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으로부터 느껴지는 부드러운 촉감에 연정훈의 몸은 조각상처럼 굳어졌다.아직 정신이 해롱해롱한 양시연은 아무런 생각 없이 혀를 내밀어 그의 손끝을 핥고 또 핥았다. 연정훈은 길게 한숨을 쉬더니 내밀었던 손을 뒤로 감추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침을 삼키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자는 거야?”낮은 소리로 뭐라 중얼거리는 양시연은 잠이 든 것 같지 않았다. 연정훈은 몸을 돌려 누워 뒷모습만 남긴 양시연에게 이불을 살포시 덮어주고 그녀 곁을 지켰다. 몇 분 뒤 드디어 꿈나라로 떠난듯한 평온한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침대 옆에 있던 연정훈은 방을 떠나지 않고 소파에 앉아 그녀 곁을 지켰다.얼마나 지났을까 연정훈이 비몽 사몽하게 눈을 떠보니 양시연이 침대에 누운 채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무슨 일이야?”연정훈이 물었다.“정훈 씨.”“응. 무슨 일 있어?”양시연은 입술을 오므리더니 잠깐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저 배고파요.”“너 방금 토했잖아. 먹을 수 있겠어?”“네. 아까 위를 비워서 그런지 배고파요.”말을 하는 내내 양시연의 눈길은 그가 가져온 도시락에 꽂혀있었다.“찹쌀죽이랑 만두네?”연정훈이 도시락에 들어있는 음식을 하나하나 알려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양시연은 도시락을 바라보며 군침을 꼴깍꼴깍 삼켰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연정훈은 그런 양시연의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 웃음을 터뜨렸다.“먹고 싶어?”양시연은 연정훈을 경계하며 대답했다.“다 먹고 나면 또 저랑 결혼하자고 할거예요?”연정훈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쯧. 완전히 취한 건 아니었네.’“나랑 결혼하는 게 그렇게 싫어?”양시연은 눈을 감고 엎드렸다가 연정훈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양시연은 어느 정도 술이 깬 상태라 정신은 맑았지만 생각나는 대로 입을 여는 것이 문제였다.“정훈 씨는 결혼하고 싶지 않으시다면서요. 예전에 독신주의셨잖아요. 평생 결혼하지 않으실거라고 하셨잖아요.”“그건 예전이고.”“정훈 씨, 지금 나이 드셔서 결혼
연정훈은 양시연의 신분을 추측해 보았었다.그는 양혁수와 양지원이 3년 동안이나 떨어져 지낸 사실과 현재 오성호의 처지를 통해 뭔가 눈치채고 있었다.하지만 양시연의 친아버지가 양석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양시연은 아직도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그녀는 연정훈과 아버지에 관한 얘기를 나누려고 몸을 일으켰다.이때 연정훈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마침 얘기를 하려는 양시연의 입을 막았다.갑자기 입 막힘을 당한 양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연정훈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눈을 깜박이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연정훈의 손을 홱 뿌리쳤다.‘정훈 씨 뭐 하는 거야?’연정훈은 잔뜩 성이 난 양시연을 달래려 입을 열었다.“너희 아버지가 양석진 씨라는 걸 절대로 말하면 안 돼. 알았지.”그의 말에 양시연은 어리벙벙해졌다.물론 그녀도 이 일은 비밀이어서 함부로 말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알겠어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말하고는 잠깐의 고민 뒤에 다시 드러누우려 했다.“말 안 할 거예요.”연정훈을 그녀 허리에 감겨있는 두 팔에 힘들 넣어 드러누우려는 양시연을 일으키고 물었다.“이 일은 또 누가 알고 있어?”“무슨 일 말씀이세요?”양시연이 정색하며 물었다.“...네 아버지가 양석진 씨라는 거 말이야.”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시연이 소스라치게 놀라서 물었다.“정훈 씨가 어떻게 아셨어요?”연정훈은 어이가 없어서 침묵을 지켰다.양시연은 머리카락을 쥐어 잡으며 잔뜩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입술을 핥으며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찾아 가족들에게 비밀이 유출되었다고 보고하려던 참이었다.“괜찮아. 말 안 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마.”“제 핸드폰 어디 있어요?”양시연은 벌써 핸드폰에 주의를 돌렸다.연정훈의 입꼬리가 가볍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베게 옆에 놓인 핸드폰을 발견하고 그녀 손에 직접 쥐여주었다.양시연은 무거운 집을 벗어버린 듯 홀가분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손에 꼭 잡고 드러누웠다.
