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을 두 번째로 보는 도우미 아주머니는 전혀 의아해하지 않고 지난번보다 더 친절하게 대했다.연정훈이 돌아오기 전에 어떤 브랜드 매장에서 옷을 가득 보내왔다.겉옷과 치마부터 속옷과 소품까지 빠진 것이 없었다.좀 피곤했던 안시연은 원래 두 벌만 고르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연정훈의 흥을 깨뜨릴 것 같았다.결국 그녀는 옷장을 가득 채웠고, 잠옷도 10여 벌 골랐다.그러는 사이에 8시가 다 됐다.어둠이 짙어지고 정원에 부드러운 노란색 불빛이 켜진 후에야 연정훈은 집에 들어섰다.식탁 위에는 요리들과 두 쌍의 수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아담한 체구의 안시연은 흰색 샤스커트 차림으로 발만 살짝 드러낸 채 담요를 덮고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연정훈이 최대한 가볍게 걸었는데도 그녀는 인기척을 듣고 잠에서 깼다.눈을 뜬 그녀는 연정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키며 담요를 젖혔다.“오셨어요?”연정훈은 그녀가 강남시티에 돌아온 것을 알면서도 밖에서 일할 때는 그녀 생각을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에 들어서기 직전에 발걸음이 빨라졌다.그녀의 부드러운 한마디에 연정훈은 마음이 간질간질했다.역시 집에 식구가 늘어난 느낌은 좋았다.“왜 올라가 자지 않고?”안시연은 코트와 넥타이를 받아서 옷장에 넣은 후 말했다.“당신이 오는 것도 모르고 계속 잘까 봐 걱정돼서요.”“그럼 뭐 어때?”연정훈은 그녀를 껴안고 자연스럽게 말했다.“자고 있으면 되지. 내가 방에 돌아가면 부를 텐데.”“저를 부른다고요?”안시연은 연정훈을 올려다보며 일부러 장난쳤다.“제가 아까워서 편하게 자라는 뜻인 줄 알았어요.”연정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소매의 단추를 풀면서 식탁 위의 요리를 훑어보았다.“저 많은 요리를 혼자 소리 없이 먹기는 아깝잖아.”안시연은 연정훈이 말한 것이 요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아주머니는?”“쉬라고 했어요.”안시연은 말하면서 가스레인지를 켜서 국을 데우고 밥을 펐다.연정훈이 먹고 싶은 건 그녀인데, 그녀는 밥을 퍼놓고 팽이처럼
예쁜 접시에 먹기 편한 크기로 잘랐거나 껍질을 벗긴 과일들이 담겨 있었고, 심지어 포도도 껍질이 벗겨져 있었다.연정훈은 소파에 앉아 안시연의 분주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녀가 포크로 과일을 찍어주려 할 때쯤 연정훈은 노트북을 내려놓고 그녀를 불렀다.“시연아.”안시연은 멜론을 손에 든 채 그를 돌아다보았다.남자는 한 손으로 그녀를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교수님...”연정훈은 그녀의 손에 있던 멜론을 먹고, 포크를 옆에 있는 접시에 던졌다.쨍그랑! 안시연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박거렸다.‘화 나셨나?’연정훈은 천천히 씹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입맛부터 사로잡아야 한다는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잠시 논하지 않겠다. 하지만 시연 학생, 교수님이 정확히 알려줄 수 있는 건 남자의 위에 담을 수 있는 음식물의 양이 제한돼 있다는 거야.”“...”안시연이 입을 벌린 채 말을 못하고 있을 때, 남자가 먼저 벌칙으로 그녀의 턱을 꼬집었다.“식탁에서 국 두 그릇을 먹이고 욕실에서 사탕수수 주스 한 잔을 먹이고.”그는 접시에 가득 담긴 과일을 보며 말했다.“아직도 부족해?”안시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설명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무슨 말을 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이런 작은 일에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당신을 잘 보살피려고...”말이 끝나기 바쁘게 그녀의 허리를 휘감은 남자의 팔에 힘이 실렸다. 남자는 그녀의 턱을 잡더니 그녀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포갰다.입술과 혀가 빨려 들어가면서 멜론의 달콤함이 그의 혀끝을 따라 넘어왔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남자의 어깨에 매달렸다. 강한 남성적 기운이 그녀를 완전히 감쌌다. 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다리를 모으고 나른하게 남자의 품에 기댔다.그녀의 입속을 구석구석 누빈 후 연정훈은 동작을 멈추더니 쉰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이렇게 보살피면 돼. 다른 건 쓸데없이 하지 마.”“...”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알았다고
