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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준은 품 안에서 문예진이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는 기척에 잠에서 깨어났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희미한 새벽빛이 침실을 밝히고 있었다. 예진은 그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 허리에 감긴 팔을 천천히 풀어 내고 있었지만, 태준은 그녀가 침대에서 완전히 빠져나가기 전에 다시 허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예진의 등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 익숙한 체온과 은은한 향기가 가까워지자 태준은 만족스럽게 눈을 감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벌써 일어나려고? 아직 시간이 이른 것 같은데.”
“여섯 시 조금 넘었습니다. 회장님은 더 주무셔도 되지만 저는 먼저 준비해야 해요.”
태준은 대답 대신 그녀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예진이 고개를 돌리자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하얀 목선이 드러났고, 그는 그곳에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예진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삼 년 동안 수없이 가까이 지냈으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그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회사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여자였지만, 둘만 남으면 작은 접촉에도 눈빛이 달라지곤 했다.
태준은 그런 모습을 아는 남자가 자신뿐이라는 사실이 좋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단정하고 빈틈없는 회장 전속 비서였지만, 자신의 품 안에서는 조금 다른 얼굴을 보여 주는 여자였다.
그는 예진이 자신의 품을 벗어나려 할 때마다 조금 더 오래 붙잡고 싶어졌다.
“오늘 저녁에도 와. 같이 저녁 먹고, 늦으면 여기서 자고 가.”
태준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예진은 평소처럼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은 어렵겠습니다. 미리 잡아 둔 약속이 있어서요.”
태준은 그녀의 목덜미에서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 예진이 자신의 저녁 제안을 거절한 적은 거의 없었다. 일이 늦게 끝나는 날에도 시간을 조정해 찾아왔고, 함께 식사하지 못하더라도 잠깐 얼굴을 보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오늘은 망설임조차 없이 어렵다고 했다.
“무슨 약속인데? 급한 일이 아니면 다른 날로 옮겨.”
평소라면 예진은 난처한 얼굴로 웃다가 결국 그의 뜻을 따라 주었을 것이다. 태준은 그녀가 자신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특별히 문제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예진은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풀어 내며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약속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아침 식사는 준비해 둘 테니 조금 더 쉬세요.”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욕실로 향했다.
태준은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베개에 등을 기댔다. 예진에게 거절당한 사실도 낯설었지만, 자신을 달래거나 미안해하지 않은 채 돌아서는 태도가 더 마음에 걸렸다.
그는 한동안 욕실 쪽을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조금 전 그녀의 허리가 닿았던 자리를 쓸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무언가를 빼앗긴 기분이었다.
***
태준이 문예진을 처음 여자로 의식한 것은 그녀가 비서실에 들어온 지 석 달쯤 지났을 때였다.
당시 그는 해외 인수합병을 마무리하느라 사흘 가까이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회장실로 돌아왔지만, 처리해야 할 서류는 여전히 책상 위에 쌓여 있었다.
보고서를 검토하던 태준은 결국 심한 두통을 견디지 못하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잠시 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퇴근하지 않은 예진이 마지막 계약서의 수정 사항을 정리한 서류를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태준이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살피더니 별다른 질문 없이 조명을 낮추고 따뜻한 물을 가져왔다.
“약은 드셨습니까?”
태준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눈을 감자 예진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잠시 후 그의 이마에 차가운 수건을 얹어 주었다.
서늘한 감촉에 눈을 뜬 태준은 바로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묶었던 머리카락이 조금 풀려 있었고, 피곤한 얼굴에는 화장기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녀의 눈매와 입술이 유난히 선명하게 들어왔다.
태준은 자신이 그녀의 얼굴을 지나치게 오래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굳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문 비서, 남자친구 있어?”
