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 씨 가문의 가훈은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게 밥을 주지 않는 건가요?”안시연이 물었다.연정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나는 이제 곧 서른이지만, 여전히 아이처럼 다뤄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안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다가 목이 메어오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죽이라도 끓여 줄게요.”안시연이 말을 마치고 돌아서려 하였다.연정훈이 손을 뻗어 안시연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연정훈은 손으로 안시연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하루 굶은 것뿐이야. 그동안 내가 너를 힘들게 한 벌이라 생각해. 그래도 나에겐 이득이야.”안시연은 연정훈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답답하게 말했다.“정훈 씨가 나한테 진 빚을 왜 할머니가 대신 갚게 하시는 거예요?”“그럼, 네가 나한테 벌을 준다면 어떻게 할 건데?”“어쨌든 밥은 줄 거예요.”연정훈은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고개를 숙여 안시연의 머리에서 나는 샴푸 향기를 맡으며 평온함을 느꼈다.“할머니가 내린 벌은 나와 할머니 사이의 일이야. 넌 나를 아껴줄 수 있지만, 그 책임까지 지려 하지는 마.”“누가 정훈 씨를 아껴준다고 그래요...”안시연은 허리를 펴며 말했다.“나는 그 면이 아까워서 그래요. 원래 망쳤다고 생각했는데 정훈 씨가 돌아와 다 먹어줄 줄 알았더니, 겨우 몇 젓가락만 먹었잖아요.”연정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나중에 다 먹을게.”안시연은 연정훈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지금 쉬려고요?” “나와 함께 아래로 내려가서 잠깐 앉아 있자.”연정훈은 안시연의 손을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계단에 다다랐을 때 안시연이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아. 정훈 씨 어머니 전화 끊는 걸 깜빡했어요.”연정훈이 답했다.“네가 끊지 않아도 엄마가 이미 끊었을 거야.”“그래도 한 통 해줘요. 어머님이 정훈 씨 많이 걱정하실 텐데.”“알겠어.”아래층에 도착하자, 연정훈은 김세연에게 전화를 걸었고 안시연은 주방으로 가서 음식을 준비했다.김세연은 전화를
안시연은 연정훈에게서 두려움을 본 적이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연정훈이 아무리 재빨리 감정을 숨기려 해도 안시연은 그것을 발견했다.그는 땀을 많이 흘렸고 얼굴이 창백해 보였으며, 그 모습은 매우 무섭게 느껴졌다.연정훈이 화장실 가서 얼굴을 씻고 돌아오니,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안시연이 물었다.“악몽 꿨어요?”“응.”연정훈은 여전히 안시연의 뒤에 누워, 한쪽 다리를 굽히고 손등으로 얼굴을 가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작은 삼촌 꿈을 꿨어.”안시연은 놀라며 물었다.“작은삼촌이 있었어요?”연정훈은 당황했다.그는 너무 빨리 말을 꺼냈고 의식했을 때 자신도 놀랐다.연정훈은 연서명에 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언급한 적이 없었는데 안시연과의 대화 속에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안시연은 이해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연정훈의 머리를 마사지해 주었다.“정훈 씨의 작은 삼촌에 관한 정보가 비밀인가요? 왜 외부에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죠?”연정훈은 잠시 침묵했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조용히 말했다.“...작은삼촌이 세상을 떠났어.”안시연의 동작이 멈췄다.안시연이 질문하기도 전에 연정훈은 천장에 있는 크리스탈 조명을 바라보며 말했다.“작은삼촌은 나보다 열두 살 더 많아. 우리 할머니의 늦둥이 아들이야. 우리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어.”안시연은 연정훈의 슬픔을 느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가족의 죽음은 어떤 말로도 그 아픔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정훈 씨가 작은삼촌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어요.”“그건 오래전 일이라.”연정훈은 한숨을 내쉬며 감정이 그다지 흔들리지 않는 듯 보였다. 눈을 감으며 말했다.“오랫동안 작은 삼촌을 꿈에서 본 적이 없었어.”안시연은 휴지를 꺼내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향초 하나 켜 줄까요? 정훈 씨 한참 자고 있었잖아요.”“괜찮아.”연정훈은 옆으로 돌아서 안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머리카락에 뭘 사용한 거야?”“머리카락?”“응. 좋은 향기가