안시연은 얼굴이 새빨개졌다.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우물거리며 말했다.“내일 병원에 갈게요.”그러자 연정훈이 그녀에게 뽀뽀를 했다.“가는 김에 보약도 좀 처방받아.”“네?”안시연은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저 건강해요.”“건강하다고?”연정훈은 그녀를 일으켜 앉히며 말했다.“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데.”안시연은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이런 꼴을 하고 있으니 차마 손을 댈 수 없잖아.”“...”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교수님은 목적성이 너무 강해요.”연정훈은 씩 웃으며 손바닥으로 그녀의 허리를 끈적하게 눌렀다. 이어서 하얀 치마가 벗겨졌다. 안시연은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의 품에 안긴 채 머리를 어깨에 개대고 얼굴을 돌렸다.남자는 티가 없는 아름다운 옥을 다루듯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안시연은 손가락을 깨물며 가볍게 끙끙거렸다.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린 후, 볼에 뽀뽀했다. 그 와중에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입가의 상처는 다 나았어?”안시연은 그가 뭘 암시하는지 알았다.그녀의 입가에 있던 상처가 이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주효진에게 뺨을 맞은 흔적이 사라지는 데는 하루로 충분했다.그녀가 대답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이미 그녀를 카펫 위에 내려놓았다.그녀는 그의 두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소파에 기대어 앉은 남자의 살짝 열린 옷깃 사이로 단단하고 다부진 몸매가 은근히 드러났다. 그는 욕망에 찬 눈으로 안시연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조급해하지는 않았다.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그는 정사에서도 여유로워 보였다.그녀의 몸을 염려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괜찮은 인간이다.그녀는 연정훈이 욕망을 억누를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그녀는 묵묵히 일어나 소파 가장자리에 무릎을 꿇고 그의 몸을 넘어 뒤에 있는 작은 스탠드를 껐다.실내가 어두워진 후 그녀는 연정훈의 목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면서 키스하기 시작했다.-이튿날 아침, 안시연이 눈을 뜨니 욕실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러시아워 시간대의 지하철에서 안시연은 아침 식사 때의 상황을 떠올렸다.연정훈과 가장 익숙할 때는 아마 침대 위에 있을 때일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침대에서 내려오면 그 남자는 냉담했다.하지만 원래부터 연인 사이가 아니니까 상관없다. 그는 그녀의 육체를 원하고 그녀는 그의 권세와 돈을 원하니 누구도 손해 보는 것은 없다.그녀는 회사에 들어갔고, 점심 때쯤 진수빈이 전화로 어떤 집과 차를 좋아하는지 물었다.“자그마한 집에, 튀지 않는 차로 해주세요.”“50평 정도의 집에, 8,000만 원 정도의 차로 하면 될까요?”“...”진 비서는 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무슨 오해가 있는 건가?“혼자 살 거니까 10여 평짜리 원룸이면 충분하고, 차는 4,000만 정도 가격대면 될 것 같아요.”진수빈이 씩 웃었다.“농담이시죠?”안시연은 말을 잇지 않았다. 그녀가 사는 곳에 연정훈도 갈 거니까 완전히 그녀의 기준에 따를 수는 없다.“알아서 하세요. 저는 다 좋아요.”“네.”오후에 회사에서 나와 병원에 가기 전에 외할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빨리 와. 너의 시부모님이 오셨어.”기쁨에 겨운 외할머니의 말을 듣고 안시연은 가슴이 철렁했다.주지혁과 결혼 얘기가 오갔기 때문에 외할머니가 말하는 시부모는 당연히 주지혁의 부모다.그녀는 주지혁의 의도를 알 수 없어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병실 밖에 도착하니 안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안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박미연이 반갑게 맞이했다.“시연아, 이제 퇴근해?”주씨 집안이 이전에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주지혁의 부모님은 동년배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중년 여성의 소박하고 진심 어린 눈빛을 보며 안시연은 한순간 마음이 헷갈렸다.그녀가 인사하자, 박미연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유능하다고 한바탕 칭찬했다.“시연이 더 예뻐졌네.”그녀는 말하면서 안시연의 옷을 훑어보았다.“이 치마도 예쁘네.”안시연은 침묵했다.그녀가 입은 것은 엄청나게 비싼 새 치마였다.박미연은 알아본 눈치다.
