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전화기 너머로 구승훈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 씨, 무슨 일 있었어?”구승훈이 낮게 웃었다.“무슨 일이 있어야만 네 생각을 할 수 있어?”강하리는 갑자기 침묵했고 구승훈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조용히 휴대폰으로 서로의 숨소리를 들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강하리가 먼저 조용히 말을 꺼냈다.“별일 없으면 먼저 끊을게.”구승훈이 웃었다.“하리야, 나 안 보고 싶어?”강하리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반나절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보고 싶기는 무슨.하지만 구승훈의 말투를 들어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망설이다가 결국 포기했다.지금 이런 사이에 그가 굳이 얘기하지 않는데 자신이 먼저 물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JM그룹 업무에 참여하기로 동의한 이후 강하리는 점점 더 바빠졌다.외교부 업무 외에도 새 회사를 위한 국내 시장 개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사실 국내 시장은 지난 2년 동안 나라에서도 대외 무역을 강력하게 추진하기에 개척하는데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JM그룹은 이미 탄탄한 실력에 유엔의 지원까지 받고 있었고 외교부에서 강하리의 입지까지 더해져 한결 쉽게 일을 진행해 한 달만에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대양그룹 연성 지사가 무너진 이후 그럭저럭 지내던 안예서는 강하리의 부름을 받고 B로 향했다.강하리는 이 기회에 안예서에게도 업무를 맡길 생각이었다.안예서는 일을 열심히 했고 강하리 밑에서 업무 능력을 상당 수준 끌어올렸기에 대부분 강하리가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다.나문빈은 강하리가 놀라운 성과를 이룩하자 직접 축하해주러 해외에서 오려고 했지만 강하리가 이를 거절했다.조금 전 안예서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누군가 JM그룹의 통역으로 속여 협업하는 척 협상 회의와 계약체결식을 엉망으로 만들어서 현재 JM은 고소까지 당한 상태였고 인터넷에서도 크게 퍼뜨려 JM그룹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고 한다.강하리는 인터넷
“오케이! 같이 일할 사람을 보내줄게요.”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문빈 씨, 날 믿어줘서 고마워요.”나문빈이 웃었다.“당신과 함께 일하게 된 덕분에 영부인께서 사업하는 데 많은 편의를 주신다는 걸 모르죠?”강하리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노진우가 문을 두드렸다.“강하리 씨, 문제가 해결됐어요. 그 남자가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고소도 취하했어요.” 강하리가 당황하며 황급히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JM을 사칭한 사람이 온라인에서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고소장도 취하된 상태였다.그 사람의 정보를 파헤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국내 오래된 번역 회사 사람이었는데 최근 시장을 너무 많이 빼앗겨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그런데 일이 이렇게 빨리 밝혀질 줄은 몰랐고 보상하고 사과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한편 JM그룹은 이번 일로 인해 한층 더 화제를 불러왔고 일은 시작도, 끝도 빠르게 진행되었다.강하리는 손에 쥔 자료를 넘기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쪽 대표님께서 해결해 주셨어요?”옆에 있던 노진우의 눈빛이 흔들렸다.“대표님께선 강하리 씨가 너무 힘든 걸 원하지 않으십니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옆에 있는 휴대전화를 바라보다가 한참 후 집어 들어 구승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고마워.]구승훈은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보고 싶어.]강하리는 이 네 글자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그 이후로 강하리는 점점 더 바쁜 시간을 보냈고 밤이 깊어지고 주위가 고요해질 무렵이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 남자를 떠올렸다.강하리는 호텔 통유리창 앞에서 휴대전화를 손에 꼭 쥔 채 서 있었다.휴대폰 안에는 구승재가 보낸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사진 속 구승훈은 창백한 얼굴로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있었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하리 씨, 아직도 형한테 화난 거 알지만 우리 형도 속은 거예요. 두 사람 다 불쌍한 사람이라고요. 우리 형 어린 시절 기억 되찾겠다고 매일 심
