.구승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응급실 문만
사실 구승훈은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그가 당시 작은 어촌 마을에 보내졌을 때 이미 여러 차례 생과 사를 경험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처음 몇 번은 그의 어머니에게 목이 졸려 죽을 뻔했고 그 뒤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어촌 마을에 오고 나서야 그는 조금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졌다. 그 후로 이어지는 치료 때문에 그는 당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하양이’라는 이름은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녀는 그의 구원자였다.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송유라를 내버려둘 수가 없었지만 강하리가 이런 위험에 빠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꽉 잡으며 창백하고 연약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이 너무 답답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그는 아직도 바위 끝에 숨을 쉬지 않고 누워있던 강하리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구승훈은 긴 손가락으로 촉촉한 그녀의 눈가를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리야, 무서워 하지 마. 나 여기 있어.”잠시 후 강하리는 마침내 안정을 되찾았다.구승훈은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손을 닦아주려던 그는 잠시 멈칫했다. 탈골된 손목은 다시 붙였지만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구승훈은 그 상처들을 조심스럽게 피하며 손을 마저 닦아준 뒤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병실 밖으로 나갔다.문을 열고 나오니 마침 구승재가 문 앞에 서 있었다.구승훈은 눈을 감으며 물었다.“둘째는 찾았어?”구승재는 고개를 저었다.“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야. 이 정도로 간이 클 줄은 몰랐어. 대낮에 사람을 납치하다니. 만약 주해찬 씨와 진태형 장관님이 뒤를 따르지 않았다면 하리 씨는 정말 큰일 났을 거야.’구승훈은 차가운 비웃음을 날렸다.“두 사람이 쫓아가지 않았다면 하리는 이런 위험에 처하지 않았을 거야.”구승재는 깜짝 놀라며 잠시 구승훈의 뜻을 되짚어보았다.만약 주해
강하리는 여전히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구승훈과 얘기를 나누고 싶어도 강하리가 깨어나면 어떤 태도일지 장담할 수 없었기에 결국 포기했다.하지만 강하리가 깨어난 뒤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도와줄 것이다.강하리가 날이 어두워져서야 깨어났다. 눈을 뜬 그녀는 아직 조금 멍한 상태였다.하지만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누군가 물었다.“깼어?”아주 익숙한 목소리지만 그녀의 마음에 아무런 파장도 일으키지 못했다.“네.”강하리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 내가 가서 의사 불러올게.”강하리는 손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자 방금까지 구승훈이 계속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의사가 와서 진찰한 뒤 말했다.“깨어나긴 했지만 폐의 감염과 몸의 타박상들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어요. 아직 휴식이 필요합니다.”강하리가 대답했다.“네 선생님 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난 뒤 구승훈은 다시 그녀의 침대 옆에 앉았다. 그는 습관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강하리는 조용히 그의 손을 피했다.구승훈의 얼굴은 바로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도 그녀가 지금 화를 내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이해하기에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그저 다정히 물을 뿐이었다.“아직 많이 아파?”강하리는 눈을 감으며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킨 뒤 말했다.“괜찮아요.”사실 그녀는 온몸이 산산조각난 뒤 다시 붙는 것처럼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이 남자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아픔이나 괴로움은 이제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구승훈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정말 괜찮아? 그럼 누가 꿈속에서 계속 아프다고 하면서 내 손을 잡고 놔주지 않은 거지?”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도 그녀의 냉담함을 느낄 수 있었다.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하리야, 미안해.”강하리는 구승훈의 미안하다는 한마
구승훈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 그는 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 내가 여러 번 말했잖아.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넌 끝낼 수 없다고. 구승현은 내가 처리할 거니까 넌 몸부터 챙겨. 소란 피우지 말고.”구승훈의 말을 들은 강하리의 마음은 고통으로 가득 찼다.그녀는 살짝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 같은 인형처럼 침대에 기대어 있었다. 하지만 두 눈에는 단호함이 가득했다.“구승훈 씨, 난 이제 정말 당신 옆에 있고 싶지 않아요. 우리 엄마가 위독하셨을 때 당신은 나를 혼자 남겨뒀고 내 옆에 위험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송유라를 찾으러 갔어요. 난 그 순간부터 당신과 그만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이번에 납치를 당하지 않았더라도 난 당신을 떠날 생각이었어요.”강하리는 말을 마친 뒤 눈가가 살짝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구승훈은 눈앞에 있는 연약한 여자를 바라보자 마음이 아팠다.“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나에게는 널 떠날 수 없게 만들 방법이 많다는 걸 너도 알잖아.”강하리는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들어 눈물이 가득 맺혀있는 두 눈으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네. 나도 알아요. 당신 앞에서 나 강하리는 영원히 하찮은 존재라는 걸. 영원히 반항할 여지도 없다는걸. 당신한테 날 다시 돌아오게 만들 방법이야 많겠지만 이제는 정말 지긋지긋해요. 어떤 방법으로 나에게 강요할 건데요? 위약금이요? 줄게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약금 줄게요. 그것도 아니면 또 우리 엄마로 날 협박하려고요? 만약 구승훈 씨가 더 이상 우리 엄마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거예요. 정말로 다른 방법이 없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엄마를 포기해야겠죠.”그녀는 구승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이제 구승훈 씨는 어떤 방법을 날 막으려고요?”강하리는 말을 마친 후 온몸에 힘이 빠진 듯 종잇장보다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는 침대에 기대었다.구승훈은 관자놀이가 갑자기 지끈거렸다.그는 강하리가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예상했었다.
