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연지는 강하리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하리야, 앞만 보면서 살자.”강하리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지 못한다 해도 어쩌겠나.손연지가 의사에게 상처를 보이고 약을 처방받은 뒤 주사를 맞기도 전에 밖에서 소란이 일어났다.노민우와 그 개 주인이 놀랍게도 그들을 쫓아왔다.“손연지.”노민우는 문에 들어서자마자 황급히 외쳤고 손연지는 노민우를 노려보았다.“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노민우가 히죽 웃었다.“너 물린 거 보고 확인하러 왔어.”손연지는 콧방귀를 뀌었다. “됐어, 개한테 물린 거지 너한테 물린 게 아니잖아?” 노민우가 혀를 찼다.“우리 둘 중에 물어도 네가 날 물겠지.”손연지는 발을 들어 노민우를 세게 차려 했지만 닿기도 전에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민우 오빠.”손연지는 순간 발을 거두며 노민우를 노려보았다.“꺼져, 거슬리게 여기 있지 말고.”노민우가 웃었다.“손연지 너도 차마 못 때릴 때가 있어?”미처 거두지 않은 손연지의 발이 앞으로 뻗어오며 마침 노민우의 급소를 가격했고 노민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손연지, 너 진짜 차?”손연지는 곧바로 강하리를 주사실로 끌어당겼다.노민우가 따라가려던 순간 옆에 있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민우 오빠, 저 여자는 누구야?”노민우는 얼굴을 찡그렸다. “너랑 상관없잖아. 이미 너희 집에 데려가라고 전화했어.”하지만 여자는 노민우의 팔짱을 끼며 달라붙었다.“싫어, 아주머니가 설까지 같이 지내라고 하셨어.”노민우는 그녀를 슬쩍 보았다.“그럼 하루 종일 따라다니지 좀 마, 귀찮아!”“아주머니가 따라다니라고 한 거야, 내가 원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직접 아주머니한테 얘기하든지.”노민우의 입꼬리가 파들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결국 포기했다.엄마한테 말해서 해결될 일이면 지금처럼 이 껌딱지를 달고 다닐 필요도 없겠지.그는 다소 무력한 표정으로 저쪽 주사실을 바라보았고 그곳으로 가려는데 마침 함께 들어온 남자가 주사실을 향해 걸어가는 것을
강하리는 깜짝 놀라서 눈앞에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고 눈빛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남자는 웃으며 강하리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넸다.“전 임명우라고 해요. 나문빈 동창인데 하리 씨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어요. 제가 최근에 마침 통역이 필요한 비즈니스 미팅이 있는데 강하리 씨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해서요.”하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했다.“임명우 씨가 나문빈 씨와 동창이라면 나문빈 씨와 얘기하는 게 더 편하겠네요. 저는 오늘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그렇게 말한 뒤 강하리는 손연지를 끌어당기며 밖으로 나갔고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자 임명우가 피식 웃었다.“꽤 경계심이 많네.”그는 조용히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그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리고 저쪽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한테 접근하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어? 왜 이렇게 오랫동안 안 움직여!”임명우는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강하리가 그렇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야? 알게 모르게 주위에 경호원들이 가득한데 오늘 겨우 친구 통해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고.”“네가 누구인지 잊지 마!”상대방은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고 임명우는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더니 얼굴에 있던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보건소에서 나온 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손연지의 손에 들려 있는 명함을 내려다보았다.임명우, 인성 테크 총괄팀장.명함만 봐서는 아무런 이상한 점이 없었다.“왜 그래? 뭐가 이상해?”손연지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조금 전 안에서 강하리의 방어적인 태도를 감지할 수 있었다.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내가 요즘 의심이 너무 많나 봐.”강하리는 손연지를 집에 데려다주고 사무실로 돌아와 나문빈에게 전화를 걸었다.“임명우? 그런 사람이 있긴 해요. 얼마 전에 같이 일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문씨 집안과 여기 테크 회사 일로 너무 바빠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그 사람에 대한 자료 넘겨줘요.”
