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민아는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서 마침내 결과를 받았다.안시연의 신분증에 등록된 정보에 따르면 생일은 9월 4일이었고 아버지는 그해 1월에 사고로 사망했다. 이를 바탕으로 보면 안시연은 유복자일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만약 안시연이 10월에 태어났다면 그 시간대는 전혀 맞지 않았다.안시연은 오성호의 아이일 가능성이 더욱 커 보였다!양민아는 불안감에 휩싸인 채, 계속해서 조사를 지시했고 오성호와 소현정이 처음 연결된 시점을 정확히 확인하라고 명령했다.그리고...“어떻게든 안시연의 유전자 검사 샘플을 구해 주세요. 최대한 빨리요!”양민아는 생각해 보니, 유전자 검사만이 모든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이었다.오성호의 샘플을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양혁수의 샘플은 구할 수 있었다.양혁수는 오성호의 아들이니, 그와 안시연의 유전적 관계만 확인하면 안시연이 오성호의 딸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만약 안시연이 오성호의 딸이라면 양민아에게는 정말로 골치 아픈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오성호는 이미 양씨 그룹에서 굳건한 위치를 차지했고, 그의 딸 또한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양민아는 깊은 고민 끝에 또 하나의 보험을 들기로 결심했다.양씨 가문의 양녀라는 신분만으로는 결국 너무 불안정했다. 정민아는 반드시 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어야만 했다!그렇게 결심한 양민아는 해외에서 휴가 중인 양홍두에게 전화를 걸었다.“할아버지, 저 민아예요...”...연정훈의 ‘결혼은 안 한다’라는 말에 안시연은 어리둥절했다.연정훈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연정훈은 자기 말을 이미 고백이라고 생각하며 안시연이 자신의 진심을 이해하리라 믿었다.“네 고백은 잘 들었어, 하지만 다음번에는 그런 고백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부승희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이승우도 비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안시연 씨가 네 말을 이해한다면 안시연 씨는 보통 사람이 아닐 거야.”연정훈은 어이가 없었다.“...”연
안시연은 연정훈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이 동의한 것 같아 안도의 숨을 내쉬며 부드럽게 말했다.“네가 벚꽃동의 구조를 좋아한다면 강남시티에 가서 따로 공간을 내서 벚꽃동의 구조를 그대로 만들어 놓을게.”하지만 안시연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왜 그러는데?”“정훈 씨, 알고 계시지 않나요? 계약을 수정하려면 양쪽의 동의가 꼭 필요해요.”안시연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연정훈이 답했다.“...알아.”안시연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연정훈은 갑자기 목이 조여드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정훈은 눈앞의 화면을 보며 잠시 멈추더니 말했다.“너는 원하지 않는 거야?”“이미 정훈 씨에게 많은 폐를 끼쳤으니,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어요.”그 말은 분명 화가 나 있는 듯한 어조였다. 정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생각에 잠긴 채, 안시연에게 솔직하게 설명하려 했다.하지만 안시연은 차분하게 말했다.“내년 이맘때쯤이면, 저는 이미 집도 있고 차도 있으며 여유도 생길 거예요. 정훈 씨와의 인맥 덕분에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입을 열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경인을 떠날 계획이에요. 외할머니를 모시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적당한 시기가 오면 결혼할 사람을 찾을 거예요.”연정훈은 가슴이 답답하게 막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결혼은 꼭 해야 해?”안시연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저는 아이를 정말 좋아해요. 결혼하지 않으면 제 아이는 아버지가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하나요? 그건 정말 싫어요.”그 말에 연정훈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연정훈은 아직 그 정도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시연의 말에 순간적으로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앞으로...”“앞으로 정훈 씨도 결혼하실 거예요.”안시연은 연정훈의 말을 끊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아마 좋은 집안의 아가씨와 잘 어울리는 사람과 결혼하시겠죠. 그때쯤이면 아이도 낳고 행복
