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주가 기산으로 갔으니 마씨 가문은 정리됐겠지?”국주는 나직이 물었다.“예, 전하. 구주왕께서 마씨 가문을 뿌리 뽑으셨습니다.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말이옵니다!”한진모가 웃으며 아뢰었다.“잘했군!”“그럼 다른 제자백가들은 어떤가? 움직임이 있나?”국주가 다시 물었다.“아직 별다른 동향은 없습니다.”“하하하! 과연 구주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어!”국주는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다만, 짐이 가장 우려하는 건...”국주는 말끝을 흐렸다.오랜 세월 국주를 섬겨온 한진모가 어찌 국주의 걱정을 모르겠는가. 그가 입을 열었다.“혹시 전하께서는 지금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종문 서열을 염려하시는 겁니까?”“그래!”국주는 말을 마치고 건장한 몸을 일으켰다.“너도 알다시피, 화진의 무도 3대 서열 중 종문이 으뜸이요, 세가와 문벌은 그저 말류에 불과하지 않느냐! 우리 화진은 무로써 나라를 세우고 육합을 정벌하였거늘, 이제 문벌과 세가가 들고 일어나니 구주가 홀로 그들을 억누르고 있지 않느냐! 그래서 짐은 종문에서 누군가 나설까 봐 심히 우려스럽다!”한진모는 고개를 조아리며 아뢰었다.“전하께서 염려하시는바, 옳은 말씀이옵니다. 허나 노복은 구주왕을 믿사옵니다! 더욱이 그 뒤에 있는 곤륜 구역을 믿사옵니다! 하옵건대, 우리 구주왕께서는 곤륜 구역의...”여기까지 아뢰던 한진모는 말을 멈추었다. 이 비밀은 지금까지 아는 자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국주는 이 말을 듣고 모처럼 웃음을 보였다.“네 말이 맞다. 그 녀석은 과연 짐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비범하구나... 에휴! 십육 년 전에 저지른 과오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그 녀석과 사이가 멀어지지는 않았을 텐데...”한진모가 아뢰었다.“전하,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노복은 구주왕께서 전하를 결코 원망치 않으시리라 믿사옵니다!”“그러길 바라야지...”국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셨다.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진모는 금란 대전 바깥에서 엄청난 기운이 몰려오는 것을 감지하였다.
“윤씨 일가 윤신우, 전하께 배알 드리옵니다!”윤신우는 금란 대전에 이르러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신우야, 어찌 이리 격식을 차리는 게냐! 짐이 전에도 말하지 않았느냐, 너와 짐은 형제와 같으니 이런 큰 예는 필요 없다. 어서 일어나거라!”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국주는 용상에서 내려와 직접 윤신우를 부축하려 했다.그러나 국주가 윤신우에게 손을 내미는 순간, 윤신우는 몸을 뒤로 물러섰다.“국주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는 미천한 백성일 뿐, 국주님의 은혜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냉정한 말투에 국주는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차가운 표정의 윤신우를 보며 국주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십육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짐을 용서하지 않았구나!”윤신우가 말했다.“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천자이시온데 소인이 어찌 감히 전하를 원망하겠습니까?”윤신우의 말에 국주는 다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한진모에게 말했다.“잠시 물러가 있거라. 신우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구나.”한진모는 놀란 눈으로 윤신우를 흘끗 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다.하지만 국주는 손을 내저었다.“물러나라.”한진모는 어명을 거스를 수 없었다.“그럼 노복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말을 마치고 한진모는 금란 대전을 나섰다.넓은 대전 안에는 이제 국주와 윤신우만 남았다. 한진모가 나가자 곤룡포를 입은 국주는 윤신우를 바라보며 말했다.“십육 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시간이 참 빠르구나!”감회에 젖은 국주는 금란 대전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그리고 윤신우에게 옆자리를 가리켰다.윤신우도 별다른 생각 없이 다가가 국주 옆에 나란히 앉았다.“신우야, 기억하는가? 짐이 아직 태자였을 때 우리는 이렇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장난도 치고 천하 대사를 논하기도 했었지...”국주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모처럼 밝은 미소를 지었다.“기억하고 있사옵니다.”윤신우가 조용히 대답했다.“어휴, 세월이 쏜살같구나. 어느새
