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쌍둥이 연수와 연아의 돌잔치가 끝난 뒤, 문리안은 예정대로 미국으로 돌아갔다.자신의 특기인 '화려한 외모와 능글맞은 미소'로 접근했다가 제대로 망신만 당한 서지우는,리안이 떠난 테라스 유리문을 노려보며 분통을 터뜨렸더랬다."허! 스물넷? 고작 스물네살짜리가 어디서 서른둘한테 아저씨 취급에 방탕아 타령이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안 넘어오는 여자가 없었는데!"지우는 자신이 성숙해졌다 자부했기에 그 모욕(?)을 잊을 수가 없었다.돌잔치장에서 톡 쏘는 독설을 날리고 미국으로 떠나버린 문리안이라는 존재는,서지우의 일상에 생각보다 꽤 긴 잔상을 남겼다.‘독사 같은.. 어린 여자애가... 나한테 감히 방탕아 타령을 해?’처음 몇 달 동안은 억울함과 오기에 밤마다 이불을 킥킥 차며 입을 삐죽거렸지만,세월의 흐름이란 무서운 법이었다.서른둘의 지우는 교수로 지내는 형을 대신해 본가의 사업을 본격적으로 맡아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고,머릿속에서 도도하게 굴던 스물넷 석사생의 잔영도 차츰 희미해져 갔다.그리고 1년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수아가 가문의 축복 속에 셋째 딸 ‘연희’를 건강하게 출산했다.수아가 고급 산후조리원에 입원한 다음날 오후.지우는 형 지완의 부탁으로 수아가 먹고 싶다던 특제 수제 타르트 상자와셋째 조카를 위한 명품 배냇저고리 선물을 들고 조리원을 찾았다.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로비에 들어서던 지우는,수아가 머무는 특실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한 여자의 뒷모습에 슬쩍 시선이 갔다.어깨를 넘어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윤기 나는 긴 생머리,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에 오버핏의 편안한 아이보리색 가디건과 넓은 슬랙스 팬츠.양손에는 미국에서부터 바리바리 싸 들고 온 듯한 영어가 가득 적힌건강보조식품과 아기 용품 쇼핑백이 가득 들려 있었다."어이쿠, 조리원 방문객이신가 본데..."지우는 예의 그 오지랖과 능글맞음이 발동해짐을 쏟을 듯 낑낑거리는 여자의 옆으로 스윽 다가갔다.긴 생머리에 편안한 옷차림 때문인지
그 어떤 고급 호텔의 웅장한 연회장보다 영롱하게 빛나는 날이었다.서대감 집안의 소문난 츤데레 장남, 서지완 교수의 얼굴에는몇 달 전부터 보기 드문 싱글벙글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바로 첫째와 둘째, 쌍둥이 연수와 연아의 돌잔치가 성대하게 열린 날이자—동시에 수아의 배 속에 셋째가 고이 뿌리를 내렸다는 기쁜 소식이온 가문에 전해진 날이었기 때문이다."아이고, 내 손주 녀석들이 판사봉이랑 청진기를 잡았구나! 가문의 경사네, 경사야!"평소 엄격하기로 유명했던 서대감마저 아이들의 돌잡이 결과에세상을 다 얻은 듯 껄껄 웃었고, 한 여사는 수아 곁을 붙다시피 하며 "얘 수아야, 너 또 임신 초기라는데 무리하면 큰일 난다. 어서 가서 좀 앉아 있어라"라며 사과 한 조각까지 깎아 입에 넣기 바빴다.그런 화기애애한 잔치 한복판에서, 서지완 교수의 동생 서지우는 연회장 한쪽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양주 잔을 설핏 흔들고 있었다.서지우는 예전처럼 매일 밤 여자를 바꾸고 클럽을 전전하던 가벼운 한량 방탕아가 아니었다.