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시연의 말에 양혁수가 손의 힘을 살짝 풀었다.양혁수는 여전히 양시연을 고집스레 바라보고 있었고 차마 포기할 수 없어 손을 놓지 못했다.연정훈이 차 앞으로 다가오는 순간 굳은 얼굴의 양혁수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양혁수가 차에서 내려 연정훈과 다툼이라도 벌릴까 걱정이 되었다.양시연도 빠르게 차에서 내렸고 연정훈에게 다가가려던 양혁수를 불러세웠다.양혁수는 잠시 그 자리에 주춤했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연정훈의 손에는 케이크가 쥐어져 있었는데 마치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거처럼 무덤덤하게 케이크를 양시연에게 건넸다.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상황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두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지켜봤다.공기 중에는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고 있었고 누구도 먼저 굽히려 하지 않았다.그때.멀리서 자동차 불빛이 비쳐왔다.양지원이 직접 운전하고 있었다. 양지원은 높은 하이힐을 신은 채로 차에서 내려 기묘한 분위기의 세 사람을 지켜봤다. 무슨 상황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날이 이렇게 더운데 다들 무슨 기력으로 이렇게 서 있는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양시연에게는 뭐라고 말하지 못하고 양혁수를 보며 마음 아파했다.“혁수야, 엄마를 도와 트렁크 물건 좀 옮겨줄래?”양혁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물건을 옮기기 시작했다.양시연은 양지원에게 감동이라는 시선을 보냈다.양지원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양혁수가 양지원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고 양시연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손의 케이크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갑자기 웬 케이크예요?”“친구가 선물한 건데 먹어봤더니 맛이 좋더라고.”“그래요?”양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양시연의 말투가 아주 딱딱했다. 아까 양혁수가 얼굴을 만지려던 손길을 피했을 때는 연정훈은 몰래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양시연의 태도에 또 자신이 없어졌다.차마 양시연에게 양혁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을 수 없어 자신
양시연이 거실에 들어섰다. 양혁수는 아마 양지원과 함께 지하실로 내려간 것 같았다.다시 마주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양혁수에게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그렇게 양시연은 지친 몸을 이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침대에 눕고 나니 연정훈이 사준 케이크가 눈에 들어왔다.작게 한입 베어 무니 다른 케이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이 좋았다.그래서 시간이 더 늦기 전에 양지원에게도 나눠주고 싶었다.방을 나서니 아래층에 앉아 있는 양혁수가 보였다. 양혁수는 테이블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양시연은 빠르게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손에 쥔 케이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 양시연 고민 끝에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소파에 앉은 양시연은 연정훈이 물어본 ‘혼인 신고’가 떠올랐다.사실 양시연은 겁이 났다. 이렇게 섣부르게 혼인 신고를 하는 건 양시연의 계획을 벗어났다.똑똑똑.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저예요. 아가씨.”집사였다.양시연은 문 앞으로 걸어갔다.“무슨 일이세요?”“혹시 잠시 후 데이트하러 가실 건가요?”양시연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아니요.”잠시 뜸을 들인 집사가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집 밖을 지키고 있어요.”양시연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테이블 앞으로 돌아간 양시연은 양씨 저택 카메라 시스템을 클릭했다. 정문의 카메라를 확대해 보니 연정훈의 차량이 여전히 그대로 세워져 있었다.잠시 생각에 잠긴 양시연은 연정훈이 무언가 오해했음을 알아차렸다.아래층에는 양혁수가 버티고 있고 집밖에는 연정훈이 지키고 있었다.이런 쪽으로는 참 죽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양시연은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카메라로 본 연정훈은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그러는 와중에도 여러 번 핸드폰을 확인하고 있었다.양시연도 핸드폰을 꺼내 대화창으로 들어갔다. 역시 1이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연정훈은 아무 말도 보내지 못했다.그러다가 연정훈은 핸드폰을 좌수석