양시연은 오랜만에 좋은 꿈을 꾸었다. 꿈속의 그녀는 아주 제멋대로였다.부드러운 입술, 녹아내리는 마음.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녀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내가 너랑 결혼하기 전까지 얌전하게 기다려줘.”‘음...뭐지? 머리도 아프고 허리도 좀 시큰시큰한 거 같은데.’양시연이 꿈나라에서 깨어날 때 방은 에어컨 바람 덕분에 아주 시원했고 커튼이 닫혀있어서 저녁처럼 어두컴컴했다.옆에 있는 시계를 보니 이미 열 시가 다되었다.소스라치게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자 양시연은 세상이 돌아가는 것처럼 어지러웠다.‘망했어.’급히 핸드폰을 열어보니 무음 모드 때문에 미처 받지 못한 부재중 전화 여러 통이 와있었다.양시연은 허탈하게 침대에서 2초 동안 멍해 있다가 전화를 다시 걸려고 했다.이때 손목에 차인 남성용 시계가 눈에 띄었다.‘누구 거지?’파텍필립 블랙 다이얼.순간 여러 가지 화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고 그녀는 시계의 주인을 찾았다. 양시연은 이마를 치며 생각했다.‘정훈 씨 거구나. 어젯밤이 미친 듯이 정보를 캐냈는데 이 시계가 어떻게 내 손에 있는 거지?’양시연은 생각을 그만하고 몸을 단장한 뒤 비서에게 연락했다.다행히도 비서가 양시연의 상황을 눈치채고 해야 할 일을 절차대로 마무리했다.양시연이 회의를 열어 인터참의 일을 알맞게 안배하자마자 연정훈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깼어?”연정훈이 자연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양시연은 잠깐의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어제 몇 시에 떠나신 거예요? 떠나실 때 시계를 두고 가셨죠?”연정훈이 대답했다.“두고 간 거 아닌데. 네가 가져간 거야.”“네?”“너 이제부터 술 못 마시면 마시지 마. 그 정도 주량으로 마셨다간 큰일 나. 네가 만난 모든 사람이 좋은 사람일 수는 없잖아.”양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때 연정훈이 한마디 덧붙였다.“괜찮아. 난 먼저 떠나서 시계만 뺏겼어.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걱정하지마.”그 말에 양시연은 입을 삐죽거렸다.그녀가 뭐
이 사람들과 며칠 동안 일을 함께 해보니 양시연은 왜 돈과 포르노가 항상 엮여있는지 알 수 있었다.사람들은 흥분한 상태에서 더 심한 정신적인 자극을 받고 싶어한다.극도로 흥분한 상황에서 화끈한 밤을 보낼 수 있다면 마다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아까 금방 양시연은 한우빈이 비서를 품에 안고 휴식실로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다.이는 아주 흔한 일이었다.낮에 사람들 앞에서 화려한 모습을 보이는 엘리트들은 누구나 여자를 곁에 두고 있었다.오히려 부승원처럼 사생활이 깨끗한 남자가 고행승이라고 불리지. 연정훈은 뭐.아.이 사람들 모두 양시연이 연정훈과 그런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는 부승원과 함께 수행하는 행렬에 들지 못했다.의자에 앉아있는 양시연의 등 뒤에는 등불이 찬란했다. 양시연은 커피를 들고 서 있는 남자를 보며 물었다.“대표님도 자주 저래요?”“무슨 말이야?”양시연은 휴식실 방향으로 턱을 치켜들어 짚었다.‘혹시 대표님도 흥이 나면 여자를 품에 안고 저러나?’연정훈은 시선을 이동하여 그녀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이런 말은 모호하게 하지 마, 내가 착각할지도 모르니까. 나는 네가 이상한뜻으로 눈치 주는 줄 알았어.”양시연은 그를 한 번 노려보고는 발을 의자의 페달에 올려놓고 한 바퀴 빙글 돌아 다시 그와 등지고 앉았다. 그녀는 나무 테이블에 엎드린 채 밖에서 달리고 있는 차들을 보며 넋을 놓았다.연정훈은 그녀가 커피를 별로 안 마시는 것을 보고 따뜻한 우유 한 잔으로 바꿔 주려 했다. 하지만 양시연이 잽싸게 커피를 가로채 앞으로 가져왔다.오전에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녀가 남긴 음료를 연정훈이 마셔버려 입이 열 개여도 설명할 수 없었다.연정훈은 한쪽 눈썹을 치켜든 채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양시연의 뒤에 서서 물었다.“요 며칠 어땠어?”“너무 쩌릿했어요.”요 며칠 돈에 발이 달린 듯 자기 절로 그녀의 주머니로 들어왔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안 올 거예요.”그녀가 말했다.연정훈은 일찍 감지 이를 예상하였다.애초
