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혁수는 변여름에게 조금의 체면도 남겨주지 않았지만 변여름은 끝내 그에게 손목시계를 선물로 남겼다.그녀가 변씨 가문의 군수 공장을 떠나기 전에 직접 만든 시계였다. 정교한 내부 구조를 갖추었으며 변씨 가문의 안전망과 연결되어 있어 자기방어는 물론 위급 시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양혁수는 시계와 봉투를 받아들었지만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채 서재 서랍에 넣고 잠갔다.사실 봉투 안에는 다른 것이 없었고 오직 시계 사용 설명서만 들어 있었다.변여름은 언제나 양혁수가 쉽게 속고 더 철저한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떠났지만 변여름은 그가 평안하길 바랐다.이 뜻밖의 재앙은 갑자기 찾아왔다가 또 흔적 없이 사라졌다. 양혁수는 두 달 동안 무료 점심을 얻어먹었지만 대가는 포장이 조금만 단순해도 불편함을 느끼고 입맛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그는 10일 넘게 집에서 식사를 거르며 끝없는 술자리 속에서 양식을 지겨워서 토할 것 같을 때까지 먹었다.제대로 먹지 못하니 잠도 오지 않았고 기분은 더욱 나빠졌다.그렇게 양씨 도련님은 서른네 살의 나이에 다시 어린아이처럼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보름을 버티던 그는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회사도 가지 않으며 집에서 있었다.이를 심각하게 여긴 집사는 조용히 양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양지원은 정확한 사정을 알지는 못했지만 변여름이 갑자기 떠났다는 이야기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그녀는 양혁수에게 직접 연락하지 않고 곧장 변백호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물었다.형제끼리 숨기고 싶은 창피한 일일 텐데 과연 변백호가 솔직히 털어놓을까 싶었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양지원은 10분 동안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속으로 연애는 역시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하는 그것으로 생각하며 변여름에게 손뼉을 쳤다.그녀는 망설임 없이 바쁜 양석진을 뒤로하고 사랑의 상처에 빠진 불쌍한 양혁수를 만나러 한강시로 향했다.한낮이었지만 양혁수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양지원은 가볍게 문을 두드렸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야? 회사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양지원은 모르는 척했다.양혁수가 양지원을 바라보자 그녀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양혁수는 콧방귀를 뀌었다.“...쳇.”양지원은 어이없었다.“...”‘이 녀석.’그녀는 혀를 차더니 휴지를 던져 그의 어깨를 툭 쳤다.‘누구한테 감히 쳇이야?’양혁수는 차갑게 말했다.“변백호, 그 입이 가벼운 놈이 또 다 말했죠?”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꽤 영리하네.’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더 이상 숨기지 않고 구경이라도 하듯 미소를 지었다.“왜? 변여름한테 당해서 마음 아파 집에 틀어박힌 거야?”양혁수는 인정하지 않았다.“대표는 연차 써서 그냥 쉬고 싶을 때 쉬는 거예요.”‘아무 이유도 없어.’양지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변여름과는 무관해?”“꼬맹이 하나 때문에 내가 진지할 이유 없어요.”“그래.”양지원은 가방에서 초대장을 꺼내 그의 얼굴 옆에 툭 내려놓았다.양혁수는 흘끗 보았다.“뭐예요?”“변씨 가문의 둘째 아들 결혼식이야. 한 번 가봐.”양혁수의 머릿속을 변여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별다른 고민 없이 거절했다.“안 갈 거예요.”“왜?”“귀찮아요.”“우리 두 집안이 가까운 사이인데 네가 안 가면 보기 좋지 않아.”양지원은 느긋하게 말하다가 문득 말투를 바꿨다.“아니면 변여름을 마주칠까 봐 가기 싫은 거야?”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입을 열려고 했지만 양지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아니지. 꼬맹이가 장난을 친 것뿐이야. 너는 어른이잖아. 그렇게 옹졸하게 굴지 마. 한번 가서 축하도 해주고 그 아이가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안심시켜.”“말이 쉽죠.”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반박했다.양지원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쳐다보았다.양혁수는 잠시 멈칫하며 이마에 주름이 더 깊어졌다.양지원은 그가 이렇게 답답해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고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내가 틀린 말 했어? 별일 아니잖아. 아니면...”그녀는 갑자기 비웃는 듯한 말