오는 여자는 절대 거절하지 않았고 가는 여자 또한 절대 잡지 않았던 나름 쿨하고 생각했던 그가,형 서지완이 목숨을 걸고 강수아를 지켜내며 진짜 '남자의 사랑'을 보여준 이후, 서지우 역시 형수를 가까이서 보며 여자는 한낱 장식품과 부속품, 대를 이어줄 도구로만 보던 눈이 변했다.강수아. 형수의 맑고 곧은 모습, 그리고 자녀와 남편을 위한 강단있는 모습까지..형수의 모든 면모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과거의 방탕한 모습을 청산하몀서 가문을 등에 업고 제멋대로 살던 태도를 버리고, 이제는 제법 가문의 사업을 진지하게 배우며 한층 성숙해진 참이었다.하지만 수년 간 몸에 배어버린 특유의 능글맞음과 겉으로 틱틱거리는 '서씨 집안 내력의 츤데레 기질'까지 완벽히 세탁된 것은 아니었다."형수님은 아주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지. 아닌가 ...? 형님이 나라를 구하신건가? 아무튼 형님이 저렇게 팔불출 늑대로 개과천선할 줄
사과꽃 향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시골 과수원, 그 옆의 별장 잔디밭.어느새 아장아장 잘도 걷는 쌍둥이 남매(연수,연아)가잔디 위를 뛰놀며 꺄르르 웃어대고 있었고,한 여사와 서 대감은 갓 백일이 지난 셋째 연희(延喜)를 품에 안고 싱글벙글 웃으며빈 유모차를 흔들고 있었다.건강한 모습의 이모와 서지우 역시 바베큐를 준비하며 유쾌하게 잔을 부딪쳤다.과거 유흥가의 아픔도, 가문의 억압도 모두 사라진 자리,오직 세상에서 가장 화목하고 온전한 다섯 식구,아니 아홉 식구의 진짜 가정이 완성되어 있었다.지완은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사과나무를 바라보던 수아의 등 위로 다가와,그녀의 허리를 자신의 큰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은은한 코지우드 향이 수아의 온몸을 포근하게 장악했다."........ 처음 노래방 문을 열고 당신이 들어와 눈이 마주쳤을 땐, 나의 뒤틀린 집착이 당신에게 상처가 될끼봐 매일 밤 숨이 막혔어."지완은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수아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낮게 잠긴 목소리롤 속삭였다."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나는 가문의 명예나 의무 때문이 아니라, 오직 강수아 당신 하나에게 중독되어 숨을 쉬는 미친 남편일 뿐이라는 것을. 나의 메마른 세상에 기적과 사랑을 가르쳐 준 유일한 구원자, 내 사랑.."평생 아껴두었던 아저씨의 완벽하고도 단단한 사랑의 맹세였다.수아는 고개를 돌려 그의 짙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며,그의 목을 끌어안고 마음속 깊은 곳에 피어난 진심을 건넸다."나도 사랑해요. 나의 아저씨, 교수님... 나의 남편 서지완 씨. 내 사랑.."두 사람은 사과 꽃비가 눈부시게 쏟아지는 저녁노을 속에서서로의 입술을 닳아없어서질 듯 깊숙하게 집어삼켰다.비극적 계약과 오해로 시작되었던 잔혹한 인연이,온 가문의 축복과 셋째의 탄생을 통해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모든 이들에게 사랑의 위대한 치유와 희망을 선물하며...[교수님, 나의 교수님] 은 막을 내립니다.그동안
