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휴대폰을 들고 멍한 표정으로 문에 기대어 있었다.가슴에 씁쓸함이 밀려왔다.믿어?내가 어떻게 믿어.두 사람 사이에 굳어 있던 모든 신뢰가 그의 손에 무너져 내렸다.기지개를 켜며 방에서 나온 손연지는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하리야, 왜 돌아왔어?”손연지가 이쪽으로 걸어오면서 말했다.“왜 그래, 왜 표정이 안 좋아?”강하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바닥으로 보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해외 파견이 미뤄졌어.”하지만 손연지는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것만으로 이런 표정일 리가 없는데, 무슨 일 있었어?”강하리가 웃었다. “구승훈이 어디서 들었는지 내가 임신한 걸 알았어.”손연지의 가슴이 철렁했다.“그래서, 또 매달리든?”강하리는 씁쓸한 눈빛으로 웃었다.“나랑 아기에게 온전한 집을 주고 싶대.”손연지가 순간 비웃었다.“집을 준다고? 말은 쉽지, 근데 구씨 집안은 어떡하고? 그 집에선 동의한대? 자기 주변 쓰레기는 정리하지 않고 너한테만 매달려서 무슨 소용이 있는데? 네가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는 걸로 부족하대?”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럼 이제 어쩌려고? 어떻게 할 건데?”구승훈은 개자식이라 한 번 꽂히면 좀처럼 떨쳐내지 못한다.애초에 놓아줄 생각도 없었겠지만 강하리가 임신한 걸 알았으니 더더욱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강하리는 배에 손을 얹고 한참이 지난 후 웃었다.“아무것도 안 해.”아이로 모험하지는 않을 거다. 게다가 엄마가 없을 때 송유라를 만나러 가느라 연락이 되지 않았던 그를 잊을 수가 없었다.그는 속죄할 기회를 달라고 했지만 때론 속죄할 수조차 없는 죄가 있다.그날 그녀가 잃은 건 엄마만이 아니었다.누군가를 사랑할 용기마저 잃었다.더는 사랑에 용기를 낼 수 없었다.손연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제부터 그 자식 피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밤이 되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강하리는 정서원이 남긴
이윽고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이 전에 보내준 강찬수의 계좌 거래 명세를 열어보았다.자료를 넘기면서 왠지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었다.그 날짜로 넘기자 그녀의 손끝이 얼어붙었다.그녀는 다이어리에 적힌 날짜와 강찬수의 거래 날짜를 확인했다.공교롭게도 목걸이가 부러진 날 강찬수는 4천만원을 받았고 정서원의 사고 당일에 받았던 금액과 똑같았다.강하리의 심장이 쿵쾅거렸다.만약 정서원의 교통사고로 받은 돈이 누군가 강찬수를 매수한 돈이라면 목걸이가 부서진 날은 뭐였을까?강찬수가 정서원을 미는 걸로 돈을 받았다면 이해가 된다.장진영과 송동혁 같은 인간들이 정서원을 가만히 둘 리가 없었으니까그런데 자신의 목걸이는 어떻게 된 걸까, 누군가의 이익에 걸림돌이 되는 것도 아닌데?강하리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지며 순간적으로 송유라의 목걸이가 떠올랐지만 잠깐 머리를 굴리다가 이내 잊기로 했다.송유라의 목걸이는 분명 구승훈이 직접 준 것이라고 인정했다.그녀는 심호흡하고 생각했다. 괜한 생각인 걸까?어쩌면 그 돈은 그냥 평범하게 주고받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하지만 세상에 정말 그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손연지가 우유 한 잔을 들고 들어왔다.“쉬라고 했잖아!”강하리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혼란스러운 생각을 뒤로했다....구승훈은 강하리의 곁을 떠난 뒤 곧장 아파트로 돌아갔고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가정부가 저녁을 차려놓은 뒤였다.그녀는 잠시 멈칫했다.“하리 씨 안 왔어요?”구승훈은 짧게 대답하고 침실로 향하는데 가정부가 뒤에서 따라왔다.“또 싸웠어요?”구승훈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하리 짐 챙겨서 보내주면서 그 집에서 돌봐줄 핑계를 찾아봐요.”가정부는 당황했다.“하리 씨 이제 안 와요?”구승훈의 발이 멈칫했다.“다시 올 거예요.”가정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짐을 싸러 돌아섰다.구승훈은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서재로 들어가 서랍에서 분홍색 크리스털 목걸이를 꺼냈다.목걸이를 바라보는 그의 목울대가 일렁거렸다.잠시 후
