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거짓말은 무수한 거짓말을 낳는다.연정훈은 한치의 후회도 없이 안시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소현주를 보러 갔어.”안시연은 순간 숨이 턱 막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잠시 후에야 안시연은 겨우 입을 뗐다.“그때 한 번뿐만이 아니죠?”“...”“우리가 병원에서 그분을 만났던 날, 아, 두 분이 다시 만난 날이기도 하겠네요. 그날도 정훈 씨는 소현주 씨를 만나러 갔어요.”연정훈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하며 말했다.“그때는 얘기할 게 있어서 만난 거야.”“무슨 얘기 했는데요?”안시연은 한 걸음 한 걸음 연정훈에게 다가가며 몰아붙였다.“정훈 씨가 얼마나 소현주 씨를 그리워했는지, 아니면 소현주 씨가 정훈 씨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나요?”연정훈의 미간은 더욱 일그러졌다.연정훈은 잘못한 것도 맞고 그것 때문에 안시연에게 미안한 것도 맞았지만 무엇보다도 안시연을 좋아했다. 하지만 뼛속에 새겨진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만은 꺾이지 않았기에 사형 선고 같은 안시연의 촘촘한 의심에 반감이 들었다.안시연은 술을 마셨지만 머리와 발음은 오히려 평소보다 더 또렷해졌다.안시연은 입술을 한번 축이고 잔뜩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몸을 돌려 찬물 한잔을 따라서는 선 자리에서 벌컥벌컥 들이켰다.“그 두 번 말고도 만나 적이 있나요?”“없어.”“아직도 절 속일 건가요?”안시연은 소파에 기대앉은 채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재단을 그 사람에게 주는 게 얼마나 큰일인데 어떻게 사적으로 몇 번 만나서 소통도 하지 않고 결정할 수 있나요?”‘그래서 그랬던 거구나.’연정훈은 그제야 알아챘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연약함을 보아냈고 사태가 더는 악화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재단에 관한 일이라면 이해해.”“말해보세요, 듣고 있잖아요.”안시연은 옅은 웃음으로 회답했다.하지만 안시연이 침착할수록 상황은 더 심각하다는 것을 연정훈은 알아챌 수 있었다.연정훈은 생애 처음으로 범죄자처럼 심문을 당했지만 하나하나
역겹다.안시연은 결국 그 말을 뱉어버렸다.연정훈의 낯빛은 여간 어두운 게 아니었다.거실에는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안시연은 상처 입은 눈을 하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정훈 씨가 약속했잖아요, 더는 절 속이지 않겠다고요.”연정훈은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해 반박하지 못했다.연정훈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시연에게 사과했다.“너한테 숨긴 건 내 잘못이 맞아. 근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절대 아니야. 난 정말 소현주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너한테 약속한 그 날부터 내 마음속은 온통 너였어.”안시연이 조금 진정된 것으로 보이자 연정훈의 안시연의 손목을 끌어당겼다.하지만 안시연은 감전이라도 당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 연정훈의 손을 뿌리쳤다.그 동작이 하도 컸던 탓에 손에 쥐고 있던 반지도 날아가 버렸다.안시연의 손에서 탈출한 반지는 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녔다.안시연은 잔뜩 흔들리는 눈빛으로 얼른 허리를 숙여 반지를 찾았다.연정훈도 잠시 감정을 뒤로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한참을 두리번거린 끝에 둘은 마침내 발견했다.반지는 테이블 모서리에 있었다.연정훈은 걸음을 옮겼고 안시연도 마찬가지였다.동시에 손을 뻗었지만 안시연이 조금 더 빨랐다. 안시연은 손끝에 닿는 느낌을 확인하고는 반지를 가져갔다.고개를 들자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얽혔다.안시연은 반지를 들어 올리며 쓸쓸하게 웃었다.“이게 바로 정훈 씨가 말한 온통 저밖에 없다던 그 마음인가요?”“저희 외할머니께서 주신 반지를 정훈 씨는 떳떳하게 끼고 싶지 않아 하네요. 제가 주제넘은 생각이라도 할까 봐 그래요? 외할머니를 위해 주문한 목걸이는 정훈 씨 서재 서랍 안에서 고스란히 모셔져 있잖아요!”연정훈은 분명 목걸이에 대한 해결책을 말해줬지만 안시연은 지금 이런 순간에 그 일을 다시 입에 올렸다.연정훈은 머리가 지끈거려 눈썹을 마구 찌푸리고 말했다.“넌 지금 쓸모없는 것에 집착하고 있어.”안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연정훈을 노려보았다. 눈에는 그 어떤 해석도 듣고 싶지 않아