한숨 자고 난 후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한결 가벼워졌다.연정훈이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기분 좋게 해줄까?”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주세요.” “...”연정훈은 잠시 침묵하더니 휴지를 꺼내 입을 닦았다. “왜요?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으니까 밥도 안 먹으려고요?” “선비는 죽어도 굴욕을 참지 않는다고 하지.”안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이 정도의 난이도로 끌어올릴 만큼 심각한 일은 아니다. “정훈 씨가 안 해주면 저도 안 만들어 줄 거예요.”안시연이 말했다.연정훈은 침착하게 휴지를 던지며 안시연을 바라보았다.“난 잔치국수 먹고 싶어. 채소도 듬뿍 넣어줘.”연정훈은 추가 주문을 하며 덧붙였다. “계란 두 개 더 삶아줘. 최대한 반숙으로 부탁해.”안시연이 말했다.“제가 꼭 만들어 줄 거라고 확신하세요?”연정훈은 웃으며 말없이 안시연을 바라보았다.안시연은 침묵했다.“...”그래.안시연은 패배를 인정하듯 고개를 돌렸다. “계란이 꼭 반숙일지는 장담 못 해요.” “나는 널 믿어.”안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계란을 완벽하게 반숙으로 만들기 위해 두 개의 냄비를 동시에 사용할 계획을 세웠다.두 사람이 짧게 눈을 붙인 후, 시계는 아직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모든 것이 고요한 그 순간, 안시연은 바깥에서 딱딱하는 소리를 들었다.그 소리는 잠 못 이루는 나비가 나타난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재료를 모두 냄비에 넣고 안시연은 몸을 돌려 거실을 보았다.연정훈이 바의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긴 다리와 반듯한 허리 덕분에 그는 더욱 우아해 보였다. 나비는 연정훈을 둘러싸며 그 주변을 맴돌다 목도리를 물어 그의 손에 가져다주었다. “더러워졌어.”연정훈이 말했다.나비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여전히 목도리를 물고 연정훈의 주변을 맴돌았다.연정훈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생각하다가 안시연에게 물었다. “깨끗한 거 있어?”안시연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저 작은 서랍
남자의 말은 대체로 신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연정훈의 대답은 완벽에 가까웠다. “나는 너와 항상 이렇게 있고 싶어.”연정훈이 가문에서의 압박을 느끼거나 최근 여러 일을 겪으며 안시연의 마음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결혼과 미래에 대한 그녀의 생각도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그들은 서로를 깊이 좋아하며 연애하고 있었다.어느 날 안시연이 결혼을 원하고 연정훈이 원치 않으면 안시연은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미래의 선택이 현재의 결정을 바꿀 수는 없다.적어도 지금 안시연은 연정훈이 진심으로 자신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괜찮다.‘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사랑을 즐기자.’연정훈과 함께 야식을 먹고 난 후, 안시연은 러그 위에 앉아 기분 좋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연정훈은 소파에 앉아 안시연의 핸드폰을 슬쩍 들여다보았다.[외상 환자를 위한 레시피]말하지 않아도 이것은 양혁수를 위해 준비한 것이 분명했다.연정훈은 질투를 감추고 물었다.“양혁수는 지금 어때?”안시연은 말했다.“상처가 아직 아프고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대요. 꽤 고통스러워하고 있어요.”“양혁수가 너에게 말했어?”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연정훈은 속으로 비웃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두 번 바라보며 고의로 떠보았다.“양혁수가 너를 위해 그렇게 큰 고생을 했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당연히 혁수 씨에게 감사하죠.”안시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동안 저를 위해 목숨을 걸어준 사람은 없었어요. 그날 사실 혁수 씨는 떠날 수도 있었는데 저를 구하려다가 다치게 된 거예요.”연정훈은 양주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자책감에 사로잡혔다.안시연을 위험에 처하게 둬서는 안 됐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양혁수가 안시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연정훈 역시 할 수 있었다.안시연의 눈에 담긴 죄책감과 감사의 감정을 본 연정훈은 결국 질문을 참지 못했다.“내가 없었다면 너는 양혁수에게 마음이 끌렸을까?”안시연은 잠시 멈칫했다.어떻게