강하리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손연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누구야!”다가가 문을 연 그녀는 거친 말을 뱉었다.“누구야?”강하리가 물었다.“개자식이 여자까지 데리고... 왔어.”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리고 곧장 걸어가더니 문 앞에 다다랐을 때 그대로 굳어버렸다.구승훈은 물에 홀딱 젖은 채 검은 셔츠가 몸에 단단히 달라붙어 완벽한 몸매의 윤곽을 모두 드러내고 있었고 가정부는 전혀 젖지 않은 상태였다.순간 강하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여긴 왜 왔어?”구승훈이 말하기도 전에 가정부가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이 음식 좀 갖다주라고 하셔서요.”가정부는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갔고 강하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가정부가 들어가자 구승훈도 따라 들어가려고 했지만 강하리가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고 구승훈은 간신히 문을 버티고 서 있었다.“나 몸이 다 젖어서 들어가서 옷 좀 갈아입을게.”강하리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여기 당신 옷 없어.”구승훈은 여전히 뻔뻔하게 말했다.“그럼 들어가서 물기 닦는 건 괜찮지?”“차에 수건 없어?” 강하리가 그렇게 말하며 문을 닫으려는데 가정부가 다시 입을 열었다.“하리 씨, 대표님께서 방금 하리 씨 옷 젖을까 봐 저한테 우산 씌워주느라 비 맞은 거니까 닦게 해주세요.말하며 그대로 구승훈을 안으로 끌고 갔다.“오늘 차를 바꿔서 차에 수건을 준비하지 않았어. 못 믿겠으면 아주머니한테 물어봐.”구승훈이 들어오면서 낮게 말하자 아주머니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는 가정부와 구승훈을 번갈아 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뒤돌아 화장실로 들어가더니 수건을 꺼내 그에게 던져주었다.“빨리 닦고 꺼져!”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수건을 받아 들고 천천히 닦기 시작했다.손연지는 속으로 뻔뻔한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나였으면 대걸레로 직격탄을 날렸을 텐데, 저 개자식이 착한 우리 하리만 괴롭히지!’가정부는 손에 보온병까
손연지는 너무 화가 나서 구승훈을 노려보며 욕했다.“하여튼 남자들은 다 똑같아.”그러고는 뒤돌아 방으로 들어가더니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강하리는 구승훈을 돌아보았다.“구승훈 씨, 우리 둘 사이의 일에 연지까지 엮을 필요 없잖아.”구승훈은 얼굴을 찡그렸다.“내가 손연지 연수를 망쳤다고 생각하는 거야?”구승훈은 웃었다.“하리야, 너한테 난 그 정도로 나쁜 놈이야? 내가 아무리 그래도 네 친구는 건드리지 않아.”특히 지금은 강하리가 그를 무시하기 바쁜데 미쳤다고 손연지를 건드리겠나.강하리는 입술을 다물며 그를 흘깃 보았다.“아니면 됐고. 늦었어, 난 쉬고 싶으니까 이만 돌아가.”하지만 구승훈이 말을 꺼냈다.“가정부 아주머니는 남게 해. 내가 곁에 없어도 최소한 돌봐줄 사람이 곁에 있으면 안심이 될 것 같아.”강하리가 멈칫했다.“연지가 잘 챙겨줘.”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가정부 아주머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아주머니, 감사하지만 이만 돌아가 보세요.”아주머니는 난감한 표정으로 구승훈과 강하리를 번갈아 바라봤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네가 곁에 안 두면 해고할 수밖에.”강하리는 어이가 없었다.“구승훈 씨, 전에 내가 한 말 못 알아들었어?”하지만 구승훈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문질렀다.“하리야, 넌 내 여자야. 네 뱃속에는 내 아이가 있고 나도 네 곁에 있으면서 우리 아이 태어나는 것도 보고 평생을 너와 함께하고 싶어. 그게 잘못됐어?”강하리는 웃었지만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그게 가능할 것 같아? 당신들 구씨 가문은 나를 허락하지 않고 이 아이도 더더욱 받아주지 않겠지. 그리고 당신은 내가 필요할 때 곁에 있어 주지도 않았는데 내가 그런 당신이랑 평생을 같이 살 것 같아?”구승훈이 그녀를 바라봤다. “앞으로는 안 그래, 하리야. 앞으로는 절대 안 그래.”강하리가 비웃었다.“그래서 뭐? 구승훈 씨, 그런다고 지나간 일이 없던 게 돼? 그냥 가, 일이 다 벌어진 뒤에 늘어놓는 변명 따위 필요 없어, 그 거짓된