세상 어느 아비가 자식의 행복과 평안을 바라지 않겠는가?윤신우 또한 그랬다.그래서 그는 윤구주가 더 이상 조정의 암투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고 지금 눈앞에 있는 국주의 손아귀에 칼이 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이미 윤구주는 문벌과 세가를 억누르고 있었다.만약 앞으로 종문까지 나선다면 윤신우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화진 무도의 정점에 있는 종문이었으니 제자백가나 문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윤신우의 말을 들은 국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신우야,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이 아니냐? 너와 짐은 막역한 사이가 아니더냐. 네 아들은 곧 과인의 아들이기도 하다. 그러니 과인이 어찌 구주를 해칠 수 있겠느냐?”윤신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정말입니까?”이 말에 국주는 순간 어색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짐이 어찌 모르겠느냐. 네가 십육 년 전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실은 짐 또한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메인다. 허나 구주를 향한 짐의 마음은 네가 익히 알고 있을 터. 이번 3대 서열의 난에 이 나라를 바로 세울 자는 구주뿐이니라! 그러하매 짐이 구주에게 제왕검을 내린 것이다. 신우야, 짐의 깊은 뜻을 헤아려 주길 바란다.”그의 말에 윤신우가 말했다.“소인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전하의 뜻은 결국 소자에게 팔방을 정벌하고 천하를 평정하여 전하를 대신해 화진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국주는 멋쩍게 웃었으나 반박하지는 않았다.윤신우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전하께서 이미 결정하셨다면 소인 또한 전하께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소자는 화진을 위해, 백성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허나 한 가지, 누구든 감히 소자를 해하려 한다면 소인 윤신우는 이 목숨을 걸고, 윤씨 일가의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그 원통함을 풀어줄 것입니다.”차갑게 말을 마친 윤신우는 국주에게 공손히
“신우 삼촌, 오늘 황성에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제 기억엔 삼촌은 황성에 오신 지 정말 오래되신 것 같은데!”이홍연은 예쁜 눈을 깜빡이며 윤신우를 쳐다보며 물었다.윤신우는 이홍연을 친자식처럼 아꼈기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오늘 전하를 뵈러 왔습니다.”“아, 그러셨군요.”“공주 전하, 소인은 이만 가봐야겠습니다.”윤신우가 말했다.그가 자리를 뜨려 하자, 이홍연이 급히 말했다.“삼촌, 잠시만요!”윤신우는 뒤돌아보며 물었다 “공주 전하,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이홍연은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삼촌, 그 사람은...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그 사람이라는 말에 윤신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윤씨 일가의 가주인 그가 화진의 공주가 자기 아들을 묻는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구주 말씀이신지요?”이홍연은 얼굴이 발그레해져서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구주는 먼 길을 떠났는데 아직 서울로 돌아오지 않았어요.”윤신우는 솔직하게 말했다.“어? 어디 갔는데요? 왜 내게 말 안 했어요?”이홍연이 서둘러 물었다.노룡산에서의 싸움 이후, 이홍연은 윤구주를 다시 보지 못했다.마씨 가문과 손잡았던 일은 이미 사과했지만 윤구주가 그 유명 배우 은설아와 껴안고 있던 장면이 자꾸만 눈에 밟혀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래서 이홍연은 황성에 머물며 윤구주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런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윤구주는 나타나지 않았다.그러니 윤구주가 서울을 떠난 지 며칠이나 됐다는 말에 이홍연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솔직히 공주 전하, 구주는 지금 기산에 있습니다.”기산?이홍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기산엔 왜 갔는데요?”“죄송하지만 공주 전하. 지금은 이유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안심하세요. 구주는 곧 돌아올 겁니다.”윤신우가 말했다.윤구주가 기산에 간 이유를 말해주지 않자 이홍연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그래요. 그럼 돌아오면 삼촌께서 꼭 알려주세요.”“알겠습니다.”
