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노민우는 처음부터 단순히 엔조이 상대야. 내가 진지해지는 순간 그게 불행의 시작인 거지.”입술을 달싹이던 강하리가 피식 웃었다. 때론 이렇듯 이성적인 손연지가 부러웠다.“알았어, 그러면 이제부터 노민우 얘기는 하지 말자.”손연지 웃었다.“그게 맞지. 내 친구는 날 힘들게 하지 않아.”두 사람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손연지가 방으로 돌아갔고 샤워를 마친 강하리는 업무를 처리하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어느새 넋이 나갔다.오늘 떠날 때 구승훈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걸 보아 분명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걸 알았다.원래는 묻고 싶지 않았다.둘 사이에는 언제나 서로에게 조금의 공간을 남겨둬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특히 이렇듯 애매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말이다.하지만 그녀는 문득 그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일이 있으면 그녀도 그와 함께 짊어지고 싶었다.강하리는 휴대폰에 뜨는 구승훈의 이름을 바라보았지만 한참을 고민하다 포기했다.그녀는 컴퓨터를 닫고 무의식적으로 수면제를 먹으려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듯 움직임을 멈췄다.잠시 후, 그녀는 일어나서 밖에 있는 술장으로 다가가 와인 한 잔을 따른 뒤 창문에 기대어 느긋하게 마셨다.구승훈이 구씨 가문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자정이 다 되어 있었다.도우미는 구동근에게 숨이 겨우 붙어 있을 정도로 맞았지만 여전히 강하리만 언급했다.구승훈도 손을 썼지만 원하는 답은 얻지 못했다.검은색 마이바흐는 밤새 소리 없이 달렸고 구승훈은 정처 없이 운전하다가 결국 자신도 모르게 차를 몰고 강하리의 집 밑으로 와버렸다.멀리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고 그는 차 옆에 서서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이고 가볍게 한 모금 들이마신 후 한참이 지나서야 천천히 숨을 뱉었다.한입 가득 연기를 내뿜으면서 고개를 드는 순간 4층 발코니에서 작은 불빛 아래 드리워진 실루엣을 발견했다.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고 천천히 와인을 홀짝이며 하늘의 보름달을 바라보고 있었다.구승훈의 움직임
남자의 말을 들은 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칫했다.그녀의 마음속 어딘가 요란하게 흐트러지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날 재워주려고 온 거 맞아?”구승훈의 말에 담담한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그렇다면 내려올래?”강하리는 전화기를 꽉 움켜쥐고 대답하지 않다가 잠시 후 침실로 들어가 패딩을 뒤집어쓰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달빛 아래 남자는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서 있었고 그의 눈빛에는 부드러움이 묻어났다.강하리의 입꼬리가 움찔하며 고요함을 깨뜨렸다.“이 시간에 여긴 왜 왔어?”구승훈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며 성큼성큼 강하리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보고 싶어서 왔어. 또 잠이 안 와?”강하리가 입술을 다물고 웃었다.“아니, 이제 막 자려고.”구승훈이 나지막이 웃었다.“내가 재워줄게.”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구승훈 씨, 무슨 일 있지?”멈칫한 구승훈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여자는 늘 똑똑하고 예리하다.하지만 이번 일은 괜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 말하기 싫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으로 인해 그녀가 고통받게 할 수는 없었다.“아니, 별일 없으면 너 보러 오지도 못해?”강하리가 입술을 달싹이며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구승훈이 갑자기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아 들었다.“하리야, 달빛이 이렇게 예쁜데 진지한 얘기나 해야겠어?”그렇게 말한 뒤 그는 곧바로 강하리를 차 뒷좌석에 내려놓았다.“구승훈....”강하리가 겨우 이름만 부르는데 남자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패딩 안에는 얇은 잠옷만 입고 있었고 구승훈의 큰 손이 거침없이 파고들었다.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이 허리를 문지르자 강하리는 순식간에 소름이 돋았다.구승훈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잘 느끼네.”강하리가 힘껏 그의 허리를 꼬집었다.“허튼짓 하지 마.”“한밤중에, 그것도 예쁜 여자가 눈앞에 있는데 어떤 남자가 가만히 있어?”“당신...”구승훈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옷깃을
