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보내 데이로에게 전투 신청서를 전하라!”현모가 부하에게 명령을 내렸다.곧 도발적인 내용이 담긴 전투 신청서가 데이로의 손에 들어갔다.“절대 물러설 수 없습니다. 현모 따위가 뭐라고 그럽니까? 윤구주 휘하의 제일 약한 장수일 뿐입니다.”“맞습니다. 화진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합니다.”“신의 피가 흐르고 있는 우리 북라국 무사들에게 화진의 놈들이 감히 상대되겠습니까?”전투 신청서를 본 휘하 장군들이 일제히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의 신경질적인 어조는 분명히 데이로를 자극하려는 수작이었다.북라국은 무술을 중요히 여기는 나라라 강자의 명령만을 따른다. 만약 데이로가 화진의 도발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물러선다면 휘하 장군들은 더는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데이로는 화진의 전투 신청서를 받은 뒤로부터 심각한 표정으로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천민 출신인 그는 양국의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예로부터 화진과 북라국은 아무런 원한이 없었다. 북라국은 영토 대부분이 사시사철 눈에 덮여있고 나머지도 불모지라 발전이 가능한 땅이 극히 적었다.옛날 폭설 때문에 큰 피해를 보았을 때마다 화진이 도움의 손길을 내주었음을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 화진이 쇠퇴하자 북라국은 그 은혜를 잊고 대대적으로 화진을 침략했다.그뿐만 아니라 세계열강이 화진을 약탈할 틈을 타서 화진의 땅을 탐냈다.현대에 이르러서는 화진 임씨가 역사의 원수를 뒤로하고 잘 대해줬음에도 북라국은 반성 없이 구주왕의 위기를 틈타 불의의 기습을 감행했다.화진 측에서 그들에게 전투 신청서를 보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데이로는 마음속으로 큰 죄책감을 느꼈지만 북라국 총사령관으로서 나라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싸울 수밖에 없었다.황천관을 잃으면 화진 10만 대군이 쳐들어올 것이고 북라국은 이대로 멸망의 길에 들어설 것이다.“현모, 구주왕 휘하 4대 군신 중 한 명. 지난날 화진 남부 구역을 지키며 남해에 있는 제국
아래쪽 귀족 출신의 대신들은 신의 피를 물려받은 신혈 무사들이 그들을 도와주러 올 뿐만 아니라 그 전공이 모두 자기들에게 돌아간다고 하니 순식간에 열의를 불태웠다. 원래 그들은 화진군이 쳐들어오는 건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여겨서 데이로가 싸워 이기면 좋고 지거나 전사하면 그 자리에서 도망칠 생각이었다.지금 그들에게 신을 기쁘게 할 기회가 왔는데 이런 좋은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평소 데이로를 깔보던 귀족들도 일제히 두 손을 들어 찬성했다.한편 북라국으로부터 보내온 답장을 받은 현모는 분노가 폭발했다.“우리 화진군더러 물러가라니 참 어이없군. 전쟁을 장난으로 여기나? 협상을 제안해? 데이로가 북라국을 대표할 자격도 없거니와 설사 된다 한들 내가 원하는 건 북라국의 항복이지 담판이 아니다.”“내 명령을 전하라. 지금 당장 출병해서 성을 친다.”현모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성수인이 발동되었다.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 거대 성수가 사지를 땅에 내리찍는 것을 목격하는 순간 북라국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데이로는 신의 피를 물려받은 신혈 전사들의 지원 소식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간신히 사기를 유지했다.10만 대군이 몰려오는 와중에도 그는 살상 무기 사용을 감히 명령하지 못했다. 그가 먼저 사용한다면 뒤에서 기다리는 진동왕이 즉시 황천산에 포격을 퍼부을 것이 뻔했다.3백만 군대가 한곳에 모여있어 포격을 몇 차례만 맞으면 사기가 완전히 붕괴할 것이다.그는 광전사 부대와 휘하 변경 군단을 최전방에 배치했고 각지에서 온 30여 명의 귀족 대신들은 후방에서 지원하도록 했다.전투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은 즉시 진동왕과 북라국에 깊숙이 잠입해 있는 주작에게 전해졌다.진동왕은 현모의 성수인이 일반 병기로는 뚫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북라국이 살상 무기를 사용할 경우 후방에서 중화기로 보복을 하기로 했다.주작은 북라국 후방 방어망을 교란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적의 동향을 감시했다.두 사람 모두 빙신전과 아사 신전이 나서야 진짜 승부