안시연은 더는 다툴 힘이 없었고 알코올에 잠식된 신경은 언제든지 그녀를 쓰러뜨리기에 충분했다.머리는 터질 것처럼 아팠지만 그보다도 마음이 더 아팠다.안시연은 연정훈을 한 번 더 보고는 눈을 내리깐 채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연정훈은 지금 이런 상태의 안시연을 나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연정훈은 재빨리 다가가 안시연을 끌어안았다.“놔줘요!”안시연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힘으로 뒤에서 끌어안은 연정훈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연정훈에 의해 몸이 돌려졌고 안시연은 그런 연정훈을 밀어내는 동시에 참지 못하고 그를 때려버렸다.혼란한 틈 속에서 손이 주제를 모르고 나댔다.짝!뺨이 얼얼했다.안시연은 선체로 굳어버렸다.옆으로 돌아간 연정훈의 뺨에는 빨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둘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안시연의 손은 덜덜 떨렸고 한동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연정훈은 턱에 힘을 주고 2초간의 침묵 끝에 무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안시연을 바라봤다.“너 지금 제정신 아니니까 밖에 나가지 마. 화를 내더라도 집에서 내.”안시연은 자신의 손톱에 긁혀 상처가 난 연정훈의 눈가를 보았다.안시연은 멍하니 넋이 나간 채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안시연이 방심한 틈을 타 연정훈은 안시연의 손을 잡아끌고 위층으로 향했다.침실에 들어선 후 분위기는 그야말로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침대에 앉혔다.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옷장을 열어 옷을 꺼냈다. 샤워하려는 것 같았다.안시연은 그렇게 다투고 난 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태평하게 앉아있을 수 없었다. 다시 정신을 차린 안시연은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연정훈은 안시연보다 먼저 문 앞으로 가서 문을 손으로 누르고는 시선을 내려 안시연을 바라보았다.“날 보고 싶지 않은 거면 오늘 밤은 내가 서재에서 잘게. 넌 여기 있어. 술 좀 깨고 나서 다시 얘기해.”“저 정신 멀쩡해요.”“너 취했어.”연정훈은 담담하게 말했다.하지만 그런 연정훈의 평온함
연정훈은 서재로 돌아가 서둘러 샤워를 했다.샤워하는 동안에도 연정훈은 아주머니에게 안시연을 지켜봐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10시쯤 되자 안시연은 갑자기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전 외할머니한테 갈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간 안시연은 연정훈과 대치해야 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붉은 얼굴을 보고 그녀가 반쯤 취해있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연정훈은 참을성을 가지고 안시연을 설득했다.“너 지금이 상태로 가면 외할머니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어.”“반우희 씨를 찾아가도 돼요!”“그 아가씨는 집에 아이들도 있잖아. 이 밤중에 찾아가서 귀찮게 하려고 그래?”“그럼 호텔에서 묵으면 되죠!”어쨌든 안시연은 연정훈을 보고 싶지 않았다.“...”연정훈은 말이 없었다.아주머니는 멀지 않은 곳에서 그 둘이 또 싸우기라도 할까 봐 마음 졸이고 있었다.위층의 두 잘생기고 예쁜 사람은 난간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안시연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고 연정훈도 다른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반우희한테 데려다줄게.”안시연은 연정훈의 말에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다. 안시연은 그저 차갑게 얼어붙은 태도로 옷을 갈아입고 신발을 신고는 마당에서 연정훈을 기다렸다.연정훈은 직접 차를 몰아 안시연을 아파트 아래까지 데려다주었다.끝내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시연은 안전띠를 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물로 올라갔다.연정훈은 여전히 시름이 놓이지 않았지만 또다시 안시연을 자극할까 봐 따라 올라가지 않았다.칠흑 같은 복도에서 빠른 걸음으로 반쯤 걸어간 안시연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안시연은 벽을 짚고 서서 주위의 어둠과 적막함을 느꼈다. 혈액 속에서 들끓었던 알코올도 점차 차게 식는 것 같았다.안시연은 당연히 외할머니를 보러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모습을 외할머니가 본다면 걱정하실 게 뻔했기 때문이다.단지 연정훈과 같은 공간에 있기 싫었을 뿐이다.그 집은 둘이 함께 살아온 추억으로 가득하다.침실의 구석구석에도 그들의