구승훈은 강하리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맞춤하고는 나지막이 그녀를 달랬다.“하리야, 괜한 생각 말고 그냥 다 잘될 거라고 믿어.”강하리는 잠시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더니 미소를 지었다.“응.”믿을 수 없대도 어쩌겠나.하지만 이내 그녀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구승훈 씨, 당신이 어떻게 연정이 사진을 갖고 있어?”구승훈의 눈빛이 번뜩였다.“구승재가 얘기하다가 보내준 거야. 네가 연정이 좋아하는 거 알고 너 기쁘게 해주려고 보냈지.”강하리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괜한 생각이겠지.“아파트로 가서 잘까? 이렇게 늦었는데 손연지 씨 방해하지 말고.”강하리가 그를 슬쩍 보자 구승훈이 웃었다.“걱정하지 마, 가서 아무 짓도 안 하고 그냥 너 재워주기만 할게. 내일 아침 일찍 연정이 선물 사러 가자.”연정이 얘기에 강하리는 끝내 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구승훈은 서둘러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구승훈은 말하면 말한 대로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강하리를 안은 채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잠에서 깨어나 침실 밖으로 나오니 구승훈이 부엌에서 죽을 끓이고 있었다.아침 햇살이 그의 몸에 쏟아지자 강하리는 문득 아늑함을 느꼈다.“뭐 하는 거야?”강하리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강 대표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팥죽이지.”강하리는 웃으며 부엌문으로 다가가 문틀에 고개를 옆으로 기댄 채 남자의 느긋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을 감상하고 있었다.“계속 보면 나 죽 못 끓여.”문득 구승훈의 잠긴 목소리가 들리며 그가 다가와 강하리를 안고 테이블에 올리자 강하리가 웃으며 밀어냈다.“하지 마. 연정이 선물 사러 가야 하잖아.”구승훈이 콧방귀를 뀌었다. “나보다 연정이가 더 중요해?”강하리는 여전히 두 눈에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몰랐어?”그녀는 구승훈을 밀어낸 뒤 밖으로 나갔고 구승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언젠가 강하리가 연정이가 자기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을 소홀히 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도우미의 말에 방 안에 있던 세 남자가 굳어버렸고 구승훈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연정이가 강하리를 닮은 건 사실이었다.막 태어났을 때는 주름이 자글자글했는데 이제 커서 얼굴이 뚜렷해지면서 이목구비가 어딜 보나 강하리와 닮아 있었다.하지만 아무도 언급하지 않고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쉽게 발견할 수는 없는 부분인데 도우미가 이를 입 밖에 꺼냈다.“예쁜 여자만 보면 연정이가 닮았다고 하네요. 얼마 전엔 연정이가 배우 누구더라, 심청아 닮았다고 했잖아요.”노진우의 말에 도우미가 웃었다.“우리 연정이가 예쁘니까 그러죠.”노진우는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 씨, 신경 쓰지 마세요.”강하리는 입꼬리를 당기며 미소를 지었지만 시선은 연정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실제로 연정이가 자신을 닮았다는 것을 알 수는 없었지만 도우미가 닮았다고 말하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졌다.진작 지워버렸던 짐작들이 이 순간 주체할 수 없이 떠올라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었다.고개를 들어 옅은 미소를 머금은 구승훈의 얼굴을 보니 어색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그가 강하리에게 다가가 말했다.“괜한 생각 마.”하지만 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시선을 내려 연정이를 바라보기만 했다.‘괜한 생각인 걸까?’왜 연정이에게 특별한 감정이 느껴지는 걸까, 왜 연정이만 보면 마음속에 행복과 슬픔이 동시에 느껴지는 걸까?강하리는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문들에 대해 몇 번이고 생각했다.하지만 고개를 들어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할 때 그 의심들은 저만치 사라져갔다.구승훈은 연정이를 한 번도 안아준 적이 없었고 연정이를 대하는 그의 태도도 무심했다.연정이가 그들의 아이라면 구승훈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다정함을 보여야 맞는데 그러지 않았다.그는 연정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연정이가 우유를 먹고 잠이 들자 도우미 아주머니는 강하리의 품에서 연정이를 떼어내 방으로 돌려보냈다.구승훈은 강하리가 여전히 정신이 팔렸다는 것을 알았고 구승재가 계속해서 주의를 끌려