예진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예진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네. 개인적인 일정이 있습니다.”태준은 펜을 내려놓았다.그녀가 자신의 저녁 제안을 거절했던 전날 아침이 떠올랐다.“누구 만나는데?”예진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내가 모르는 사람인가?”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회장님께 보고드려야 하는 일정은 아닙니다.”태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그는 예진이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었지만, 그녀가 자신의 곁을 떠나려는 이유가 다른 남자 때문이라면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문예진, 나한테 숨기는 게 있어?”“숨기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제 개인적인 시간을 모두 설명드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태준은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을 돌아 그녀에게 다가갔다.예진은 물러서지 않았지만, 그가 가까워지자 손에 쥔 태블릿을 조금 더 단단히 잡았다.그 모습을 본 태준은 걸음을 멈췄다.전날 그녀가 자신의 손길을 피했던 장면이 떠올랐다.그는 손을 뻗지 않았다.대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낮게 물었다.“당신은 정말 나 없이도 괜찮겠어?”예진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태준은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가 천천히 놓는 동안 눈가에 옅은 물기가 맺혔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괜찮아지려고 합니다.”태준은 숨을 멈췄다.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괜찮아지려고 한다고 했다.그녀가 얼마나 힘든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 고통이 자신의 곁에 남을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분명했다.태준은 그녀가 얼마나 오래 이별을 준비했을지 처음으로 생각했다.자신이 약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동안, 예진은 혼자 관계의 끝을 헤아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그녀를 붙잡고 싶었다.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품에 끌어안고, 더는 떠나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그러나 예진의 눈빛을 마주하자 움직일 수 없었다.그녀는 자신이 붙잡는다고 해서 남을 여자가 아니었다.“예
자신이 잘못을 인정했으니 그녀가 조금은 마음을 풀어 주기를 바랐다. 예전처럼 괜찮다며 웃어 주거나, 다음에는 늦지 말라고 가볍게 타박해 주기를 기대했다.하지만 예진은 업무로 돌아갔다.그녀가 다시 태블릿을 확인하자 태준은 무심코 말을 꺼냈다.“당신이 없으면 이런 일이 자주 생길 것 같군.”예진의 손이 멈췄다.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대답했다.“그렇지 않도록 인수인계를 준비하고 있습니다.”태준은 할 말을 잃었다.그가 원한 대답은 그것이 아니었다.그러나 예진에게는 가장 정확한 대답이었다.그녀는 자신의 빈자리를 남겨 두고 떠나려는 것이 아니라, 누가 오더라도 업무에 차질이 없도록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있었다.태준은 책상 위에 놓인 인수인계 계획안을 내려다보았다.그녀는 자신을 사랑했지만, 자신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남으려 하지 않았다.그 사실이 이상할 만큼 자존심을 건드렸다.***오후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태준은 투자사 대표와의 면담에서 협상 조건을 조정했고, 전략실과의 회의에서는 다음 분기 투자 우선순위를 재검토했다.오전의 지각이 무색할 만큼 업무 판단은 정확했다.투자사 대표가 태성그룹의 자금 운용 계획을 문제 삼았을 때도 그는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상대가 제시한 수치를 하나씩 확인한 뒤 계약서에 명시된 위험 분담 조항을 짚어 냈고, 불리한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양측의 책임 범위를 다시 정리하도록 했다.회의가 끝날 무렵 상대 대표는 처음보다 훨씬 신중한 태도로 악수를 청했다.태준은 그 손을 받아 주며 짧게 웃었다.“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계약이라면 오래갈 수 있습니다. 다만 한쪽만 위험을 떠안는 구조라면 처음부터 다시 검토해야겠죠.”상대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태준은 협상에서 물러설 때와 밀어붙일 때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사람이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숫자와 계약 조건으로 상대를 설득하는 능력은 그가 태성그룹을 이끌어 온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였다.그러나 회의실을 나오는 순간, 그의