양혁수는 결국 변씨 가문에 가기로 결심했다. 양지원의 역지사지 전략 때문도 아니었고 변여름 때문도 아니었으며 변백호 때문이었다.그는 친구가 많지 않았고 그중에서도 변백호는 높은 위치에 있었다.10년 넘게 쌓아온 우정이 변여름의 장난 때문에 틀어질 이유는 없었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지 않으면 아마 변여름을 만날 일도 없을 것이고 단지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뿐이었다. 11월이 되자 날씨가 적당해졌다.그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변백호가 직접 그를 마중 나왔다.변백호를 만나자마자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양혁수는 짐 가방을 변백호에게 던지고 마치 대장처럼 앞장서서 걸어갔다.변백호는 이미 익숙했다. 예전에도 그의 건방진 태도를 참아냈고 이번에는 여동생이 사고를 쳐서 약간 찔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짐을 들어주는 정도는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공항을 나서자 양혁수는 뒷좌석으로 향했다.그때 두 명의 인형 같은 아이들이 나타났다.“안녕하세요.”달콤한 목소리로 동시에 인사를 건넸다.양혁수는 전혀 배려하지 않고 쾅 소리와 함께 차 문을 닫고 조수석으로 향하며 차에 탄 변백호에게 불쾌한 시선을 보냈다.변백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꼭 따라와야 한다고 해서 달래도 소용없었어.”양혁수는 말이 없었다.노지혜가 낳은 이 두 아이는 마치 악마의 화신 같았다.지금은 여섯 살이지만 몇 년 전에 아주 어렸을 때 알록달록한 큰 거미를 들고 변백호의 베개 밑에 숨겨 놓았다. 한밤중에 변백호 거의 기절할 뻔했다.양혁수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내내 졸면서도 신경은 예민했다.이상하게도 이 두 아이는 내내 조용했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변백호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두 아이는 각자 카메라를 들고 양혁수를 계속 찍고 있었다.“너희 뭐 하는 거야?”작은 여자아이 하니가 먼저 대답했다. 목소리는 달콤하고 순수하며 설탕을 입힌 사과 같았다.“마크가 영상을 찍으면 고모랑 뭐든 바꿔줄 수 있다고 했어요.”작은 남자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양혁수가 움직이지 않는 틈을 타 그의
변여름은 정말 집에 없었고 양혁수는 도착한 지 하루가 다 지나도록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변씨 가문에는 가족 인수가 많아 평소에는 모이기 힘들었지만 이번에는 온 가족이 모두 모였다.양혁수는 예전에 해외에 있을 때 변씨 가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성격이 잘 맞아 변백호의 어머니는 그를 아들처럼 여겼고 양혁수는 자신을 낯선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고 변씨 가문에 오면 자유롭게 행동했다.이번에는 달랐다. 변여름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양혁수는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았다. 그는 가장 한적한 방을 요구했고 결혼식 전까지는 운동하고 식사하는 것 외에는 혼자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변씨 가문 사람들을 최대한 피했다.결혼식 전날 저녁 양혁수는 야외 수영을 마친 뒤 식당을 지나가다가 가까운 가정부에게 식사를 방으로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나오는 길에 마침 변여름과 마주쳤다.그는 흰색 긴 잠옷을 입고 간단한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머리는 축축하게 젖어 물이 뚝뚝 떨어졌다.변여름은 긴팔 옷과 긴 바지를 입고 책가방을 메고 있었으며 품에 책을 안고 있었다.두 사람이 마주치자 잠시 멈칫했다.양혁수는 변백호의 말을 듣지 말고 호텔에 머물러야 했다고 후회했다.그는 입술을 꽉 깨물며 어른다운 품위를 지키려 애쓰며 먼저 말을 걸려고 했다.그런데 변여름은 아무 말 없이 그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를 한 후 빠르게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양혁수는 그 자리에 서서 앞으로 떨어지는 두 장의 나뭇잎을 바라보았다. 어이없다는 생각이 최고조에 달했다.‘칙.’불쾌한 표정을 짓고 그는 병뚜껑을 열어 물을 반 컵 마시며 얼굴을 찌푸린 채 위층으로 올라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변백호가 그를 술자리에 초대했다.양혁수는 짜증이 났지만 두 잔 정도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변씨 가문의 와인 저장고는 엄청나게 컸다. 안팎으로 세 겹으로 되어 있었고 마치 도서관 같았다.두 사람은 직접 내려가 와인을 고른 뒤 양혁수는 가장 비싼 와인만 골랐다.와인을 들고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