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연지는 케이크에 초를 꽂은 뒤 불을 붙여주었다.“자 이제 소원 빌어. 앞으로 건강할 거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강하리는 눈앞에서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었다.‘앞으로는 자유로울 수 있기를 기도할게요.’그녀는 촛불은 껐지만 케이크를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손연지도 굳이 강요하지 않았다.“크림은 소화가 잘 안돼. 기다려. 내가 소화 잘되는 음식으로 사다 줄게.”강하리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며 말했다.“연지야, 나 핸드폰 좀 사다 줘. 집에 가서 계약서도 가져다줄래? 그리고 약도 좀 준비해 줘.”손연지는 미간을 찌푸렸다.“어떤 약?”“음식을 먹을 수 없게 만드는 약 있지? 음식을 먹기만 해도 바로 다 토해내는 약 말이야.”강하리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손연지는 경악했다.“너 미쳤어? 지금 네 몸이 얼마나 많은 영양소를 필요로 하는지 알아?”강하리는 씁쓸하게 웃었다.“이제 나한테 다른 선택은 없어.”만약 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는다면 그녀는 떠날 방법이 없었다.그렇기에 그녀는 한 번 도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구승훈이 조금이라도 그녀를 신경 쓰길 바랄 뿐이었다.만약 며칠 동안의 고통으로 미래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그녀는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손연지가 입을 열었다.“너 정말 결정했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손연지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하리야 나 정말 속상해 죽겠어. 넌 왜 저런 놈을 좋아하는 거야.”강하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맞다. 그녀는 왜 저런 남자를 좋아했을까?손연지는 강하리의 옆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고 바로 떠났다.구승훈이 밥을 사 왔을 때 강하리는 침대에 기대어 옆 탁자에 놓여 있는 작은 케이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그는 눈썹을 추켜세웠다.“누가 사 온 거야?”강하리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연지가요.”구승훈은 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네 친구는 네 입맛을 잘 알고 있네
송유라는 강하리의 말에 순간 숨이 막혔다.그녀는 강하리가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그러나 송유라의 표정은 이내 다시 어두워졌다.송유라는 강하리의 말이 끝내자 구승훈의 표정이 싸늘하다 못해 얼음처럼 굳어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구승훈은 강하리의 말에 기뻐하지 않았다. 이 남자는 강하리와 헤어질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송유라, 너 먼저 돌아가.”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자 송유라의 표정은 더 일그러졌다. 그녀는 구승훈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 부장님 내 뜻은 그런 게 아니라 난...”“꺼지라고.”강하리는 더 이상 그녀의 가식적은 말들을 듣고 싶지 않아 돌직구를 던졌다.“내가 경비원이라도 불러야 하는 건가요? 송유라 씨 공인이잖아요? 쫓겨나는 모습 보이면 안 될 텐데.”송유라는 강하리의 말에 멈칫하더니 바로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억울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승훈 오빠. 난 그저 강 부장님과 오빠가 싸울까 봐 걱정돼서 설명하러 온 건데 강 부장님은 이게 무슨 태도야?”구승훈의 표정은 정말 안 좋아 보였지만 강하리의 태도 때문이 아니었다. 강하리는 송유라를 항상 마음에 걸려 했다. 이런 상황에 송유라가 찾아온 것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것밖에 더 되지 않았다. 강하리의 꺼지라는 한 마디는 사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구승훈은 방금 강하리가 한 말에 화가 났을 뿐이었다. 강하리는 화가 나니 아주 자연스럽게 그가 필요 없다는 말을 뱉어냈다. 이 여자가 감히 더 이상 그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다니.구승훈은 마음속에서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지만 어디에 풀 곳이 없었다.그의 차가운 눈빛이 송유라에게로 향했다.“내가 먼저 돌아가라고 한 말 못 들었어?”송유라는 그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구승훈은 눈물을 흘리는 송유라의 모습에 그제야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먼저 돌아가. 여기에서 네가 더 설명할 건 없어.”송유라도 이쯤