연정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별일 아니야. 그냥 두 명의 협력사를 만났을 뿐이야.”“그럼 왜 내 메시지는 안 읽었어요?”연정훈은 잠시 멈칫했다.안시연은 그를 살피며 물었다.“가기 전, 운동장에서 전화 한 통 받았었죠? 누가 건 거예요?”‘역시 여자는 사랑에 빠지면 셜록 홈즈가 된다더니...’연정훈은 심리전의 고수답게 절반의 진실을 말했다.“소현주한테서 온 전화였어.”안시연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럼 그날 현주 씨를 만나러 간 거예요?”“아니야.”안시연은 말없이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진실을 말하고 있는 건지 확인하려 했지만 연정훈의 얼굴은 너무도 평온해 한 치의 빈틈도 찾을 수 없었다.잠시 실망했으나 안시연은 동시에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만약 그날 연정훈이 소현주를 만나러 갔다면, 자신이 납치된 그 순간에 그와 소현주가 함께 있었다면 차마 용납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연정훈은 그녀의 의심 가득한 표정을 보고 되레 물었다.“그날 아침, 부승희랑 룸 안에서 무슨 얘기 했는지 기억나?”안시연은 금세 기억이 떠올랐다.그녀가 부승희와 나눈 대화를 그들이 엿들었을 것이라 부승원이 경고한 적이 있었다.그제야 상황이 이해됐다.“화났어요?”“조금.”연정훈의 말은 사실이었다.그녀가 자신을 이승우와 비교하며 때가 되면 떠날 준비를 한다는 말을 듣고 크게 상처받았다.마침 그때 소현주 쪽에서 일이 터졌다는 전화가 온 것이다.안시연은 설명했다.“그 전날 정훈 씨가 현주 씨의 전화를 받고 나서부터 날 대하는 게 차가워졌어요. 마음이 불편했어요. 그다음 날 또 이승우 씨가 어떤 여자랑 같이 있는 걸 보고 기분이 더 안 좋아지더라고요. 그래서 부승희 씨랑 얘기할 때 그냥 승희 씨 말에 맞춰서 말했을 뿐이에요.”연정훈은 내심 후회했다.그날 소현주의 전화를 받은 게 실수였다.그 감정이 그녀에게까지 번져 이런 문제를 일으킨 것이니 말이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들어 올려 품에 앉혔다.“지금도 떠날 생각 있어?”
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안겨 천천히 소파에 눕혀졌다.연정훈의 손을 베개 삼아 기대어 그와 깊은 애정이 담긴 키스를 나눴다.“어딜 가든... 그건 제 자유예요.”“넌 못 가. 한번 가볼 수 있나 해봐.”연정훈은 안시연의 귓불을 살며시 입에 물고 빨았다.그러자 안시연은 얇게 신음소리를 흘렸고 날씬하고 곧은 다리가 그의 다리를 스치고 있었다.“이건 너무 억지잖아요.”“다른 건 몰라도 이건 억지여도 돼.”그는 안시연의 셔츠 단추를 풀며 부드러운 입맞춤을 아래로 이어갔다.안시연은 연정훈의 머리를 감싸며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그의 머리카락 속으로 집어넣었다.몸은 점점 뜨거워졌지만 차가운 공기가 살짝 스쳤다.연정훈은 담요를 꺼내 자신과 안시연 위로 덮었다.속박은 하나씩 풀렸고 안시연은 소파의 팔걸이에 기대 몸을 살짝 웅크리더니 위에 달린 크리스털 등을 바라보며 입술을 벌려 숨을 내쉬었다.아직 아래층에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부끄러워 몸이 붉어졌고 손톱은 연정훈의 어깨에 꽉 박혀 있었다.곧 안시연이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양옆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코끝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왜 그래?”“위층으로 가요.”안시연은 그의 어깨를 잡고 조심스럽게 아래층 계단 입구를 쳐다보며 말했다.“만약 누가 올라오면 어떡해요?”“안 와.”“그래도... 만약에요.”안시연은 그의 품에 숨으며 장난스럽게 투덜댔다.“누가 보면 다 정훈 씨 탓이에요.”“알았어. 내 탓으로 할게.”연정훈은 모든 걸 받아들이며 그녀의 턱을 잡고 피하지 못하게 했다.가볍게 신음소리를 내며 안시연은 도무지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 두 손으로 연정훈의 가슴을 밀었다.마치 위층으로 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주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결국 연정훈은 그녀의 고집에 지고 말았다.그는 안시연의 목에 강하게 입을 맞추고 거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까탈스럽긴.”안시연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뭐가 까탈스럽다는 거야. 내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유혹을 걸
