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미란은 고개를 돌려 서리를 머금은 듯한 구승훈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했다.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상대는 그녀를 어른으로서 전혀 존중하지 않았다.석미란은 더더욱 악에 받쳐 이를 갈았다.조금 전 휴대폰으로 받은 사진은 구승훈이 공항에서 강하리와 키스하는 장면이었다.아들은 아직 중환자실에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는데 이 망할 남녀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주해찬이 깨어날 때까지 연애하지 않겠다더니, 꼭 자신을 우습게 보는 것 같아 석미란은 차갑게 웃었다.“내가 함부로 행동하는 거야? 너희들이 사람 우습게 보고 괴롭히는 건 아니고?”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손 들고 때리려던 사람치고 당당하시네요?”석미란은 그를 노려봤다.“때릴 만하니까 때리는 거지!” 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사람들한테 말해볼까? 심씨 가문과 구씨 가문이 우리 주씨 가문을 어떻게 괴롭혔는지! 정말 우리 주씨 가문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는 거야?”아무리 구씨 가문이나 심씨 가문보다 못하다고 해도 주씨 가문에는 아직 어르신 주호준이 있었고 심문석도 그를 만날 땐 예의를 갖춰야 했다.다만 주호준은 오랫동안 은둔 생활을 하며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아들은 강하리 때문에 저 지경이 됐는데 망할 강하리는 뻔뻔하게 다른 남자를 만나다니.전부 다 석연란 때문이다. 애초에 강하리와 주해찬이 결혼하게 밀어붙여야 했는데!두 사람의 다툼은 진작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고 석미란이 이렇게 말을 하자 사람들이 이쪽으로 모여들기까지 했다.게다가 심씨 가문에 막 돌아온 오늘의 주인공과도 관련이 있으니 사람들은 더더욱 흥미가 당겼다.심씨 가문 사람들은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가 이쪽에서 소란이 들리자 그제야 가까이 다가왔다.“무슨 일이지?”심준호가 깊은 목소리로 물었다.인상을 찌푸린 채 석미란을 슬쩍 보니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뒤덮여 있었다.“무슨 일이냐고? 다 네 잘난 조카가 한 짓 때문이지!”
“여사님, 최소한의 예의조차 갖추지 않으시면 더 할 얘기가 없네요.”석미란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심준호가 단호하게 끼어들었다.이 문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강하리에게 이런 식으로 욕설을 퍼붓게 놔둘 수는 없었다.멈칫하던 석미란이 다시는 나쁜 년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내가 바보인 줄 알아? 이렇게까지 하면서 안 만난다고?”심준호의 올곧은 시선이 구승훈에게 향했다.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이 구승훈이니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그가 나서야 했다.강하리가 입술을 굳게 다물다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구승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제가 강제로 키스했어요.”말문이 막힌 석미란이 구승훈을 노려보았다.“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하지만 구승훈은 차가운 웃음만 내뱉었다.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하세요. 난 차라리 다들 하리가 내 여자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네요.”석미란은 화를 내며 그를 노려보았지만 이대로 멈출 생각은 없었다.아들과 이어져야 할 여자가 지금 다른 남자와 얽히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다시는 구승훈과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해!”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그렇게는 못 한다.뭐라고 해도 구승훈은 연정이 아빠고 연정이를 위해서라도 구승훈을 만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피식 웃는 구승훈의 미소엔 조롱이 가득 담겼다.“왜요, 또 감정적으로 몰아붙이시려고요? 아니면 은인이라는 이유로 협박하시려고요?”석미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감정적으로 몰아붙이다니? 애초에...”“하리가 주해찬과 만날 때 둘을 어떻게 갈라놨는지 벌써 잊으셨어요? 당신들 입으로 하리는 주해찬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이제 하리가 심씨 가문 사람이라고 하니까 서둘러 결혼시키고 싶으세요? 교통사고도 주해찬이 쓸데없는 말을 들어서 생긴 거고 하리를 지킨 것도 본인 선택인데 왜 하리에게 주해찬 목숨의 대가를 치르라고 하세요? 주씨 가문에선 늘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했나요?”구승훈은 입가에 의미심장한
