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소수의 운 좋은 사람들이 빠르게 반응하여 박물관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곧바로 생방송을 열어 방금 목격한 끔찍한 장면을 시청자들에게 설명했다.이 소식은 순식간에 인터넷을 뒤흔들었으며 수많은 네티즌이 생방송으로 몰려들었다. 헨드리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박물관에서 벌어진 일을 알게 되었다.거리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찼고 박물관 안에서 들려오는 절망적인 비명 소리는 군중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두려움의 분위기는 박물관을 넘어 거리 전체로 퍼져나갔다.순찰 경찰들이 도착했지만 상부의 지시하에 박물관을 봉쇄하기만 했다.잠시 후 특수 부대가 현장에 도착해 군중들을 안전 지역으로 밀어냈다.그들의 행동에 군중들은 분노를 표시했다. 왜 즉시 박물관에 갇힌 사람들을 구출하지 않는 것인가?현대인의 교육과 사고방식으로 그들은 박물관에서 발생한 이상 현상은 어떤 유독 가스 누출로 인한 것이라고 여겼다.이성이 그들에게 즉시 대피해야 한다고 알려줬지만 그들은 호기심에 이끌려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박물관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내려 했다. 쓩!어느 병원의 기사단이 군마를 타고 먼저 도착했다. 이어서 검은 갑옷을 입은 암부 요원 10여 명과 구주군 갑옷을 입은 장군들도 소식을 듣고 현장에 도착했다.기사는 중세기의 고전적인 직업으로 근대에 들어서는 이미 사라진 존재였다.그런데 그들이 이제 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도착한 기사들은 말에서 뛰어내려 맨손으로 교통사고가 난 차량의 문을 뜯어내어 갇힌 사람들을 구출한 후 차량을 들어 올려 군중 밖으로 던져버렸다.사람들은 넋을 잃고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괴력인가? 아니다. 이건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이 장면을 본 생방송 시청자들이 열광했다.“유라비아 기사들이 이렇게 세다고?”전 세계 사람들뿐만 아니라 유라비아인들조차 어리둥절해 했다.이 장면은 현장에 도착한 기자들에게도 포착되어 전 세계 사람들이 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이때 군중들이 갑자기
이때 검은 기운이 벽을 뚫고 나오더니 주차된 차량을 순식간에 부식시켜 없애버렸다.방금까지 자신의 힘을 과시하던 기사들은 이 상황을 보고 넋을 잃었다.그들은 수련자이긴 했지만 화진의 수련자와는 달리 경지만 있고 술법을 쓸 줄 전혀 몰랐다.몇몇 기사들이 강한 육체로 맞서려 했지만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액체로 변해버렸다. 하급 법기인 갑옷도 얼음 녹듯 녹아내렸고 강화된 문양과 축복은 이 검은 기운 앞에서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기사들이 허겁지겁 후퇴하자 군중들은 다시 공포에 휩싸였다.“구주지.”웅!몇몇 장군들과 암부 대장이 즉시 술법을 발동해 퍼져나가는 검은 기운을 잠시 억누르는 데 성공했다.암부에서 대장 급 이상은 공법을 습득할 자격이 있었고 구주군 내부에도 윤구주가 전수한 공법이 있었기에 곤륜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이 장면을 본 군중들과 생방송 시청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이게 바로 신비한 동방의 힘이구나!”하지만 이 몇몇 장군들과 암부 대장의 힘으로는 부족했다.그들이 거의 한계에 도착할 때 빙신전의 사람들이 도착했다.“전문적인 일은 전문가에게 맡겨야죠. 잠시 물러나 있으세요.”청해는 공중에 뜬 채 등장했다.그는 한 손으로 천지의 힘을 끌어모아 박물관 전체를 얼려버린 뒤 퍼져나가던 검은 기운을 강제로 밀어 넣었다.슉!빙신전의 부하 십여 명이 박물관으로 빠르게 진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얼음으로 만들어진 문이 생기더니 갇힌 사람들이 하나하나 구조되었다.구조된 관람객들은 추위에 덜덜 떨고 있었지만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이 빙신전 사람들을 알아보고 무릎을 꿇고 경배했다.빙신전은 유라비아에도 기반을 두고 있었고 종교를 세워 신도들을 거느리고 있었다.사람들을 구출해낸 청해 일행은 기사들처럼 자신을 과시하지 않았다.그들은 평범한 인간들에게 자신을 증명할 필요 없다고 여겼고 오직 윤구주의 환심을 사길 바랐다.암부와 구주군 장군들 그리고 소수의 기사가 꽁꽁 얼어붙은 박물관으로 들어갔다.빙신전 측은 이미 제단