안시연은 화가 나다 못해 헛웃음이 나왔다. 주씨 집안의 사실 왜곡 능력은 대대로 전해 내려온 것이 틀림없다.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또박또박 말했다.“주효진이 회사에서 잘린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고 저와는 상관없습니다. 주지혁의 사업에 관해서는 더더욱 모릅니다. 신분 상승을 했으니 좋든 나쁘든 다 그 사람 일이죠.”박미연은 화를 냈다.“시연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하룻밤 부부라도 그 정은 오래간다고 했는데.”“저는 주지혁과 부부였던 적이 없습니다.”박미연은 할 말이 없었다.전혀 먹히지 않자, 그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우리 지혁이 쉽지 않은 거 너도 알잖아. 부지런하고 착실하게 일해서 여기까지 왔어. 시연아, 너는 젊고 예뻐서 얼마든지 대단한 사람을 만날 수 있겠지만 지혁이는 너와 달라.”“지혁이 그동안 너의 외할머니를 돌봐드렸던 것을 봐서라도 너그러이 용서하고, 그 사장님한테 우리 지혁이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고 해줘.”주지혁이 부지런하고 착실하다고? 안시연은 역겨워 토할 것 같았다.주지혁이 변심하고 권세 있는 사람에게 빌붙은 것이고, 그녀는 단지 반격했을 뿐인데, 박미연은 모두 그녀의 잘못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안시연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이를 본 박미연은 급히 그녀를 잡았고, 옆에 사람들이 있는데도 무릎을 꿇으려 했다.안시연은 깜짝 놀랐다.“시연아, 제발 도와줘.”“엄마!”박미연이 무릎을 꿇기 전에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 나는 쪽을 보니 주지혁과 주효진이 왔다.주효진은 눈에 쌍불을 켜고 달려오더니 박미연을 일으켜 세운 후 안시연에게 욕설을 퍼부었다.“양심이 있어? 우리 엄마가 그래도 어른인데.”허! 안시연은 입을 삐죽거렸다.주지혁이 외할머니를 가지고 협박할 때는 외할머니를 어른이라고 생각했었나?박미연은 작은 소리로 흐느끼며 여전히 안시연에게 사정했다.주지혁이 앞에 나서며 미간을 찌푸렸다.“엄마, 소란을 피우지 마세요.”박미연은 눈 밑이 거뭇한 아들을
“너 정말 연정훈과 사귀어?”주지혁의 질문에 안시연은 부인하지 않았다.주지혁은 눈을 감고 몹시 마음 아파했다.“시연아.”“돌아서라고 설득하고 싶다면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구역질 날 뿐이니까.”주지혁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내뱉지 못했다.그는 안시연이 어느 날 이렇게 변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그는 쓰라린 감정을 억누르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너를 말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진짜 모습을 알려주려는 거야.”안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그 사람이 너의 목숨을 살려주는 마지막 지푸라기 같지?”주지혁은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안시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말을 이었다.“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위선자야. 그동안 너에게 관심이 없는 척했어. 강 건너 불구경하면서 네가 궁지에 몰려 제 발로 찾아오길 기다린 거야.”안시연이 사무실에서 연정훈에게 키스하는 순간, 그는 자기가 직접 안시연을 연정훈에게 밀어냈다는 것을 알았다. 연정훈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안시연은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연정훈이 자기에게 어떤 감정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다. 육체적인 관계일 뿐,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다.그렇다면 그가 수단을 좀 썼다고 해서 크게 비난할 것은 없다.“그 사람이 위선적이라고? 난 상관없어. 당신이 그 사람을 비난할 자격도 없고. 어쨌든 나를 압박하라고 당신 목에 칼을 들이댄 사람은 없었으니까.”주지혁은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후회막급이었다.“내 방식이 잘못됐지만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이야.”그는 안시연을 바라보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연정훈이 너를 위해 효진을 해고하고 내가 진행 중인 몇 개 큰 프로젝트를 망쳐버렸는데, 이 모든 것은 단지 자기 권리를 과시해 네가 순순히 말을 듣게 하기 위한 거야.”안시연은 놀랐다.“연정훈이 네가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망쳤다고?”그녀가 모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주지혁은 잠시 눈빛이 흔들리더니 이어서 말했다.“기다려 봐. 며칠 있으면 알려줄 거야. 그걸 가지고 너를 감지