구승훈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구승재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물건 좀 준비해 줘.”구승훈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을 마친 후 구승재에게 몇 마디 당부했고 구승재는 얼굴을 찡그렸다.“형, 무슨 일이야?”구승훈은 한껏 어두운 눈빛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마음의 위안이 될까 해서.”그렇게 말한 뒤 그는 곧장 들어갔다.구승훈을 보자마자 송동혁의 눈빛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구승훈이 자신을 구하러 왔다고 생각했다.“구 대표, 난 정말 결백해. 누가 날 속인 거야. 난 정말 구 대표를 노릴 생각 없었어. 난...”구승훈은 옆 의자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한 모금 들이마신 뒤 비웃었다. “송동혁, 내가 아니라면 누굴 건드릴 생각이었지?”송동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순간 그는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구승훈의 표정에 심장이 툭 떨어졌다.“구 대표, 난 누구도 건드릴 생각 없었어. 그놈들한테 이용당했을 뿐이야. 구 대표, 제발 날 좀 내보내 줘! 유라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유라는...”“송동혁.”구승훈은 살기를 품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훑어보았다.“아직도 감히 내 앞에서 송유라 얘기를 해?”송동혁의 얼굴이 굳어졌다.“구 대표, 무슨 말이야?”“송씨 가문은 정말 날 멍청이로 보는 건가?”송동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순식간에 그의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들킨 건가? 그 일이 다 드러난 걸까?’하지만 이내 다시 감정을 진정시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당황하면 안 된다.“구, 구 대표, 무슨 말인지 정말 모르겠어, 우리 송씨 가문은 한 번도 자네한테 미안한 짓 한 적 없어. 유라가 떼를 쓰긴 해도 자네한테는 줄곧 진심이었는데 지금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구승훈은 차가운 눈빛으로 송동혁을 바라보았다.“송동혁, 이 박사 알지?”송동혁의 표정이 한껏 어두워졌다.“구 대표, 어느 이 박사를 말하는 거야? 알다시피 우리 송씨 가문은 의학계에 종사해서 아는 의사들이
송동혁은 더욱 단호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가까이 다가가 칼을 그의 목에 바로 갖다 댔다.“한 번만 더 기회를 줄게.”하지만 송동혁은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난 그런 적 없어.”구승훈의 손에 쥔 칼이 송동혁의 손바닥을 단숨에 파고들었다.송동혁은 비명을 질렀지만 여전히 같은 말뿐이었다.“내가 안 그랬어, 구 대표. 내가 안 그랬어. 억울해. 유라가 알면 얼마나 서운해하겠어...”구승훈은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칼을 뽑아 들었고 송동혁은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구승훈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고 구승재는 황급히 물티슈를 건넸다.“형, 대체 무슨 일이야? 송유라가...”구승훈은 손을 닦으며 대답 대신 어두운 얼굴로 한 마디만 남긴 채 밖으로 걸어 나갔다.“송동혁 돌려보내.”구승재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구승훈은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저 멀리 희뿌연 빗줄기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서둘러 찾아와 송동혁을 고문한 건 송유라가 진짠지 아닌지 궁금해서가 아니었다.그동안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을 뿐이었다.이제 송동혁의 행동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동시에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불안함이 가득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 목걸이는 분명히 하나뿐인데, 강하리와 송유라 둘 다 갖고 있었다.송유라의 팬들이 그 목걸이 모조품을 많이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강하리의 목걸이는 절대 가짜가 아니었다.그녀의 어머니가 남겨준 유물이었다.4년 전 강하리 어머니가 사고를 당했을 때 송유라는 이제 막 연예계 활동을 시작한 터라 그 목걸이를 대중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다.강하리와 송유라가 이전에 서로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고서야 모조품을 만들 수가 없다.하지만 두 사람의 행동을 보면 과거 서로를 알고 지낸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구승재가 다가와 우산을 씌워주었다.“형, 무슨 일이야?”구승재는 고개를 가로젓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지금까지 엉뚱한 사람을 보호하고 있었다면 어떨 것