“전법이 완성되기 전이였다면 제가 막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완성된 이상 문물을 파괴해도 소용없어요. 이제는 저라도 핵심을 찾아야 이 전법을 깰 수 있죠.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헨드리 사람들은 사람 구실은 못 하면서 눈은 참 밝군요. 가장 좋은 법기들만 골라서 훔쳐 갔으니.”윤구주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설윤은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아사 신족이 박물관에 있는 각국 문물들을 이용해 신술을 펼쳤다는 부분은 알아들었다.“그럼 저희는 뭘...”“신경 쓰지 마세요. 이미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밖의 일은 그 사람들에게 맡기고 저희는 저희가 할 일에 집중합시다.”이때 현모가 전음으로 보고했다.“저하, 이제 입장할 수 있습니다.”“알겠어. 출발하자.”딸깍!현모가 자동차 문을 열자 설윤은 일행의 호위를 받으며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윤구주는 혼자서 느릿느릿 움직이며 맨 뒤에 서성거렸다.설윤이 의사당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가 숨을 죽였다.공주가 정말로 왔다.죽으러 온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케일 공작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서 설윤은 자기가 정말 왕위를 계승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건가?의회마저 디크스의 편에 선 상황에서 헨드리의 대권은 이미 디크스 손에 쥐어졌다. 이미 승부가 난 것과 다름없다.설윤을 본 디크스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렇게 오랫동안 찾아다니며 죽여도 해결되지 않던 문제가 제 발로 찾아오다니.“참 고맙구나. 바로 이 회의실 안에서 너를 처형함으로 너희들의 기를 꺾어주마. 이제 누가 감히 신들을 거스르겠는가.”디크스가 손을 휘젓자 사방에서 흑해골 병사들이 나타나더니 설윤을 향해 달려들었다.설윤이 오자마자 디크스가 바로 손을 쓸 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이 장면을 보고 있는 의원들의 심정이 많이 복잡했다. 헨드리의 보석 같은 공주가 이런 용기를 보일 줄이야. 죽음을 각오하고 온 이 담력만으로도 이 의원들은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용기만으로는 부족했다. 설윤이 죽으면 앞으로 디크스가 헨드리를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인 채 침묵했다.이것이 신인가?이건 그들과 협상을 하려는 게 아니라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가짜 신인 주제에 네가 무슨 자격으로 헨드리의 왕을 선택하느냐?”디크스가 빙신전 전주를 향해 소리쳤다.공중에 떠 있는 빙신전 전주를 노려보고 있던 그의 얼굴은 분노 때문에 흉악하게 일그러졌다.웃기게도 그의 눈빛에서 강한 질투와 부러움이 묻어났다.디크스의 꿈은 진정한 신이 되는 것이었다. 천하를 지배하는 것도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오랜 수명을 가지고 수억 생명을 지배하며 한 사람의 의지로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인생이라 여겼다.“하찮은 인간 따위가 감히 신의 뜻을 거스르다니. 내가 헨드리의 군주를 선택하려는 게 아니라 이미 설윤을 군주로 정한 것이다. 너 같은 미물이 신의 명령을 거역하다니.”쿵!하늘에서 압도적인 위압이 내려오며 건물 전체가 요동쳤다.마치 세계의 종말 같은 광경에 모든 사람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거대한 힘이 쏟아지며 디크스는 순식간에 재로 변해버렸다.폭군이 이렇게 쉽게 처단되었다고?으르렁!야수가 울부짖는듯한 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디크스의 육체가 소멸된 후 아사 신전이 부여한 사신의 몸으로 세상에 강림한 것이다.10여 미터에 달하는 신의 형상이 나타나며 맹렬한 살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몇몇 나이가 든 의원들은 그 장면에 놀라 심장 마비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야수는 사악한 기운을 담은 검은 불꽃으로 뒤덮여 있었고 분노로 세상 모든 것을 태워버리려는 듯했다.이 신의 힘은 너무나도 강력해 현모도 이겨낼 방법이 없었다.윤구주는 2층 좌석에 앉아 느긋하게 동화책을 넘기고 있었다. 회의실 대부분이 사신의 검은 불꽃에 뒤덮였는데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빙신전 전주는 웃음을 터뜨렸다.“가짜 신 주제에 웃긴 뭘 웃어? 이건 아사 신전이 내게 주신 영령 신체다. 내가 유일한 신이다.”디크스가 소리쳤다.“영령 신체라고? 웃기고 있군. 그냥 고대 영수의 정혈을 주입한 거잖아