그는 아무렇지 않게 집어 들어 넘기며 불쾌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이 자식은 누구야?”강하리는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모르겠어? 잘생긴 남자잖아.”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나만큼 잘생겼어?”강하리는 그를 무시했고 구승훈이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강 대표님 남자가 필요한가?”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구승훈 씨, 좀 정상적으로 생각할 수 없어?”하지만 구승훈은 뻔뻔한 태도를 유지했다. “필요하면 언제 어디서든 전화만 해, 내가 달려올게.”강하리가 그를 노려보았다.“구승훈, 정신 좀 차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강 대표님은 내 실력을 못 믿는 거야?”강하리는 그의 다리를 직접 발로 찼고 구승훈이 웃으며 말했다.“기분 좀 나아졌어?”강하리는 멈칫하다가 한참 후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바보, 나한테 무슨 고맙다는 말을 해.”강하리는 웃으며 사무실 책상으로 돌아와 잠시 멍하니 눈앞에 놓인 서류들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저쪽에서 휴대폰으로 이메일에 답장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바쁜데 굳이 여기로 올 필요 없어.”구승훈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강 대표님 일이 언제나 나에게 우선이지.”강하리의 컵을 잡은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고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은 설날 전날까지 계속 내렸다.JM의 국내 대표로서 강하리는 각종 연말 모임을 피할 수 없었다.송년회를 마친 그녀의 얼굴은 이미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몸에 걸친 붉은 원피스는 이미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주었다.구승훈은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강하리 쪽으로 걸어가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임명우.구승훈은 그날 돌아가서 곧바로 그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았고 수상한 점은 하나도 없이 제2의 정양철을 보는 것처럼 깨끗했다.하지만 그럴수록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졌다.강하리는 임명우를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강하리 씨,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미소를 지었다.“
강하리는 취해 있었고 구승훈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녀가 그의 앞에서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을 테니까.그녀는 그동안 줄곧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특히 그 앞에서.구승훈은 눈물을 흘리는 여자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아 들었다.차에 탄 그는 강하리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여 속눈썹에 입을 맞췄다.“복 많이 받아, 하리야.”남자는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앞으로 매년 같이 보내자, 알았지?”하지만 강하리는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은 웃으며 그녀의 턱을 당겨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런데 강하리가 갑자기 얼굴을 돌리자 입술은 그녀의 볼로 향했고 구승훈은 그녀의 볼을 따라 귀 옆까지 부드럽게 키스했다.그의 입술과 혀에 촉촉하고 짠 눈물이 감겨 들어왔고 그는 아예 그녀를 자기 다리 위로 앉혔다.“대답해, 응?”강하리는 고개를 저었고 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나랑 보내기 싫어?”강하리는 흐릿한 정신으로 그를 밀어냈다.“응, 싫어. 당신이랑 있으면 너무 힘들어, 개자식. 난 너 싫어. 넌 항상 내 여기를 아프게 해.”강하리가 아픈 마음을 가리키자 구승훈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뺨을 살살 문질렀다.“앞으로는 힘들게 하지 않을게.”하지만 강하리는 곧바로 그를 밀어내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그와 거리를 두는 모습에 구승훈은 무력감에 휩싸였다.그는 한숨을 내쉬며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갔다.아파트에 돌아와 보니 강하리는 좌석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고 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문 앞에 다다랐을 때 현관에 서 있는 구동근이 보였다.구동근은 구승훈이 품에 안고 있는 사람을 보자 순식간에 얼굴이 극도로 일그러졌다.