양혁수는 휴대폰을 맞은편의 귀부인 앞에 던지고는 건들거리며 턱을 치켜올렸다.“보세요. 굉장한 미녀예요.”양지원은 여자가 뺨을 때릴 때부터 끝까지 아래층의 해프닝을 구경했다.그녀는 권력자에게 빌붙는 이런 여자를 질색하는데, 연정훈과 연관이 있을 줄이야.그녀는 50대의 나이에도 관리를 잘해서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별로 남지 않았고 30-40대로 보이는 얼굴에는 도도함과 부티가 철철 흘렀다.눈앞의 싸구려 커피를 그녀는 입에도 대지 않았고 물 한 잔만 마셨다.아들의 휴대폰에서 동영상을 힐끗 훑어본 후 그녀는 이마를 찡그렸다.양혁수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의자에 기대앉아 시비를 걸었다.“이 여자가 이렇게 매혹적인 외모에 뺨을 때린 것으로 봤을 때 성깔도 장난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연정훈이라도 그녀의 손에 죽고 싶었을 거예요. 이렇게 강력한 경쟁상대가 있는데도 양민아를 연정훈에게 시집보내고 싶어요?”양지원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누나 일에 참견하지 말고 너나 잘해.”양혁수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거칠고 버릇없이 행동했다.양지원은 휴대폰을 던져주며 센 말투로 말했다.“누나한테 전화해서 언제 도착하는지 물어봐. 벌써 15분이나 늦었어.”“알았어요.”-정인그룹의 어느 탁 트인 공간,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왔다.“연정훈이 나를 사랑하든 말든 상관없어.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연정훈은 탁자 옆에 앉아서 아무 감정 기복이 없는 덤덤한 얼굴로 자사호를 들고 최고급 차를 찻잔에 따랐다. 차향이 사방으로 퍼졌다.그의 어깨 너머로는 강향단 나무가 파릇파릇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그는 차를 마신 후 몸을 뒤로 기대며 휴대폰의 영상을 정지시켰다.그때 전화가 울렸다. 남자가 휴대폰을 집어 들자, 손목에서 시계가 번쩍번쩍 빛났다.일어나서 창가로 간 그는 몸을 곧게 세우고 약간의 장난기가 담긴 말투로 입을 열었다.“지원 이모, 모처럼 경인에 오셨는데, 제 체면부터 깎네요?”“어찌 감히 우리 연 대
안시연은 똑똑하고 자기 처지도 잘 알지만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아주머니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도 마음속으로 살짝 기뻤다.브랜드 매장 직원은 조심스럽게 말을 아끼면서 그저 안시연에게 보석의 디테일을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2019년 4월 17일 연정훈 씨가 이 스타티스-라벤더 목걸이를 주문하셨습니다. 메인 보석은...”직원이 목걸이 정보를 자세히 알려주었다.2019년이라는 말을 들은 아주머니는 안색이 변하더니 문득 안시연을 쳐다보았다.안시연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확인이 끝나셨으면 사인해 주세요.”직원의 말에 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사인했다.화려하고 값비싼 보석 목걸이를 그녀는 그저 슬쩍 엿보았다. 2019년 그 당시 연정훈은 그녀에게 아주 먼 전설에 불과했다.이 목걸이는 그녀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직원이 떠난 후 아주머니는 조리대 뒤에 서서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시연 아가씨...”안시연은 방긋 웃으며 보석을 내려놓았다.“괜찮아요. 교수님이 돌아오시면 제가 말씀드릴게요.”아주머니는 머쓱해하며 대답하더니 더 이상 참견하지 않았다.안시연은 차분하게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그 목걸이에 대한 생각뿐이었다.‘그 목걸이의 주인은 누굴까?’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그녀가 일어나서 문어귀로 가니 연정훈이 밖에서 들어왔다. 옷에서 살짝 술 냄새가 나고 얼굴은 멀쩡한 것을 보니 오늘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은 것 같다.“뭐 좀 드시겠어요?”안시연이 묻자, 연정훈은 손목시계를 풀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헐렁한 셔츠와 옅은 색의 프린트 스커트 차림에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는 마치 그림 속의 사람처럼 아름다웠다.살뜰히 챙기는 것을 보고, 모르는 사람은 그녀가 연정훈을 깊이 사랑한다고 생각할 것이다.그는 어젯밤처럼 그녀를 끌어안고 물었다.“뭐 했어?”“너무 늦었어요. 제가 만둣국을 끓여드릴까요?”안시연이 어깨에 기대자 남자는 그녀에게 키스했다.“좋아.”안시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