공중에서 두 사람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빙신전의 다른 수련자들은 투명한 결계를 만들어 두 사람을 그 안에 가두었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건물이 폐허로 변할 것이 분명했다.두 사람의 싸움은 천지를 뒤흔들 정도였고 디크스는 극히 흥분해 있었다.‘신주라 해도 어쩔 수 없나 보군. 아사 신족이 직접 나선다면 빙신전 따위는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텐데.'이때 빙신전 전주는 디크스가 아픔을 느끼지 못하며 영혼이 영수의 정혈에 억눌려 본능적인 야성만 남아 공포나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이 술법을 손에 넣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군을 대량으로 만들어낼 수 있겠군.'바로 그때 윤구주의 전음이 그의 귓가에 차갑게 들려왔다.“야, 도대체 얼마나 더 시간을 낭비할 셈이냐? 쓸모없는 제물에 불과한데 저놈의 영혼이 다 타버릴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건가?”꿀꺽!빙신전 전주는 침을 삼치며 윤구주를 흘끗 쳐다보았다. 마침 윤구주도 책장을 넘기던 중 그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그 단 한 번의 시선에 빙신전 전주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알겠습니다. 오늘은 이 자를 철저히 짓밟아 저놈들에게 아사 신족과 우리의 격차를 보여주겠습니다.”빙신전 전주의 눈동자는 얼음 같은 푸른색으로 변했고 온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팍!디크스가 다시 한번 손바닥을 내리치자 이번 공격은 빙신전 전주의 몸에 정확히 적중했다.디크스는 상대방의 몸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성공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가 빙신전 전주를 바라보자 신주의 두 눈에서 푸른색의 블랙홀이 나타나더니 그를 안으로 끌어당겼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눈앞에는 끝없는 별들이 펼쳐져 있었다.디크스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이것이 신주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신주의 진짜 모습은 우주 그 자체인가? 이것이 나와 신주의 차이인가?'사실은 빙신전 전주가 천술을 발동하면서 천지의 기운을 끌어모았고 이 엄청난 양의 기운이 디크스의 정신에 영향을 미쳐 환각을 일
정혈을 거두어들인 빙신전 전주가 다시 디크스를 내려다보았다.조금 전의 오만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빙신전 전주의 술법에 영혼이 꽁꽁 묶인 그는 극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빙신전 전주가 직접 손을 쓰지 않아도 곧 죽을 운명이었다.“신주님! 당신이야말로 이 세상 유일한 신이십니다. 제가 맹세코 충성을 다하겠으니 목숨만이라도 살려주십시오.”디크스가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했다.악인은 악인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오만하던 디크스가 똑같이 오만한 빙신전 전주를 만나자 완전히 제압당한 것이다.“살려달라고? 안 될 것도 없지만. 네가 그럴 자격이 있느냐? 쓰레기 주제에 감히 나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기도하고 참회하라! 그래야 내가 자비를 베풀어 너에게 편안한 죽음을 선사해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를 기다리는 건 지옥 불 속의 끝없는 고통뿐이다. 그때가 되면 죽음도 사치가 될 터.”끝없는 고통이라는 말에 디크스는 간담이 서늘해져 울며불며 용서를 빌었다. 자신을 천한 놈이라 욕하며 원래의 주인보다 더 강력한 이 신주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천한 놈, 네가 살 자격이 있느냐? 헨드리의 인간들이여 모두 똑똑히 보아라. 이것이 신에게 대적한 자의 끝이다.”빙신전 전주는 회의실에 모인 모든 사람 앞에서 디크스의 영혼을 산산조각내버렸다.그리고 흑해골 특수 부대 전사들까지 모두 얼음 조각으로 만들어버렸다.이로써 설윤을 반대하던 모든 세력이 소탕되었다.빙신전 전주는 현장에 유일하게 남은 신으로서 인간들의 숭배를 마음껏 누렸다.“야. 인간답게 행동 좀 안 할래?”빙신전 전주가 흐뭇해하는 찰나 윤구주가 한마디 내뱉었다.다른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했다간 즉시 목숨을 잃었겠지만 말한 자는 윤구주였다. 그를 절망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절대 강자였다.“물론이죠. 구주왕님께서야 말로 인간계의 주인공이십니다.”빙신전 전주는 윤구주에게 아양을 떤 뒤 설윤을 위로 모셨다.신력으로 설윤을 발언대 위에 올려놓은 그는 동시에 회의실 상층 구조 전
