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앞두고 주해찬이 급작스레 바빠지기 시작했다.새해맞이 외빈 영접에 문지방이 닳도록 외교부에 들락거렸다.강하리 또한 만만치 않았다. 초창기인 데다가 연말이라 예상외로 많은 업무들이 손을 거쳐야 하다 보니 잠꼬대로 브리핑 자료를 외울 지경이었다.평일 주말 할것 없이 둘 다 일에 매진하는 통에 만나려고 해도 시간 조율이 도톻 되지 않았다.밤 늦은 시간에 영통이나 전화 통화를 하는 게 전부.이날도 늦은 퇴근을 마친 강하리에게 낯선 번호로 전화가 들어왔다.고객사 쪽에서 온 전화가 아닌가 싶어 냉큼 받았지만, 웬 낯선 여인의 부드러운 음성이었다.“하리 양 맞죠? 갑자기 전화해서 죄송한데, 좀 만나볼 수 있을까요?”고객사라 하기엔 너무나도 비즈니스 톤이 아닌 목소리.“아참, 제 소개를 깜빡했네요. 저는 해찬이 이모예요.”잠시 멍해졌던 강하리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위치 말씀해 주시면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여인이 알려준 한 카페에 도착하자, 검은 정장 차림의 건장한 사내 하나가 막아섰다.“강하리 씨 맞으시죠? 죄송하지만 핸드폰은 반입 안되십니다.”강하리의 미간을 살짝 찌푸려졌다.“왜죠?”“카페를 대절할 만큼 극비리에 진행될 거라서요. 핸드폰 외 기타 촬영 또는 녹음 가능한 기기도 가지고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남자는 깍듯하지만, 가차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강하리는 순순히 핸드폰을 내놓는 대신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제가 잘못 찾아온 것 같네요. 전 남자친구 가족분을 만나러 온 거지, 무슨 기밀회의 같은 데 참석하러 온 게 아니라서요.”“들어오라고 해요.”안쪽에서 여인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오자 그제야 정장남이 비켜섰다.휑한 카페 안, 차분한 걸음으로 들어간 강하리는, 우아한 자태로 앉아 스푼으로 커피를 휘젓고 있는 한 여인의 맞은편에 멈춰섰다.“앉아요.”눈을 내리깐 채, 하인에게 분부하듯 고개만 까닥인 여인.강하리가 자리에 앉자, 그제야 여인의 눈길이 강하리를 위아래로 훑기 시작했다.
”우리 해찬이가 만나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던 것 뿐이에요.”여인이 뻔뻔스럽게 대꾸했다.“그랬는데 웬걸, 굉장하더라고요. 해찬이와 연애한답시고 딴 남자와 별 짓을 다 하더군요. 하리 양 같은 여자를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여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창녀라고 하죠. 우리 해찬이 빛나는 인생에 먹칠하기 딱 좋은.”강하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갔다.“우리 해찬이, 업무에 티끌만 한 실수 한 번 없던 애예요. 그랬던 애가 하리 양 때문에 가장 중요한 외교부 회의까지 결석했다고요!”날 선 여인의 음성이 이어졌다.“구승훈 대표 정부 노릇 하면서 익힌 수단들을 남김없이 쓴 모양인데, 인정할께요. 어떤 의미로는 하리 양 참 대단해요. 하지만 그게 다예요. 우리 주씨 집안은, 하리 양처럼 천박한 여자는 절대 용납 못 합니다!”“어이구야. 겨 뭍은 개 흉보는 똥 뭍은 개를 이렇게 직관하다니.”느닷없이 끼어든 남자의 서늘한 목소리.강하리의 낯빛이 확 바뀌었다.차갑고 고고한 기운을 뿜어내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한 남자.“준호네 집에서 본 이후로 처음 뵙네요, 전 여사님.”“아 네, 오랜만이네요 구 대표님.”심씨 가문 큰 사모님, 전미연이 차갑게 흥, 콧방귀를 뀌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이 파렴치한 여자가 얼마나 낯짝이 두꺼운지 봐 두세요. 괜히 또 속지 마시고요.”구승훈이 입가가 조소적으로 말려 올라갔다.“낯짝 두꺼운 걸로 치면 세컨드에서 정실 자리 꿰찬 전 여사님을 이길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요.”“뭐라고요?”전미연의 표정이 마구 일그러졌다.“맞잖아요. 심씨 가문 소실이 정실로 탈바꿈한 사건, 꽤 컸었는데. 설마 세월이 지나 싹 잊혀졌다고 여기신 건 아니죠?”“이보세요 구 대표님!”전미연의 악에 받친 음성이 카패에 울려퍼졌다.“아무리 그래도 제가 윗어른인데 그런 망발을-.”“아까부터 자꾸 윗어른을 들먹이시는데.”윗어른에 대한 존중 따윈 1도 없는 구승훈의 말이 가차없이 전미연의 말을 잘랐다.“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전미연이 신경질적으로 통화 수락을 눌렀다.