연씨 가문과 양씨 가문의 혼사에 온 세상이 떠들썩해졌다.양시연이 청혼에 응한 이튿날, 두 사람이 먼 세운에서 경인으로 돌아왔다.그날 아침, 부승원은 바삐 업무를 처리하는데 비서가 회의실로 부승원을 찾아왔다.“부승원 변호사님, 연 대표님이 찾아오셨어요!”부승원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무슨 일이죠?”“아마도... 청첩장 때문인 것 같아요!”부승원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어이가 없네.’‘하루 중에서 가장 바쁜 시간에 글로벌 그룹 대표가 한가하게 청첩장이나 돌리고 있다니.’‘잠깐만.’부승원이 몸을 일으켜 사무실로 돌아갔다. 문을 여니 여유롭게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연정훈이 보였다. 척 보아도 연정훈은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결혼 확답을 받은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청첩장이 나왔어?”부승원의 물음에 연정훈은 찻잔을 내려놨다.“아니. 지금 너한테 주는 건 샘플이야.”아직 샘플에 불과했지만 충분히 정교하고 예쁜 디자인이었다.청첩장은 총 두 장.다른 한 장은 부승희의 것으로 생각했지만 연정훈은 콕 집어 이렇게 말했다.“그 한 장은 반우희 씨 몫이야. 네가 대신 전해줘.”“...”부승원은 그 청첩장을 연정훈의 앞으로 돌려주며 말했다.“네가 직접 전해. 양시연 씨를 향한 진심을 직접 보여주라고.”연정훈은 그런 농담에도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말했다.“난 널 위해 그러는 거야.”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부승원은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너나 양시연 씨한테 잘해. 네 연애사를 직접 지켜본 사람으로서 넌 누굴 이어줄 자격 없어.”“...”한참 티격태격하다가 부승원이 진지한 얘기를 꺼냈다.“회신 테크에서 소송을 제기했어. 그렇게 큰 손실이 생겼으니 끝까지 할 생각인가 봐.”연정훈은 대수롭지 않아 했다.“네가 있으니, 하나도 걱정되지 않는걸.”부승원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전 여친에게 무한한 대시를 하다가 몸값이 반토막이 난 것도 모자라 고소까지 당하게 생겼는데도 이렇게 태평하다니.연정훈은 돈이 부족한 사람이
정인 그룹.연정훈이 지분을 양도한다는 소문이 이미 업계에 돌고 있었다. 여러 주주가 직접 전화를 걸어왔지만 비서들이 모두 막아섰고 더 이상 막아서는 건 무리였다.연정훈은 아주 덤덤하게 말했다.“주주총회에서 직접 발표할 겁니다.”비서들은 할 말이 없었다.점심시간, 민수희가 직접 회사를 찾았지만 연정훈과 마침 엇갈려 만나지 못했다.연정훈이 자리에 돌아오자 비서가 USB 하나를 넘겼다.“여사님께서 USB를 꼭 확인하고 다시 결정하라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연정훈은 덤덤하게 USB를 바라보며 말했다.“알겠으니까 이만 나가보세요.”“네.”비서가 떠나고 연정훈은 USB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할머니는 회사를 양시연에게 넘기는 것을 반대했고 이 USB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충분히 예상이 갔다.“정인 그룹을 처리하려면 많은 방법이 있지만 이렇게 양씨 가문에 넘길 필요는 없어!”연정훈은 정인 그룹을 처리하고 싶어 양시연에게 양도하는 게 아니었다.그냥 주고 싶어 그렇게 결정했을 뿐이었다.두 사람 사이의 일은 이미 복잡하게 얽혀버렸고 정인 그룹으로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면 그 가치가 충분했다.연정훈은 빠르게 업무를 처리하고 양시연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려 준비했다.결혼하기로 했으니 빨리 관계 회복을 해야 했다.그때.핸드폰이 울렸다.수신자를 확인한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렸다.“할머니.”민수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보낸 건 확인했느냐?”“네.”“...”“확인했지만 생각을 바꾸지는 않을 겁니다.”민수희는 바로 눈치를 챘다.“아직 확인하지 않았구나.”연정훈은 익숙하게 계약서에 싸인을 하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그 안에 무엇이 들었든지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겁니다. 정인 그룹은 제 소유이고 어떻게 처리할지는 저에게 달렸어요. 불만이 있으시면 직접 빼앗아 가세요. 그러면 저도 포기할 테니까요.”민수희는 너무 화가 나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안경을 벗어 내려놓으며 민수희는 애써 호흡을 고르게 했다.“정훈아, USB 확인해 봐