이제 그들을 이끌어갈 인물이 나타났다. 바로 이자벨라 설윤이다.설윤의 선언은 헨드리 국민의 투지를 깨웠다.회의실의 대다수 의원이 일어나 설윤 군주 만세, 헨드리 제국 만세를 외쳤다.“성공했군.”이 광경을 지켜보던 윤구주는 헨드리 제국의 추락하던 국운이 안정되는 것을 감지했다.‘인간계, 인간들. 신계를 세운 지 이렇게 오래되었건만 아직도 이 인간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이 장면을 바라보는 빙신전 전주는 마음속으로 깊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속임수에 쉽게 넘어가는 이 인간들, 약해 보이고 한 방에 쓰러질 것 같은 이 존재들이 때론 신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우리 인간들의 힘은 너희들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대단해. 자신을 신이라 칭하는 너희 수련자들은 신계에 숨어 세계를 지배하려 하지만 너희들은 사실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일 뿐이다. 내가 왜 계속 너희들을 가짜 신이라 부르는지 아느냐? 진정한 신이라면 말이 곧 법이 되고 한 마디로 세계의 법칙을 바꾸며 천하를 뒤엎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너희들은 그렇지 못하다. 너희들은 우리가 단결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어. 너희들은 자원을 독점한 이기적인 수련자들에 불과하다.”빙신전 전주는 지나치게 거만한 윤구주의 말을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윤구주는 강하니까. 강한 자의 말은 법이 되는 법이다.“역시 못 알아듣는군. 더는 말을 낭비할 필요 없다. 전과 같이 말하마. 설윤을 잘 보호하면 너는 공신이 되어 죽음을 면할 수 있다. 반대로 설윤에게 문제가 생기면 너희 빙신전은 존재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빙신전 전주는 마음속으로 불안을 느끼며 긴장을 늦추지 않고 연신 약속했다.‘저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지? 아사 신족이 곧 손을 쓰려 한다는 뜻인가?’설윤이 의회의 지지를 얻어 무사히 왕위를 계승했기에 디크스가 발표한 조서는 자연스럽게 무효화되었다. 디크스는 무수한 죄목으로 헨드리 역사상 최악의 역적이 되었다.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왕위를 계승한 후
마음을 공략한다니.부하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들은 심리전의 달인들이었지만 정작 윤구주에게 농락당한 꼴이 되었다.도대체 누가 진정한 권모술수의 달인인가?사해 사건 이후 오래지 않아 윤구주가 반격을 시작했다.이 여인은 다름 아닌 윤구주의 옛 연인 문아름이었다.그녀는 헨드리의 국운이 안정되는 것을 보고 이미 상황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음을 직감했다.“전하라. 유라비아에 있는 문씨 가문 일원은 즉시 철수하도록 해. 더는 머물 필요 없다. 윤구주가 우리를 아직 건드리지 않은 건 우리가 먼저 손을 쓰길 기다리는 거다. 우리 사람들이 후방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이 바로 그가 그물을 걷을 때다. 윤구주가 무자비해지면 그 누구도 당해낼 수 없어. 나도 방법이 없다.”문아름이 즉시 명령을 내렸다.그 순간 문씨 가문 고수들이 갑자기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이건 살기다.”“누구냐? 당장 나와라.”문씨 가문 고수들이 즉시 검을 뽑아 들며 문아름을 중심으로 호위망을 형성했다.슉!수많은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갑옷을 입고 짐승 가면을 썼으며 등에 쌍검을 멘 이들은 바로 암부 사람들 이였다.“벌써 왔구나. 하지만 너희들로 충분하다고 생각해?”문씨 가문 고수들이 코웃음을 쳤다. 암부는 강하지만 상대에 따라 달랐다. 일반 암부 요원은 무도 고수들이 간단히 상대할 수 있었으며 절정급 무도 강자는 암부 분대 전체를 혼자 상대할 수도 있었다.해외 임무를 수행하는 이 암부들이 약한 것은 아니지만 문아름과 동행하는 이들 역시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화진 무도계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들이다.문씨 가문 고수들은 철수 전 이 암부 분대를 섬멸할 생각이었지만 문아름이 고개를 저으며 그들을 말렸다.“지금 암부의 부장이 복귀했다는 사실을 벌써 잊었나 보네. 윤구주는 정보전의 전문가가 아니지만 그녀는 달라.”문아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작이 강림했다.공중에 서 있는 그녀의 오만한 눈빛만으로도 문씨 가문 고수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단 한 걸음,그 한 걸음만 넘기면, 그는 곧 성급 바로 직전 경지에 이른다.그리고 그 마지막 문턱을 박살내는 순간 반쯤 성인이 된 경지, 반성급이다!지금 이 자리, 그 반성급 경지에 선 자는 바로 인마라고 불리는 무명이었다.“과연... 화진의 인황, 구주왕이라 불릴 자격은 있군. 하지만 너도 알겠지. 지금 네 수준으론 몸을 직접 이 판에 던지지 않는 이상 나랑 맞붙을 자격조차 없어. 네가 그 잘난 원신출체를 어떻게 하겠다는지 구경이나 해보자고. ”무명이 입꼬리를 비틀며 코웃음쳤다.팔기귀일에 도달한 윤구주의 전투력은 이미 황의 지경을 뛰어넘었다.하지만 무명과의 경지 차이는 여전히 너무 컸다.실력은 분명 엄청났지만 격이 다르였다.지금 상태로도 보통의 황자의 경지까지 초월한 상태지만 무명을 상대하긴 아직 한참 부족했다.심지어 무명이랑 싸울 실력은커녕 참마검조차 손에 제대로 못 잡는 게 현실이었다.