어느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닥뜨렸다.양시연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연정훈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지금 뭐로 보이시는지 아세요?”“뭔데? ”“여직원들을 괴롭히는 직장 쓰레기.”연정훈은 할말을 잃었다.양시연은 콧방귀를 뀌고 의자를 옮겨서 그를 멀리했다.그녀는 컴퓨터 화면을 가리켜 연정훈에게 데이터를 보여주고는 그의 정보를 캐내면서 이 일을 할지 안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억지로 시키는 일은 좋은 결과를 못 볼 거예요.”양시연은 연정훈에게 슬쩍 말을 건네면서 추잡한 수단을 썼다간 아무 이득도 얻지 못할 거라고 눈치를 줬다.이에 연정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상관없어. 결과가 어떨지는 그때 가서 보면 되지.”양시연은 침묵을 지켰다.그의 말에 더욱 불안해진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고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민했다.이때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양지원이 그녀더러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자고 재촉했다.양시연은 잠깐 하던 생각을 멈추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연정훈은 더는 그녀를 막지 않고 물건을 챙겨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그의 시선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양시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잠시 후 양씨 가문 저택에 도착한 그녀는 가방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은은한 달빛이 쏟아져 양시연을 감싸고 있었다. 엄청 피곤하고 머리가 여전히 무거웠지만 최근 며칠의 경험을 생각하면 피가 끓어오르는 듯싶었다.집에 들어서니 양지원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고 그녀를 마주한 이는 양혁수였다.영혁수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은 양혁수가 준비한 음식이 차려져 있는 정원 앞의 작은 정자로 발걸음을 옮겼다.양시연은 조용히 식사하기 시작했고 양혁수는 대나무 의자에 누워 열기를 식혔다. 긴소매 긴바지의 실크 잠옷을 입고 누운 그의 모습은 참으로 편안해 보였다.“최근에 왜 연정훈이랑 가깝게 지내는 거야?”양혁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양시연은 그를 힐끗 보고 잠깐의 고민 후에 대답했다.“대표님이 선물 계약
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양혁수는 양시연을 불러 멈춰 세웠지만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샤워하러 가봐.”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덤덤한 톤으로 말했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장난을 쳤다. “예, 형님!”양혁수는 침묵을 지켰다.덩굴로 뒤덮인 복도를 지나가는 양시연의 얼굴에 미소가 점점 사그라졌다.그녀는 계단을 올라가며 머릿속에서 그해에 있었던 일을 빠르게 뒤집어 보았다.출생의 비밀에 대한 일은 양지원이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녀에게 말해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도 알게 되었다.양혁수와 양지원과의 모자 관계가 그리도 좋았는데, 갑작스럽게 자기가 어머니의 결혼을 파기한 여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심한 타격에 그는 혼자 에든베타로 떠났다.그때 양지원은 밤을 새워가며 마음 편히 잠자리에 들지 못했고, 몇 번이나 양혁수를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다.결국은 양시연이 에든베타의 중세 마을에서 양혁수를 발견했다.그녀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저 양지원 대신 양혁수를 집으로 데려가고 그에게 너는 여전히 양혁수라며 나는 아무것도 뺏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빨리 가, 귀찮게 하지 말고.”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양혁수는 그렇게 말했다.양시연은 당연히 그곳을 떠나지 않고 고생스럽게 양혁수를 설득했다.가뜩이나 침울했던 양혁수는 양시연의 행동을 가장 악의적인 마음으로 추측했다.“넌 연기하러 여기까지 왔냐?”“그러면 넌 너 자신을 악역에 대입하지 않을 수 없냐?”“......”처음 며칠 동안 양혁수는 그녀와 말을 섞지 않고 투명인간 취급을 하며 무시하는 방법으로 그녀를 쫓아내려고 했다.하지만 그녀는 쉽게 포기하고 떠나려 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를 ‘감화’시키고 싶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슨 면목으로 양지원을 만나야 할지 모르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갑자기 엄마가 생겼고 또 그녀를 너무나 잘 대해주니 조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양시연이 양혁수에게 이 말을 해주자 그는 그녀를 조
