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선택은 안시연이 화가 나서 즉흥적으로 떠올린 것이었다. 안시연은 당당하게 말했다.“정훈 씨가 소현주 씨와 완전히 정리하면 전 다시 정훈 씨를 믿고 연애를 계속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정훈 씨가 소현주 씨를 놓지 못한다면 저를 아내로 맞아주고 명분과 지위를 주세요. “사랑과 권리 중 하나는 가져야 하지 않겠어요?”‘봐, 얼마나 일리 있는 이론이야.’밤에 싸울 때, 연정훈은 안시연이 결혼 얘기를 꺼내는 것이 짜증 났다. 양혁수가 방해하자 연정훈은 질투로 가득 차 있었지만, 안시연에게 결혼을 강요받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하지만 안시연은 이렇게 말했다.“부유한 가문의 사모님들은 한쪽 눈을 감고 모른 척 하고 살잖아요. 내가 연씨 사모님이 되면 정훈 씨 걱정하지 말아요. 나도 규칙을 지킬게요. 양씨나 임씨가 몇 명 더 와도 난 참아낼 수 있어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안시연의 이 말은 분명히 연정훈을 자극하려는 의도가 있었다.안시연의 성격을 보면 그런 일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게 분명했다.연정훈이 침묵하자 안시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재촉했다. “대표님, 하나만 골라보세요.”안시연은 세 번째 선택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연정훈의 아내가 되겠다는 마음을 최근에 서서히 접어두었다.연정훈과의 관계는 마치 도박 같았다. 안시연은 필연적으로 질 것이고 그 끝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이었다. 그저 독이 전신으로 퍼지는 걸 느끼며 차분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이전의 모든 일은 죽음의 시간을 늦추기 위한 것이었다.연정훈은 또다시 안시연을 설득하려 했을 것이다. 소현주와의 관계가 아무 문제 없다는 듯, 계속해서 그녀와 연애를 이어가려고 했을 것이다.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연정훈은 한참 동안 안시연을 응시하다가 얇은 입술을 살짝 움직이며 물었다.“나한테 시집오고 싶어?”안시연은 순간적으로 주춤했다. 그러나 곧 입술을 깨물며 등을 곧게 세우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 돼요?”“정훈 씨가 나를 사랑한다면서 왜 나와
안시연은 잠시 멈칫했다.‘정훈 씨에게 시간을 주라고?’연정훈은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한 자 한 자씩 천천히 말했다.“충분한 시간을 줘. 내가 그 장애물을 다 해결하고 너를 내 아내로 맞이할게.”안시연의 눈빛이 흔들렸고 어쩔 수 없이 침을 삼켰다.잠깐 머릿속이 멈췄지만, 이내 이성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얼마나요?”연정훈은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최대한 빨리.”안시연은 고개를 돌리며 다시 말했다.“정훈 씨는 여전히 날 달래고 싶은 거잖아요.”연정훈은 안시연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안시연은 자신이 연정훈의 아내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장애물을 넘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결혼은 중요한 일이야. 신중해야 하지 않겠어?”연정훈은 조심스럽게 반문했다.“처음 정훈 씨가 소현주와 결혼하기로 했을 때도 그렇게 신중했나요?”안시연은 여전히 소현주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연정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이건 우리의 일이야. 계속해서 소현주를 끌어들이지 마.”“소현주 씨만 있으면 이건 우리 셋의 문제예요!”그녀는 한동안 생각하다가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결혼이며 뭐든 다 별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안시연은 갑자기 강하게 몸부림치며 연정훈의 품에서 빠져나갔다.“세 번째 선택도 하지 말고 두 번째 선택도 하지 마요. 그냥 우리 헤어져요.”연정훈은 어이없어하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는 눈을 감고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불가능해.”안시연은 입술을 꽉 깨물며 다시 차 문을 열고 내리려 했다. 안시연은 일방적으로 헤어지겠다고 선언하면 연정훈이 자신을 붙잡지 못하리라 생각했다.그러나 연정훈은 뒤에서 안시연을 힘껏 끌어안으며 그녀를 놓지 않았다.“놔줘요!”안시연은 술기운에 화가 나서 어디서 생긴 힘인지 모르게 저항하며, 연정훈의 얼굴을 때리려 했다. 맞히면 때리고 맞히지 못하면 손톱으로 할퀴려고 했다.연정훈은 처음으로 안시연이 이렇게 거칠게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어쩔 수 없이 그는 안시연의