그는 자신이 예진의 능력에 얼마나 의지해 왔는지 알고 있었다. 다만 그녀가 언제나 곁에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 사실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었다.오늘처럼 예진이 모든 일을 제대로 했는데도 자신이 흔들린다면, 그녀가 떠난 뒤에는 무엇이 달라질까.태준은 서류를 덮었다.그 질문에 답하고 싶지 않았다.***회장실로 돌아오는 길, 태준은 비서실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걸음을 늦췄다.예진은 다른 직원과 나란히 앉아 모니터를 확인하고 있었다.책상 위에는 업무 매뉴얼과 일정 관리 자료가 펼쳐져 있었고, 옆에 앉은 직원은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빠르게 메모하고 있었다.“해외 계열사 관련 보고서는 숫자만 확인해서는 안 됩니다. 환율 적용 시점과 계약 조건이 다르면 같은 금액이라도 의미가 달라질 수 있으니 원본 자료와 반드시 대조해야 합니다.”예진은 화면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회장님께 보고할 때는 결론부터 정리하세요. 검토가 필요한 위험을 먼저 표시하고, 선택 가능한 대안을 함께 제시하는 것이 좋습니다.”태준은 문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녀가 자신의 업무 방식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 있었다.아직 정식 후임자가 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예진은 이미 자신이 없어도 업무가 유지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태준의 시선이 책상 위 업무 매뉴얼에 머물렀다.삼 년 동안 그녀가 익힌 자신의 습관과 판단 방식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그동안 자신에게만 맞춰져 있던 작은 배려들까지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려는 것처럼 느껴졌다.“문 비서.”그가 부르자 예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회의는 잘 마치셨습니까?”평소와 다르지 않은 목소리였다.그러나 태준은 이제 그 평온함을 이전처럼 받아들일 수 없었다.“잠깐 들어와.”태준은 회장실로 향했다.잠시 뒤 예진이 태블릿을 들고 들어왔다.그는 책상에 앉지 않고 창가에 서 있었다.“오늘 회의에 늦은 거, 알고 있지?”“네. 열여덟 분 늦게 입장하셨다고 전달받았습니다.”태준은 그녀를 돌아보았다.“왜
재무총괄 사장이 서류를 넘겼다.“현재 금융기관과 추가 협의 중입니다. 금리 조건이 확정되지 않아서—”“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보수적으로 계산해야 하는 겁니다.”태준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단호했다.그는 화면에 표시된 세 개의 자금 조달안을 차례로 확인했다.“첫 번째 안은 단기 차입 비중이 지나치게 높습니다. 두 번째 안은 조달 비용이 불리하고, 세 번째 안은 만기 분산 효과가 있지만 환율 위험에 대한 대비가 부족합니다.”태준은 잠시 말을 멈추고 참석자들을 둘러보았다.“세 가지 중 하나를 고를 문제가 아닙니다. 단기 차입은 필요한 수준으로 제한하고, 만기 구조는 분산하되 환율 변동 위험을 별도로 관리해야 합니다. 금융기관 협상도 한 곳에 집중하지 마십시오.”재무총괄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금리 변동 시나리오를 세 단계로 나누고, 각 단계에서 필요한 현금 확보 규모를 다시 계산하십시오. 차입 구조를 바꾸는 목적은 단순히 이번 분기의 비용을 줄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의 위험을 감당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 있습니다.”임원들이 빠르게 메모했다.태준은 그 모습을 확인한 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그가 회의의 흐름을 장악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앞서 십팔 분을 지각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판단은 정확했고, 질문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불필요한 보고는 잘라 내면서도 중요한 위험은 놓치지 않았고, 의견이 엇갈리는 순간에는 숫자와 책임 범위를 기준으로 결론을 내렸다.회의가 끝날 무렵 정필원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회장님, 오전에 문 비서가 별도로 전달한 검토 의견입니다. 방금 지시하신 내용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서 함께 보시면 좋겠습니다.”태준은 서류를 받아 들었다.그 안에는 자신이 회의에서 지적한 문제들이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금리 상승에 따른 추가 비용과 만기 집중 위험, 대체 금융기관 협상 가능성까지 한 장에 담겨 있었다. 단순히 보고서를 요약한 것이 아니라, 그가 반드시 확인해야 할 위험을 먼저 표