문창정이 전음을 받자마자 건너편에서부터 귀청을 찌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네놈이 감히 우리를 팔아넘겨? 문씨 가문이 배신을 밥 먹듯이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우리를 팔아먹을 줄이야! 그 사신이 다시 권력을 잡으니 우리 뒤통수를 치다니.”문창정은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몰라 멍해졌다.“망했어요. 윤구주가 이미 손을 썼나 봐요.”문아름의 얼굴에서 놀란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그들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면 윤구주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을 터였는데 너무 늦었다.문창정이 급히 무슨 일이 일어났냐고 묻자 화가 잔뜩 난 것 같은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연기 그만하지? 그쪽이 신전 출병 정보를 흘려서 빙신전 3천 신병이 윤구주에게 전멸당했소. 지난번 대제사장님의 원한도 갚지 못했는데 이번엔 세 명의 대제사장과 12명의 중요한 부하가 몰살당했소. 나조차 죽을 뻔했다고.”문창정에게 연락을 보낸 빙신전 부전주는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이때 그의 말을 들은 문아름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뭔가 이상해요. 빙신전 부전주는 극 신급 절정 중기 실력이고 다른 대제사장 두 명도 부전주와 같은 실력이었는데 전부 윤구주에게 살해당했다면서요. 이 상황에서 부전주가 어떻게 혼자 살아남은 거죠?”문창정도 문아름의 말에 숨은 뜻을 알아듣고 순간 모든 것을 깨달았다.“저 빌어먹을 자식이 우리를 팔아넘긴 거야. 윤구주에게 정보를 줌으로써 목숨을 건진 게 분명해. 추가 정보도 넘겼을 테지.”문창정은 빙신전 부전주의 말을 무시하고 3천 가족을 버린 채 문아름과 함께 문씨 가문의 비밀기지를 떠났다.그는 윤구주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북라국은 핑계일 뿐이었고 윤구주의 진짜 목표는 그들임이 분명했다.같은 시각 북라국.넓은 평원의 한가운데 검게 탄 땅이 수백 리나 펼쳐져 있었다.푸른 바다 같았던 초원이 불에 태워져서 이젠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없었다.아직도 검은 연기가 치솟는 이 지역엔 빙신전의 3천 신병의 시체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
빙신전 부전주는 신의 위엄을 잃고 개처럼 땅에 엎드려 있었다.그는 구주왕 윤구주의 시선을 받으며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말 한마디라도 잘못했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긴장감이 그의 목구멍을 조였다.“구...구주왕님. 구주왕님이 시키는 대로 수행했습니다. 제 목숨을 살려준다고 하셨잖아요.”“그래 맞아. 나 윤구주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지.”윤구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부전주의 눈에서 감격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사신이 곤륜역 출신이 아니라는 걸 다행으로 여기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소신은 이만 물러가도...”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가라고 했나?”그 말을 들은 부전주는 등골이 오싹해났다. 그는 고개를 돌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다시 바닥에 엎드려 빌었다.“제발 살려주십시오. 살려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목숨은 살려준다 했지. 그런데 이렇게 쉽게 보내줄 수는 없어.”‘망했어. 내 내공을 없애려는 거구나.’윤구주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검은 부적이 부전주의 등뼈를 파고들어 명맥을 조여오고 있었다.“이건 섭혼 부적입니까?”부전주는 내공을 잃는 것보다 섭혼 부적이 더 무서웠다.“아니야. 이건 폭혼 부적이다. 너에게 섭혼 부적을 쓰긴 너무 아까워.”부전주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폭혼 부적이 발동하면 말 그대로 영혼이 폭발하게 된다.“됐어. 꺼져. 어디를 가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당장 꺼져.”부전주에게 부적을 붙인 윤구주가 손짓하며 말했다.누구나 감지할 수 있는 이 부적을 달고는 곤륜으로 돌아갈 수도 세상 떠돌 수도 없었다. 곤륜으로 돌아가면 배신자로 몰려 처형을 당할 것이 분명하니 윤구주의 곁에 남아있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부전주는 윤구주의 발끝에 매달리며 울부짖었다.“개라도 되게 해주십시오. 죄를 갚게 해주세요.”“죄?”윤구주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북라국을 불모지로 만든 게 누군데? 예전의 북라국은 자원이 풍부한 나라였지. 너희들이