변백호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양혁수는 이런 변백호를 옆에 꼭 잡아 두고 계속 타자를 했다.[그러니까. 너한테 그런 재주가 있을 리가 없지.]“...”변백호는 길게 한숨을 내뱉고 핸드폰을 빼앗아 들더니 토독토독 타자를 했다.[대단한 실력자이신 네가 그럼 우리 가문 유전자 개량에 힘 좀 써보지 그래?][그러니까 내 매부가 되어줘.]그리고 서늘한 미소를 짓는 이모티콘까지 덧붙였다.양혁수는 코웃음을 치며 휴대폰을 되찾아왔고 아래층에서 여전히 소녀들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난 엄마가 하도 눈치를 줘서 도운 것뿐이에요.”“엄마가 그러는데 오빠가 지혜 씨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으니 나더러 오빠가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어 주라고 했단 말이에요.”양혁수는 옆에 앉아 있는 변백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고 눈빛엔 장난기가 스쳤다.변백호는 무표정하게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노지혜는 집요하게 변여름을 부추겼다.“바로 그거야! 어쩌면 혁수 씨도 그런 구실이 필요할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내 말 대로 먼저 혁수 씨 마음을 잡고 다시 내 방법대로 해.”“거절할게요.”“왜?”“내가 오빠를 많이 좋아하니까요.”소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며 그냥 사실을 말하는 듯했지만, 그 안엔 단단한 확신이 배어 있었다.“난 오빠가 정말 좋아요.”변여름이 한 번 더 강조하자 노지혜는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재미없어.”“좋아하면 그냥 덮쳐야지.”“싫어요. 혁수 오빠가 싫어할 거예요.”“너 진짜 재미없다.”노지혜의 한숨 섞인 투정과 함께 순간 침묵이 흘렀다.조금 전까지 변백호를 놀리던 양혁수는, 예상치 못한 변여름의 고백에 바짝 굳어버려 변백호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변백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미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양혁수를 바라보았다. 아까 자신이 당한 걸 그대로 돌려주는 듯한 얼굴이었다.그리고 휴대폰을 꺼내는 것도 귀찮았는지 변백호는 다시 양혁수의 폰을 빼앗았으며 잠금 해제를 하고 재
와이너리.노지혜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위층을 확인하더니 여유롭게 머리카락 한 올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두 사람 떠났어.”변여름은 테이블에 엎드린 채로 노트북을 조작했고 영상을 앞으로 당겨 양혁수와 변백호가 투덕거리는 장면을 되돌아봤다.노지혜도 관심을 보이더니 콕 집어 이렇게 말했다.“백호 오빠가 이겼네.”변여름은 노지혜를 힐끗 쳐다보았고 노지혜는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변여름은 안 보여줄 거라는 듯이 아예 노트북을 옆으로 밀어버렸다.“...”“아, 근데 말이야. 네가 고백했을 때 혁수 씨 반응 어땠어?”변여름은 턱을 괴고 다시 영상의 타임라인을 조정했다. 이번엔 양혁수가 카메라를 쳐다보던 순간을 되돌려보았다.“우리한테 들킨 거 알고 있었네.”“어쩐지 네가 심하게 오글거리더라.”변여름은 아무렇지 않은 듯 굴었지만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그러게 왜 날 그렇게 매몰차게 밀어낸 거야.’‘난 그냥 고백만 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것도 못 하게 하고. 흥’노지혜가 다시 다가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근데 이제 두 사람 모두 자리 비웠는데 약 정말 줘?”“음... 일단 지혜 씨가 갖고 있어요.”노지혜는 단번에 눈치챘고 변여름의 어깨를 감싸안더니, 귀에 대고 더 위험한 계획을 속삭였다.변여름은 순진한 얼굴로 연신 손을 휘저으며 거부 의사를 표했지만 눈이 반짝거렸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일부러 그랬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질질 끌지 않고 고백 같은 건 아예 못 하게 단칼에 잘라, 최대한 빨리 집에 돌려보냈다.하지만 변여름은 꼭 끝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그래서 할 수 없이 양혁수는 변여름을 애써 모른 척했다. 평소처럼 행동하면서 결혼식이 끝나는 대로 곧장 떠날 계획을 세웠고 앞으로 엮일 일은 절대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그런데, 밤에 혼자 있으면 자꾸 변여름 생각이 났다.‘대체 내 어디가 좋다는 거야?’‘몇 년 동안 얼굴도 자주 못 봤고... 그때는 완전 어린애였는데?’어린아이의 짝사랑이니 그렇지 상