구름이 걷히고 비가 그쳤다.안시연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조차 없어 조용히 연정훈의 품에 파묻혀 있었다.연정훈이 살짝 움직이자 안시연은 가볍게 소리를 내며 그의 팔을 붙잡아 그가 떠나지 못하게 했다.모든 것이 끝난 후의 달콤한 순간, 안시연은 적당히 그에게 의지했고 연정훈은 기꺼이 받아들였다.그는 안시연을 안아 깨끗이 씻기고 나서 침대로 돌아왔다.여전히 안시연은 연정훈의 팔을 베고 그의 품에 안긴 채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그녀가 마음을 놓자 연정훈도 마음이 놓였다.침대 옆 탁상 등이 꺼지고 두 사람은 서로를 안은 채 잠들었다....경인의 날씨는 갑자기 추워졌고 하늘도 맑아졌다.안시연은 집에서 한동안 요양한 후 다시 출근하기 시작했고 운전 연습도 재개했다.이 시기는 유난히 평온했다.모든 걱정이 마치 하룻밤 사이에 사라진 듯했다.그녀와 연정훈 사이에는 그 누구도 끼어들지 않았고 심지어 최미란을 보러 병원에 갈 때도 소현정을 보지 않았다.안시연의 주변에는 연정훈과 최미란이 있었고 가끔 부승희의 초대에 응해 함께 식사하는 일상이 이어졌다.이 모든 것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나중에 이 시기를 회상할 때마다 그녀는 마치 꿈을 꾼듯해 믿기지 않았다.첫눈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그날, 안시연은 운전 연습을 마치고 차장 밖에서 이승우를 만났다.이승우는 막 부승원을 만나고 연정훈을 만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연정훈이 거절했다는 것이다.“잘됐네요. 타세요. 시연 씨가 있으면 정훈이도 내 약속 거절 못 할 거예요.”안시연은 망설였다.“정말로 일이 있을지도 몰라요. 가서 확인해봐야 해요.”“뭘 확인해요. 걘 분명 집에 가서 시연 씨랑 따뜻한 방에 같이 누워있으려는 거예요.”안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이승우의 말은 늘 이렇듯 대처하기 어려웠다.마침 부승희에게도 전화가 와서 이승우와 함께 가자고 했다.그들은 겨울의 첫 소고기 전골을 먹기로 했고 한우빈이 최고급 술을 협찬해줬다고 했다.거절할 수 없었는지라 안시연은 결국 이승우의 차에 올라탔다.
“오늘 운전 연습은 어땠어?”연정훈이 묻자 안시연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코치님이 내가 엄청 빨리 늘고 있다고 하셨어요. 아마 한 번에 면허 딸 수 있을 거예요.”“어느 코치?”“전에 그 코치요.”“내일 사람 시켜서 바꾸라고 해야겠네.”안시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왜요?”“필기에서 두 번이나 떨어졌는데도 너한테 빨리 늘었다고 칭찬하는 사람이 좋은 코치겠어?”연정훈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안시연은 억울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건 단순 실수였어요!”이 말에 연정훈은 살짝 웃었고 안시연은 그의 팔을 붙잡으며 계속 말했다.“게다가 밤에 연습하게도 안 해주잖아요. 난 낮에 일도 해야 하는데 이 정도 속도면 정말 빠른 거예요!”연정훈이 안시연의 밤 운전 연습을 금지한 이유는 그녀가 밤에 연습을 하고 나면 집에 와서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들어버리기 때문이었다.그러면 그와 함께할 시간이 없어지니 참기 힘들었다.사실은 이런 이유였지만 연정훈은 겉으로는 이렇게 말했다.“밤에 연습하는 건 효율이 안 좋지. 다음날 업무에도 영향이 갈 거고.”“그리고 밤에 너 수업 있잖아.”안시연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오늘 밤엔 이미 수업 예약했어요. 꼭 다 들을 거예요.”그러더니 연정훈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그러니까...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연정훈은 너무도 쉽게 수락했다.“알았어, 너는 서재에서 공부해. 난 침실에서 기다릴게.”“...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했잖아요.”“그래서 지금 일부러 나한테 암시하는 거야?”“아니거든요!”두 사람이 방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안에서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문을 열어보니 부승희와 그 친구들뿐만 아니라 낯선 얼굴들도 몇몇 보였다.연정훈이 들어가자 모두 그를 보며 인사했고 안시연에게는 형수님이라며 인사했다.안시연은 아직 그런 호칭이 익숙하지 않아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예전에는 연정훈이 안시연을 데려와도 사람들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모두가 안시연을 공손하게 대하고