방으로 돌아간 양시연은 기억 속에서 빠져나왔다.흥분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온을 되찾자 피로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양시연이 지식인을 클릭해 들어가 보니 EAN이 한 차례 변론을 끝마쳤다.마침 할 일이 없어 한가했던 양시연은 요 며칠 동안의 경험에 분석을 더해 사이트에 올렸다.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그중 EAN이 있었다.이 사람들은 모두 눈치가 빨라서 조그마한 실마리로도 많은 일을 귀신같이 추측해낼 수 있었기에 양시연은 내용을 여러 번 고친 뒤 다시 올렸다.이때 EAN이 댓글을 남겼다.“아주 좋아요.”드디어 EAN에게서 칭찬을 받은 양시연은 득의양양했다.곧이어 두 번째 댓글이 도착했다.“수준을 봐서는 그쪽이 쓴 것 같지 않아요.”양시연은 어이가 없어 할말을 잃었다.‘존나 빡치네. 어쩜 정훈 씨처럼 입이 모질지. 능력 있는 분들은 다 이래?’그녀가 아무런 답장을 하지 않자 얼마 뒤 EAN이 두 번째 댓글을 지우고 그녀에게 '좋아요'를 눌러줬다.“...”‘뭐 정훈 씨보다는 낫네. 어떤 말을 해서 안 될지는 잘 아니까.’기분이 나빴던 것은 뒤로하고 양시연은 EAN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EAN은 훨씬 부드러워진 말투로 그녀의 모든 질문에 답장을 해주었다.두 사람은 오랫동안 문자를 오고 받으며 어느새 친구가 다 되었다.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양시연은 일시 중지 버튼을 누르고 문을 열었다.문밖에는 양지원이 서 있었다.“엄마, 무슨 일이세요?”양지원은 마실 것이 담긴 컵을 건네주고 어깨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물었다.“정훈이한테 선물 계약에 대해 배우고 있다며?”“맞아요. 그냥 좀 지루해서 재미로 하는 거예요.”양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는 연정훈이 교활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양창수 씨 말로는 네가 요즘 C150을 모집하고 있다며.”그 말에 양시연은 마음속으로 양창수 아저씨가 대단하다 감탄하고 있었다.‘와 창수 아저씨 진짜 대단하다. 뭐든 다 아시네.’양지원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너
“천우성은 삼촌을 통해서 C150을 마련하려는 속셈이야.”양혁수의 말에 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었다.양석진은 그 일에 손을 쓸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 일은 양석진의 작업 범위가 아니었고 양석진이 대형 민영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생각은 연정훈과 같았기에 일성 그룹이 그동안 해온 짓거리는 그의 미움을 샀다.양시연은 온 새벽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아침 일찍 일어나 금속시장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시장의 큰 변화에 소스라치게 놀라 선택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아침 일찍 깨난 양시연은 거울 앞에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하느님께서 미쳤나 봐. 이렇게 중요한일을 나 같은 초보한테 맡기다니 세계가 멸망할 날이 머지않았어.’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다. 결단의 시간이 점점 가까워졌다.어르신들이 말씀을 나누는 틈을 타 양시연은 밖으로 나가 연정훈에게 전화를 쳤다.전화가 통한 순간 연정훈이 전화를 받았다.“천우성씨 지금 너희 집에 있어?”“네.”양시연은 꽃으로 단장된 화랑 아래를 지나며 땅에 떨어진 꽃들을 발로 짓밟고 있었다.그녀가 한창 고민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연정훈은 침착하게 양시연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제가 이 일을 맡으면 정훈 씨가 절 도와주실 건가요?”“꼭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거야.”양시연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가 다시 들이쉬며 물었다.“저에게 함정을 파고 있는 게 아니죠? 정훈 씨, 제가 먼저 말씀드리는 건데요. 만약 그 물건으로 절 협박하셔도 전 정훈 씨랑 결혼 안 할 거예요.”연정훈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양시연은 의자에 앉아 나팔꽃을 주워들더니 꽃줄기를 잡고 두 손가락으로 돌리며 꽃향기를 맡았다.“아직은 모르겠어요. 근데 협박으로 결혼하려는 사람은 저에겐 나쁜 사람이에요.”연정훈은 아무런 변명도 할수 없었다.잠깐 침묵이 흐른 뒤 그가 입을 열었다.“가서 그일 네가 맡아서 해결하겠다고 말해. 내가 꼭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까.”양시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