저녁에 양혁수가 부엌에서 뛰쳐나오며 양시연에게 불평했다.“너 왜 이렇게 매운 양파를 샀어? 너무 매워서 눈물이 쏟아질 지경이야!”양시연은 정원에서 강아지를 목욕시키며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바보야. 양파 자를 땐 물을 한 모금 머금고 있으면 안 맵다고!”“왜?”“그건...”“뭐 복어 흉내 내면 양파에 면역이라도 생기냐?”“...”아침이었다.양혁수는 티셔츠를 입고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양시연은 작은 가방을 메고 손에 장난감 하나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야, 양혁수! 이 인형 망가진 것 같아. 소리가 안 나!”“그거 만진 지 몇 분이나 됐다고 벌써 고장 냈냐?”“원래 고장 난 거였겠지! 우리가 사기당한 거야.”양혁수는 들고 있던 채소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거기 둬. 좀 있다가 내가 봐줄게.”“응. 알겠어.”아침 다른 시간대에 양혁수가 상의를 입지 않은 채 방에서 나왔다. 양시연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옷 입어!”“뭘 호들갑이야. 너한테 복지를 주는 거야.”“아...”양혁수가 무덤덤하게 말했다.“...안목 없긴. 밖에 나가서 우리 가문 딸이라고 하지 마!”...늦은 밤이었다.둘은 마당에서 각자의 의자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사이에는 작은 탁자가 있었고 그 위에는 과일과 간식이 놓여 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물었다.“너 언제 집에 들어올 거야?”양혁수는 코코넛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태연하게 대답했다.“내가 집에 들어가면 너랑 재산 분쟁 싸움 할까 봐 두렵지 않아?”양시연은 숨을 고르고 진지하게 말했다.“집에 들어와. 난 재산 안 가질 거야. 다 너 줄게.”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양시연은 다시 다짐했다.“정말이야. 나 재산 가지고 너랑 싸우지도 않을 거야.”양혁수는 고개를 저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됐어.”“왜?”“그게 더 위험한 거거든.”양시연은 놀라며 되물었다.“위험해?”양혁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내가 재산을 차지하면 할아
양시연은 퇴근 후 곧바로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요즘 양시연은 양혁수를 마주칠 때마다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오후에 두 명의 국제적인 웨딩드레스 디자이너가 양시연에게 연락했다. 연정훈은 이미 예약하였고 그녀의 취향을 알고 싶어 했다.그러나 양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거절했다. 민수희가 이 결혼을 반대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연정훈은 효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연정훈의 할머니 민수희가 결혼을 반대한다면 그가 결혼을 고집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혹시 있을지도 모를 상황을 피하고자 양시연은 연정훈에게 먼저 확인하고 싶었다.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야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연정훈이 짧게 응답했다.양시연은 그가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쳇. 혹시 할머니에게 혼났나?’양시연의 부유한 남편감이 사라질지도 있다.문제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양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따르며 오후에 웨딩드레스 디자이너들이 물어본 사항을 꺼냈다.잠시 침묵이 지나고 연정훈이 물었다.“어떤 스타일이 좋아?”양시연은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잠시 고민한 뒤 대답했다.“간단한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니면 맞춤 없이 해도 괜찮아요. 시간을 아낄 수 있으니까요.”반대편 사무실에서 연정훈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차분한 표정으로 양시연의 말을 듣고 있었다.결혼은 연정훈이 억지로 성사한 것이었다. 그녀가 무심한 태도를 보인 것도 이해할 만했다.그러나 방금 본 영상이 그의 마음속 질투심을 자극하며 그것을 억누를 수 없게 만들었다.그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고르면 돼. 지금 당장 생각이 안 나도 괜찮아. 드레스는 디자이너들이 야근하며 완성할 거야.”양시연은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기에 사소한 일로 다투는 게 싫었다.게다가 양시연은 사실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를 건 것이었다.“듣기로는 정훈 씨 할머니가 우리 결혼을 반대하신다고 하던데요.