안시연은 완강하게 강남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끝까지 버텼다.결국 연정훈은 어쩔 수 없이 안시연을 다시 반우희의 집으로 데려다주었다.가는 내내 두 사람은 침묵만이 흐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아파트에 도착하자 안시연은 말없이 차 문을 열고 내렸다.연정훈은 안시연이 어두운 계단으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결심한 듯 차 문을 열고 빠르게 걸어갔다.계단 입구에서 연정훈은 안시연을 힘껏 안았다.“오늘 밤 여기서 자도 좋아. 하지만 내일은 집으로 돌아가.”안시연은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정훈은 한 걸음 더 양보하며 말했다.“내일 돌아가기 싫으면 여기서 이틀 더 있어도 돼.”그럼에도 안시연은 여전히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긴 침묵 끝에 연정훈은 안시연을 조용히 놓아주며 나지막이 말했다.“들어가.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해.”“네...”안시연은 침울하게 대답하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연정훈은 그 자리에 서서 안시연이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기다렸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반우희가 문을 열며 깜짝 놀라 안시연을 맞아들이는 소리가 들리자 연정훈은 그제야 차로 돌아갔다.위층에서 반우희는 이미 잠에서 깨어났고 갑자기 찾아온 안시연을 보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침실에서 자라고 권했다.안시연은 미안한 마음에 말했다.“괜찮아요. 소파에서 자도 돼요.”하지만 반우희는 졸린 눈을 비비며 손을 휘저었다.“그럴 순 없어요. 시연 씨는 손님이잖아요. 제 침대에서 주무세요.”안시연은 비틀거리며 흔들리는 반우희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동안 마음속을 어지럽히던 복잡한 감정들이 낯선 공간 속에서 잠시나마 따뜻함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반우희의 침대는 오래됐지만, 매우 컸다. 아마도 이전에 어르신이 사용했던 것 같았다.반우희는 이불을 안고 나와 안시연에게 창가 쪽 자리를 내주었다.“언니, 난 먼저 잘게요. 언니도 빨리 자요.”반쯤 낯선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맞아들이고는 그
양씨 가문에서.집 밖에서 양혁수는 귀가한 양지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 앞에서 양지원을 가로막으며 차 창문에 기대어 말했다.“대표님, 어떻게 다른 사람 편을 들어줄 수 있어요?”양지원은 양혁수를 한 번 쳐다본 뒤, 아무렇지 않게 입을 벌려 그에게 ‘후’하고 바람을 불었다.강렬한 두리안 냄새가 났다.“아!”양혁수는 눈을 감고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무슨 냄새예요? 너무 지독한데요.”양지원은 웃으며 차 문을 두드렸다.“비켜.”양혁수는 자리를 내주며 불평했다.“앞으로 이거 좀 먹지 마세요. 그 냄새가 몸에 배면 품격 없어 보여요.”양지원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품격을 모르는 놈.”“두리안 같은 심오한 과일은 너희 할아버지와 나도 좋아해. 왜 너만 싫어하는 거야?”“내 유전자가 업그레이드돼서요.”“그건 퇴보야.”양지원은 안시연을 떠올렸다. 안시연은 두리안을 좋아했다.에휴.그들은 집 앞에 도착했고 양지원은 밖에서 2층을 한 번 쳐다봤다.양민아의 방 불이 갑자기 꺼졌다.양지원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시선을 거두고 양혁수에게 빨리 올라가서 쉬라고 재촉했다.“앞으로 안시연 씨한테 매달리지 마. 안시연 씨는 널 좋아하지도 않아.”양혁수는 손을 깍지 끼고 계단을 올라가며 느긋하게 말했다.“진정한 사랑은 항상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에요. 엄마는 못 느끼세요? 안시연이랑 연정훈 씨 이제 곧 끝나요.”“끝나도 네 차례가 아닐 거야.”양혁수는 불만스럽게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쳐다봤다.양지원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양혁수를 보내려 했다.“두고 보세요. 내가 안시연을 결국 저에게 넘어올 거예요.”양혁수가 말했다.글렀다.그 ‘넘어온다’는 말 한마디만으로도 양혁수가 안시연을 가질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양지원은 한밤중임에도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콩국을 먹고 있었다.거실은 조용했고 양지원은 2층 양민아의 방을 바라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한강은행 사건은 사소한 일이 아니었고 양민아의 성격으로 보아