새벽이 되도록 양혁수의 방에는 열기가 뜨거웠다.딸깍.헤드 등을 켜고 변여름이 이불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연스레 변여름의 몸을 닦아줬다.변여름은 자꾸 양혁수를 훔쳐봤고 양혁수는 손을 뻗어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꾹 눌렀다.그러자 변여름은 양혁수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비며 입꼬리를 올렸다.이어 욕실에서 샤워 소리가 들려오자 왠지 양혁수가 만족하지 못해 홀로 해결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 옆 서랍을 열어보니 손목시계 따위만 있을 뿐 남은 콘돔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양혁수가 많이 자제한 것 같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있는 걸 통째로 갖고 오는 건데.’그리고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양혁수가 돌아왔다.변여름은 얌전히 누워있다가 양혁수의 품에 꼭 안겼다.양혁수의 체향을 느끼며 변여름은 두 눈을 감고 얼굴을 비볐고 목 언저리에 뽀뽀하려 했다.그러나 양혁수가 변여름을 제지했다.“지금 뭐 해?”“왜요?”양혁수는 제 목에 있는 흔적을 가리켰고 새길 때는 몰랐지만 샤워하고 나니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변여름이 지난번처럼 또 정도 없이 세게 흔적을 남긴 모양이었다.하지만 이번 모양과 색깔이 너무 마음에 들어 변여름은 미안한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오빠 다음엔 반대편도 해줄게요.”“...”양혁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변여름이 취조하듯 방금 잠자리가 만족스러웠냐고 물었다.“오빠, 나 다른 것도 배웠는데 오빠만 좋다면... 읍!”양혁수는 바로 변여름의 입을 막았다.“...”‘풉. 부끄러워하긴.’양혁수는 본인이 오빠로서 리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 꼬맹이한테 놀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잠이나 자!”그래서 고작 이런 일로 무게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흥. 오늘은 이만 물러선다.’변여름은 얌전히 몸을 돌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자꾸 치근덕거렸다.“오빠가 많이 보수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요
변여름은 말재주가 뛰어났고 그대로 두면 분명 더 큰 소동을 일으킬 기세였다.양혁수는 그녀를 다잡아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변여름은 밀고 당기기에 능했고 결국 늘 그가 그녀를 달래는 쪽이었다. 변여름을 제압하려면 그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를 유혹하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서로가 진심을 담기 시작하면 결국 누가 누구를 먼저 유혹한 건지조차 흐려진다.어느새 그녀는 그에게 기대어 그를 천천히 침대로 이끌었다.양혁수는 조용히 누워 있었고 변여름은 이불 속에서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었다. 표정은 잔잔했지만 눈동자에는 설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는 익숙한 듯 그의 팔을 벌리고 조용히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내 그의 온기를 안은 채 잠이 들었다.양혁수는 차갑게 굴어보려 했지만 몸은 정직하게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키스가 끝나자 그는 스스로의 입을 때리고 싶을 만큼 후회가 밀려왔다.저녁이 되면 변여름은 양혁수 곁에서 말이 많아졌다. 그녀는 그와 감정을 나누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전부 들려주었다. 작은 머릿속은 놀라울 만큼 명확했고 양혁수가 확신하지 못하던 일들을 종종 먼저 짚어내곤 했다.그러다 보면 두 사람의 입술은 자석처럼 끌려붙었고 전에는 양혁수가 불씨를 조심스럽게 다룰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변여름을 집에 데려온 첫날 밤 양지원을 마주친 이후의 느낌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녀를 몸 아래에 눕히고 얼굴을 감싸안은 채 키스하자 변여름은 그의 몸에 다리를 스치듯 비볐고 그는 순간적으로 치솟는 충동을 느꼈다.자신의 반응을 깨달은 그는 재빨리 움직임을 멈췄다.변여름에게 들킬까 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조명의 밝기를 낮추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막 눕자마자 변여름의 부드러운 몸이 다시 양혁수의 품에 파고들었고 변여름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으며 단 한 번의 눈 맞춤으로 그녀가 이미 모든 것을 알