깊은 밤이었다.양민아는 한 남자를 대문 밖까지 배웅한 뒤 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처럼 욕실로 향해 몸을 씻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면서도 내내 혐오감이 가슴 속 깊이 치밀었다.몇 년 전, 양지원이 그녀를 양씨 가문에서 쫓아내며 자유까지 빼앗았다. 양민아는 그 상황을 뒤집기 위해 몇십 살이나 많은 정호덕과 관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높이 올라갈수록 그 관계는 그녀에게 더더욱 구역질 나는 족쇄가 되어 갔다.하지만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녀가 양시연의 성공과 양시연이 연정훈과 결혼하는 것도 그냥 지켜봐야 한다는 점이었다.양민아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깊은 좌절 속에서 미쳐가는 것 같았다.욕실에서 나온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계단을 내려갔다. 와인 한 잔이라도 마시며 복잡한 감정을 달래려 했다.쾅!갑자기 저택의 문이 거세게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순간 놀란 양민아는 몸을 움츠린 채 경계심을 품고 어두운 곳에 몸을 숨겼다.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밖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긴장이 조금 풀린 그녀는 숨을 고르며 거실로 돌아왔다.하지만 바로 그 순간 위층에서 느껴지는 낯선 그림자가 그녀의 등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놀라서 몸을 돌리기도 전에 강한 충격이 그녀의 등을 강타했고 양민아는 앞으로 쓰러지며 앞에 놓인 화병 위로 넘어졌다.산산조각 난 화병의 파편 위에서 몸부림치던 그녀는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두 손으로 땅을 짚었지만, 날카로운 조각들이 손끝을 찔러 통증이 온몸으로 퍼졌다.그 순간 뒤에서 다가온 남자가 그녀의 얼굴을 거칠게 움켜쥐더니 파편 위에 강제로 얼굴을 눌렀다.“으아!”비명을 지르는 사이 남자는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그녀를 거칠게 내던졌고 남자는 다시 양민아 앞에 서 있었다.바닥에 나뒹군 그녀는 어마어마한 고통에 휩싸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공포를 느끼게 한 것은 얼굴에 느껴지는 따가운 통증이었다.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니 손가락에는 피가 흥건히 묻어났다. 그러
금요일이 가까워지며 양시연의 초조함은 점점 더 커졌다.결혼을 앞둔 불안감은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짐이었다.몇 번이나 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어 결혼하지 말자고 말할지 고민했다.막상 휴대폰을 들어 올릴 때마다 생각을 접고 말았다. 양시연은 원래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이번 결혼을 위해 연정훈이 보여준 노력과 성의는 분명 눈에 띄었다. 그는 양시연 없이는 안 된다는 태도로 마음을 다해 설득했고 여러 가지 제안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결혼을 취소하자고 한다면 그것은 그녀 자신도 비도덕적이라고 느껴졌다.‘아. 답답해.’양시연은 목요일 오후 사무실을 서성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그때 직원이 다가와 조심스레 보고했다.“양 대표님, 어떤 남성분이 대표님을 만나 뵙겠다고 하십니다.”“누구신데요?”“본인을 연 할머니의 비서라고 소개했습니다.”양시연은 잠시 멈춰 섰다.역시나 이 결혼이 순조롭게 진행될 리 없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민수희가 연정훈을 설득하지 못하자 결국 양시연을 직접 상대하려는 모양이었다.양시연이 민수희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상은 표세연보다도 더 안 좋았다. 특히 완벽하게 손질된 짧은 웨이브 머리와 값비싼 은테 안경이 더해진 그녀의 모습은 차갑고 위압적이었다. ‘쳇.’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연정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정훈 씨 할머니께서 날 찾아오셨어요.]하지만 연정훈은 바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아마 바쁜 듯했다.그 사이 비서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그분이 계속 재촉하고 계십니다.”양시연의 입가에 미묘한 비웃음이 떠올랐다.역시, 권력자 곁의 사람들은 대부분 거만한 법이다.양시연은 평소 권력을 과시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연정훈의 체면을 위해 민수희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만만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차를 대접하세요. 그리고 내가 바쁘니 기다리라고 전하세요.”비서는 순간 당황한 듯 보였다. 평소 온화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유지하던 양시연에게서는 보기 드문 반응이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