구승훈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한참 후 쓴웃음을 지었다.주호준은 강하리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요.”강하리도 나지막이 답했다.“제가 죄송하죠.”더 단호하게 거절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주호준은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주씨 가문에서 막지 않았다면 지금쯤 강하리는 주씨 가문의 며느리가 됐을지도 모른다.결국 잘못을 저지른 건 그들 주씨 가문이었다.주호준은 다소 미안한 표정으로 심문석을 바라봤지만 심문석은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볼 뿐이었다.저 아이의 고집만 아니었다면 이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하지만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으면 강하리가 평생 마음 편히 살기 힘들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됐어, 이만 가서 쉬어.”그는 다가가 강하리를 토닥였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 위층으로 올라갔다.구승훈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무거워졌다.피식 쓴웃음이 나왔다. 그동안의 노력으로 조금씩 호전될 기미를 보이던 관계가 오늘 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주해찬 때문에.허...할 수만 있다면 지금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사람이 차라리 자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소란이 끝나고 파티는 계속되었지만 사람들은 모두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수군거렸다.강하리도 파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지만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그녀만 당당하면 다른 사람의 시선은 상관없었다.와인 한 잔을 들고 3층 테라스로 나갔다.아래층의 웃음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더 이상 그녀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테라스 문이 열리고 구승훈이 자리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그저 문 앞에 서서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연기가 피어오르자 남자의 복잡하고 씁쓸한 눈빛이 연기 속으로 감춰졌다.강하리는 그가 바로 뒤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다소 쓸쓸한 밤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자 살짝 몸이 떨렸다.강하리는 잔에 든 와인을 다 마시고 뒤
...강하리는 방으로 돌아와서야 가슴이 먹먹해지는 괴로움을 느꼈다.연정이의 웃음소리가 방에서 들려올 때까지 입술을 다물고 한참을 문 앞에 서 있다가 겨우 흐트러진 기분을 추스르고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본 도우미가 황급히 불렀다.“아가씨.”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정이를 안으러 갔다.“고생했어요.”도우미는 웃었다.“고생은요. 연정 아가씨 너무 귀여워요.”도우미는 연정이를 놀리면서 말했다.“다들 연정 아가씨가 아가씨랑 닮았다는데 제가 보기엔 구 대표님을 더 닮은 것 같아요.”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그래요?”도우미는 방금 아래층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 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보세요. 연정 아가씨 웃을 때면 구 대표님과 똑같게 생겼어요.”그녀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말했다.“한 가족이 다 예뻐요. 누굴 닮든 예쁠 거예요.”강하리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한 가족이라는 말은 가뜩이나 좋지 않은 그녀의 기분에 약간의 씁쓸함을 더했다.“이만 가보세요.”도우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떠난 후에야 강하리는 연정이를 안고 욕실로 향했다.그녀가 나왔을 때 휴대폰에는 메시지가 한 통 도착해 있었다.심준호가 보낸 거다.[승훈이가 주해찬 치료할 의사를 데려왔어.]강하리는 휴대폰을 움켜쥐며 손가락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구승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고마워.]구승훈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고맙다는 말은 됐어. 네가 주해찬이랑 무슨 사이인 것도 아니고. 나도 목적이 있어서 의사 찾아준 거야. 하리야, 난 절대 주해찬이 우리 사이 걸림돌이 되는 걸 용납 못해.]강하리는 메시지를 보고도 답장하지 않았다.그녀는 부드럽게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옆으로 치웠다.아래층에 서 있던 구승훈은 3층 방을 올려다보며 불이 다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잘 자.” 나지막이 속삭이고 뒤돌아 별장으로 향해싿.구승훈이 데려온 의사가 다음 날 도