양혁수의 ‘착하지’라는 한마디에 변여름의 입꼬리는 하늘까지 닿을 듯 환하게 올라갔다.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데 능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특히 밤 11시 30분이 넘도록 그가 나타나지 않자 아마도 자신이 먼저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아이고.’변여름은 그의 장난에 넘어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간질이는 마음을 안고 그녀는 문가에 서서 발끝을 들어 여러 번 밖을 내다보았다.밤이 깊어 12시가 다 되어도 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외투를 걸쳐 입은 채 문을 열고 나섰다.양씨 가문의 저택은 워낙 넓어서 그녀가 양혁수의 방에 닿기 위해선 한 층 아래로 내려가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어야 했다.몰래 발걸음을 옮겨 문 앞에 선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예상대로 잠겨 있지 않았다.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은 숨 막힐 듯 어두웠다.침실은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녀는 익숙한 감각과 뛰어난 시력에 의지해 침대를 더듬어 앉았지만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변여름은 숨을 죽인 채 주변을 감지했고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혹시 오빠가 나를 찾으러 간 걸까?’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작은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그녀는 즉시 멈춰 섰다.달빛이 비추는 거실 그 한쪽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침실 문을 빠져나온 그녀가 멈추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았고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그의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고 그는 그것을 가볍게 던지며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변여름은 품에 안긴 이가 양혁수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갑작스레 뒤에서 안아오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이어진 그의 키스가 그녀의 옆얼굴에 가볍게 닿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양혁수는 평소 그녀가 마음껏 표현하게 두었지만 자신이 먼저 유혹
식사가 끝나자 양지원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식사 후 그녀는 아래층 소파에 편히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재어 양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층에서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에 또다시 작은 충돌의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양지원이 집에 머무는 동안 양혁수는 변여름과 같은 방에 머무를 수 없었다.변여름은 몹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에는 세 글자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양혁수.]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꽤 화가 난 모양이네. 성까지 붙여 부르다니.’풀네임으로 불린 건 처음이라 문득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수건을 툭 던지고 침대에 앉은 그는 변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났어?]잠시 후 변여름에게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사진 속에는 줄에 매달린 막대 인형이 있었고 그 옆에서 날아온 주먹이 인형의 배를 강하게 가격하고 있었다. 인형 옆 상자에는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고 상자 안에는 ‘양혁수’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양혁수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디서 배운 거야? 너희 천재들은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는 거야?]예전에 변여름은 허예나의 이름으로 그와 채팅할 때 일부러 평범한 여고생처럼 꾸미며 어색하고 오래된 이모티콘을 보내곤 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고 재치 넘치고 독특한 이모티콘으로 그의 휴대폰을 장악했다.[이런 게 아주 유용하죠.]변여름이 말했다.[그러니까. 이제는 원격으로도 때릴 수 있지.]양혁수가 답장을 보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양혁수는 전화를 받았다.화면 속 변여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었고 아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지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각도는 썩 좋지 않았다.양혁수가 웃으며 말했다.“집에 재밌는 공간 많잖아. 잠 안 오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나가기 싫어요.”변여름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