연정훈은 체면을 중시하여 안시연에게 애걸복걸할 수는 없었다.안시연이 그렇게 말한 이상,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할 주제가 없었다.연정훈은 컴퓨터 앞에서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안시연은 이미 침대에 누워 쉬고 있었다.이런 답답함은 연정훈이 태어날 때부터 경험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이불에서 끌어내어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자신의 이미지를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안시연은 방금 납치 사건을 겪었고 심리적으로 상처받아 사람에게 경계심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맞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이렇게 자신을 다독인 후, 연정훈은 더욱 불안해졌다.갑자기, 핸드폰이 진동하며 울렸다.침대 위에 있던 안시연은 약간 놀랐다.연정훈은 핸드폰을 힐끔 보더니 할아버지 측의 사람인 것을 알았다. 연정훈은 찡그린 얼굴로 전화가 온 시간이 적절하지 않다고 불만을 품었다.최근 안시연은 잠이 얕았고 특히 놀람에 민감해졌다.연정훈은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가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문이 닫히자, 안시연은 눈을 떴다.안시연은 한참 동안 조용히 바라보며 연정훈에게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자신에게 다짐했지만, 또다시 시계를 쳐다보며 그가 나간 시간을 세고 있었다.연정훈은 밖에서 전화를 받았다.“도련님.”연정훈이 일을 시작한 이후로, 집 밖에서는‘연 대표님’이라고 불리지만, 할아버지 측의 사람은 예전 호칭을 그대로 사용했다.연정훈은 상대방을 ‘신 아저씨’라고 불렀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왜 전화를 주셨나요?”상대방은 공손한 태도로 몇 마디 격식을 차리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연강훈 씨가 회장님을 뵈러 몇 번이나 찾아갔습니다. 무릎을 꿇을 지경입니다.”연정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할아버지께서는 어떤 태도였나요?”“회장님께서는 당연히 도련님과 같은 태도를 유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도련님, 이번에는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 어제 오전, 연강훈 씨뿐만 아니라 L K 은행
안시연은 납치 사건으로 인해 며칠간 결근했다.함풍의 주식 양도 절차는 전면 중단되었고 심사팀은 이미 경인으로 돌아갔다.안시연은 차라리 긴 휴가를 내고 양주에서 쉬고 싶었지만, 연정훈은 안시연을 경인으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정훈 씨, 바쁘면 먼저 혼자 돌아가세요.”안시연이 말했다.“저는 양주에 남을게요.”연정훈은 안시연이 양혁수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연정훈은 마음이 불편해졌다.“양혁수도 곧 경인으로 돌아가서 치료받을 거야.”안시연은 잠시 망설였다. “전화 한 통만 할게요.”안시연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연정훈은 무표정하게 기다렸다.조금 후, 안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돌아왔다.“혁수 씨도 오늘 밤에 돌아간다고 하네요. 그러면 저도 정훈 씨와 같이 갈게요.”연정훈은 순간 혼란스러웠다.어릴 적부터 배워온 품격이 자꾸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연정훈은 욕설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차로 갈까요? 아니면 열차를 탈까요?”안시연이 물었다.“저는 두 마리 양도 데리고 가야 해요.”연정훈은 짧게 대답했다. “...차.”안시연은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면 다행이네요.”말을 마친 안시연은 부승희에게 전화를 걸어 두 마리 양을 데려올 시간을 정했다.그리고 바쁘게 짐을 챙겼다.안시연은 양혁수와 양에게만 신경을 쓰고 연정훈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연정훈은 책상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안경을 벗었다.쿵!큰 소리가 났다.안시연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중얼거렸다. “나비가 차 멀미하는 것 같아. 약을 좀 사야겠어.”연정훈은 말문이 막혔다.“...”...소현정이 소란을 피운 덕분에 다행이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양혁수가 안시연과 함께 가겠다는 양지원의 마음을 달래 동의를 얻었을지도 모른다.그렇게 되면 연정훈은 정말로 다시 교양 수업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경인으로 가는 길에 그들은 넓은 리무진을 타고 이동했다.안시연은 맞은편에서 영준을 안고 있었고 연정훈은