“그런데 문아름이 바보일 것 같아? 문아름이 능력이 없다면 무슨 수로 두 신전을 복종시켰겠나?”윤구주의 말에 부전주는 입을 다물었다. 이는 사실이었다. 문창정은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신전과의 연락이 두절되면 부하들이 즉시 이 소식을 문아름에게 알렸을 것이다. 그 여자의 머리라면 모든 것을 미리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종말산으로 가자.”윤구주는 기를 타고 검을 날리며 유성처럼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부전주는 비로소 이 모든 것이 구주왕의 함정이었음을 깨달았다. 깊이 생각할 사이 없이 그는 신술을 사용해 윤구주의 뒤를 바싹 따랐다.북라국 신화에서 종말산은 신들의 안식처이자 최후의 피난처로 알려져 있었다. 화진의 선전포고 후, 북라국 국주는 왕도를 버리고 이곳으로 피신한 상태였다.국주가 신들이 안식처인 이곳에 온 이유는 아사 신전의 보호를 받으며 그들에게 화진 대군을 물리쳐 달라고 부탁하기 위함이었다.아사 신전이 뿌리내린 이곳에는 신혈 전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곤륜역 출신이 아닌 이들은 가혹한 시험을 통과한 반신들로 북라국의 진정한 히든카드였다.데이로가 우연히 말한 대로 아사 신전은 국주의 부탁을 받고 이미 천 명의 신혈 전사를 전장에 보내기로 약속한 상태였다.이들은 곤륜역에서 반신으로 불리며 화진 기준으로는 평범한 신급 수준이었지만 신앙을 업고 황천관에 도착한다면 전세를 뒤집기에 충분했다.천 명의 신혈 전사들은 신전의 부름을 받고 함께 나타났다.가혹한 시험으로 선택받은 그들은 무적의 무사들이라고도 불린다.국주를 비롯한 문무 대신들이 길 양쪽에 무릎 꿇은 채 숨죽이고 있었다. 제아무리 국주라 해도 신혈 무사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신혈 무사들이 움직였으니 화진의 10만 대군은 아무것도 아니야. 진동왕이든 현모든 모두 없애버릴 거야. 구주왕이 직접 나선다고 해도 막아내지 못해. 윤구주가 황천관에 있다면 그들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을 텐데. 그때가 되면 화진은 내 손에 들어오게 되지.”북라국 국주는 화진의 넓은 땅과 수많은 자원 그리고 아
신성한 성지 종말산.비록 어떠한 방어 병력도 없지만 이곳에는 상당한 수의 신시들이 살고 있었다.소위 신시란, 신의 가장 충성스러운 종을 뜻한다.신권이 최고인 나라에서 그들이 국가의 실권을 손에 쥐고 있었다.북라국 수입의 절반이 그들의 손에 들어갔고 신이 보낸 사자 역할을 하는 그들은 백성들의 옹호를 받으며 높은 지위에 있었다. 그 가증스러운 가면 뒤에서 그들은 타락한 삶과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검은 망토를 입은 자들의 칼날 앞에서 이 신시들은 뚱뚱한 몸집 때문에 멀리 도망치지도 못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지만 검은 망토를 입은 자들의 칼날은 용서를 빈다고 해서 멈추지 않았다.신시들이 대량으로 학살당하는 것을 본 북라국 국주는 가슴이 아팠다.그는 이 신시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모른다. 신시들이 귀족들을 통제해 줬기에 그가 국주의 자리를 지금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현재 그가 데려온 수백 명의 호위대는 이미 전멸했고 더는 쓸 만한 병력이 없어 속만 태우고 있을 뿐이었다.“국주님, 정신 차리세요. 신혈 무사들이 여기에 있잖습니까.”신하들의 말에 북라국 국주는 정신을 차리고 신혈 무사들 앞에 무릎을 꿇어 그들의 도움을 빌었다.원칙적으로 신시들이 외부인들에게 이렇게 학살당하는 것은 아사 신전에 대한 도전이었다. 신혈 무사들은 신전의 가장 충실한 수호자로서 신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즉시 나서야 했다.하지만 이 신혈 무사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그 이유는 그들이 출관한 뒤로부터 신들과의 연락이 끊겼기 때문이다. 연락을 담당하던 신패도 빛을 잃고 어두워져 있었기에 신혈 무사들은 누가 신전을 공격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현재 종말산보다 신전을 지키는 것이 더 시급했다.국주나 신시들이 죽으면 사람을 바꾸면 그만이었다. 북라국에는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났기에 이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신혈 무사들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수십 명의 검은 망토를 입은 자들이 종말산을 올라 신
그 장면을 목격한 신혈 무사들이 동작을 멈췄다.‘이들이 정말 전설 속의 죽음의 신인가?’이번에는 삼백 명의 신혈 무사가 출동했고 여전히 승리를 거두었다. 수십 명의 검은 망토를 입은 자들은 신혈 무사의 손에 산산조각이 났다.그제서야 신혈 무사들은 이 죽음의 신들이 생명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잘려 나간 사지는 금속으로 만들어졌고 몸속에는 정교한 부품들이 돌아가고 있었다.“이건 꼭두각시 술법입니다. 신계 사악한 신들의 음모 아닐까요?”신혈 무사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거의 해체된 꼭두각시들이 다시 회복되었다.천 명의 신혈 무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거의 동등한 수의 사상자를 내고서야 마침내 꼭두각시들을 완전히 해체했다. 사악한 꼭두각시들이 더는 회복되지 못했다.