윤씨 성을 듣자 주도는 순간 상황을 파악했다. 공주가 이렇게 묻는 건 윤구주 그 괴짜 녀석 때문이라는 걸 말이다.“영감, 마씨 가문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 빨리 말해 봐요.”이홍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세력으로 말하자면 수천 년 이어진 마씨 가문의 기관술은 정말 엄청나게 강합니다. 게다가 최고 고수인 시조들도 세 명이나 있어요.”주도의 말을 들은 이홍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럼 그 녀석 혼자 마씨 가문에 갔으니 위험한 거 아니에요?”“어? 딴 놈이 가면 위험천만하겠지만 구주 그 괴물이라면 공주님께선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 녀석 실력이 어마무시하잖아요!”노룡산 싸움을 떠올리면 주도는 아직도 등골이 오싹했다.특히 마지막에 윤구주가 펼친 봉왕팔기의 적선술은 너무 놀라웠다.“영감, 정말 그럴까요?”이홍연이 다급하게 물었다.“당연하죠. 노룡산에서 홀로 오십여 명의 세가 절정 고수들을 몰살시킬 수 있는 자는 종문의 조상들 말고 이 늙은이는 평생 본 적이 없거든요!”주도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그의 자신만만한 말에 이홍연은 웃음을 지었다.“윤 바보만 무사하면 됐어요. 그거면 충분해요!”눈앞의 육공주는 완전히 연애에 빠진 여인의 모습이었다.그녀에게 윤구주만 안전하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한참 기분이 좋아하던 이홍연이 갑자기 걱정스레 물었다.“영감, 그 바보가 지난번 노룡산 일 때문에 나를 멀리하지 않을까요?”주객은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음... 그럴 리야 없겠지요.”“왜요?”“공주님은 미모도 훌륭하시고 게다가 귀한 황족이신데 누가 공주님을 마다하겠습니까?”주도는 솔직하게 말했다.“히히! 그 말은 맘에 드네요. 근데 그 바보는 그렇게 생각 안 할 거예요. 걔는 다른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르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둘이 지금처럼 될 수도 없었겠지요.”이홍연은 말을 하다가 슬픔에 잠겼다.“공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그런 점을 좋아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주도가 문득 말했다.이홍연은 감개무량한 듯 말했
주도의 말에 이홍연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고 목까지 붉게 달아올랐다.하지만 주객은 멈추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공주님, 제 말은 경험에서 나온 겁니다. 이 방법은 틀림없이 효과가 있을 테니 믿어 보십시오!”주도가 쉴 새 없이 떠들어 대자 이홍연이 바로 소리쳤다.“입 다물어요. 이 늙은 변태 영감!”말을 마친 이홍연은 돌아서서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영문을 모르는 주도는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왜? 내가 왜 변태야? 내 말은 백번 옳은 말인데.”방 안에서. 방으로 뛰어 들어온 이홍연은 여전히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특히 방금 주도가 꺼냈던 잠자리 얘기가 자꾸 떠오르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의 말도 어느 정도 맞는 것 같았다.윤구주처럼 뛰어난 사람에게 주위에 예쁜 여자가 없을 리가 있겠는가?그 미녀 배우나 다른 여인들처럼 말이다.이런 생각에 이홍연은 점점 더 마음이 답답해졌다.“아니, 정말로 그 영감탱이 말대로 그 녀석과 그런 짓을...?”부끄러움에 이홍연의 얼굴은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안 돼! 내 사내를 이 세상 누구에게도 빼앗길 순 없어!”이홍연은 사랑도 미움도 분명히 표현하는 사람이었다.그녀는 결정을 내리자마자 행동으로 옮겼다.“그 바보가 지금 기산에 있다지? 마침 기산에도 가본 적 없는데! 헤헤, 놀러 가는 김에 그놈도 만나고 오면 되겠다!”생각이 정리되자 이홍연은 곧바로 짐을 꾸려 기산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그녀는 윤구주를 만나러 갈 것이다....기산, 마궁한때 웅장함의 극치를 보여주던 마궁의 전각들은 이제 반이나 무너진 채 폐허로 변해 있었다.그 중앙에 우뚝 솟은 웅장한 궁궐 안에서는 놀라운 기운들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기운이 하늘을 찢을 듯 솟구칠 때마다 사방이 진동했고 주변 산맥의 천지원기까지 궁궐로 빨려 들어갔다.머우! 머우!거침없는 기운 속에서 코끼리의 울음소리 같은 기이한 소리가 궁궐 안에서 울려 퍼졌다.자세