“팔기로 부족하다면... 제구기는 어때? 구기:적선!”부우우우웅!윤구주의 온몸을 하얀 선기가 감싸는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웃고 있던 무명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뭐라고? 이건 네 따위가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잖아! ”그 순간, 무명조차 숨을 삼켰다.이건 상식의 틀을 깨부수는 광경이었다.근대에 들어서면서 도에 대한 수련는 사실상 약해졌다.그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세상에 흐르는 천지영기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봉신전쟁 당시, 상상을 초월하는 영기가 소모됐고 그 전쟁이 끝난 후 곤륜구역은 세상의 영기 90%를 신계에 봉인해버렸다.거기서 마음껏 영기를 탕진한 것도 모자라 바깥의 산수들까지 무분별하게 빨아들인 탓에세상의 영기는 걷잡을 수 없이 줄어들고 말았다.결국 세상은 고위 수련자가 태어나기 어려운 구조가 되었다.그래서 화진에선 500년에 한 번 황자가 나올까 말까 할 정도이고 황자의 경지에 도달하는 건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었다.임정설이 황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처음부터 그가 강해서가 아니라 윤구주를 돕기 위해 왕
마기가 검종 제자들의 혼백에 침투하자 그 순간 제자들의 몸에서 시커먼 마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이를 목격한 장인 대진인은 망설임 없이 즉시 결단을 내렸다. 오염된 제자들을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정화해 버린 것이다.“모든 제자들아, 입문 첫날 내가 분명히 말했을 것이다. 서요산은 찬란한 성지 화진 정통의 계승지다. 정은 사악함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정은 사악함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서요산 제자들이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는 도의였다.입문과 동시에 깨달음을 얻은 그들은 언젠가 반드시 도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저 화진 정통의 수호자가 되기 위해서였다.그 순간 진요탑 외곽에서는 7대 진인을 중심으로 전 종문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진요탑을 사수하고 있었다.하늘을 뒤덮을 듯한 마기의 기세는 점점 거세져 어느새 검종의 경내 전역을 삼켜버렸다.검종 제자들은 마기를 막아내면서도 동시에 진요탑의 결계를 유지해야 하는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정도를 지키는 일은 그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투쟁이었다.산 아래 상황도 마찬가지로 치열했다.온갖 요괴와 귀신들이 들이닥치는 가운데 임정설은 황운을 등에 업고 이씨 가문의 국운을 모두 모아 홀로 수백만 마기를 막아서고 있었다.백호는 마인으로 완전히 변신해 광란의 충격 속으로 몸을 던졌고, 스스로 마를 품은 채 적진을 난도질했다.청해는 천뢰신술을 펼쳐 수만 개의 천뢰를 무기로 변환시켜 온갖 사도와 악귀를 쓸어내기 시작했다.그 무렵 진요탑 내부에서 풍무극의 기세는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구주야, 내 한계에 도달했다. 이제 내 500년 수련의 혼을 너에게 바치겠다."”풍무극의 준비는 이미 완료되었다.그는 미리 준비해 둔 제천 법기를 꺼냈고 전법이 발동되는 순간 그의 육신은 산산조각 부서졌다.그의 정기와 천지 정기를 모두 품은 찬란한 진신 영혼은 한 자루의 참마검으로 변해 윤구주 앞에 떠올랐다.“풍 종주...” 윤구주는 입술을 깨물었다.슬프고 아쉬
윤구주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새로운 국운의 기운이 그의 발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그가 진요탑의 문에 도달했을 무렵 모든 국운이 윤구주에게 집중되었다.윤구주의 주변으로는 천인신광이 펼쳐져 있었다.이 순간만큼은 그가 천지의 주재자 화진의 영겁을 관통한 유일한 존재였다.윤구주는 홀로 진요탑 안으로 들어섰다.겉보기에 거대한 산 같았던 진요탑의 내부는 참혹한 말세의 풍경이었다. 땅은 끝없이 펼쳐진 용암으로 뒤덮여 있었고 하늘에서는 강줄기가 거꾸로 흘러내리고 있었다.불과 물이 충돌할 때마다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격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거꾸로 흐르는 강물 위에 한 노인이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백발이 성성한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서요산 검종의 종주였다.밖에서 보이던 강건한 중년의 모습은 단지 화신에 불과했으며, 본체는 수백 년 전부터 이 진요탑에서 마인을 봉인해 왔다.