구승훈은 강하리의 두 눈에 반짝이던 빛이 사그라드는 걸 발견했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내가 실례했네.”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그의 품을 떠나 돌아서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그 후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웃고 떠들면서 이상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구승훈은 그녀의 눈빛에서 우울함을 느낄 수 있었다.노진우의 집에서 돌아오는 내내 강하리는 넋이 나가 있었고 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잡자 시종일관 차가운 손은 아무리 노력해도 온기가 전해지지 않는 것 같았다.“하리야... 미안해.”강하리가 문득 입을 열었다.“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 당신이 달래준 건데 내가 미안하지.”구승훈은 인상을 찌푸리며 점점 더 죄책감을 느꼈다. “하리야, 우리 사이에 왜 그런 말을 해?”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그녀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오늘 밤에 아파트로 가. 널 그냥 두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아.”“난 괜찮아.” 강하리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구승훈은 계속 그녀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강하리는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다시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었다.구승훈은 조용히 시동을 걸고 차를 몰고 나갔다.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구승훈의 휴대폰이 울렸다.최하영의 전화였다.도우미 입에서 구동근의 사건을 해결할 실마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약물의 출처를 조사해야 했다.구동근에게 탄 독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었고 구승훈은 어젯밤 집에서 나오자마자 최하영에게 전화를 걸어 독약의 출처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지금쯤 아마 결과가 나왔을 거다.“나 통화 좀 할게.”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리퍼를 갈아 신고 침실로 향했다.사실 조금 전 노진우 집에서 돌아올 때만 해도 연정이가 물었던 젖병을 몰래 갖고 와 친자 확인을 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결국 포기했다.괜히 빈틈을 노려 캐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강하리는 가쁜 숨을 내쉬며 가슴 속 답
구승훈은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당연히 안다.그녀가 혼자서 아이의 복수를 하려던 순간부터 그는 알고 있었다.강하리는 절대 나약하지 않았고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했다.하지만 아이 문제는 다른 일과 달랐다.아이 일에 대해서만큼은 유독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고 아이에 관해서라면 늘 감정적으로 굴었다.구승훈은 모험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 그녀 본인도 안전하지 않았다.지난 이틀 동안 구동근이 움직이지 않았어도 언제 공격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녀를 위험에 내버려둔 것도 이미 내키지 않는데 여기에 아이까지 끌어들일 수 없었다.구승훈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고개를 돌려 강하리와 두 눈을 마주했다.“알겠어, 하리야.”강하리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았다.구승훈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며칠 전에 누가 할아버지께 독을 탔는데 독을 탄 사람이 네가 지시했다고 했어.”멈칫한 강하리가 피식 웃었다.“당신 할아버지는 그걸 믿어? 내가 사람을 시켜 독살할 거였으면 그 사람은 벌써 몇 번이나 죽었어.”구승훈도 그녀의 말에 웃음이 났지만 이내 어두워진 눈빛으로 말했다.“할아버지가 믿든 안 믿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그걸 빌미로 무슨 짓을 하느냐는 거지. 그래서 애초에 너한테 끼어들지 말라고 한 거야. 하리야, 난 더 이상 나 때문에 네가 또 상처받는 건 원치 않아.”이번 일은 누가 지시했든 분명 그와 연관되어 있을 테고 이번에도 그가 강하리를 끌어들인 셈이었다.강하리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쓴웃음을 내뱉었다.“구승훈 씨,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일이 있어.”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처럼, 아이에게 사고가 생겼을 때처럼.구승훈이 그녀의 말속에 담긴 의미를 단번에 알아채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강하리는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덧붙였다.“때론 피하는 것보다 부딪치는 게 정답일 수도 있어.”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부터 이 여자가 이렇게 변한