부승원이 갑자기 찾아오자 반우희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안시연이 반우희를 살짝 밀어 깨워주고 나서야 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렸다.“부 변호사님,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부승원은 이미 아이들에게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아이들은 의자를 가져다주고 과일을 내오며 차를 따르는 등 바삐 움직였다.부승원은 안시연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안시연은 미소로 답했다.부승원은 반우희에게 말했다.“옹지천 씨의 사건을 내가 맡게 됐어.”옹지천은 바로 그 악명 높은 원장이었다. 그날 그들을 차로 들이받은 사람이기도 했다.반우희는 부승원이 이 사건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궁금했다.부승원은 이미 안시연에게 설명을 마친 듯했다.“연정훈이 저를 보낸 겁니다. 그날 시연 씨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들었어요.”반우희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렇구나.’안시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부승원이 말을 이었다.“연정훈에게 들었는데 시연 씨가 옹지천을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하더군요. 연정훈이 사람을 보내 해결하려 했지만, 완전히 끝을 보지 못해서 옹지천이 궁지에 몰리자 반우희 씨를 찾은 거예요. 결국 시연 씨까지 피해를 보게 됐죠.”안시연은 당황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부 변호사님, 당신 같은 변호사가 직접 나서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부승원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어렵지 않았습니다. 충분한 보상을 받았습니다.”안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반우희에게 말했다.“상황을 말해 봐.”“아, 네!”반우희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긴장한 듯 들뜬 기분이 들었다.반우희는 갑자기 바빠지며 책상 위를 정리했다. 특히 법률 서적들과 소설책들을 한꺼번에 치우고는 작은 노트북을 들고 부승원 맞은편에 집중한 표정으로 앉았다.“부 변호사님, 이제 시작하셔도 됩니다.”말이 끝나자마자 반우희는 두 눈을 반짝이며 펜을 꽉 쥐었다.부승원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네가 말하고 내가 적
소현주는 온화한 표정으로 외할머니에게 말했다.“과찬입니다. 저는 그저 무명 의사일 뿐이에요. 할머님의 외손녀와는 비교할 수 없죠.”안시연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외할머니는 웃으며 눈이 가늘어지더니 소현주의 손에 낀 반지를 보고 참지 못하고 물었다.“소 선생님, 결혼하셨나요?”안시연도 외할머니의 질문에 이끌려 그 반지를 보았다.그것은 지나치게 큰 다이아몬드 반지였다.소현주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아직입니다.”“그럼 곧 결혼하시나요?”소현주는 약간 쑥스러운 듯 손에 낀 반지를 바라보며 말했다.“몇 년 전 연애 기념일에 받은 작은 선물이에요. 그냥 계속 끼고 있었죠.”안시연은 불편한 마음에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더는 볼 필요가 없었다.몇 년 전이라면 분명 연정훈이 준 것일 것이다. 소현주는 안시연과 연정훈의 관계를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이런 모호한 말을 꺼낸 것이 분명했다.“외할머니, 이제 가요. 소 선생님을 방해하지 말아요.”안시연이 외할머니에게 말했다.“그래, 그래.”외할머니는 안시연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섰다.소현주는 끝까지 그들을 배웅하며 단정한 태도를 유지했다.아래층에 내려온 뒤에도 외할머니는 계속해서 소현주를 칭찬했다.안시연은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그들이 떠난 후, 위층 창가에 선 소현주는 안시연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얼굴은 점점 차가워졌고 눈빛은 어둡고 일그러져 갔다.요즘 며칠 동안 아무리 소현주가 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어도 연정훈은 더 이상 소현주를 만나주지 않았다.대신 연정훈의 비서가 여러 가지 물건을 보내왔고 저택의 설계도와 프로젝트 계획서 같은 것들이었다. 그 모든 것들은 어마어마한 액수를 의미했다.“연 대표님께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시면 된다고 하셨습니다.”‘마음대로 고르라니...’그러니 다 고르면 연정훈의 보상도 끝난다는 것이다.갑자기 이렇게 냉정해진 연정훈은 소현주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잔인했다.안시연을 본 순간, 소현주는 그 이유를 깨달