“역시 만상지력이군! 구음은 힘, 구양은 기!구음 구양, 용상합체! 이것이 바로 두 개의 구주령에 숨겨진 놀라운 비밀이었어!”윤구주는 금빛으로 빛나는 눈으로 자신의 두 손을 흥분하며 바라보았다.구음만상결을 수련하기 시작한 이후, 윤구주는 이 기묘한 무공이 자신의 구양진룡결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깨달았다.그의 말처럼 구양은 기, 구음은 힘이었다!만상의 거대한 힘과 구양진기가 합쳐진 윤구주의 공력은 이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경계에 이르렀다.다만 구음만상결을 수련하려면 막대한 양의 천지원기를 흡수해야 했다.지금 기산 주변 백 리 안의 천지원기는 이미 모두 윤구주가 흡수했기에 구음만상결을 완성하려면 더 많은 천지원기가 필요했다.윤구주는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켜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이곳의 원기는 이제 없다. 더 강력한 원기를 찾아 떠나야겠어!”윤구주가 중얼거렸다.그가 말하는 순간, 마가 궁전 뒤편에서 콰직하는 굉음과 함께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뒤돌아보니 궁궐 바닥에 팔뚝만 한 균열이 생기면서 그 아래 숨겨져 있던 문 하나가 드러났다.“어? 비밀통로인가?”윤구주의 눈이 번뜩이며 갈라진 틈 사이로 드러난 문을 예의주시했다. 아마도 조금 전 구음만상결의 강력한 힘 때문에 지하의 거대한 문이 모습을 드러낸 듯했다. “마씨 가문에 비밀통로가 있었다니.”윤구주가 신념을 펼쳐 살펴보니 그곳에는 거대한 공간이 숨겨져 있었다.잠시 생각에 잠긴 윤구주는 오른손으로 검결을 맺어 비밀통로를 향해 휘둘렀다.슥!절묘한 기검이 허공을 가르며 문을 강타했다.쾅!굉음과 함께 문이 산산이 조각나며 폭발했다.윤구주는 소매를 휘둘러 먼지와 돌 부스러기를 날려 버렸다.그러자 거대한 지하 보물 창고가 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곧장 보물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지하 보물 창고는 거대했고 발을 들여놓는 순간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가 느껴졌다. 마치 얼음 동굴에 들어온 것 같았다.보물 창고 안에는 기이한
윤구주의 머릿속에 끔찍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화진은 무력으로 세운 나라였고 제자백가 중 하나인 마씨 가문은 화진의 무도 3대 서열 중 하나였다.어떤 이유에서든 마씨 가문에 설국의 물건이 있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차가운 눈빛으로 거대한 상자들을 노려보던 윤구주는 손을 휘둘렀다.콰직!그의 앞에 있던 거대한 상자 하나가 순식간에 부서졌다.상자가 부서지자 무기, 병장, 그리고 무공 비급 사본들이 쏟아져 나왔다.윤구주가 손을 들어 한 움큼 잡은 순간 무공 비급의 사본들이 모두 그의 손안에 떨어졌다. 고개를 숙여 보니 이 비급들 속에는 화진의 무공 비급들이 가득했다.팔극문, 응조문, 철도문, 오랑팔괘곤, 양가창 등등 온갖 무공 비급들이 다 있었다.정리된 무공 비급들과 상자 안의 무기들을 보자 윤구주의 몸에서 엄청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마씨 가문 이놈들이 감히 설국과 내통하다니! 감히 화진의 무학을 몰래 설국으로 빼돌려!!”윤구주의 몸에서 분노와 살기가 폭발했다. 전에는 마씨 가문을 멸하는 것이 너무 잔인한 일이 아닐까 생각했었다.하지만 화진의 수천 년 역사의 무학 정수를 설국과 거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 화진의 진국 전신으로서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적국과 내통하다니, 이는 죽어 마땅한 죄를 넘어 구족을 멸해야 할 죄악이었다.차가운 눈빛으로 거대한 상자들을 훑어보니 모든 상자에 설국 황실의 표식이 찍혀 있었다.마씨 가문과 설국의 내통은 이제 명백한 사실이었다.이 모든 것을 바라보며 윤구주의 얼굴에는 살기가 점점 짙어졌다.십 국 전쟁 당시, 얼마나 많은 화진의 용사들이 전장에서 쓰러져 뼈조차 찾지 못했던가!그런데 무도 세가인 마씨 가문은 감히 적국과 내통한 것도 모자라 화진의 무학 정수까지 설국에 넘기다니.이는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었다.윤구주의 눈에서 분노의 화련이 피어났다.“불태워라!”화련금안이 나타나 거대한 상자들에 닿는 순간, 마씨 가문의 지하 창고는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설국으로 보내질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