양지원은 양석진이 예전엔 어떤 사람이었는지 희미하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그가 살이 찐 건지 빠진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저릿함은 그가 분명히 살이 빠졌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했다.잠시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양석진과 그의 일행이 어느새 그녀 앞에 다다라 있었다.그녀는 손을 꽉 움켜쥔 채 순간 말을 잃었고 그의 뒤에 서 있는 예전에 본 적 있던 용 국장의 얼굴을 보고서야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용 국장 역시 그리 나이가 많지 않았고 서른네다섯쯤 되어 보였고 또래들 사이에서는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었다.하지만 양석진을 마주하면 그는 어딘가 빛을 잃는 듯했다.그가 먼저 운명 같은 우연이라며 말을 꺼냈다. 대운산을 사용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정말로 이곳에서 회의가 잡혔고 그 책임자가 다름 아닌 양석진이었다.“양 대표님, 우연의 일치네요. 막 완공된 이 대회장의 첫 번째 사용자가 바로 당신 가족입니다.”양지원은 미소를 머금은 채 최대한 차분히 그를 바라보았다.‘오빠’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녀는 끝내 입을 다물고 대신 직함을 부르며 입을 열었다.“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오늘은 더우니까요. 조금 후에 제가 임원분들을 모시고 천천히 둘러보시게 해드릴게요.”양석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더는 머무르지 않고 돌아섰다.“2시에 출발하죠.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좋아요.”양지원은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안은 채 돌아서 앞장섰다.그 일행은 의외로 조용히 정리되어 있었고 마치 더는 움직이거나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쉬었다.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홀은 금세 고요해졌다.양지원은 아래층에 홀로 앉아 차를 마셨지만 입안에는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두 사람은 서둘러 스쳐 지나갔고 양석진은 그녀에게 단 한 마디를 남겼다.비록 이제는 서로 마주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그녀의 시간과 기억은 여전히 십 년 전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그가 모든 것을 그녀를 중심으로
[청년기]“내일 돌아오는 거예요?”대운산으로 향하던 길 양지원은 집에 있는 양혁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그녀는 감기에 걸린 지 이틀째였다. 아무것도 할 기운이 없었고 그나마 양혁수와 이야기하는 순간만이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해주었다.“가능하면 돌아가려고 해.”몇몇 선생님들의 불만이 떠오르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집에서는 좀 얌전히 지낼 수 없을까? 너 때문에 맨날 선생님 앞에서 얼굴을 못 들겠어.”한창 말썽꾸러기 시절을 지나 양혁수는 이제 누구에게도 귀여움을 받지 못하는 나이에 접어들었다.몇몇 선생님이 함께 교육을 맡으면 그는 종종 머리를 치켜들고 반항했다.“저 정도면 엄청 얌전한 편 아닌가요? 같이 농구도 하잖아요.”양지원은 눈동자를 굴리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무더운 여름날 예민한 성격의 선생님들이 누가 그런 말썽꾸러기와 농구장에 나가고 싶겠는지 의문스러웠다.“알겠어. 어쨌든 조금만 얌전히 있어 줘.”“알겠어요. 엄마는 밖에서 몸조심하고 집에 오시면 제가 생일 챙겨드릴게요.”양지원은 말끝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세상 어딘가에서 여전히 자신을 걱정해 주는 이 작은 녀석이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통화가 끝나자 차의 속도도 서서히 줄어들었고 비서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양 대표님, 먼저 접대소에서 잠시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용 국장 쪽 점검팀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양지원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대운산 관광 프로젝트는 오래전에 시작되었지만 그녀는 그동안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위쪽에서 이 지역을 외교 관련 주요 회의 장소로 활용하고 싶다는 연락이 들어왔다. 그건 분명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행궁’을 조성하려면 결국 관계자들의 사전 점검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양지원은 직접 사람들을 이끌고 일주일 전 이곳에 도착해 현장을 둘러보며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점검했다.최근 날씨가 너무 더워서 에어컨이 있는 곳과 뜨거운 태양 아래를 오가다 보니 체력이 많이 지쳐갔다.비서는 그녀의 얼굴 색