안시연은 조심스레 과자를 챙겨 놓았다.할머니는 안시연의 기분이 좋은 걸 눈치채고 참지 못해 물었다.“누구셔?”“상사예요.”안시연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할머니는 안시연의 회사 상사인 줄 알고 말했다.“정말 좋은 사람이네”몇 마디 하시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안시연이 출발하려던 찰나 휴대폰이 갑자기 깜빡였다.안시연은 슬쩍 휴대폰을 살폈다. 놀랍게도 이메일 회신이 온 것을 발견했다.[발신자: N.S.]안시연은 약간 흥분되었고 빨리 집에 돌아가서 메일을 확인할 생각이었다.이 느낌은 마치 잃어버린 청춘이 한순간에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양지원은 건너편에서 안시연의 차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패딩을 입었음에도 여전히 메마른 안시연의 모습을 떠올렸다. 양지원은 문득 연민을 느꼈다. ‘참, 좋은 소녀였는데 운이 따라주질 않아서 안타깝구나.’때마침 양혁수가 병원에서 돌아왔다. 그들은 함께 집으로 향했다.“며칠 있으면 설인데 큰삼촌 오세요?”양혁수가 조용히 물었다.양지원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모르겠어.”“전화해서 물어보지 그래요?”“...바쁘신데 뭘 굳이 물어.”양혁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앞좌석에 앉은 집사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양씨 저택에 도착하자, 집안 곳곳이 설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할아버지가 이번 설을 경인에서 보내시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화려한 장식들이 집 안 곳곳에 걸려 있었다.양민아는 방학을 했고 한강시 특산 음식을 준비하라고 사람들에게 지시하고 있었다.양지원은 2층 테라스에 앉아 통유리창 너머 펼쳐진 눈 덮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3대가 모이니 이제야 집안에 화목한 기운이 감돌았다.그 사이, 오성호에게서 걸려 온 전화는 양지원의 좋은 기분을 반쯤 깨트렸다.기분이 울적한 가운데 아래층에서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집사는 난간 너머를 살짝 내다보더니 다시 양지원에게 다가와 말했다.“민아 아가씨가 실수로 접시를 깼습니다.”양지원은 무심
양지원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친자 확인이요?”“네.”“누구와 누구의 친자 결과를 확인하려는 거죠?”상대방은 완전히 침묵에 빠졌다.양지원은 한숨을 내쉬며 바닥나는 인내심을 간신히 붙잡았다.“손문병 씨, 계속 입 닫고 있을거면 앞으로 제 일을 맡지 마세요.”“...”상대방은 더 이상 망설일 수 없다는 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중 하나는 아마도 도련님의 것일 겁니다.”양지원은 순간 멈칫했다.“뭐라고요?”“도련님의 것입니다.”양지원은 할 말을 잃고 머릿속이 잠시 멈춰 버린 듯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꽉 쥐었다가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며 천천히 손을 풀었다.그럴 리 없다.이미 예전에 친자 확인을 했고 혁수는 분명 오성호의 아이였다.“다른 하나는 누구 거예요?”“샘플 정보를 근거로 저희는 큰아씨인 것으로 의심하고 있습니다.”양지원은 얼어붙었다.그녀는 계속 혁수가 오성호의 아이가 아닐지 걱정했지만, 혁수가 자신의 아이가 아닐 거로 의심하는 사람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정말 웃기는 일이었다.양민아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궁금해졌다!양지원은 의자에 깊이 기대며 낮게 말했다.“민아가 이걸 조사하는 이유가 뭔가요?”손문병은 대답 대신 조심스럽게 다른 힌트를 주었다.“큰아씨, 친자 결과에 문제가 있습니다.”양지원은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어떤 문제요?”손문병은 결심한 듯 서둘러 말했다.“양민아 아가씨와 협력했던 사람들은 모두 통제했습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이번이 처음이 아니며 얼마 전에도 두 개의 샘플을 가져갔다고 합니다. 하나는 도련님이었고 다른 하나는 안시연 씨의 것이었습니다.”안시연?양지원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너무 급히 일어난 탓에 격해진 감정과 함께 눈앞이 캄캄해졌다.“계속 말해요!”“첫 번째는 혈연 확인이었는데 결과는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친자 확인이었고 결과는...친자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쾅!양지원은 천둥이 머리 위로 내리치는 듯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