신혈 무사들이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종말산 신전을 초토화한 꼭두각시들이 신성한 성전으로 밀려들어 왔다.진정한 학살이 시작되었다.반신이라 불리는 신혈 무사들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치유 능력이 엄청나며 심지어 신술까지 사용하는 꼭두각시들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잔혹한 학살이 벌어진 후 천 명의 신혈 무사들은 백 명 정도로 줄어들었고 살아있는 자들도 모두 상처투성이였다.회복된 꼭두각시들은 더는 그들을 공격하지 않고 명령을 기다리는 듯 제자리에 멈춰 있었다.“신혈 무사들도 안 되는 건가? 젠장, 여기서 끝나면 안 되는데.”북라국 국주는 주위를 둘러보며 탈출구를 찾으려 했지만 이미 꼭두각시들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이 사악한 신들이 감히 아사 신전을 모독하다니. 우리의 신들이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너희들은 아사 신전의 무자비한 보복을 받게 될 것이다.”신혈 무사 대장이 소리쳤다.이제는 신혈 무사들도 붕괴 직전이었다. 굳건한 신앙으로 지금까지 버텨왔다.“너희를 위해 복수해 줄 거라고? 너희들이 그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해? 술법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반신인 주제에. 너희들은 아사 신전의 신들에게 언제든지 버려지게 되는 도구에 불과해. 게다가 너희들의 신들은 너희
수백 년 전 북라국에서는 오직 제일의 용사만이 국왕이 될 자격이 있었다.현대 사회로 들어서면서 북라국의 권력자들은 편안하고 사치스러운 생활 속에서 돼지처럼 변해버렸다.윤구주의 말에 자극받은 북라국 국주는 주먹을 꽉 쥐고 앞으로 나아갔지만 두 걸음도 채 가지 못하고 자신의 뚱뚱한 다리에 걸려 넘어졌다.신혈 무사들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이게 무슨 국주냐? 그냥 뚱뚱하고 멍청한 돼지일 뿐이지.’“윤구주, 신계의 사신이여! 나는 아사 신전 신혈 무사 대장이다. 구주왕, 너는 나와 한 번 싸울 용기가 있느냐?”신혈 무사 대장은 신성한 갑옷을 벗고 상처로 가득한 거대한 몸을 드러냈다.“나를 도전하겠다고? 좋아, 그 도전 받아주지. 네 기백만큼은 인정한다. 너에게 온전한 시체를 남겨주마.”윤구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신혈 무사 대장은 속으로 욕을 했다.‘왜 그렇게 자신만만한 거야? 아직 싸우지도 않았는데 벌써 승리를 확신하다니.’“구주왕, 너무 자만하지 마라.”신혈 무사 대장은 검을 들고 오랫동안 윤구주와 대치하다가 그를 향해 돌진했다.산을 가를듯한 기세를 담아 윤구주를 향해 내리쳤다.그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쾅!그 칼날이 윤구주의 얼굴에 닿을 순간 윤구주는 손을 들어 장법으로 무기를 한 방에 산산조각내고 신혈 무사의 거대한 몸을 관통했다.신혈 무사 대장은 멀리 날아가 땅에 떨어졌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겉으로 보기에는 큰 상처가 없어 보였지만 내부의 장기와 뼈가 모두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윤구주는 약속을 지켜 그에게 온전한 시체를 남겨주었다.북라국 국주가 힐끗 보니 신혈 무사 대장의 뼈와 살이 액체화된 내장과 함께 입과 코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그걸 본 북라국 국주는 소스라치게 놀라 기절할 뻔했다.신혈 무사 대장은 팔부 동천의 절정에 도달한 신급의 존재였다. 신에 거의 가까운 그가 구주왕의 한 방을 견디지 못했다.대장의 시체를 본 나머지 신혈 무사들은 무릎을 꿇고 신들에게 기도하며 전사한 후 영령전에 올라 영생하기를
“저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를 죽여야 합니까? 저자의 기운이 이토록 흉악한데 성수의 혈기로 진압할 순 없습니까?” 백호는 이미 싸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안 된다. 너희 네 명이 함께라면 잠시나마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너희는 그저 성수의 정혈을 가졌을 뿐이니 마인을 완전히 없애려면 성수가 직접 나타나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 성수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윤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을 마친 윤구주는 곧장 진요탑 쪽으로 향했다.백호와 임정설, 청해가 함께 가서 돕고자 했으나 장인 대진인이 그들을 가로막았다.“이 마인은 오직 구주만이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국주님, 곧 전투가 시작될 터인데 서요산의 진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호법의 중임을 몇 분께 맡기겠습니다.”장인 대진인이 임정설에게 경건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저 마인을 죽이고야 말겠다.” 임정설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황자의 위엄을 한껏 드높였다.