“왜?”구승재의 목소리가 무겁게 들렸다.“문연진이 임신했어.” 구승훈의 얼굴이 살짝 구겨지다가 곧 차가운 웃음을 내뱉었다.“임신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문연진이 구정우와 몇 번이나 밤을 보냈는지는 모른다.하지만 하필 문씨 가문이 몰락하는 시기에 문연진이 임신할 줄이야.“어젯밤에 문원진이 깨어나자마자 할아버지한테 연락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할아버지가 문연진과 구정우 결혼에 동의했어. 그리고 문씨 가문 도와줄 생각인 것 같아.”구승훈의 얼굴에 냉기가 감돌았다.“그럼 남 걱정 못하게 본인 처지부터 곤란하게 해드려야겠네. 내가 전에 시켰던 일 진행해.”구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한참 후 대답했다.“알겠어.”전화를 끊은 구승훈이 노진우에게 연락했고 노진우는 다소 긴장한 모습으로 전화를 받았다.“대표님, 강하리 씨가 눈치챘나요?”“아니.”말을 마친 구승훈이 잠시 멈칫했다.“강하리 한동안 나랑 있으니까 당분간 나한테 전화하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승재한테 연락해.”노진우는 서둘러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 대표님.”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방으로 돌아갔고 그가 눕자 강하리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구승훈의 두 눈에 미소가 담기며 강하리를 품에 꼭 껴안고 이마에 부드럽게 입 맞춘 뒤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그날 SH그룹은 갑작스럽게 큰 사건이 터졌다.15년 전 구씨 가문 소유의 건물이 부실 공사로 인해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하룻밤 사이에 갑작스럽게 무너졌고 당시 비를 피하기 위해 건물 안에 있던 민간인 근로자 여러 명이 건물 아래에 깔렸다.당시 구씨 가문 가주였던 구명진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보상금을 줄이기 위해 모든 책임을 민간 노동자들에게 전가했고 아래층에 매몰된 인부들은 최소한의 보상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건물 붕괴에 대한 책임까지 떠안게 되었다.구명진이 직접 덮었던 이 사건이 15년이 지난 지금 다시 드러날 줄이야.마침 주식시장에서 큰 변동을 겪은 구씨 가문은 다시 한번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다.그리
강하리가 얼굴을 찡그렸다.“무슨 일이야?”막 말을 꺼내던 그녀가 멈칫했다.그녀의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잠겨 있었고 손연지는 순식간에 그녀의 상황을 알아차렸다.“쯧, 못 들은 걸로 해. 잘 지내나 보다.”강하리는 누가 봐도 갈라진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목을 가다듬었다.“그, 내가 감기 기운이 좀 있어. 뭐라고 했어?”손연지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만해. 외박하고 이런 목소리를 내는데 누가 모를 줄 알아?”강하리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방금 뭐라고 했어? 구승훈이 왜?”그러자 손연지가 본론으로 들어갔다.“누가 죽이려 하는 거 몰랐어?”놀란 강하리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해갔고 손연지가 망설이며 말을 이어갔다.“인터넷에서 그러더라. 네가 직접 가서 물어봐.”강하리가 입술을 축였다.“그래, 알았어. 고마워, 연지야.”통화를 마친 강하리는 인터넷에 들어가서야 오늘 하루 종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구명진이 구승훈을 죽이려 했다는 기사를 보며 마음이 아려왔다.저 개 같은 남자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강하리는 곧장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고 구승훈은 뒤를 돌아보다가 맨발로 부엌문 앞에 서 있는 강하리를 발견했다.“왜 맨발로 여기 왔어?”그가 다가가 강하리를 안아주려는데 그녀가 물었다.“당신 아버지가 당신 죽이려고 했어?”구승훈이 멈칫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인터넷에 떠도는 헛소문 믿지 마.”“구승훈!” 강하리는 타는 듯한 눈빛으로 눈앞의 남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말했다.“왜 나한테 말 안 했어?”구승훈은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아 들고 성큼성큼 걸어가 소파에 내려주었다.“속상해?”강하리가 시선을 돌렸다. 속상했다.이 망할 남자가 대체 무슨 일을 겪고 있는 걸까?“속상하면 밤에 힘들다고 하지 마.”멈칫한 강하리가 발로 그의 배를 차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발목을 잡은 뒤 몸을 숙여 키스했다.“걱정하지 마. 인터넷 얘기는 사실이 아니야. 사실 차를 보내 나를 미행하다가