구승훈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알아, 하지만 난 알고 싶어. 하리야, 난 기억을 떠올려서 우리 사이에 잃어버렸던 것들을 하나하나 보상하고 싶을 뿐이야.”강하리의 가슴이 먹먹해지며 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꺼냈다.“구승훈 씨, 알고 싶다면 내가 알려줄게.”구승훈의 목울대가 일렁거리더니 한참 후 대답했다.“좋아.”그녀는 구승훈에게 어린 시절에 대해 말하는 것이 옳은 건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그가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정말 괴로웠다.배 속에 있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한 발짝 물러서기로 했다.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11월이 되고 식어버린 날씨와 함께 강하리의 배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헐렁한 니트는 그녀의 온몸을 따뜻하고 부드럽게 감싸주면서도 그녀의 아우라를 감추지 못했다.강하리가 주위 사람들과 낮게 웃고 떠들며 외교부 밖으로 나오는데 밖으로 나오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어깨에 코트를 씌워주었고 강하리는 습관적으로 노진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곧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옷에서 그녀에게 너무도 익숙한 냄새가 났다.강하리가 뒤를 돌아보니 구승훈이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뒤에 서 있었다.강하리는 그가 무척 야윈 것을 발견했고 강하리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옆에 있던 동료들이 서둘러 말을 전했다.“하리 씨, 그럼 우린 먼저 가볼게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머지 일은 전화로 연락드릴게요.”일행이 가고 강하리가 입을 열었다.“언제 왔어?”구승훈은 웃으며 그녀를 곧장 품으로 끌어안았다.“오후에 왔는데 강하리 씨 한번 만나기 힘드네.”주위에 오가는 사람들 전부 외교부 동료들이었기에 강하리는 다소 어색하게 그를 밀어냈지만 구승훈은 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강하리는 문득 후회되었다. 이 남자는 늘 그렇듯 뻔뻔하게 선을 넘는데 도가 터 있었다.“이거 놔.”하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곧장 차 안으로 끌어당겼고 차에 탄 그는 그녀가 숨을 돌릴 틈도 주지 않은 채 키스를 퍼부었다.뜨겁고 거친 키스에
구승훈은 웃으며 그녀를 놓아주더니 그녀의 다리를 꾹 눌렀다.“어딜 들이밀어!”강하리가 그를 노려보며 싫은 기색으로 입가를 연신 닦는데 구승훈이 손을 들어 그녀의 연약한 뺨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하리야, 고마워.”강하리는 움직임을 멈추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아이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아이 아빠가 그깟 어린 시절 기억 때문에 몸 망치는 건 싫으니까.”구승훈의 눈에는 식지 않은 열기가 담겨 있었다.“알아.”그는 웃으며 그녀의 손가락을 잡고 자기 턱에 문질렀다.“아기를 위해서지만 그래도 고마워.”강하리가 손을 뒤로 빼려 했지만 구승훈은 더 꽉 잡았다.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근처에 있던 수납함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자 강하리는 멈칫했다.“이게 뭐야?”구승훈의 눈빛에는 온통 미소뿐이었다.“열어봐.”강하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열어보고는 깜짝 놀랐다.구승훈이 에비뉴의 주식 51%를 자신의 명의로 이전한 것이었다.강하리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구승훈 씨, 당신 뭐 하는 거야?”구승훈의 눈에는 다정함이 가득했다.“네 거라고 했잖아. 에비뉴는 원래 네 거였어.”강하리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서류를 다시 구승훈의 손에 밀어 넣었다.“싫어.”구승훈은 그녀의 손가락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다.“그럼 우리 아이한테 줘. 이제부터는 너랑 아이를 위해 일할게. 강 대표님, 할 수만 있다면 평생 당신 위해서 일하고 싶어.”강하리의 손가락이 움츠러들며 그녀는 시선을 내린 채 한참 후 입을 열었다.“구승훈 씨, 이럴 필요 없어.”구승훈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필요한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해. 너랑 아이를 위해서 난 뭐든지 할 수 있어.”말을 마친 그는 시동을 걸고 차를 몰고 출발했다.강하리는 시트에 뒤로 기대어 밤하늘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생각에 잠겼다.같은 시각, 외교부 앞 한 차에서는 문연진이 두 사람이 차고 있던 차가 떠나는 걸 보며 분노에 핸들을 쾅 내리쳤다.그동안