안시연은 결국 안방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최근 안시연은 자주 어지럼증을 느꼈고 연정훈도 안시연을 무리하게 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이불을 덮고 단순히 대화만 나누는 것도 연정훈에게는 충분했다.물론, 안시연이 연정훈과만 대화할 때 한해서였다.“내일 점심은 저에게 가져다줄 건가요?”연정훈은 침대 머리맡에서 책을 들고 있었지만, 이마를 찌푸린 채였다.안시연은 연정훈 옆에서 대놓고 양혁수와 통화 중이었고 벌써 20분이 넘게 흘렀다.양혁수는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끝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그 세 번의 은혜 덕분에 안시연은 양혁수를 향한 관용이 전보다 커졌다.안시연은 연정훈을 신경 쓰고 있었다. 전화를 받기 전, 예의 있게 물었다.“혁수 씨가 전화했는데, 받아도 괜찮을까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차마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안시연이 아픈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연정훈은 그녀를 더 불편하게 할 수 없었다.“시간이 늦었으니 너무 오래 통화하지 마.”“네.”안시연은 가볍게 대답했지만, 전화를 끊지 않았다.“혁수 씨는 집에 계시잖아요. 저는 그 집에 들어갈 수 없어요.”안시연이 말했다.“네가 오면 내가 뒷문으로 사람을 보내 데리러 갈게.”연정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시선을 피하며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사람을 위험에 빠뜨리지 마. 안시연이 잡히면, 네가 안시연을 보호할 수 없을 거야.”양혁수는 웃으며 말했다.“아, 형도 계셨군요.”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안시연은 연정훈에게서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을 감지하고 살짝 옆으로 몸을 옮겼다.양혁수는 더 도발적인 말을 이어갔다.“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저는 목숨 부지하는 처지라, 저희 어머니는 제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셔요. 안시연이 날 보러 오는 건 물론이고 제가 안시연과 결혼하겠다고 해도 어머니는 고려해 보실 겁니다.”연정훈과 안시연은 둘 다 잠시 말을 잃었다.둘은 동시에 양혁수가 병실 밖에서 있었던 일을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다음 날, 연정훈은 평소처럼 회사에 출근했다.안시연이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마당에 경호원들이 늘어난 것을 발견했다. 전부 다 무섭게 생긴 사람들이었다.아주머니는 대문 앞에 벚꽃이 피었길래 보러 갔는데 사람들이 다가와 물어보았다고 했다.“대표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나가실 때는 대표님께 전화해야 한답니다.”안시연은 원래부터 마음이 불편했고 더구나 감시까지 당하는 상황에 기분이 나빠졌다.안시연은 다시 거실로 돌아와서 앞에 있는 케이크를 힘껏 찔렀다.아주머니는 안시연이 불쾌해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위로하면서 연정훈에게 전화를 걸라고 유도했다.안시연은 절대 전화를 걸지 않았다. 어차피 나갈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지금 안시연은 단지 어지럼증이 빨리 나아져서 다시 일하고 싶을 뿐이었다. 수업도 들어야 하고 운전 연습도 해야 한다.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안시연은 불안했다.점심에는 퀵 서비스를 불러 양혁수에게 음식을 보냈다.아주머니가 두 세트를 준비하며 제안했다.“대표님께도 한 세트 보내드릴까요?”안시연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정훈 씨는 회사에서 잘 먹고 있어요.”“그래도 직접 보내드리는 것만 못하죠.”안시연은 대답하지 않고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아주머니가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제가 보내드릴게요.”안시연은 침묵했다.“...”됐다.안시연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안시연은 먹고 자는 것 외에는 두 마리 알파카와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막 낮잠을 자려던 참에, 연정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점심 먹었어?”연정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안시연이 말했다.“벌써 1시 가까이 됐는데요.”‘시간이 몇 시인데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몰라?’연정훈은 마치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처럼 말했다.“나 방금 일이 끝나서 시간 보는 걸 깜빡했어.”안시연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바보로 아는 아는 듯했다.이 정도 레벨의 대표라면 시간관념이 가장 철저해야 했다. 설령 그가 까먹었다 하더라