“제가 꼬셔서 넘어오게 한다면 어떻게 하실래요?”“네가 정말 안시연을 꼬셔서 넘어오게 만들면 그때 인정해줄게.”양지원은 속으로 어차피 양혁수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양혁수는 순식간에 활기를 되찾았다.“그래요. 어머니께서 인정해주신다면 그걸로 충분해요.”양혁수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양지원은 몸을 곧게 세우며 물었다.“너 뭐 하려고 그러니?”“어머니한테 콩국 좀 사다 드리려고요.”“무섭게 왜 갑자기 안 하던 효도를 하고 그러니.”양혁수는 그저 웃었다.“기다리세요. 이 아들이 콩국 사 들고 돌아와서 효도할게요.”양지원은 양혁수가 혹여나 무슨 일이라도 벌릴까 봐 당부했다.“이 늦은 밤에 괜히 찾아가서 재수 없게 굴지 말아라. 이 시간이면 다들 잠들었을 거야.”양지원은 ‘잠들었을 거다’라는 말을 괜히 더 강조했다. 양혁수는 그저 피식 웃기만 할 뿐이었다.이미 잠들었다면 그거야말로 양혁수에게는 그 둘에게 혼란을 주기 딱 좋은 기회였다.양혁수는 주머니를 뒤적이며 밖으로 나가면서 바로 안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이 밤에 갑자기 찾아가는 건 안시연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여겨 설명해야 했다.양혁수는 전화를 걸면서도 안시연이 과연 받을까 내심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안시연이 바로 받을 줄은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여보세요?”양혁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안시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울린 벨 소리에 다른 사람들이 놀랄까 봐 황급히 응답 버튼을 누른 탓이었다.“무슨 일이야?”안시연은 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하자 듣고 있던 양혁수는 이상함을 감지하고 물었다.“선배님 우셨어요?”“...”안시연은 코를 훌쩍이고는 다시 물었다.“무슨 일이야?”‘반복재생기도 아니고 이게 뭐야.’양혁수는 잠깐 조용히 생각하다가 말했다.“이 밤에 불쑥 전화를 드린 건 죄송합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선배님의 어머니께서 너무하다고 생각이 들어서 참을 수 없었어요.”“...”안시연은 말이 없었다.말을 마친 양혁수는 뒤늦게 본
양혁수는 안시연에게 가까이 다가가 살짝 냄새를 맡고는 물었다.“많이 마셨어요?”안시연은 몸을 움직여 양혁수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졌다.양혁수는 안시연의 맞은편에 앉아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이렇게 취하셨는데 연정훈 씨는 선배님이 그냥 나오게 내버려 뒀어요? 늑대가 선배님 물어갈까 봐 걱정도 안 되시나 봐요.”“나 이래 보여도 정신은 맑아.”참 겁도 없다.양혁수는 손으로 가위를 만들어 안시연의 눈앞에서 흔들었다.“이게 몇으로 보여요?”“... 팔.”“어이구 진짜 말짱하네요?”“...”안시연은 온몸이 아팠지만 웃지 않을 수 없었다.그런 안시연을 본 양혁수는 소파에 기대앉아 다리를 쭉 뻗고는 말했다.“뭐 좀 먹을래요?”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위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아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그럼 제가 알아서 주문하고 올게요.”양혁수는 몸을 일으켜 QR코드를 찍어 경인의 지역 특색 음식을 한가득 시켰다. 그중에 콩국 두 접시는 포장해달라고 부탁했다.“우리 집 아가씨 거예요.”안시연은 콩국을 힐끗 보고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연정훈이 아팠던 날, 안시연은 한밤중에 양나비를 보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연정훈에게 줄 콩국을 샀지만 양혁수의 차에 모두 쏟아버리고 말았다.그때도 밤새 다퉜었다.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하지만 이 짧은 반년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발생한 나머지 어떤 일들은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진 것이다.양혁수는 테이블을 두드렸다.“이보세요, 선배! 무슨 생각 해요?”안시연은 집 나간 정신을 다시 붙잡아 왔다.양혁수는 혀를 찼다.“지금 저를 앞에 두고 마음속으로는 연정훈 씨를 생각하는 거예요?”“...”안시연은 양혁수가 마음을 읽는 능력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양혁수는 안시연의 표정을 보고 자신이 맞게 짚었음을 알아챘다.양혁수는 순간 기분이 잡쳤지만 죽 한 그릇을 안시연의 앞으로 밀어주었다.“좀 먹어요. 얼굴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남자랑 싸웠다고 혼도