그 말을 듣고 손연지는 안도했고 가정부 아주머니는 옆에서 억울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봤지만 강하리는 조용히 밥만 먹었다.식사를 마친 손연지는 강하리에게 눈썹을 찡긋했다.“내가 은행까지 데려다줄까?”“너 오늘 일 안 해?”“휴가 냈어, 가자.”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밖으로 나섰다.은행에 도착한 두 사람은 이제 막 차를 주차했을 때 장서연도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장서연을 본 손연지는 눈을 흘기며 조용히 중얼거렸다.“외출할 때 오늘의 운세라도 봤을걸. 똥 밟았네.”강하리는 다소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없는 사람 취급해.”그들이 무시하고 싶어도 장서연이 가만 둘리 없었다.두 사람을 보자마자 장서연이 다가왔다.“강하리 씨, 우연히 또 만나네요.”강하리가 그녀를 무시하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지만 그녀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강하리 씨, 구승훈이랑 헤어졌죠?”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손연지는 콧방귀를 뀌었다.“뭐야, 어디서 개가 사람 일에 참견하지?”그녀의 말에 장서연의 얼굴이 붉어졌다.“손연지 씨, 당신이 뭔데 나한테 그런 말을 해요?”손연지는 헛웃음을 지었다.“난 개랑 말 섞고 싶지 않네.”그녀는 강하리를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갔고 장서연은 굴하지 않고 따라갔다.“강하리 씨, 빌어먹을 당신 엄마 죽었다면서요?”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칫하며 손을 들어 장서연의 뺨을 내리쳤다.“장서연, 한마디만 더 하면 네 입을 찢어버릴 거야!”장서연은 뺨을 맞고 깜짝 놀라 분노에 찬 표정으로 강하리를 노려보았다.“강하리, 당신이 어떻게 감히 날 때릴 수 있어?”“때리기만 하면 다행이지!”그런데 장서연이 콧방귀를 뀌었다.“사람 때릴 줄밖에 모르지. 당신 엄마가 죽었을 때 구승훈이 어디 있었는지 알아? 송유라 옆에 있었어. 송유라가 수술하는 동안 구승훈이 이틀 동안 잠도 못 잔 건 알아? 강하리, 네 남자 마음속엔 언제나 다른 여자가 있어도 넌 전혀 상관없나 봐?”“닥쳐!” 장서연이 말을 끝내자 이번엔 손연지가 그녀의 뺨을 때
손연지는 그녀를 껴안고 토닥였다.“잘 간직했다가 시집갈 때 꼭 착용해!”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은 집으로 돌아와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어젯밤 비를 여러 번 맞은 탓에 옷이 눅눅해져 있었다.그렇지 않았다면 곧 강하리를 만날 수 있는 상황에서 다시 돌아오진 않았을 것이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구승재의 전화가 걸려왔다.“형, 그 목걸이 감정해 봤는데 진품이야.” 구승훈은 멈칫했다.“확실해?”“응, 당시 이 목걸이를 만들었던 장인이 직접 감정했는데 거짓일 리가 없지.”구승훈은 침묵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꺼냈다.“강하리와 송유라 일은 어떻게 됐어?”“확인하고 있어.”짧게 대답을 마친 구승훈은 전화를 끊은 뒤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괜한 생각인가, 심준호의 말에 홀려서.’그는 한참을 제자리에 서 있다가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옷을 챙겨입고 무의식적으로 향수에 손을 뻗는데 향수를 집어 들자 그것이 바닥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강하리의 서랍을 열려고 몸을 돌렸다.보통 향수는 강하리가 그를 위해 몇 병씩 준비해 두곤 했다.하지만 서랍을 여는 순간 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강하리의 서랍 안에는 일기장이 들어있었다.구승훈의 목울대가 일렁거렸다.그의 기억이 맞다면 이 일기장은 강찬수한테서 가져온 것이다.그는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일기장을 바라보다가 잠시 후 그것을 집어 들었다.첫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목걸이가 부서졌다. 강찬수가 부쉈다. 엄마도 다쳤다. 난 이 집이 특히 싫다. 강찬수가 싫다. 엄마랑 여기서 탈출해서 다시 그 작은 어촌 마을로 돌아가고 싶다, 승훈 오빠도 보고 싶다...”구승훈은 멍한 표정으로 그 글들을 바라보았다.목걸이, 어촌 마을, 승훈 오빠?순간 구승훈은 숨이 막히고 당황한 나머지 팔다리가 마비되는 느낌이 들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두 페이지를 넘기다가 다시 손가락이 떨렸다.[오늘은 내 열일곱 번째 생일이다. 지난 몇 년 이래