새벽이 되도록 양혁수의 방에는 열기가 뜨거웠다.딸깍.헤드 등을 켜고 변여름이 이불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연스레 변여름의 몸을 닦아줬다.변여름은 자꾸 양혁수를 훔쳐봤고 양혁수는 손을 뻗어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꾹 눌렀다.그러자 변여름은 양혁수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비며 입꼬리를 올렸다.이어 욕실에서 샤워 소리가 들려오자 왠지 양혁수가 만족하지 못해 홀로 해결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 옆 서랍을 열어보니 손목시계 따위만 있을 뿐 남은 콘돔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양혁수가 많이 자제한 것 같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있는 걸 통째로 갖고 오는 건데.’그리고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양혁수가 돌아왔다.변여름은 얌전히 누워있다가 양혁수의 품에 꼭 안겼다.양혁수의 체향을 느끼며 변여름은 두 눈을 감고 얼굴을 비볐고 목 언저리에 뽀뽀하려 했다.그러나 양혁수가 변여름을 제지했다.“지금 뭐 해?”“왜요?”양혁수는 제 목에 있는 흔적을 가리켰고 새길 때는 몰랐지만 샤워하고 나니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변여름이 지난번처럼 또 정도 없이 세게 흔적을 남긴 모양이었다.하지만 이번 모양과 색깔이 너무 마음에 들어 변여름은 미안한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오빠 다음엔 반대편도 해줄게요.”“...”양혁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변여름이 취조하듯 방금 잠자리가 만족스러웠냐고 물었다.“오빠, 나 다른 것도 배웠는데 오빠만 좋다면... 읍!”양혁수는 바로 변여름의 입을 막았다.“...”‘풉. 부끄러워하긴.’양혁수는 본인이 오빠로서 리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 꼬맹이한테 놀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잠이나 자!”그래서 고작 이런 일로 무게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흥. 오늘은 이만 물러선다.’변여름은 얌전히 몸을 돌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자꾸 치근덕거렸다.“오빠가 많이 보수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요
변여름은 말재주가 뛰어났고 그대로 두면 분명 더 큰 소동을 일으킬 기세였다.양혁수는 그녀를 다잡아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변여름은 밀고 당기기에 능했고 결국 늘 그가 그녀를 달래는 쪽이었다. 변여름을 제압하려면 그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를 유혹하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서로가 진심을 담기 시작하면 결국 누가 누구를 먼저 유혹한 건지조차 흐려진다.어느새 그녀는 그에게 기대어 그를 천천히 침대로 이끌었다.양혁수는 조용히 누워 있었고 변여름은 이불 속에서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었다. 표정은 잔잔했지만 눈동자에는 설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는 익숙한 듯 그의 팔을 벌리고 조용히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내 그의 온기를 안은 채 잠이 들었다.양혁수는 차갑게 굴어보려 했지만 몸은 정직하게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키스가 끝나자 그는 스스로의 입을 때리고 싶을 만큼 후회가 밀려왔다.저녁이 되면 변여름은 양혁수 곁에서 말이 많아졌다. 그녀는 그와 감정을 나누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전부 들려주었다. 작은 머릿속은 놀라울 만큼 명확했고 양혁수가 확신하지 못하던 일들을 종종 먼저 짚어내곤 했다.그러다 보면 두 사람의 입술은 자석처럼 끌려붙었고 전에는 양혁수가 불씨를 조심스럽게 다룰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변여름을 집에 데려온 첫날 밤 양지원을 마주친 이후의 느낌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녀를 몸 아래에 눕히고 얼굴을 감싸안은 채 키스하자 변여름은 그의 몸에 다리를 스치듯 비볐고 그는 순간적으로 치솟는 충동을 느꼈다.자신의 반응을 깨달은 그는 재빨리 움직임을 멈췄다.변여름에게 들킬까 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조명의 밝기를 낮추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막 눕자마자 변여름의 부드러운 몸이 다시 양혁수의 품에 파고들었고 변여름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으며 단 한 번의 눈 맞춤으로 그녀가 이미 모든 것을 알