양혁수가 변여름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지만 그 이후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자신을 계속해서 훔쳐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심스럽지만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시선이었다.그때 음악이 울려 퍼지며 결혼식이 시작되었다.양혁수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어디에서 차를 탈 거냐는 비서의 질문에 답장을 보냈다.식장은 축복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신부가 드디어 신랑 앞에 마주했고, 주례는 뻔한 멘트를 읊기 시작했다.양혁수는 시큰둥했다. 아침부터 그 쌍둥이들한테 시달려서인지 아직도 정신이 혼미했다.미간을 지그시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변여름이 양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어설프게 각도를 조절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충 봐도, 자기랑 같이 찍히려고 하는 것 같았다.휴대폰 화면에 뭐가 찍혔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변여름이 잠깐 동작을 멈춘 걸 보니, 마침 양혁수가 쳐다보는 순간이 찍힌 모양이었다.스크린 속에서 서로의 시선이 맞닿는 묘한 순간 변여름이 망설이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찰칵!양혁수는 변여름의 뻔뻔한 태도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피식 나갔다.그렇게 두 사람은 말없이 몇 초간 시선을 마주했다.그런데 그때.콰과광!귀청이 찢어질 듯한 폭발음이 식장을 뒤흔들었다.순간적으로 엄청난 충격이 몰아쳤고, 사방에서 날아온 파편들이 양혁수를 비롯한 주변의 하객들을 노렸다.그리고 비명과 구조 요청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폭탄이야!”정신을 차린 양혁수는 힘겹게 몸을 지탱하며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아직 경호원들이 도착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오빠! 이쪽으로 가요!”변여름이었다.지금은 시시비비를 따질 때가 아니었고 양혁수는 곧장 변여름을 따라 움직였다.하객들은 모두 호텔 밖으로 도망치고 있었지만 변여름은 반대로 움직였다. 양혁수를 데리고 호텔 내부로 들어가, 가장 외진 길을 선택해 빠르게 이동했다.그리고 무선 장비를 이용해 가족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전원이 무사하다는 걸
“그럼 뭐라고 말해야 하나요?”“무조건 괜찮다고 말하세요. 만약 문제 생기면 본인의 눈을 대신 주겠다고 말이에요!”양혁수가 눈을 뜨기도 전에, 먼저 들려온 건 노지혜가 의사를 윽박지르는 소리였다.양혁수는 천천히 몸의 감각을 확인했다. 팔다리는 멀쩡했고, 감각도 정상이었다. 다만 눈앞이 온통 어두웠지만 실명한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 문이 열렸고 들어온 사람은 변여름이었다. 변여름은 들어오자마자 노지혜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의사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아무 문제없습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제 눈을 바치겠습니다!”“...”이제 변여름이 대답할 차례였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대신 종이를 넘기는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렸다.한참 후에야 변여름이 입을 열었다.“됐어요. 이제 가보셔도 돼요. 여긴 제가 있을게요.”“네네! 알겠습니다!”의사는 마치 해방이라는 듯 밝게 대답하고 황급히 병실을 나갔다.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변여름.”그 순간, 변여름이 얼마나 빠르게 다가왔는지 침대 옆으로 바람이 일렁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오빠! 깨어났어요?”“응.”양혁수는 변여름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지금 내 상태는 어때?”“눈꺼풀이 유리 파편에 긁혔지만 안구는 문제없대요.”그 말을 듣자 양혁수는 안심하며 긴 숨을 내쉬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행여나 걱정할까 봐 말을 덧붙였다.“지금 눈이 안 보이는 건 눈을 뜨지 못하게 고정 장치랑 붕대를 감아둬서 그런 거예요. 잠시 휴식하고 붕대를 풀면 정상적으로 돌아올 거예요.”“다른 건?”“미약한 뇌진탕이랑 등에 충격으로 인한 타박상이 있어요.”양혁수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봤고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앞이 보이지 않는 게 꽤 불안했다.“다른 사람들은?”“부상자는 있지만, 사망자는 없어요.”그건 그나마 다행이었다.변여름은 붕대로 가려진 양혁수의 눈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오빠, 미안해요. 내가 판단을 잘못해서... 그 길로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