강하리는 그가 건넨 물을 바라보다가 결국엔 받아 마셨다.그러고는 시선을 바닥으로 보내며 말했다.“고마워.”구승훈은 의미심장하게 혀를 차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복도는 잠시 조용해졌다.강하리의 얼굴은 창백했고 통증 때문인지 컵을 잡은 손도 떨렸다.구승훈은 얼굴을 찡그리더니 갑자기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에서 물컵을 뺏고 팔로 강하리의 허리를 감쌌다.“의사한테 가자.”강하리가 그를 밀어냈지만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내가 알아서 갈게.”구승훈이 콧방귀를 뀌었다.“혼자 걸을 수 있어?”강하리는 지금 걷기 힘든 상태였다.그냥 내버려둘 리 없는 구승훈이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아 들었다.강하리는 통증에 입술마저 핏기가 사라졌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구승훈의 발걸음은 빠르고 안정적이었다.두 사람이 복도로 나오는데 때마침 석미란과 마주쳤고 이 모습을 본 석미란은 순식간에 또다시 화가 치밀었다.석미란은 그 모습에 순간적으로 다시 짜증이 났다.역시 망할 년이다. 어젯밤 분명 약속을 해놓고도 오늘 또다시 구승훈과 붙어 있는다.그것도 그녀 앞에서!석미란이 따질 기세로 다가오자 그녀를 바라보는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여사님께선 또 주씨 가문의 면모를 과시하려는 건가요?”석미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를 무시한 채 강하리를 껴안고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석미란은 뒤에서 분노에 이를 갈았지만 어젯밤 집으로 돌아간 뒤 주호준에게 한바탕 호되게 꾸중을 들었기에 대놓고 강하리에게 따질 수 없어 속으로 화만 삭였다.석미란이 다시 뒤돌아 중환자실로 향하는데 발을 붙이기도 전에 의사가 중환자실에서 나왔다.진시연이 간호사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중환자실을 나오다가 화가 잔뜩 난 석미란과 마주했다.“아주머니.”진시연이 부드럽게 부르자 석미란은 그녀를 보고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주해찬의 상대를 물색할 때 눈여겨보던 게 진시연이었고 나중에 잘 안되었지만 그녀는 진시연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시연아
강하리는 침대에 누워 나지막이 말했다.“고마워.”구승훈이 투덜거렸다.“고맙다는 것 말고 할 말 없어?”강하리가 아예 눈을 감고 그를 무시하자 구승훈은 다소 무력한 웃음을 내뱉었다.더 이상 밀어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그도 괴로웠다.하지만 지금처럼 선을 긋는 모습도 달갑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주해찬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야 해?”강하리의 속눈썹이 잠시 흔들렸지만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구승훈은 콧방귀를 뀌며 더 이상 주해찬을 언급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아직도 아파?”자기 여자 앞에서 다른 남자를 언급하다니. 참 못났다.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답했다.“이제 괜찮아.”구승훈은 짧게 대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강하리는 그가 떠난 뒤에야 눈을 떴다.그녀는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구승훈은 그녀에게 주해찬을 위해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냐고 물었다.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가치를 따져서 뭐 하나.어차피 한때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이젠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는데.지금 그녀는 그저 양심의 가책만 느낄 뿐이었다.구승훈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핫팩을 손에 들고 밖에서 돌아왔다.“붙여.”강하리가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대꾸하지 않자 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내가 도와줄까?”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단추를 풀려고 하자 강하리가 홱 고개를 돌렸다.“구승훈!”구승훈은 마침내 소리 내 웃으며 그녀의 매서운 눈빛 속에서 핫팩을 뜯어주었다.“너 데리고 한의원에 간다고 했는데 아직도 못 갔네. 나중에 같이 가자.”말하며 그는 강하리에게 핫팩을 건넸고 그걸 건네받은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잠깐 나가 있어.”구승훈은 못 들은 척 미소만 지으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몸 중에 내가 못 본 곳도 있어?”강하리가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며 격앙된 표정을 짓자 구승훈은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를 어루만졌다.“하리야, 네가 정말 나랑 선 그을 수 있다고 생각해?”입술을 굳게