“준호야, 준호야! 당장 이쪽으로 와! 나 굴욕 당했다고!”핸드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전미연. 하지만 저쪽에서 뭐라 하자 낯빛이 확 바뀌면서 꺽 멈추더니, 한참 뒤에야 꽥 소리질렀다.“야! 심준호! 나 네 숙모야! 어떻게 나한태 이래?”이내 씩씩거리며 전화를 끊어버리는 전미연. 아마도 심준호 쪽에서 말이 곱게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딱 기다려요. 해찬이 설득시킬 테니까.”노기 가득찬 눈으로 전미연이 강하리를 죽일 듯이 한 번 노려보고는, 벌떡 일어나 카페를 나갔다.구승훈이 나타난 시점부터 강하리는 줄곧 말이 없었다.창피함? 어색함? 무슨 느낌인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전미연이 안겨준 굴욕감 하나만은 뚜렷했다.이런 상황을 진중히 고려해보지 못한 자신의 치기에 대한 경종이기도 했다.“왜? 속상해? 저런 수모를 당하고도 주씨 가문에 들어가고 싶어?”괘씸하리만치 담담한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가 고개를 돌렸다. 구승훈을 향해 화살촉 같은 눈빛을 쏘아보냈다.“그러는 그쪽은 즐거우세요?”“즐겁다기보다는 약간, 그렇게 충고했는데 기어이 비집고 들으가더니 쌤통이다, 뭐 이런 생각.”거리낌 없이 직설을 날리는 구승훈.“주씨 집안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야. 네 과거로는 그 집 문턱을 넘을 수가 없어.”구승훈의 입가에 보일듯말듯 미소가 걸렸다.“사실 헤어진다 해도 별 거 아니지 않아? 세상에 너랑 잘 맞는 좋은 남자가 널렸을 건데.”“누가 헤여진가 그래요!”강하리가 냉소를 지으며 밖을 향해 걸어갔다.구승훈이 표정을 굳히며 따라가려다가, 곧 다시 돌아서서 탁자에 어질러진 사진들을 주섬주섬 챙겼다.본의는 아니지만, 강하리와의 첫 투샷들이었다.한편, 눈시울이 붉어진 강하리가 빠른 걸음으로 카페를 벗어나 차에 올랐다.이제 주해찬에게 막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고, 진심으로 갈 데까지 가 보려고 마음먹었는데.이런 방식으로 끝낸다니 분하고 억울했다.주
더없는 진심이 담긴 약속이었다.그러나 똑같은 말을 전에도 들어본 강하리한테는 그저 우스갯소리로 들릴 뿐.몸부림치며 구승훈의 품에서 벗어나 원망스런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제발, 저 좀 놔주면 안 돼요?”구승훈이 멈칫했다. 무너져내리는 표정을 간신히 갈무리하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내가 안 놔줘서 너한테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그걸 말이라고 물어봐요? 사진 찍히게 만든 장본인이 누군데!”강하리가 원한 가득 담아 소리질렀다.아득한 주씨 가문 문턱이 언젠가는 마주해야만 하는 관문인 건 사실이지만.구승훈이 자꾸 들러붙지만 않았다면, 적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건덕지는 안 잡혔을 터.“내가 없으면 주씨 가문에서 두 팔 활짝 열고 어서오세요 우리 며늘님, 이럴 것 같아? 상황 파악 좀 제대로 하라고!”“안 나가면 내가 나갑니다 내가!”운전석 문을 열어젖히는 강하리를 구승훈이 와락 잡았다.“어디 가! 새 차 버릴 거야?”“폐기처분할 겁니다. 더러워졌으니까요!”말문이 꺽 막힌 구승훈. 한참만에야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냥 내가 만만하지, 강하리.”결국 구승훈이 차에서 내렸고, 차 문까지 잠근 강하리는 그제야 등받이에 털썩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온 몸의 힘을 다 쓴 듯한 무기력감이 전신을 휘감았다.……영혼 빠진 얼굴로 집에 들어서는 강하리를 본 손연지가 기겁을 하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왜, 왜 이래? 강하리! 하리야! 무슨 일이야 이게!”붉어진 눈시울로 강하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냐, 아무것도.”“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까 해찬 선배가 전화왔었어. 하리 괜찮냐고.”오는 도중 주해찬이 다시 걸어온 전화를 받지 않은 강하리였다.하도 머릿속이 복잡해 받을 상황이 아니다보니.“일단 좀 씻을게. 씻고나서 얘기해.”도망치듯 욕실로 들어간 강하리가 핸드폰을 꺼냈다.주해찬의 부재중 전화가 수두룩히 들어와 있었다.통화를 누르자마자 1초도 안 돼 주해찬이 전화를 받았다.“하리야, 괜찮아?”걱정