새벽이 되도록 양혁수의 방에는 열기가 뜨거웠다.딸깍.헤드 등을 켜고 변여름이 이불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연스레 변여름의 몸을 닦아줬다.변여름은 자꾸 양혁수를 훔쳐봤고 양혁수는 손을 뻗어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꾹 눌렀다.그러자 변여름은 양혁수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비며 입꼬리를 올렸다.이어 욕실에서 샤워 소리가 들려오자 왠지 양혁수가 만족하지 못해 홀로 해결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 옆 서랍을 열어보니 손목시계 따위만 있을 뿐 남은 콘돔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양혁수가 많이 자제한 것 같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있는 걸 통째로 갖고 오는 건데.’그리고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양혁수가 돌아왔다.변여름은 얌전히 누워있다가 양혁수의 품에 꼭 안겼다.양혁수의 체향을 느끼며 변여름은 두 눈을 감고 얼굴을 비볐고 목 언저리에 뽀뽀하려 했다.그러나 양혁수가 변여름을 제지했다.“지금 뭐 해?”“왜요?”양혁수는 제 목에 있는 흔적을 가리켰고 새길 때는 몰랐지만 샤워하고 나니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변여름이 지난번처럼 또 정도 없이 세게 흔적을 남긴 모양이었다.하지만 이번 모양과 색깔이 너무 마음에 들어 변여름은 미안한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오빠 다음엔 반대편도 해줄게요.”“...”양혁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변여름이 취조하듯 방금 잠자리가 만족스러웠냐고 물었다.“오빠, 나 다른 것도 배웠는데 오빠만 좋다면... 읍!”양혁수는 바로 변여름의 입을 막았다.“...”‘풉. 부끄러워하긴.’양혁수는 본인이 오빠로서 리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 꼬맹이한테 놀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잠이나 자!”그래서 고작 이런 일로 무게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흥. 오늘은 이만 물러선다.’변여름은 얌전히 몸을 돌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자꾸 치근덕거렸다.“오빠가 많이 보수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요
변여름은 말재주가 뛰어났고 그대로 두면 분명 더 큰 소동을 일으킬 기세였다.양혁수는 그녀를 다잡아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변여름은 밀고 당기기에 능했고 결국 늘 그가 그녀를 달래는 쪽이었다. 변여름을 제압하려면 그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를 유혹하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서로가 진심을 담기 시작하면 결국 누가 누구를 먼저 유혹한 건지조차 흐려진다.어느새 그녀는 그에게 기대어 그를 천천히 침대로 이끌었다.양혁수는 조용히 누워 있었고 변여름은 이불 속에서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었다. 표정은 잔잔했지만 눈동자에는 설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는 익숙한 듯 그의 팔을 벌리고 조용히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내 그의 온기를 안은 채 잠이 들었다.양혁수는 차갑게 굴어보려 했지만 몸은 정직하게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키스가 끝나자 그는 스스로의 입을 때리고 싶을 만큼 후회가 밀려왔다.저녁이 되면 변여름은 양혁수 곁에서 말이 많아졌다. 그녀는 그와 감정을 나누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전부 들려주었다. 작은 머릿속은 놀라울 만큼 명확했고 양혁수가 확신하지 못하던 일들을 종종 먼저 짚어내곤 했다.그러다 보면 두 사람의 입술은 자석처럼 끌려붙었고 전에는 양혁수가 불씨를 조심스럽게 다룰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변여름을 집에 데려온 첫날 밤 양지원을 마주친 이후의 느낌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녀를 몸 아래에 눕히고 얼굴을 감싸안은 채 키스하자 변여름은 그의 몸에 다리를 스치듯 비볐고 그는 순간적으로 치솟는 충동을 느꼈다.자신의 반응을 깨달은 그는 재빨리 움직임을 멈췄다.변여름에게 들킬까 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조명의 밝기를 낮추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막 눕자마자 변여름의 부드러운 몸이 다시 양혁수의 품에 파고들었고 변여름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으며 단 한 번의 눈 맞춤으로 그녀가 이미 모든 것을 알