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무슨 일 있어?”피식 웃는 구승훈의 눈가에 서늘함이 밀려왔다.“그냥 헛소리일 뿐이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내 출생에 관한 거야?”구승훈은 어두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신경 쓰지 마.”강하리는 심호흡했다.“난 괜찮아.”정양철에 관해서 줄곧 마음이 불편했지만 뭐가 됐든 그녀가 바꿀 수 없는 일이었다.자신이 정말 정양철의 딸이라도 자신의 운명에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의 손에서 벗어난 강하리는 나지막이 말을 전했다.“고마워.”이젠 다 상관없지만 조금 전 곁에 있어 준다는 구승훈의 한 마디에 마음속에서 작은 파문이 일었다.구승훈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고마우면 오늘 밤에 네 방에서 자게 해주던지.”강하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구승훈, 정신 차려!”이제 막 선을 긋겠다고 했는데 이 개자식은 뻔뻔하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구승훈의 눈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이젠 선 못 그어. 석미란이 아까 내가 널 안고 있는 걸 봤잖아. 또 약속해도 이젠 널 안 믿을걸. 그리고...”강하리의 출생 때문에 석미란이 어떻게든 강하리와 선을 그으려 들지도 몰랐다.구승훈이 뒷말을 뱉지는 않았지만 강하리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다른 사람과는 상관없어. 내가 원해서 하는 거야.”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중환자실을 향해 걸어갔다.구승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가 곧바로 뒤를 따랐다.중환자실 앞에서 석미란은 누군가와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강하리를 본 일행은 순식간에 대화를 멈췄지만 강하리는 이상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심호흡한 뒤 마음속으로 신경 쓰지 말자고 몇 번이나 되뇌고 나서야 그쪽으로 계속 걸어갔다.그녀를 보고 차갑게 웃는 석미란의 미소 속엔 조롱이 담겨 있었다.“나쁜 년은 영원히
“그런 식으로 함부로 모함했다가 아니면 무릎 꿇고 머리 조아리면서 사과라도 하실 건가요?”구승훈이 그럴듯하게 말하자 석미란은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채 노려보기만 하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병원에 소문 다 퍼졌는데 가짜일 수가 있어?”구승훈의 눈에는 조롱이 가득했다.“전에 병원에 주해찬이 죽을 거라는 소문도 돌던데요.”석미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구승훈 너...”구승훈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제가 의사를 불러온 이유는 하리가 주해찬 때문에 계속 죄책감에 시달리는 게 싫어서였어요. 하지만 여사님이 이런 태도라면 언제든 그 의사를 돌려보낼 수 있어요.”석미란은 깜짝 놀랐다.“그게 무슨 말이야? 저 의사 네가 부른 거야?”구승훈은 차갑게 비웃었다.“그러면 여사님은 누가 데려왔다고 생각하시는데요?”석미란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하게 변했다.그녀는 진시연이 데려온 줄 알았다.석미란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본 구승훈도 그녀와 말을 섞기 싫었다.하지만 잠시 후 뒤돌아 가면서 석미란에게 이렇게 말했다.“참, 앞으로 하리 건드리지 마세요. 그쪽 아들에겐 하리가 과분하니까.”석미란은 피를 토하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지만 조금 전 구승훈의 협박에 이젠 대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런 세계 최고의 의사는 환자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구승훈이 그를 데려왔어도 주씨 가문에겐 그럴 능력이 없었다.하지만 이대로 넘어가기엔 내키지 않아 석미란은 구승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휴대전화를 꺼내 재벌가 사모님들로 가득 찬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병원에서 나올 땐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강하리는 문 앞 계단에 서서 구승훈에게 또다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구승훈은 피식 웃었다.“저녁에 네 방에서 잘 거야.”그렇게 말한 뒤 그는 곧장 돌아서서 차에 탔다.강하리가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구승훈, 가기만 해!”하지만 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강하리는 손가락을 꽉 움켜쥐다가 결국 짜증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