양지원은 화려한 의상에 휩싸인 채 기분이 한껏 들떠 있었다.그녀는 오빠의 팔에 살며시 팔짱을 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우리 오빠는 당연히 멋져요. 키도 크고 잘생기기까지 했는걸요.”진병수는 이마를 짚은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양석진은 길을 걸으며 양지원에게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지만 현장에 도착하자 그녀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두 세트를 함께 찍기로 했다.예복을 입고 양지원과 함께 거울 앞에 서자 주위에서 감탄의 말들이 흘러나왔다.그는 마음속에서 불안이 스멀거리자 양창수의 애매한 미소를 피하려 애써 시선을 돌렸다.결혼사진을 찍는 자리였지만 양지원에게는 가족사진을 남기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그녀는 예쁜 옷을 입었으니 기념으로 사진을 남기고 싶었고 중간에 진병수에게도 함께 찍자며 부탁했다.“자, 신부가 신랑에게 키스해 주면 좋겠네요.”사진사가 말하자 양석진의 눈빛이 흔들렸고 양지원은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저기요. 이분은 제 오빠예요.”사진사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아. 깜빡했네요.”양창수가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키스하는 게 뭐 어때? 얼굴에 하는 거면 괜찮아.”진병수도 거들었다.“나는 괜찮은 것 같은데.”“안 돼. 그건 너무 이상해.”양지원이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손명우가 조용히 제안했다.“카메라 각도를 조절해서 찍으면 돼.”양지원과 양석진은 동시에 외쳤다.“안돼.”순간 현장은 조용해졌다.“...”양지원은 웃으며 옆에 앉은 오빠를 바라보았다.“오빠, 우리 둘 진짜 잘 맞는 것 같아요.”그녀는 그의 팔을 감싸며 바르게 자세를 고쳤다.“오빠, 우리 사진 한 장 찍어요. 처음 오빠를 만났을 때도 가족사진 찍느라 소파에 나란히 앉았잖아요.”양석진은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감정을 억누르며 부드럽게 말했다.“맞아. 그렇게 하는 게 제일 좋지.”두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고 찰칵하는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그 순간이 고정되었다.수많은 사진 중 그 사진은 양지원이 가장 아끼는 사진이 되었
배가 콕콕 쑤시는 걸 제외하면 양지원은 꽤 신나게 놀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미소가 가득했다.위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양석진이 양창수를 뒤뜰로 불렀고 늦여름이라 뒤뜰에는 매미 소리가 귀를 울렸다. 양창수는 계단에 뚝 멈춰 섰다가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뒤뜰에서 양석진이 말했다.“지원이 이제 어리지 않으니 지원이 앞에서 아무 말이나 쉽게 내뱉지 말았으면 해.”“내가 뭘 또 아무 말이나 했다고 그래요?”양석진은 시시콜콜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너 자꾸 까불면 바로 입대시켜 버린다?”양창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마음대로 하세요.”양창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며 위층을 슬쩍 보다가 양석진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내가 헛소리했다 치죠.”그리고 몸을 휙 돌려 자리를 떠났다.양석진은 뒤뜰에 홀로 남아 사라지는 양창수의 뒷모습을 지켜봤다.의미심장한 양창수의 시선은 마치 오래된 전등처럼 깜빡깜빡하며 양석진의 마음을 괴롭혔다.양석진은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러다가 위층에서 양지원이 저를 부르자 천천히 위층으로 올라갔다.양석진은 그날 밤 또 불면증에 시달렸다. 하룻밤 내내 뜬눈으로 지새우는 건 양석진에게 있어 흔한 일이 되었다.어느 날부터인지, 양석진은 감히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못할 감정이 생겼고 아무리 억눌러도 아무도 없는 새벽이 되면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양석진도 이게 무슨 감정인지, 본인이 뭘 하고 싶은 건지 잘 몰랐다.그저 양지원만 떠오를 뿐이었다.어쩌면 양지원도 나이가 좀 더 들고, 각자 연인이 생기면 이런 감정이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했다.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이 현실이 되기를 양석진은 늘 기도했고 한편으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날 뒤로, 양석진은 며칠 동안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양지원의 걱정을 사지 않기 위해 최대한 집을 비우는 것을 택했다.그 시간이 점차 길어지고 더 이상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양석진은 바로 진병수의 연락을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