화진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면 임정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하지만 마기가 몰려와 서요산 전체를 뒤덮고 세상이 오직 흑백 두 가지 색깔만으로 변해버리며 그 끔찍한 살기가 강림했을 때 임정설마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떨렸다.“이 마인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이야.” 임정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기로 가득 찼고 윤구주마저 그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진요탑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실체가 되어 넘쳐흘렀다. 마기가 나타나자 서요산을 지키는 모든 검종 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어떤 제자는 순간적으로 십여 년을 늙어버렸다.수련이 부족하면 수명으로라도 채워야 하는 참혹한 상황이었다.웅웅.하늘에는 먹구름이 밀집했고 그 안에서 요괴의 번개가 끊임없이 터졌다.“이젠 영기조차 요기로 변하고 있다. 풍수 비술로 보건대 머지않아 이곳에서 요마가 출현하겠구나.” 임정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요산 외부에서 짙은 요기
도가는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대단히 중히 여긴다.그의 한 번의 인연, 한 번의 생각은 곧 만백성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윤구주가 정상에 오르자 앞서 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서요산 검종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이 경배한 대상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구주의 저하, 화진의 인황, 오방 천지의 주재자였다.“모두 일어나십시오. 제가 오늘 서요산에 온 이유는 오직 진요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진요탑 안의 마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문 씨 세가의 역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마인을 죽여야만 문 씨 세가의 야심도 함께 근절할 수 있습니다.”윤구주는 서요산 검종의 모든 제자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이번 서요산 행차의 목적은 바로 문 씨 세가의 역심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검종 제자들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고 모두가 금정을 지나 뒷산으로 향했다.뒷산에 막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후산 중앙에는 높이 오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 서 있었는데 그 산은 무려 구백구십구 개의 쇠사슬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이 쇠사슬은 그저 평범한 사슬이 아니었다. 절반은 땅속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 높이 떠올라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이런 수준의 봉인이라면 설령 윤구주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다고 해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처럼 견고한 고진마저 지금은 마인의 사기로 조금씩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는 영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이었으나 지금은 온 서요산이 마인의 기운에 물들어 음침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 강렬한 악기운을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솟구치는 사기를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최근 몇 대에 걸쳐 입종한 서요산의 제자들은 이런 마인의 사기와 요마의 위협 속에서 수련해야 했다.천지의 영기조차 마인의 기운에 오염되어 수련에 큰 지장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남은 현