으앙-, 응애, 응애-!드디어 우렁차고 맑은 아기의 울음소리가 VIP 병실안을 가득 채웠다.지완과 수아를 반반씩 쏙 빼 닮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아름답고 건강한 셋째 딸아이의 탄생이었다.처음 쌍둥이들의 출산 때 처럼 기절하듯 의식을 잃고 지완이 울부짖으며"임신시켜서 미안하다"고 붕괴하던 비극적 시나리오는 없었다.수아는 기쁨과 감격으로 웅성거리는 가족들과 의료진들 사이로,자신의 품에 안긴 핏덩이를 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지완은 침대 머리맡에 무릎을 꿇은 채,수아의 뺨과 입술 위로 자신의 눈물 어린 입술을 천천히 덮었다.오직 감격과 영원한 사랑만이 섞이는 격정적인 눈물의 키스였다."........ 고생 많았어, 수아 씨. 나의 영원한 구원자. 너무 고맙고 사랑합니다."지완은 수아의 손을 꼭 쥔 채 몇 번이고 고백했다.수아는 자신 품의 아기와,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는 단단한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며비로소 자신이 출산 도구가 아닌, 이 가문과 서지완이라는 한 남자의 목숨보다 소중한 임을 가슴으로 따뜻하게 재확인했다."나도 사랑해요, 지완 씨. 세 번째 기적을 만날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요."서로를 향한 무한한 신뢰와 치유의 고백이,분만 병실의 모니터 음 사이로 애달프게 퍼져 나갔다."크흠.. 음흠....그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게냐? 우리도 아기 얼굴 좀 보자꾸나."셋째의 울음 소리를 들으며 서로를 껴안고 눈물 흘리던 가족들 사이로, 서 대감이 더는 참지 못하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비극으로 시작되었던 두 사람의 인연은 이제 단 한 줌의 상처도 남기지 않은.완전한 축복의 패밀리의 이야기로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서 교수님. 제왕절개 수술방 준비 완료해 두었습니다. 안주인 마님과 서 대감 어르신도 곧 로비에 도착하실 겁니다."한국대 본원 산부인과 최고급 프라이빗 분만 센터. 지완은 바쁜 걸음으로 수아가 있는 병실로 향했다."수아, 여보.. 수술방은 준비가 잘 되었어요. 이제 당신만 준비되면..""지완씨, 여보. 전 수술 안 해요. 자연분만 할 수 있어요. 어렵다는 쌍둥이들도 자연 분만으로 낳은 몸이예요. 걱정할 거 없어요.""아니... 당신, 그 힘들고 아픈 고생을 또 겪는 걸 내가 지켜 볼 자신이 없어요. 그러니... 제발, 수술 합시다. 한 숨 자고 일어나면 아기는 태어나 있을거야..""지완씨, 여보.. 수술이 더 무서워요. 마취하는 것도 싫고. 아기가 스스로 세상에 잘 나오도록.... 그리고... 사실... 진통 시작한지 좀 되었고, 조금 전에 양수도 이미 터졌어요..."지완이 눈을 크게 뜨고 놀라서 침대 옆의 비상벨을 눌렀다."아니, 그건 왜 눌러요? 지금 비상상황은 아닌데... 그냥 진통이 시작 되었다고 간호사에게 말만 하면 될것을..."VIP병실의 비상벨에 놀란 의료진들이 허겁지겁 달려 들어오자 수아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의사가 NST 검사 그래프를 보고 놀라서 물었다,"산모님, 언제부터 배가 아프셨어요? 지금 어느 정도 아프신지...""배가 사르르 한 느낌은 한 2-3시간 전이었던 것 같고, 양수 터진지 한 15분 쯤 된것 같아요. 양수가 터진뒤로 진통이 급격히 심해 졌구요.""하.. 잠시만요. 내진 좀 할게요."간호사들이 가림막을 세우고 의사가 수아의 다리 사이을 확인하려고 얼굴을 가까이 하다내진도 않고 바로 나왔다."내진도 필요 없겠네요. 벌써 7-8cm 열려서 아기 머리가 살짝 보이는 상태예요.""네에...??"수아와 지완이 동시에 놀라서 되물었다."여기서 바로 출산 하실 수 있게 출산 베드를 가져 오겠습니다.""아니... 수술을...""교수님, 사모님은 출산 체질이실가봐요.