”강하리, 이제 어떡할 거야?”가까스로 화를 다스린 손연지가 강하리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모르겠어. 선배가 소식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일단 기다려 봐야지.”강하리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평범한 집안이면 또 몰라도 상대는 권세 높은 명문가였다.손연지가 강하리를 꼭 껴안았다.“됐어. 다 필요 없고 한 잔 때리자.”벌떡 일어나 방에 들어간 손연지가 와인 한 병과 와인잔을 들고 돌아왔다.“짜잔. 우리 아빠 와인 캐비닛에서 어렵게 빼내온 건데, 들키기 전에 증거 인멸을 하는 거야!”강하리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 연지야.”“으악! 닭살! 너 지금 나 손발 오그라뜨리고 와인 독차지하려고 이러는 거지! 정의의 심판을 받아랏!”권선징악을 외치며 손연지가 달려들었고, 둘이 소파에서 한바탕 간지럼 난투극을 펼쳤다.비명과 웃음소리가 사라질 때쯤, 엉키고 막혔던 강하리의 마음도 한결 후련해졌다.붉은색 액체가 찰랑거리는 두 잔이 쨍 부딪쳤다.“강하리, 앞으로 꽃길만 걷는 거야.”진심 가득 담은 손연지의 축배사에 강하리는 콧잔등이 시큰해났다.“응, 우리 모두 꽃길만 걷자.”“하리야, 나 설 연휴 때 내려가지 말고 그냥 너랑 여기서 보낼까?”주해찬이 오기로 했었지만, 상황상 아무래도 물 건너간 것 같았다.“괜찮아. 혼자 설 지낸 게 한두 해도 아닌데 뭘.”“아니면 나랑 같이 우리 집에 내려가는 건 어때?”“병원에서 엄마랑 지내려고.”손연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달마저 빛이 바래가는 늦은 밤.손연지는 꿈나라로 간 지 오랬고, 강하리 혼자 거실 창가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낯선 보경 지역 전화번호였다.누군지 대략 감이 온 강하리는 깊게 심호흡을 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안녕하세요, 하리 양. 해찬이 엄마입니다.”주해찬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핸드폰을 쥔 강하리의 손에 바싹 힘이 들어갔다.“우선 먼저 해찬이 이모의 미행과 무예의 호출에 사과드려요. 죄송합니다.”강하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선배? 얼굴에 또…….”대답 대신 다가온 주해찬이 강하리의 두 손을 꼭 잡았다.“하리야, 나는 너를 위해서 모든 걸 버릴 수 있어.”강하리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 주해찬의 눈에는 전에 없던 뜨거운 것이 일렁이고 있었다.“너는?”못박힌 듯 굳어진 강하리.“선배 나는…….”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렇게는 못 할 것 같아요. 미안해요 선배.”겨우 되찾은 자유로운 생활.병상에 누워계신 엄마.엄마 생명줄인 치료비를 벌 수 있는 직장.강하리는 그 모든 걸 버릴 자신이 없었다.또한, 주해찬이 고작 자신 때문에 모든 걸 버리게 할 수가 없었다.감당 못할 대가를 치른 뒤 남는 거라곤 풀썩이는 먼지 뿐인 사랑, 그건 강하리가 바라는 사랑이 아니었다.“하지만 하리야, 시작하자고 한 건 너잖아.”주해찬의 다급한 목소리에 하리는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주제넘게 시작하는 게 아니었는데.“맞아요. 제가 성급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선배.”첫 걸음에 쓰라린 고배를 머금은 두 사람이었다.“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꼭…… 헤어져야만 하는 거야?”주해찬이 강하리에게 묻는 건지, 자기 자신에게 묻는 건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듯 던졌다.강하리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주해찬의 눈에 고통스러운 빛이 스쳐지났다.하지만 이내 빙그레 웃었다.“미안해. 잘 해결하겠단 약속 못 지켰네.”강하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들었던 손이 허공에 멈췄다가 내려졌다.“하지만 다른 약속은 꼭 지킬게. 설날에 같이 있어주겠다던 약속.”강하리가 뭐라 하려던 순간.“하리야, 기다려달라는 염치 없는 말은 하지 않을게. 다만.”주해찬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경건했다.“내가 가문의 허락을 받아냈을 때, 그때 네가 혼자라면 나한테 돌아와 줘.”“……선배.”강하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나는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에요.”“내가 있다면 있는 거야, 하리야.”미소를 지어보인 주해찬이 돌아서 멀어져갔다.강하리는 그 자리에 미동도 없