강하리는 구승훈이 자신의 앞에서 최선을 다해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때때로 그 느낌이 여지없이 다가왔다.강하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식탁에 앉아서 음식을 세팅했고 구승훈은 상대방에게 몇 마디 덧붙인 뒤 전화를 끊었다.“이사 가려고?”강하리는 멈칫하다가 한참 후에야 말을 꺼냈다.“응.”강하리는 B시에서 하는 일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늘 호텔에 머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그래서 그녀는 주해찬에게 아파트를 구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말을 마친 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그가 따라오겠다거나 뭐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는데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계속 호텔에만 지내기엔 불편하지.”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이 웃었다.“왜? 내가 따라간다는 말 안 해서 실망했어?”강하리는 그를 노려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날 밤 강하리는 웬일로 구승훈과 얼굴을 붉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노을이 하늘을 가득 채운 그날의 만남부터 그녀가 울며 그의 차를 쫓아가던 날까지.구승훈은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을 머릿속에 새기려는 듯 귀를 기울였다.그동안 일부 기억을 되찾긴 했지만 전부 암담하고 추악한 것들이었다.그 작은 어촌에서 있었던 기억은 세상 어딘가에 철저히 버려진 듯 그의 머릿속에서 잊혔다.“하리야.”구승훈은 그녀를 품에 안았다.“언제 한번 강주에 다시 가보자.”강하리가 한참 동안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오래전에 철거됐어.”간다고 해도 원래의 모습을 보아낼 수 없었다.마치 두 사람처럼.전부 돌아갈 수 없는 과거로 되어 사람도, 상황도 모든 게 달라져 버렸다.어느샌가 강하리는 잠에 들었고 다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창가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앉아 있는 구승훈을 발견했다.강하리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니 그 모습에 설명할 수 없는 외로움과 연약함이 느껴졌다.눈가가 시큰 해나자 한참 후 그녀는 시
남자는 다소 씁쓸하게 웃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손연지와 헤어진 후에야 구승훈은 시선을 내리며 강하리에게 말했다.“하리야, 너와 아이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할게.”강하리는 바닥을 내려보며 웃다가 한참 후에야 말했다.“구승훈 씨, 가끔은 그런 약속이 아무런 소용 없을 때도 있어.”피식 웃은 구승훈은 그녀가 뭘 얘기하는지 알았다. 과거 그가 제대로 해내지 못한 건 사실이었지만 이젠 목숨을 걸고서라도 아이와 그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다.그저 겉으로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을 뿐.구승훈은 강하리에게 개인 의사와의 약속을 잡았고 진찰을 마친 의사가 적극적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여기가 머리고 여기가 엉덩이예요. 아이가 무척 건강해 보이네요.”강하리는 컴퓨터 화면의 이미지를 바라보다가 문득 코끝이 찡해졌다.그녀의 아이, 그녀의 핏줄인 아이였다.강하리는 손을 들어 촉촉한 눈가를 닦았다.“건강하게 낳을 수 있겠죠?”의사가 웃었다.“당연하죠.”의사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물었다.“사진 한 장 출력해 드릴까요?”검사 기록을 남기지 말라는 말을 미리 들었지만 이 아가씨가 아이를 무척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강하리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쓸어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필요 없어요.”의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강하리는 이미 작별 인사를 고했다.“감사해요.”그러고는 금방 자리를 떠났다.의사는 한숨을 내쉬며 검사 기록을 모두 지운 뒤 생리불순으로 바꿨다.강하리와 구승훈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연진이 조용히 들어왔다.“선생님, 방금 그 여자는 무슨 검사 때문에 온 거예요?”의사는 인상을 찌푸렸다.“죄송하지만 환자 정보는 알려드릴 수 없어요.”문연진은 웃으며 의사 앞에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여기 1억이 있는데 저 여자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지만 알면 돼요.”의사의 눈이 번뜩이며 천천히 그 카드를 받았고 컴퓨터에 있던 검사 기록을 전부 찾아냈다.[생리불순.