연정훈은 본인이 충분한 매너와 인내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장 달려들어 가 애송이와 한 여자를 두고 싸우는 건 본인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여겼다.안시연에 자신에게 화가 났다는 건 연정훈도 안다.안시연이 그저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을 원했고 그게 양혁수라는 점도 이해한다.시간이 되면 얌전히 자신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것. 연정훈은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연정훈은 안시연이 정말로 양혁수와 무슨 일을 벌일까 의심하지 않았다.안시연은 원래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양혁수가 주문한 음식들이 하나둘 나오자 새삼 입맛이 돌았다.중간에 닭발 한 접시가 나왔다. 양혁수는 스테인리스 숟가락으로 닭발의 뼈를 발라냈다. 막힘없는 양혁수의 전문적인 손놀림은 안시연을 놀라게 했다.“... 배웠어?”“우리 집이 전생에 무뼈닭발을 팔던 집이었거든요.”안시연은 또 바람 빠지게 피식 웃었다.“먹어요. 그리고 힘없이 처져있지 말아요. 보고 있는 제가 다 힘들어요.”양혁수는 분명 찻잔을 들고 있었음에도 술을 마시는 모양으로 쿨하게 두 모금 마셨다.안시연은 다시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나서야 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먹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온갖 애를 썼다. 그러려면 양혁수에게 먼저 말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혁수 씨 상처는 어떻게 됐어?”“지금 벗어서 보여드릴까요?”“... 아무래도 그만하는 게 좋겠어.”“그래요. 날씨도 추워서 저도 감기 걸릴까 봐 무섭네요.”...두 사람은 끊길 듯 이어지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음식을 거의 바닥냈다.양혁수는 안시연을 데리고 드라이브를 하며 밤공기를 마시게 해줄 계획으로 안시연을 차에 태웠다.하지만 차에 앉은 안시연은 또다시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까 많이 먹은 탓에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더 심해졌다.“나 좀 쉬고 싶어...”양혁수는 둘의 좌석을 모두 뒤로 눕히고 선루프를 열어 안시연에게 별을 보여주었다.안시연은 밤하늘에 홀로 반짝이는 외로운 별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마음은 평온
안시연은 밝은 빛에 놀라 눈을 뜨자마자 코앞에 있는 양혁수의 얼굴을 발견했다.안시연은 깜짝 놀라 무의식 간에 뒤로 물러났다.양혁수는 쯧쯧 혀를 찼다.양혁수는 손을 들어 빛을 가리는 것이 아닌 차에 시동을 걸고 따라서 라이트를 켰다.안시연은 하는 수 없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어떤 재수 없는 사람이 이 도련님의 심기를 건드렸나 확인하려 했다.사실 양혁수도 맞은 편의 사람이 누구인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두 자동차 라이트가 경쟁이라도 하듯이 마주 보고 밝히고 있으니 시야에는 온통 하얀 빛만이 들어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3초 정도 대치 끝에 상대방이 물러설 기미가 없자 양혁수는 작게 욕을 읊조리며 차에서 내렸다.양혁수는 칼에 찔린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와 싸움이라도 난다면 정말 큰 일이었다.안시연은 손을 뻗어 양혁수를 잡아 세웠다.“충동적으로 굴지 마.”양혁수는 미간을 찌푸리고 안시연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려던 찰나, 강렬한 빛을 뚫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남자를 어렴풋이 확인했다.‘연정훈? 하!’순식간에 침착해진 양혁수는 다시 운전석에 앉아 안시연에게 더 바짝 붙었다.안시연이 여전히 당황해하고 있을 때 차 문손잡이가 당겨졌다.눈치 빠른 양혁수가 한발 먼저 차 문을 잠갔다.그러고 나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창문을 두드리는 힘은 전혀 작지 않았다.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남자의 잔뜩 가라앉은 두 눈을 마주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연정훈이었다.안시연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해하고 있을 때 양혁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선배님 뭘 무서워하고 그래요. 저 사람은 전애인과 여전히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사이잖아요. 근데 선배님이 저 좀 만나고 저랑 말 몇 마디 한 게 무슨 큰일이라고 그래요.”안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의 말이 맞았다.안시연은 양혁수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소현주의 냄새를 온몸 가득 묻히고 온 연정훈과는 감히 비교도 안 되었다.창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 한참을 대치했다.그러자 안시연의 핸드폰이 울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