시간은 화살처럼 흘러 마침내 셋째가 임신 34주 차가 외었다.첫 쌍둥이가 임신 34주 차에 윤서희의 납치 위협과 조기 진통으로피와 양수 범벅이 되어 병원으로 질주했던 악몽 같은 기억이수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하지만 이번 임신의 34주차는 완전히 달랐다.한남동 레지던스 침실은 아늑하고 평온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사방에는 가문의 경호원들이 개미 한 마리 얼씬 못 하게삼엄하고도 안전한 방패를 두르고 있었다.윤서희는 이미 교도소 독방에서 완벽한 파멸의 형기를 채우는 중이었기에.그 어떤 방해꾼도 존재하지 않았다.2주 뒤..."..............어디 아픈 곳이나 불편한 곳은 없어요, 수아?"지완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수아의 만삭인 배를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어루만지며몇 번이고 수아의 안색을 꼼꼼히 살폈다.그의 손가락 끝은 여전히 조심스러웠지만,과거의 공포 기억은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았다."괜찮아요, 지완씨. 이번에는 아기도 아주 얌전하고, 내 옆에는 나의 남편인 당신이 이렇게 지켜주고 있잖아요."수아가 지완의 단단한 손을 꼭 맞잡으며 환하게 웃었다.첫 출산의 트라우마를 남편의 지독한 과보호와 사랑으로완벽하게 극복해 낸 순간이었다.지완은 고개를 숙여 수아의 부푼 배 위에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이제 2주만 지나면 우리의 세 번째 기적이 세상 밖으로 나오네요.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당신의 출산 길을 가장 아름답고 평화롭게 만들어줄 테니, 나만 믿어요, 여보."의무가 아닌 완전한 신뢰로 묶인 두 사람의 숨소리가,출산의 피날레를 향해 가장 따뜻하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술을 마신 지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지완은 몸 안쪽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이상 열기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단순한 취기가 아니었다. 척추를 타고 올라온 뜨거운 불길이 뇌를 난도질하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고, 거친 숨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눈앞이 흐려지고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지르며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서지우. 술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지완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지우의 덜미를 잡으려 했지만,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형, 미안. 근데 형을 위해서야.
“엄마, 대박 사건이라니까? 형이 여자한테 눈이 돌아갔어. 그것도 아주 제대로.” 서울 성북동의 거대한 저택, 서지우는 수화기 너머의 어머니에게 흥분된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지방의 한 한적한 카페 구석, 지우의 손에는 채원의 신상명세서와 조사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강수아, 스물둘. 지방 국립대 농업생명과학과 과수석. 부모 없이 홀로 키워준 이모의 교통사고 수술비를 대기 위해 잠시 밤거리로 흘러든 불쌍하고 올곧은 여자. 평생 얼음 조각 같던 형 서지욱이 매일 밤 노래방 구석에서 그 미련한 짓을 하
서지우는 제 친형인 서지완을 한 번도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형은 가문의 완벽한 피조물이자 오차 없는 기계였다. 부모님조차 형을 자식이 아닌 가문의 간판으로 대했고, 지우 역시 늘 대단한 형의 그늘에 가려져 방탕한 둘째 도련님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가문에는 철저히 숨겨진 비밀이 있었다. 형 지완은 아주 어릴 적 앓았던 큰 병의 후유증으로 인해, 선천적으로 이성에게 반응하지 못하는 데다가 그 병으로 인해 아이를 갖기 힘든 몸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집안 어른들이 기를 쓰고 명문가 딸인 윤서희와 형을
“은수아 학생. 출석 안 합니까?” 강의실을 채운 백여 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의 뒷덜미에 꽂혔다. 하지만 수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귓가에서 거대한 이명이 일었다. 단상 위에 서 있는 남자. 은테 안경 너머로 지독하려치만 냉정하게 빛나는 저 눈동자. 맞춤 수트를 자로 잰 듯 차려입은 한국대 식물생명공학과 교수, 서지완. ‘말도 안 돼.’ 수아의 손끝이 작게 떨렸다. 온몸의 피가 바닥으로 웅덩이치며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저 목소리를 안다. 저 단단한 어깨를, 제 살결을 파고들던 그 뜨거운 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