이 말을 듣자 모든 이들은 천 년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그 성인이 바로 서요산 검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짐은 서요산 검종의 선대 종주께서 우화등선하셨다고만 들었는데 그저 떠도는 신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것이었군.” 임정설이 깊은 감탄과 함께 말했다.구백 계단 윤구주는 이미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백삼십 계단 사십 계단을 오르면서 윤구주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욱 가벼워졌고 그가 세우는 기록은 사람들의 상식을 계속해서 뒤흔들었다.구백팔십 계단을 지나 정상까지 겨우 십여 계단만 남은 그 순간 윤구주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구백구십구 계단에 이르러 결국 완전히 멈추었다.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모두가 숨을 죽이고 윤구주를 지켜봤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험일 터였다.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십여 분을 견뎌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다시 계단을 오를지 초조하게 기다렸다.마침내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습니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포기하지요.”말을 마치고 계단에서 내려서는 순간 청석 계단 아래에서 강력한 영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고 곧바로 서요산을 감싸던 어둠의 기운을 깨끗이 몰아냈다.오랫동안 음울했던 서요산 상공은 순식간에 환해졌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서요산의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져 넋을 잃었다.그제야 그들은 윤구주가 왜 그토록 여유롭게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서요산의 청석 계단이 가진 진법의 힘을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었다.“참으로 대단하신 신위군요! 우리 서요산의 청석 진법마저 제압하셨다니! 마지막 한 걸음을 분명 넘으실 수 있었을 텐데 혹시 강제로 넘었다가 진법이 견디지 못해 영기가 새 나가고 진법이 무너져 진요탑까지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신 건 아닌가요?” 장인 대진인이
도법의 깊이는 워낙 심오해서 임정설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쉽게 말씀드리자면 구주는 천지의 운기를 완전히 장악한 데다가 하늘이 직접 영광을 내리신 거죠.” 장인 대진인이 말했다.임정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한 듯 말했다.“대진인의 말은 윤구주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는 뜻인가?”“맞습니다. 우리 화진 사람들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면 본심에 따라 도법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는 다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윤구주는 분명 큰 복을 타고났지만 그 엄청난 복을 감당할 힘도 필요합니다.”대진인이 설명했다.말이 끝날 무렵 윤구주는 이미 육백삼십 계단을 거뜬히 올라와 있었다.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더욱 확고한 걸음으로 계속 전진했다.그의 발걸음마다 천지의 기운이 응축되었다.어느 순간 서요산의 계단조차 윤구주의 기세를 가두지 못했다. 그는 마치 천지를 밟으며 오르는 듯했다.곧이어 그는 칠백 계단마저 돌파했다.칠백 계단이란 천 년 전 서요산의 전성기에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지금 만약 윤구주가 구주왕이 아니라 일반 수련자였다면 이 기록만으로 서요산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다. 만일 윤구주가 서요산에 입문을 원했다면 서요산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그를 키웠을 것이며 서요산 검종의 다음 종주 자리는 당연히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칠백 계단에 이르렀음에도 윤구주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칠백오십 계단 팔백 계단 팔백오십 계단!그는 끊임없이 정상의 기록을 깨며 전설을 써 내려갔다.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윤구주 앞에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장인 대진인조차 감히 그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겨우 칠백 계단에 그쳤으니 팔백 계단을 오른 사람을 감히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마치 천지를 흔들어 이 강산을 뒤엎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그리고 마침내 구백 계단에 이르렀다.“구백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