서요산 검종 종주는 극도로 지쳐 있었고 이제는 마지막 호흡으로 버티고 있었다.“드디어 왔구나.” 서요산 검종 종주는 허약한 전음으로 말을 건넸다.“오백 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종주님.” 윤구주는 고개를 숙였다.풍무극은 현 서요산의 종주이자 당대 최고의 영웅, 화진 제일 검으로 불리던 남자였다.원래는 풍속을 다루는 수련자로 젊은 시절엔 검 하나로 화진을 호령한 사내로 알려졌다.그의 검은 아무도 궤적을 볼 수 없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500년 전 마인이 봉인되고 서요산의 조사가 승천한 후, 풍무극은 서요산의 거자로서 종주의 자리를 이어받았다.그날 이후 진요탑에 몸을 묻고 마인과의 싸움을 500년간 지속해 왔다.풍을 다루던 그였지만 지속적인 봉인을 위해 익숙하지 않은 수속까지 수련하며 지금까지 버텨왔다.그가 마도에 빠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이었다.“그래도 괜찮다. 다행히 이 시대에 또다시 인황이 나왔으니. 화진은 연달아 두 명의 인황을 배출했다. 임정설이 인황에 등극한 지금 쇠락하던 이씨 가문의 국운이 다시 살아났다. 그가 천지의
마인이 출현하면 곤륜 구역조차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서요산 검종의 진요탑은 이미 오백 년 동안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이는 곧 그 마인이 오백 년 동안 진요탑 안에 봉인되어 있었음을 의미했다.“우리가 가진 유일한 이점은 저 마인이 지난 오백 년간 수련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오백 년 동안 분명 무언가를 '깨달았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정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사도가 존재하는 법입니다. 만약 그가 이곳을 벗어나 다시 한번 돌파에 성공하여 진정한 성인의 경지에 오른다면…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 우리 종문의 선대 종주께서 이 마인을 직접 봉인하셨습니다. 하지만 선대 종주께서는 진요탑만으로는 그를 완전히 봉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아셨지요. 그래서 마침내 구천으로 비상하셔서 바깥 세계에 존재한다는 신기를 찾기 위해 떠나신 것입니다.”장인 대진인이 비밀을 털어놓자 임정설은 왜 그 옛날 서요산 검종을 창립한 선조가 갑자기 사라졌는지 이해했다.“구천을 비상했다고? 전설 속 그 이야기 설마 전부 사실이었단 말인가? 이 세상 위에 더 위대한 세계가 있다는 건가?” 임정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들은 바로는 성인이란 육지에서 신선이 된 자를 이르는 말이고 준성은 그보다 한 단계 아래 반쯤 신선이 된 존재라 하더군요. 우리보다 더 풍부한 영기의 세계가 과연 존재하는지는 이 몸 역시 감히 짐작할 수 없습니다.” 장인 대진인은 고개를 저었다.그때였다.진요탑이 거칠게 흔들렸고 모든 호법 제자의 얼굴이 딱딱해졌다.수련이 부족한 제자 몇몇은 그 자리에서 마기의 침식으로 피를 토했다.“모든 제자에게 고한다. 나와 함께 현문을 수호하라.” 장인 대진인이 친히 자리에 앉아 온 종문의 기운을 모아 마인을 억제하기 시작했다.마인은 일시적으로 제압되었지만 산 밖의 요괴들과 악귀들은 마기의 부름을 받아 사방팔방에서 서요산으로 몰려들고 있었다.임정설은 이제 자신이 이곳에 온 진짜 이
“저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를 죽여야 합니까? 저자의 기운이 이토록 흉악한데 성수의 혈기로 진압할 순 없습니까?” 백호는 이미 싸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안 된다. 너희 네 명이 함께라면 잠시나마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너희는 그저 성수의 정혈을 가졌을 뿐이니 마인을 완전히 없애려면 성수가 직접 나타나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 성수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윤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을 마친 윤구주는 곧장 진요탑 쪽으로 향했다.백호와 임정설, 청해가 함께 가서 돕고자 했으나 장인 대진인이 그들을 가로막았다.“이 마인은 오직 구주만이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국주님, 곧 전투가 시작될 터인데 서요산의 진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호법의 중임을 몇 분께 맡기겠습니다.”장인 대진인이 임정설에게 경건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저 마인을 죽이고야 말겠다.” 임정설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황자의 위엄을 한껏 드높였다.