양혁수의 ‘착하지’라는 한마디에 변여름의 입꼬리는 하늘까지 닿을 듯 환하게 올라갔다.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데 능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특히 밤 11시 30분이 넘도록 그가 나타나지 않자 아마도 자신이 먼저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아이고.’변여름은 그의 장난에 넘어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간질이는 마음을 안고 그녀는 문가에 서서 발끝을 들어 여러 번 밖을 내다보았다.밤이 깊어 12시가 다 되어도 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외투를 걸쳐 입은 채 문을 열고 나섰다.양씨 가문의 저택은 워낙 넓어서 그녀가 양혁수의 방에 닿기 위해선 한 층 아래로 내려가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어야 했다.몰래 발걸음을 옮겨 문 앞에 선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예상대로 잠겨 있지 않았다.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은 숨 막힐 듯 어두웠다.침실은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녀는 익숙한 감각과 뛰어난 시력에 의지해 침대를 더듬어 앉았지만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변여름은 숨을 죽인 채 주변을 감지했고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혹시 오빠가 나를 찾으러 간 걸까?’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작은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그녀는 즉시 멈춰 섰다.달빛이 비추는 거실 그 한쪽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침실 문을 빠져나온 그녀가 멈추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았고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그의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고 그는 그것을 가볍게 던지며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변여름은 품에 안긴 이가 양혁수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갑작스레 뒤에서 안아오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이어진 그의 키스가 그녀의 옆얼굴에 가볍게 닿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양혁수는 평소 그녀가 마음껏 표현하게 두었지만 자신이 먼저 유혹
식사가 끝나자 양지원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식사 후 그녀는 아래층 소파에 편히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재어 양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층에서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에 또다시 작은 충돌의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양지원이 집에 머무는 동안 양혁수는 변여름과 같은 방에 머무를 수 없었다.변여름은 몹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에는 세 글자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양혁수.]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꽤 화가 난 모양이네. 성까지 붙여 부르다니.’풀네임으로 불린 건 처음이라 문득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수건을 툭 던지고 침대에 앉은 그는 변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났어?]잠시 후 변여름에게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사진 속에는 줄에 매달린 막대 인형이 있었고 그 옆에서 날아온 주먹이 인형의 배를 강하게 가격하고 있었다. 인형 옆 상자에는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고 상자 안에는 ‘양혁수’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양혁수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디서 배운 거야? 너희 천재들은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는 거야?]예전에 변여름은 허예나의 이름으로 그와 채팅할 때 일부러 평범한 여고생처럼 꾸미며 어색하고 오래된 이모티콘을 보내곤 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고 재치 넘치고 독특한 이모티콘으로 그의 휴대폰을 장악했다.[이런 게 아주 유용하죠.]변여름이 말했다.[그러니까. 이제는 원격으로도 때릴 수 있지.]양혁수가 답장을 보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양혁수는 전화를 받았다.화면 속 변여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었고 아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지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각도는 썩 좋지 않았다.양혁수가 웃으며 말했다.“집에 재밌는 공간 많잖아. 잠 안 오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나가기 싫어요.”변여름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