“감히 이 물건을 데리고 왔어?”구승훈은 웃었다.“그게 이상할 일인가요?”“구승훈!” 구동근은 화를 내며 소리쳤다.“오늘이 섣달그믐인 거 몰라? 그런데 이 여자랑 같이 있어?”구승훈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녀는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술기운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취한 상태가 아니었다.구승훈은 안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룸으로 향했다.옷을 갈아입는 그의 움직임이 잠시 멈칫하더니 손가락이 가슴이 있는 위치에서 멈췄다.젖어 있었다.남자는 한숨을 내쉬고는 강하리의 속옷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강하리가 막 씻고 있을 때 밖에서 욕실 문이 열렸다.“같이 씻을까?”“구승훈!”구승훈이 웃었다.“뭐가 무서워? 네 몸 중에 내가 못 본 것도 있어? 보기만 했겠어, 구석구석 입도 맞췄지.”“당장 꺼져!”강하리는 옆에 있던 세면도구를 집어 들어 구승훈에게 던졌고 구승훈은 웃으며 피하면서 옷걸이에 속옷을 걸더니 짙은 눈빛으로 그녀의 몸을 슬쩍 보았다.강하리는 옆에 있던 수건을 집어 들고 다시 구승훈 쪽으로 던졌다.구승훈은 웃으며 문을 닫았다.“빨리 씻어, 떡국 할 거야.”강하리는 욕실에 한참을 서 있다가 대답했다.“응.”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아주머니는 이미 간 뒤였다.구승훈은 앞치마를 두른 채 주방에 서서 떡국을 끓이고 있었다.강하리는 거실에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게 꿈인 것 같았다.“내가 그렇게 잘생겼어?”구승훈이 문득 이렇게 말하자 강하리는 곧바로 시선을 돌리고 머리를 말리기 위해 헤어드라이어를 가지러 갔다.머리를 다 말렸을 때쯤 구승훈의 떡국도 완성되어 있었다.그는 레드 와인 두 잔을 따르더니 강하리를 끌어당겨 식탁에 앉혔다.“먹어 봐, 처음 해보는 건데 다 익었는지 모르겠어.”강하리는 시선을 내린 채 눈앞에 놓인 떡국을 바라보았다.“구승훈 씨, 힘들어?”구승훈은 잠시 멈칫하다가 웃었다.“너에 비하면 멀었지.”강하리는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두 사람은 조용히 그믐날 저녁을 먹었다.오랫동안 만났어도 처음으로 함께 먹는 그믐날 밥이었다.저녁 식사 후 강하리는 창가에 서서 바깥의 불꽃놀이를 바라보았고 구승훈이 다가가 뒤에서 안아주었다.“소원 빌어봐. 혹
강하리는 굳어버렸다.강찬수 집에 사람이 있다고? 강찬수 쪽은 지난번에 간 이후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아주머니, 확실해요?”“당연히 확실하지.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기까지 했는데 문을 열어준 사람이 네가 아니고 나도 모르는 사람이라 너한테 급하게 전화했어.”“네, 알겠어요. 고마워요 아주머니.”강하리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강찬수 집에 누가 있대?”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가서 확인해 봐야겠어.”구승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끌어당겼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옷 한 벌과 패딩을 꺼내주었다.“두꺼운 옷으로 갈아입고 나랑 같이 가.”그렇게 말한 후 그는 돌아서서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또 다른 외투를 꺼냈다.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옷을 집어 들고 침실로 들어갔고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은 강찬수에게로 향했다.마침 차가 멈췄을 때 이웃 아주머니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아주머니는 구승훈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경호원까지 데려왔어?”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지난번에 두 사람이 함께 왔을 때 구승훈을 경호원이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아줌마, 저 위에는 어떻게 된 거예요?”“그냥 남자랑 여자 둘이 함께 집 안 물건을 부수는 것처럼 쿵쿵거리길래 문을 두드리러 갔더니 안이 난장판이 되어 있었어. 얼른 가서 봐, 설날 전날인데 도둑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네.”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렸다.강찬수의 집에는 사실 도둑을 만났다고 해도 훔칠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그녀가 서둘러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구승훈이 그녀를 뒤로 끌어당겨 보호했다.“내가 먼저 올라갈 테니 내 뒤에 있어.”강하리는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아주머니는 뒤에서 한숨을 쉬었다. “경호원이 있어서 좋네. 그나저나 네 남자 친구는 어디 갔어? 지난번 네 엄마 장례식 때 못 봤는데.”강하리는 입꼬리를 끌어당겼다.“헤어졌어요, 아주머니.”“아, 안됐네. 아주머니가 다른 사람 소개해 줄까?”앞에 있던 구승훈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돌