구승훈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물 흐르는 소리가 막 멈춘 참이었다.그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살균 티슈로 손을 닦는 강하리의 모습이 차가운 벽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조시욱 때문이야?”구승훈은 무릎을 꿇고 강하리 앞에 앉아 그녀의 턱을 잡아올렸다.“대답해 봐, 조시욱을 위해 몸을 지키겠다는 거냐고?”강하리는 고개를 쳐들며 비웃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묻는 건데요?”구승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휠체어를 돌려 화장실을 나서는 그녀의 등 뒤에서 구승훈은 한참이나 멍을 때렸다. 구승훈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병실 문이 열리고 심준호와 백아영, 조시욱이 들어와서였다.구승훈을 본 심준호와 백아영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예전에는 무슨 일이 있든 심준호가 먼저 구승훈에게 상황을 묻고 강하리와 화해할 수 있도록 조율하려 했다.하지만 이번 일 이후 심준호는 단 한 번도 구승훈을 찾지 않았다.그건 구승훈에 대한 더 말할 나위 없는 실망을 의미했다.백아영은 당장이라도 구승훈의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수십 년간 유지해 온 품격과 매너로 화를 억눌렀다.세 사람이 강하리와 함께 연정이 주위에 둘러앉자, 병실 한구석에 있던 구승훈은 마치 외부인 같이 느껴져 굳은 표정으로 병실을 나와 유리 창가에 서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뒤늦게 찾아온 심준호가 말을 꺼냈다.“일은 다 정리됐어?”구승훈은 낮게 대답했다. “거의.”비록 여초연의 주변이 완전히 정리되진 않았지만 그녀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이상 큰문제는 없었다.“하리랑 조시욱 일은 너도 알고 있겠지. 승훈아, 너한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제 그만 하리 인생에서 나가줘.”구승훈은 멈칫하다 이내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강하리 인생을 방해한다고? 준호야,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넌 알잖아, 어떻게 된 일인지.”“알면 뭐 하냐? 구승훈, 우리 하리가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그걸로도 부족해?”심
강하리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무의식적으로 구승훈을 밀쳐내려 했지만 연정이의 웃음소리에 잠시 망설였다.아직 열이 가시지 않은 구연정은 강하리와 구승훈을 보고 흥분했던 것도 잠시, 곧 다시 기운이 빠졌다.구연정은 힘없이 구승훈 어깨에 기댄 채 한 손은 구승훈의 옷자락을, 다른 한 손은 강하리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강하리를 바라봤지만 강하리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그가 한숨을 내쉬며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의사가 검사 결과를 들고 들어왔다.“강 대표님, 아가씨는 현재 바이러스 감염으로 보입니다. 며칠 입원이 필요할 것 같아 이미 병실은 준비해두었습니다. 곧 간호사가 안내해 드릴 겁니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수고 많으셨습니다.”병실에 도착하자마자 연정이는 곧 깊은 잠에 빠졌다.강하리는 침대 곁에 앉아 연정의 손을 꼭 잡고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구승훈은 다른 한쪽에서 의사와 연정이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의사가 떠난 뒤에야 그는 강하리 옆으로 돌아왔다.“의사 말로는 보기보다 심각하진 않대. 너무 걱정하지 마.”하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연정이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그녀 곁에 앉아 손을 잡으려 하자 강하리는 황급히 그 손을 빼냈다.“이제 돌아가요. 나랑 아주머니가 있으면 돼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조시욱이 오기 편하게 나더러 가라는 거야?”강하리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노려보다가 이내 비웃듯 말했다.“여기 남아 있으면 임 선생님이 화내지 않을까?”구승훈은 끝내는 강하리의 손을 잡고서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임 선생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너 정말 나 못 믿는 거야?”그의 목소리엔 억눌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강하리가 이를 악물고 손을 빼내려 하자 구승훈이 낮게 말했다.“움직이지 마. 연정이 깼어.”강하리는 움직임을 멈추고 급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연정이는 여전히 곤히 자고 있었다.분노에 찬 강하리를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