화진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면 임정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하지만 마기가 몰려와 서요산 전체를 뒤덮고 세상이 오직 흑백 두 가지 색깔만으로 변해버리며 그 끔찍한 살기가 강림했을 때 임정설마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떨렸다.“이 마인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이야.” 임정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기로 가득 찼고 윤구주마저 그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진요탑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실체가 되어 넘쳐흘렀다. 마기가 나타나자 서요산을 지키는 모든 검종 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어떤 제자는 순간적으로 십여 년을 늙어버렸다.수련이 부족하면 수명으로라도 채워야 하는 참혹한 상황이었다.웅웅.하늘에는 먹구름이 밀집했고 그 안에서 요괴의 번개가 끊임없이 터졌다.“이젠 영기조차 요기로 변하고 있다. 풍수 비술로 보건대 머지않아 이곳에서 요마가 출현하겠구나.” 임정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요산 외부에서 짙은 요기
도가는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대단히 중히 여긴다.그의 한 번의 인연, 한 번의 생각은 곧 만백성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윤구주가 정상에 오르자 앞서 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서요산 검종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이 경배한 대상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구주의 저하, 화진의 인황, 오방 천지의 주재자였다.“모두 일어나십시오. 제가 오늘 서요산에 온 이유는 오직 진요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진요탑 안의 마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문 씨 세가의 역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마인을 죽여야만 문 씨 세가의 야심도 함께 근절할 수 있습니다.”윤구주는 서요산 검종의 모든 제자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이번 서요산 행차의 목적은 바로 문 씨 세가의 역심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검종 제자들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고 모두가 금정을 지나 뒷산으로 향했다.뒷산에 막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후산 중앙에는 높이 오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 서 있었는데 그 산은 무려 구백구십구 개의 쇠사슬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이 쇠사슬은 그저 평범한 사슬이 아니었다. 절반은 땅속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 높이 떠올라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이런 수준의 봉인이라면 설령 윤구주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다고 해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처럼 견고한 고진마저 지금은 마인의 사기로 조금씩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는 영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이었으나 지금은 온 서요산이 마인의 기운에 물들어 음침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 강렬한 악기운을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솟구치는 사기를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최근 몇 대에 걸쳐 입종한 서요산의 제자들은 이런 마인의 사기와 요마의 위협 속에서 수련해야 했다.천지의 영기조차 마인의 기운에 오염되어 수련에 큰 지장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남은 현