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강찬휘, 강찬수의 남동생이다.강하리는 어렸을 때 그와 한두 번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것 뿐이었고 이후 강찬휘는 송씨 집안에서 화풀이할까 봐 일찍이 그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다.오랜 세월이 지나 그녀는 그의 존재조차 잊고 살았는데 오늘 또다시 그 사람이 이곳에 나타났다.“여기서 뭐 하세요?”강찬휘는 얼굴 가득 음란한 표정을 지으며 비웃었다. “내가 뭘 하겠어? 여긴 우리 형 집인데 내가 오면 안 돼? 그리고 강하리, 우리 형 죽었을 때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유산을 혼자만 꿀꺽하려고?”강하리는 그 말을 들으며 어이가 없었다.“강찬수한테 유산이 있어요? 참, 있네요. 빚 10억이 있는데 상속받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강찬휘는 그 말에 바로 그만두었다.“웃겨...”강찬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승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입 함부로 놀리지 마.”강찬휘는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왜, 돈 있고 권력 있으면 다야? 그러면 유산 혼자 다 가져도 돼? 구승훈, 내가 널 무서워한다고 생각하지 마. 오늘은 하느님이 와도 난 무섭지 않으니까. 내가 정상적으로 물려받아야 할 유산이야!”구승훈은 그와 말을 섞기 싫어서 곧바로 발로 차버렸다.“여기서 꺼져! 사람 불러서 쫓아내게 만들지 마!”발로 차는 순간 강찬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그의 아내가 옆에서 순간적으로 소리를 질렀다.“당신이 뭔데 사람을 때려? 우리는 우리 것을 되찾으러 온 것뿐인데! 이러는데도 혼자 꿀꺽하려는 게 아니야?”구승훈이 비웃으며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강하리는 이미 경찰에 신고 전화를 걸고 있었다.“자택 무단 침입, 사유 재산 파괴, 설날을 감옥에서 보내시겠네요.”강하리의 신고 전화가 이미 연결된 것을 확인한 강찬휘는 표정이 확 바뀌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기어나갔다.“강하리, 딱 기다려. 언젠가 내 몫인 재산을 돌려받을 테니까.”두 사람은 허둥지둥 자리를 떠났고 강하리의 얼굴은 다소 일그러져 있었다.설날 전날 왜 강찬휘가 갑자기 나타나서
강찬휘는 잠시 생각했다.“그래, 아는 사람을 찾아서 휴대폰을 고칠 수 있는지 알아볼게.”구승훈은 강하리의 방을 한 바퀴 둘러보며 강하리가 고등학교 시절 썼던 공책들을 챙겼고 강하리가 얼굴을 찡그렸다.“그걸로 뭐 하려고?”구승훈은 웃었다.“고등학교 때의 강하리를 찾고 있어.”멈칫한 강하리가 시선을 피했고 구승훈은 두 사람이 떠나기 전에 사람을 불러서 자물쇠를 바꿨다.“내일 사람을 보내서 이곳을 깨끗이 치울 거야. 단서를 찾을 수 있는지 보자.”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믐날 밤은 곳곳에 화목한 기운이 감돌았고 명절 분위기가 가득했다.강하리는 계단 아래에 다다랐을 때 한숨을 내쉬었고 구승훈은 뒤에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추워?”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좀 걸을까?”구승훈이 말하며 강하리를 차에 태웠다.강하리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거절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안부사는 연성에서 비교적 유명한 곳으로 꼽히는데 이곳에서 연애운과 건강운을 빌면 유난히 신통했다.강하리가 구승훈에게 건넸던 염주 팔찌도 이곳에서 얻은 것이었다.구승훈은 강하리의 손목을 잡고 야시장의 다양한 등불 사이를 걸었다.강하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잠시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구승훈.”구승훈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응?”강하리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자두를 가리켰다.“나 저거 먹고 싶어.”구승훈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웃었다.“그리고? 또 뭘 원해?”강하리는 고개를 저었고 구승훈이 웃었다.“알았으니까 기다려. 내가 가서 사 올게.”구승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두를 한 주머니 들고 왔고 강하리가 고개를 숙여 한입 베어 물었다.“맛있어?”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강하리가 고개를 들어 그의 부드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마주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맛있지는 않았다. 제대로 씻지도 않은 데다 자두는 아주 셨지만 어렸을 때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어렸을 때 나한테 사줬는데 기억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