”분명 예전에는 행복했잖아. 우리 둘은.”한참동안 말이 없던 구승훈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행복했다고 한 적 없는데요.”“뭐라고?”“뭔가 제대로 착각하고 계신 모양인데, 나는 승훈 씨와 함꼐 있는 매 순간이 고통이었어요.”말을 마친 강하리가 그대로 아파트에 들어갔다.손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여전히 너무나도 손쉽게 자신의 마음속에 파문을 일으키는 구승훈이었다.주해찬과 헤어진 울적함도 압도적으로 밀어낼 만큼.그만큼 너무나도 쉽게 자신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그 고통을 같이 있는 매 순간마다 받았었다.행복했었다고?무슨 얼어죽일 놈의 행복?새장에 같힌 카나리아의 행복?아니면 송유라와의 투샷을 직관하는 행복?‘그 따위 행복, 개나 줘버리라고.’저만치, 도망치듯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는 강하리의 모습이 구승훈의 눈동자에 맺혔다.저도 모르게 서글픈 외마디 헛웃음을 뱉어냈다.‘고슴도치도 아니고, 어떻게 매번 이렇게 아프게 찔러대냐고.’지금껏 강하리를 쫄래쫄래 따라다닌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한참을 어둠 속에 서 있던 구승훈이 차에 올랐다.조수석에 고이 눕혀놓은 리시안셔스 꽃다발이 하등 쓸모없게 보였다.그걸 집어든 구승훈은 유리창을 내려, 가차없이 밖에 던져버렸다.……섣달 그믐날.대양그룹 연성지사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차 한 대.너무나도 평범한 나머지, 며칠째 타는 이도 내리는 이도 없이 매일 주차장만 들락거리는 수상쩍은 차란 걸 발견한 사람이 없었다.거기에는 구승훈이 타고있었다.강하리가 주해찬과 헤어진 그 날 이후로 매일 퇴근하자마자 대양지사에 와서는, 회사에서 나오는 강하리를 따라 집까지 바래다주고 소리 없이 떠나가기를 반복해 온 구승훈이었다.왜 그러는지는 구승훈 스스로도 몰랐다.하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하루라고 강하리를 못 보면 불편해 견딜 수가 없단 것.이윽고 주차장에 나타난 강하리가 차에 타자, 기다렸단 듯 구승훈이 시동을 걸었다.능숙하게 일정 거리를 유지
병원으로 가는 도중, 주해찬이 전화를 걸어왔다.“하리야, 미안. 오늘 일이 바빠서 못 갈 것 같아.”“아니에요 선배. 즐거운 설날 되셔요.”급급히 대답한 강하리가 몇 마디 더 나누려는 주해찬의 전화를 그대로 끊어버리고는풀악셀을 밟았다.갑자기 속도를 올린 강하리의 차가 미친듯이 도로를 질주했다.‘젠장, 들킨 건가?’그 뒤를 따르던 구승훈이 속으로 욕을 뱉었다.걱정과는 달리, 구승훈의 차는 안중에도 없이 병원에 도착한 강하리는 부리나케 정서원의 병실로 달려갔다.검진이 그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선생님, 우리 엄마 깨어났어요?”다급한 강하리의 질문에 의사가 감개무량한 눈빛을 보냈다.“아직 깨어나신 건 아니지만 가능성이 큽니다. 외부의 자극에 꽤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어요. 이쪽으로 와서 어머님을 불러보세요. 아마 목소리에 반응하실 겁니다.”삽시에 강하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다급히 정서원의 머리맡에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엄마, 들려요? 나 하리예요. 엄마…….”저도 모르게 왈칵 터져나온 눈물에 눈 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시야가 흐려지기 직전에 똑똑히 보았다.두 번째로 엄마를 불렀을 때, 엄마의 손가락이 까닥, 움직이는 걸.순간, 더는 걷잡을 길 없이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엄마! 들려요? 나 하리예요 엄마! 얼른 깨어나요 네? 엄마아아-.”정서원의 손을 꼭 잡은 채, 강하리가 병상에 엎드려 엉엉 목놓아 울었다.그 모습이 막 뒤따라 들어온 구승훈의 눈동자에 오롯이 박혔다.엄마 손을 꼭 잡은 채, 어린애마냥 우는 강하리.회한과 죄책감이 구승훈의 마음속에서 휘몰아쳤다.3년동안 엄마 얘기를 입 밖에 비친 적이 없던 강하리였다.사전조사 때, 강하리 엄마가 사고로 병원에 누워있단 얘기를 들은 게 다였다.강하리가 그토록 돈에 집착했던 게 엄마를 살리기 위해서란 걸 이제서야 절실히 깨달았다.그동안 혼자 엄마 의료 비용을 부담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그런 강하리를 약값으로 협박하고, 급기야는 거액의 위약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