태준은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지금은 당신하고 얘기하고 있잖아.”“중요한 회의입니다. 재무총괄 사장님과 계열사 대표님들이 모두 참석하십니다.”그녀는 태준의 표정을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이 이야기는 업무가 끝난 뒤에 하셔도 됩니다.”언제나 자신이 놓칠 수 있는 부분을 먼저 챙겨 주던 여자였다. 태준은 그런 판단을 신뢰했고, 때로는 자신의 결정보다 예진의 일정 관리가 더 정확하다고 인정하기도 했다.그러나 지금은 그녀가 자신과의 대화를 피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당신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군.”그의 말에 예진의 표정이 굳었다.그녀는 눈을 한 번 천천히 감았다 떴다. 손에 쥔 태블릿이 조금 기울어졌지만, 곧 자세를 바로잡았다.“저도 쉽지 않습니다.”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하지만 어렵다고 해서 이미 내린 결정을 바꾸지는 않을 겁니다.”태준은 입술을 다물었다.예진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떠나겠다는 선택이 이해되지 않았다.차라리 마음이 식었다고 말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 자신을 사랑하는 듯한 눈빛으로 관계를 끝내겠다는 여자를 어떻게 붙잡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회장님, 이동하셔야 합니다.”예진이 다시 시간을 알렸다.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잠시 살피다가 낮게 말했다.“먼저 나가 있어.”예진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다.“회의실에는 제가 연락해 두겠습니다.”문이 닫힌 뒤에도 태준은 한동안 소파에 앉아 있었다.그녀가 떠나겠다는 말을 되풀이할수록 붙잡고 싶은 마음은 강해졌지만, 무엇을 약속해야 할지는 여전히 대답할 수 없었다.그는 보고서를 다시 펼쳤다.그러나 첫 장에 적힌 숫자보다 예진의 목소리가 먼저 떠올랐다.*저도 쉽지 않습니다.*태준은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그녀도 힘들다고 했다.그런데 왜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회의실 문이 열렸을 때, 벽시계는 오전 열 시 십팔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긴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있
그녀는 복잡한 재무 수치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대신 태준이 반드시 확인해야 할 쟁점만 간결하게 추려 놓았다. 금리 상승에 따른 추가 비용과 만기 집중에 따른 위험, 대체 금융기관과의 협상 가능성까지 한눈에 들어왔다.태준은 자료를 넘기지 못했다.그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불필요한 설명을 싫어했고, 숫자 뒤에 숨은 위험부터 확인하는 편이었다. 예진은 그런 습관을 알고 있었기에 보고서의 순서까지 그의 판단 방식에 맞춰 정리했다.삼 년 동안 그녀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익혔는지 새삼 실감했다.그런 여자가 떠나겠다고 했다.태준은 보고서를 덮었다.계약 종료일이 다가온다는 이유만으로 이 모든 것을 정리하겠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곁에서 쌓아 온 경력과 신뢰, 두 사람 사이의 친밀함까지도.그는 책상 위 내선전화 버튼을 눌렀다.“문 비서, 잠깐 들어와.”예진은 오래 기다리지 않고 회장실에 들어왔다. 책상 앞에 선 그녀는 태준을 바라보았지만, 그가 손짓한 소파 쪽으로는 움직이지 않았다.태준은 전날 서랍에 넣어 두었던 후임 채용 계획안을 꺼냈다.“계약 조건을 다시 검토했어. 연봉은 지금보다 올려 주고, 업무 범위도 조정할 수 있어. 원하는 조건이 있으면 말해.”예진의 시선이 서류에 머물렀다.“회장님, 보수나 근무 조건 때문에 결정한 일이 아닙니다.”“그럼 뭐가 문제인데?”태준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평소라면 협상 상대의 요구를 먼저 파악했을 것이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아야 유리한 조건을 제시할 수 있었고, 그는 그런 협상에서 좀처럼 밀린 적이 없었다.그런데 예진 앞에서는 그 원칙이 통하지 않았다.그녀가 원하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자신이 약혼을 취소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으면서도, 다른 조건을 제시하면 그녀가 마음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삼 년 동안 함께 일했어. 당신만큼 내 업무를 잘 아는 사람도 없고,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권한을 맡겼는지도 알잖아. 지금보다 더 좋은 조건을 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