구승훈은 그녀를 식탁으로 끌어당겼다.“네 곁에 돌봐줄 사람이 없으면 내가 불안해서 그래. 계속 배달 음식만 먹을 수는 없잖아.”강하리는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하리는 외교부 업무를 중단했다.배가 점점 불러와 불편하기도 했기에 JM의 일은 전부 집에서 처리했다.나문빈이 소유한 다른 회사도.나문빈은 강하리를 도와줄 사람을 보낸다고 했는데 그게 그 본인일 줄은 몰랐다.매일 강하리를 찾아오는 나문빈을 보며 구승훈의 표정은 갈수록 굳어만 갔다.하지만 둘이 그저 일 얘기만 했기에 구승훈은 뭐라 하고 싶어도 할 말이 없었다.안예서가 강하리와 구승훈에 대해 알게 된 건 B시에 도착한 후였다.예전부터 강하리와 구승훈이 만나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긴 했지만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났다는 사실에 며칠 동안 충격을 받았다.특히 사람들이 감히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던 구 대표님이 하루 종일 강하리 곁에 달라붙어 있는 모습을 보고는 세상이 뒤집어지는 느낌이었다.겨우 구승훈이 강하리 곁을 비운 사이 안예서는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부장님 쫓아다닌다던 사람이 구 대표님은 아니겠죠?”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여긴 어디, 나는 누구?’안예서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겨우 자료를 챙겨 자리를 떠났다.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심문석의 생일을 앞둔 11월 말, 일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강하리의 임신 6개월 가까이 된 배는 헐렁하고 두꺼운 점퍼를 입으면 숨길 수 있었다.하지만 드레스를 입으면 배를 감출 수 없었기에 심문석의 생일날 원래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심준호가 직접 그녀를 데리러 왔다.“드레스 말고 평소처럼 입어도 돼요. 엄마랑 할아버지가 하리 씨 보고 싶다고 하셔서 그냥 가서 얼굴만 비추고 더 머물고 싶지 않으면 일찍 와도 돼요.”강하리는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자 심준호는 현관에
TV나 뉴스에서 그를 거의 매일 본다.“그냥 할아버지라고 불러.”강하리는 낮게 불렀다.“안녕하세요, 할아버지.”심금천은 멍하니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앞으로 집에 자주 놀러 와.”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고 심문석은 이어서 둘째, 셋째에게도 그녀를 소개했다.셋째를 소개할 때 석미란은 눈을 흘길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막 뭐라 하려던 찰나 구승훈의 눈길이 이쪽으로 향했고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지금도 구승훈을 보면 얼굴에 아픔이 느껴졌다.구승훈만 있는 게 아니라 큰집 식구들과 어르신까지 있었고 대체 저 계집이 무슨 약이라도 먹였는지 하나 같이 자기 딸보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저 계집한테 더 잘해주었다.석미란은 남몰래 몇 마디를 중얼거리며 옆으로 걸어갔다.심문석이 강하리를 데리고 일일이 소개를 마친 뒤 백아영이 그녀를 곁으로 끌어당겼다.“태형 씨 말로는 일 다 넘겼다면서?”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마음 편히 해외 파견을 기다리고 싶어요.”백아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문연진과 함께 밖에서 들어오는 문원진을 보았다.멈칫하던 강하리의 안색이 굳어지자 백아영의 두 눈이 번뜩였다.“여기 있기 싫으면 승훈이랑 나가서 둘러봐. 여긴 별로 볼 것도 없고 노인네들만 많으니까.”강하리는 문씨 일가와 마주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바로 답했다.헐렁한 니트를 입었어도 문연진의 눈을 완벽히 속일 자신이 없었다.그녀는 지난번 유산을 경험한 뒤 눈앞에 겨눈 총보다 뒤에 숨어 쏜 화살이 더 무섭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 터라 지금은 문연진을 피하고만 싶었다.“백 장관님 감사합니다.”백아영이 웃으며 말했다.“가 봐.”강하리가 구승훈과 함께 자리를 뜨려는 찰나 때마침 문씨 일가와 정면으로 부딪쳤다.문연진은 강하리가 입고 있던 헐렁한 니트와는 대조적으로 유난히 화려해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그녀는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 씨, 심