구승훈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물 흐르는 소리가 막 멈춘 참이었다.그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살균 티슈로 손을 닦는 강하리의 모습이 차가운 벽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조시욱 때문이야?”구승훈은 무릎을 꿇고 강하리 앞에 앉아 그녀의 턱을 잡아올렸다.“대답해 봐, 조시욱을 위해 몸을 지키겠다는 거냐고?”강하리는 고개를 쳐들며 비웃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묻는 건데요?”구승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휠체어를 돌려 화장실을 나서는 그녀의 등 뒤에서 구승훈은 한참이나 멍을 때렸다. 구승훈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병실 문이 열리고 심준호와 백아영, 조시욱이 들어와서였다.구승훈을 본 심준호와 백아영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예전에는 무슨 일이 있든 심준호가 먼저 구승훈에게 상황을 묻고 강하리와 화해할 수 있도록 조율하려 했다.하지만 이번 일 이후 심준호는 단 한 번도 구승훈을 찾지 않았다.그건 구승훈에 대한 더 말할 나위 없는 실망을 의미했다.백아영은 당장이라도 구승훈의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수십 년간 유지해 온 품격과 매너로 화를 억눌렀다.세 사람이 강하리와 함께 연정이 주위에 둘러앉자, 병실 한구석에 있던 구승훈은 마치 외부인 같이 느껴져 굳은 표정으로 병실을 나와 유리 창가에 서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뒤늦게 찾아온 심준호가 말을 꺼냈다.“일은 다 정리됐어?”구승훈은 낮게 대답했다. “거의.”비록 여초연의 주변이 완전히 정리되진 않았지만 그녀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이상 큰문제는 없었다.“하리랑 조시욱 일은 너도 알고 있겠지. 승훈아, 너한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제 그만 하리 인생에서 나가줘.”구승훈은 멈칫하다 이내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강하리 인생을 방해한다고? 준호야,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넌 알잖아, 어떻게 된 일인지.”“알면 뭐 하냐? 구승훈, 우리 하리가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그걸로도 부족해?”심
강하리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무의식적으로 구승훈을 밀쳐내려 했지만 연정이의 웃음소리에 잠시 망설였다.아직 열이 가시지 않은 구연정은 강하리와 구승훈을 보고 흥분했던 것도 잠시, 곧 다시 기운이 빠졌다.구연정은 힘없이 구승훈 어깨에 기댄 채 한 손은 구승훈의 옷자락을, 다른 한 손은 강하리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강하리를 바라봤지만 강하리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그가 한숨을 내쉬며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의사가 검사 결과를 들고 들어왔다.“강 대표님, 아가씨는 현재 바이러스 감염으로 보입니다. 며칠 입원이 필요할 것 같아 이미 병실은 준비해두었습니다. 곧 간호사가 안내해 드릴 겁니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수고 많으셨습니다.”병실에 도착하자마자 연정이는 곧 깊은 잠에 빠졌다.강하리는 침대 곁에 앉아 연정의 손을 꼭 잡고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구승훈은 다른 한쪽에서 의사와 연정이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의사가 떠난 뒤에야 그는 강하리 옆으로 돌아왔다.“의사 말로는 보기보다 심각하진 않대. 너무 걱정하지 마.”하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연정이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그녀 곁에 앉아 손을 잡으려 하자 강하리는 황급히 그 손을 빼냈다.“이제 돌아가요. 나랑 아주머니가 있으면 돼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조시욱이 오기 편하게 나더러 가라는 거야?”강하리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노려보다가 이내 비웃듯 말했다.“여기 남아 있으면 임 선생님이 화내지 않을까?”구승훈은 끝내는 강하리의 손을 잡고서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임 선생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너 정말 나 못 믿는 거야?”그의 목소리엔 억눌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강하리가 이를 악물고 손을 빼내려 하자 구승훈이 낮게 말했다.“움직이지 마. 연정이 깼어.”강하리는 움직임을 멈추고 급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연정이는 여전히 곤히 자고 있었다.분노에 찬 강하리를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