이 말을 듣자 모든 이들은 천 년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그 성인이 바로 서요산 검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짐은 서요산 검종의 선대 종주께서 우화등선하셨다고만 들었는데 그저 떠도는 신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것이었군.” 임정설이 깊은 감탄과 함께 말했다.구백 계단 윤구주는 이미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백삼십 계단 사십 계단을 오르면서 윤구주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욱 가벼워졌고 그가 세우는 기록은 사람들의 상식을 계속해서 뒤흔들었다.구백팔십 계단을 지나 정상까지 겨우 십여 계단만 남은 그 순간 윤구주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구백구십구 계단에 이르러 결국 완전히 멈추었다.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모두가 숨을 죽이고 윤구주를 지켜봤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험일 터였다.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십여 분을 견뎌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다시 계단을 오를지 초조하게 기다렸다.마침내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습니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포기하지요.”말을 마치고 계단에서 내려서는 순간 청석 계단 아래에서 강력한 영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고 곧바로 서요산을 감싸던 어둠의 기운을 깨끗이 몰아냈다.오랫동안 음울했던 서요산 상공은 순식간에 환해졌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서요산의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져 넋을 잃었다.그제야 그들은 윤구주가 왜 그토록 여유롭게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서요산의 청석 계단이 가진 진법의 힘을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었다.“참으로 대단하신 신위군요! 우리 서요산의 청석 진법마저 제압하셨다니! 마지막 한 걸음을 분명 넘으실 수 있었을 텐데 혹시 강제로 넘었다가 진법이 견디지 못해 영기가 새 나가고 진법이 무너져 진요탑까지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신 건 아닌가요?” 장인 대진인이
도법의 깊이는 워낙 심오해서 임정설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쉽게 말씀드리자면 구주는 천지의 운기를 완전히 장악한 데다가 하늘이 직접 영광을 내리신 거죠.” 장인 대진인이 말했다.임정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한 듯 말했다.“대진인의 말은 윤구주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는 뜻인가?”“맞습니다. 우리 화진 사람들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면 본심에 따라 도법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는 다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윤구주는 분명 큰 복을 타고났지만 그 엄청난 복을 감당할 힘도 필요합니다.”대진인이 설명했다.말이 끝날 무렵 윤구주는 이미 육백삼십 계단을 거뜬히 올라와 있었다.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더욱 확고한 걸음으로 계속 전진했다.그의 발걸음마다 천지의 기운이 응축되었다.어느 순간 서요산의 계단조차 윤구주의 기세를 가두지 못했다. 그는 마치 천지를 밟으며 오르는 듯했다.곧이어 그는 칠백 계단마저 돌파했다.칠백 계단이란 천 년 전 서요산의 전성기에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지금 만약 윤구주가 구주왕이 아니라 일반 수련자였다면 이 기록만으로 서요산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다. 만일 윤구주가 서요산에 입문을 원했다면 서요산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그를 키웠을 것이며 서요산 검종의 다음 종주 자리는 당연히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칠백 계단에 이르렀음에도 윤구주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칠백오십 계단 팔백 계단 팔백오십 계단!그는 끊임없이 정상의 기록을 깨며 전설을 써 내려갔다.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윤구주 앞에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장인 대진인조차 감히 그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겨우 칠백 계단에 그쳤으니 팔백 계단을 오른 사람을 감히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마치 천지를 흔들어 이 강산을 뒤엎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그리고 마침내 구백 계단에 이르렀다.“구백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