구승훈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물 흐르는 소리가 막 멈춘 참이었다.그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살균 티슈로 손을 닦는 강하리의 모습이 차가운 벽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조시욱 때문이야?”구승훈은 무릎을 꿇고 강하리 앞에 앉아 그녀의 턱을 잡아올렸다.“대답해 봐, 조시욱을 위해 몸을 지키겠다는 거냐고?”강하리는 고개를 쳐들며 비웃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묻는 건데요?”구승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휠체어를 돌려 화장실을 나서는 그녀의 등 뒤에서 구승훈은 한참이나 멍을 때렸다. 구승훈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병실 문이 열리고 심준호와 백아영, 조시욱이 들어와서였다.구승훈을 본 심준호와 백아영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예전에는 무슨 일이 있든 심준호가 먼저 구승훈에게 상황을 묻고 강하리와 화해할 수 있도록 조율하려 했다.하지만 이번 일 이후 심준호는 단 한 번도 구승훈을 찾지 않았다.그건 구승훈에 대한 더 말할 나위 없는 실망을 의미했다.백아영은 당장이라도 구승훈의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수십 년간 유지해 온 품격과 매너로 화를 억눌렀다.세 사람이 강하리와 함께 연정이 주위에 둘러앉자, 병실 한구석에 있던 구승훈은 마치 외부인 같이 느껴져 굳은 표정으로 병실을 나와 유리 창가에 서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뒤늦게 찾아온 심준호가 말을 꺼냈다.“일은 다 정리됐어?”구승훈은 낮게 대답했다. “거의.”비록 여초연의 주변이 완전히 정리되진 않았지만 그녀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이상 큰문제는 없었다.“하리랑 조시욱 일은 너도 알고 있겠지. 승훈아, 너한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제 그만 하리 인생에서 나가줘.”구승훈은 멈칫하다 이내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강하리 인생을 방해한다고? 준호야,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넌 알잖아, 어떻게 된 일인지.”“알면 뭐 하냐? 구승훈, 우리 하리가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그걸로도 부족해?”심
강하리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무의식적으로 구승훈을 밀쳐내려 했지만 연정이의 웃음소리에 잠시 망설였다.아직 열이 가시지 않은 구연정은 강하리와 구승훈을 보고 흥분했던 것도 잠시, 곧 다시 기운이 빠졌다.구연정은 힘없이 구승훈 어깨에 기댄 채 한 손은 구승훈의 옷자락을, 다른 한 손은 강하리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강하리를 바라봤지만 강하리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그가 한숨을 내쉬며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의사가 검사 결과를 들고 들어왔다.“강 대표님, 아가씨는 현재 바이러스 감염으로 보입니다. 며칠 입원이 필요할 것 같아 이미 병실은 준비해두었습니다. 곧 간호사가 안내해 드릴 겁니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수고 많으셨습니다.”병실에 도착하자마자 연정이는 곧 깊은 잠에 빠졌다.강하리는 침대 곁에 앉아 연정의 손을 꼭 잡고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구승훈은 다른 한쪽에서 의사와 연정이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의사가 떠난 뒤에야 그는 강하리 옆으로 돌아왔다.“의사 말로는 보기보다 심각하진 않대. 너무 걱정하지 마.”하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연정이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그녀 곁에 앉아 손을 잡으려 하자 강하리는 황급히 그 손을 빼냈다.“이제 돌아가요. 나랑 아주머니가 있으면 돼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조시욱이 오기 편하게 나더러 가라는 거야?”강하리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노려보다가 이내 비웃듯 말했다.“여기 남아 있으면 임 선생님이 화내지 않을까?”구승훈은 끝내는 강하리의 손을 잡고서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임 선생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너 정말 나 못 믿는 거야?”그의 목소리엔 억눌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강하리가 이를 악물고 손을 빼내려 하자 구승훈이 낮게 말했다.“움직이지 마. 연정이 깼어.”강하리는 움직임을 멈추고 급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연정이는 여전히 곤히 자고 있었다.분노에 찬 강하리를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