구승훈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물 흐르는 소리가 막 멈춘 참이었다.그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살균 티슈로 손을 닦는 강하리의 모습이 차가운 벽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조시욱 때문이야?”구승훈은 무릎을 꿇고 강하리 앞에 앉아 그녀의 턱을 잡아올렸다.“대답해 봐, 조시욱을 위해 몸을 지키겠다는 거냐고?”강하리는 고개를 쳐들며 비웃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묻는 건데요?”구승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휠체어를 돌려 화장실을 나서는 그녀의 등 뒤에서 구승훈은 한참이나 멍을 때렸다. 구승훈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병실 문이 열리고 심준호와 백아영, 조시욱이 들어와서였다.구승훈을 본 심준호와 백아영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예전에는 무슨 일이 있든 심준호가 먼저 구승훈에게 상황을 묻고 강하리와 화해할 수 있도록 조율하려 했다.하지만 이번 일 이후 심준호는 단 한 번도 구승훈을 찾지 않았다.그건 구승훈에 대한 더 말할 나위 없는 실망을 의미했다.백아영은 당장이라도 구승훈의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수십 년간 유지해 온 품격과 매너로 화를 억눌렀다.세 사람이 강하리와 함께 연정이 주위에 둘러앉자, 병실 한구석에 있던 구승훈은 마치 외부인 같이 느껴져 굳은 표정으로 병실을 나와 유리 창가에 서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뒤늦게 찾아온 심준호가 말을 꺼냈다.“일은 다 정리됐어?”구승훈은 낮게 대답했다. “거의.”비록 여초연의 주변이 완전히 정리되진 않았지만 그녀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이상 큰문제는 없었다.“하리랑 조시욱 일은 너도 알고 있겠지. 승훈아, 너한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제 그만 하리 인생에서 나가줘.”구승훈은 멈칫하다 이내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강하리 인생을 방해한다고? 준호야,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넌 알잖아, 어떻게 된 일인지.”“알면 뭐 하냐? 구승훈, 우리 하리가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그걸로도 부족해?”심
강하리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무의식적으로 구승훈을 밀쳐내려 했지만 연정이의 웃음소리에 잠시 망설였다.아직 열이 가시지 않은 구연정은 강하리와 구승훈을 보고 흥분했던 것도 잠시, 곧 다시 기운이 빠졌다.구연정은 힘없이 구승훈 어깨에 기댄 채 한 손은 구승훈의 옷자락을, 다른 한 손은 강하리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강하리를 바라봤지만 강하리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그가 한숨을 내쉬며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의사가 검사 결과를 들고 들어왔다.“강 대표님, 아가씨는 현재 바이러스 감염으로 보입니다. 며칠 입원이 필요할 것 같아 이미 병실은 준비해두었습니다. 곧 간호사가 안내해 드릴 겁니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수고 많으셨습니다.”병실에 도착하자마자 연정이는 곧 깊은 잠에 빠졌다.강하리는 침대 곁에 앉아 연정의 손을 꼭 잡고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구승훈은 다른 한쪽에서 의사와 연정이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의사가 떠난 뒤에야 그는 강하리 옆으로 돌아왔다.“의사 말로는 보기보다 심각하진 않대. 너무 걱정하지 마.”하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연정이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그녀 곁에 앉아 손을 잡으려 하자 강하리는 황급히 그 손을 빼냈다.“이제 돌아가요. 나랑 아주머니가 있으면 돼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조시욱이 오기 편하게 나더러 가라는 거야?”강하리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노려보다가 이내 비웃듯 말했다.“여기 남아 있으면 임 선생님이 화내지 않을까?”구승훈은 끝내는 강하리의 손을 잡고서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임 선생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너 정말 나 못 믿는 거야?”그의 목소리엔 억눌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강하리가 이를 악물고 손을 빼내려 하자 구승훈이 낮게 말했다.“움직이지 마. 연정이 깼어.”강하리는 움직임을 멈추고 급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연정이는 여전히 곤히 자고 있었다.분노에 찬 강하리를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