양혁수의 ‘착하지’라는 한마디에 변여름의 입꼬리는 하늘까지 닿을 듯 환하게 올라갔다.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데 능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특히 밤 11시 30분이 넘도록 그가 나타나지 않자 아마도 자신이 먼저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아이고.’변여름은 그의 장난에 넘어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간질이는 마음을 안고 그녀는 문가에 서서 발끝을 들어 여러 번 밖을 내다보았다.밤이 깊어 12시가 다 되어도 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외투를 걸쳐 입은 채 문을 열고 나섰다.양씨 가문의 저택은 워낙 넓어서 그녀가 양혁수의 방에 닿기 위해선 한 층 아래로 내려가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어야 했다.몰래 발걸음을 옮겨 문 앞에 선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예상대로 잠겨 있지 않았다.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은 숨 막힐 듯 어두웠다.침실은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녀는 익숙한 감각과 뛰어난 시력에 의지해 침대를 더듬어 앉았지만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변여름은 숨을 죽인 채 주변을 감지했고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혹시 오빠가 나를 찾으러 간 걸까?’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작은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그녀는 즉시 멈춰 섰다.달빛이 비추는 거실 그 한쪽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침실 문을 빠져나온 그녀가 멈추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았고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그의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고 그는 그것을 가볍게 던지며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변여름은 품에 안긴 이가 양혁수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갑작스레 뒤에서 안아오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이어진 그의 키스가 그녀의 옆얼굴에 가볍게 닿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양혁수는 평소 그녀가 마음껏 표현하게 두었지만 자신이 먼저 유혹
식사가 끝나자 양지원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식사 후 그녀는 아래층 소파에 편히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재어 양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층에서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에 또다시 작은 충돌의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양지원이 집에 머무는 동안 양혁수는 변여름과 같은 방에 머무를 수 없었다.변여름은 몹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에는 세 글자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양혁수.]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꽤 화가 난 모양이네. 성까지 붙여 부르다니.’풀네임으로 불린 건 처음이라 문득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수건을 툭 던지고 침대에 앉은 그는 변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났어?]잠시 후 변여름에게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사진 속에는 줄에 매달린 막대 인형이 있었고 그 옆에서 날아온 주먹이 인형의 배를 강하게 가격하고 있었다. 인형 옆 상자에는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고 상자 안에는 ‘양혁수’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양혁수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디서 배운 거야? 너희 천재들은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는 거야?]예전에 변여름은 허예나의 이름으로 그와 채팅할 때 일부러 평범한 여고생처럼 꾸미며 어색하고 오래된 이모티콘을 보내곤 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고 재치 넘치고 독특한 이모티콘으로 그의 휴대폰을 장악했다.[이런 게 아주 유용하죠.]변여름이 말했다.[그러니까. 이제는 원격으로도 때릴 수 있지.]양혁수가 답장을 보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양혁수는 전화를 받았다.화면 속 변여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었고 아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지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각도는 썩 좋지 않았다.양혁수가 웃으며 말했다.“집에 재밌는 공간 많잖아. 잠 안 오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나가기 싫어요.”변여름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