안시연은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문을 조용히 닫은 뒤, 침착하게 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었다.“너는 내려갈 필요 없어. 내가 지금 바로 집으로 갈게.”연정훈이 말했다.전화를 끊자, 아주머니가 다시 와서 알려주었다.“여사님께서 차 한잔 같이하자고 부르셨어요.”아주머니의 미묘한 표정에서 안시연은 연 할머니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직감했다.안시연은 내려가고 싶지 않았고 굳이 내려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하지만 상황을 보니, 더 버티면 곧 경호원이 와서 억지로 데려갈 것만 같았다.끌려 내려가는 모습은 절대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옷 갈아입고 곧 내려갈게요.”“네. 알겠습니다.”아주머니는 급히 내려갔다.안시연은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부드러운 흰색 긴팔 셔츠에 은은한 연보라색 모직 치마를 맞춰 입었다.안시연이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예상했던 대로 특별한 환영도 거창한 장면도 없었다. 소파 옆에 서 있던 나이 든 아주머니가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차를 새로 데워드릴까요?”“두 잔 가져와요. 그 아이도 곧 내려올 것 같아요.”“네. 알겠습니다.”나이 든 아주머니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계단 위에 있는 안시연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던 민수희에게 말했다.“안시연 아가씨가 내려왔습니다.”민수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연정훈의 어머니와는 달리 연 할머니는 차분하고 여유로워 보였지만, 그 침착함이 오히려 안시연을 더 긴장하게 했다.안시연은 작은 거실을 지나 조용히 민수희 앞에 다가섰다.민수희의 외모와 표정을 보면서도 안시연은 민수희의 나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안시연의 외할머니는 오랜 병상 생활로 얼굴에 기운이 없었고 안시연이 보아온 대부분의 노인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하지만 민수희는 달랐다. 단정하고 깔끔하게 차려입었으며 콧대 위에 걸린 안경이 지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피부는 다소 처졌지만, 여전히 희고 깨끗해 보였다. 눈매와 얼굴 윤곽을 보면 젊은 시절 상당한 미모였음을 짐작할 수
안시연은 민수희를 만나 비로소 말로 사람을 얼마나 상처를 줄 수 있는지 깨달았다.단 두 마디의 간단한 말만으로 안시연의 자존심은 무너졌다. 아이, 신분 얘기들.표면적으로 관대하게 들렸지만, 실제로는 치명적인 모욕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그것도 연정훈의 정식 연인으로서 존재하는 안시연에게 그런 말은 더욱 황당하게 느껴졌다.안시연의 얼굴빛이 변하는 것을 본 민수희는 자신이 예상한 대로라고 확신했다.안시연은 자존심이 강하고 연정훈의 재산이 아닌 그 사람 자체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민수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안시연이 가진 것은 아름다운 외모 외에는 별로 없으며 그것마저도 민수희의 눈에는 무모한 야망으로 보였다.“사실 네가 이 집에 머무를 수 있는 자격은 없지만, 연정훈이 널 그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그를 설득해서 너를 내보내는 건 불가능할 것 같구나.” “그렇다면 그냥 여기 계속 있어라.”“나중에 연정훈이 약혼을 하게 될 거야. 그때 우리는 신혼집을 따로 마련해 줄 계획이니, 그때는 준비하렴.”안시연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 “...약혼이요?”“연정훈이 네게 말하지 않았니?”민수희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물었다.안시연은 말이 목에 걸려서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민수희는 더욱 평온하게 말을 이어갔다. “양민아는 알고 있지?”“우리와 양씨 가문과 대대로 인연이 깊은 집안이야. 그만큼 적합한 혼사가 또 있을까?”민수희의 말은 마치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처럼,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필연처럼 들렸다.“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넌 연정훈의 미래를 위해 마음을 비우는 게 좋을 거야. 그게 너에게도 너의 아이에게도 더 나은 선택일 테니까.”안시연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야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안시연은 더 이상 민수희를 보지 않았고 창백한 얼굴로 일어섰다.“할머니, 죄송하지만 아직 제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 같아서 더 이상 대화를 나누기 힘들 것 같습니다.”“그래, 괜찮아. 네 방으로 가서 쉬어.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