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된 일이지? 그 계집애가 어떻게 이런 인맥이 있을 수가?”소천홍은 기분이 언짢은 듯 말했다.“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아까 오전에 봤다시피 그 강성 제일 갑부가 진짜 그 계집애랑 아는 사이이긴 하던데.”소진이 물었다.“아버지 그러면 그 계집애가 DH그룹에게 들러붙은 거네요?”“몰라! 하지만 얘 때문에 성훈 도련님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우린 다 죽는 거야!”“당연하죠! 우리가 성훈 도련님한테서 얻은 게 얼마인데요! 그리고 지금 계약도 사인만 남은 상황인데.”소진의 말을 듣자 소천홍의 얼굴색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그리고 한참 후.소천홍은 갑자기 일어나더니 말했다.“지금부터 네 모든 인맥을 움직여 주세호가 진짜 수양아들이 있는지 가서 알아봐! 나는 지금 중해그룹에 다녀올 테니깐.”“아버지, 가서 성훈 도련님을 만나시려고요?”소진이 묻자 소천홍은 머리를 끄덕이였다.“그래!”“그 계집애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DH그룹 수양아들이 맞던 아니던 일단 성훈 도련님에게 알려야 해! 아니면 일이 더 복잡하게 돼!”“알겠어요. 지금 바로 사람을 붙여서 조사해 볼게요!”...소채은은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한 이후부터 계속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걱정하였다.소채은은 이번 일만 완벽히 속여 넘겨서 조성훈과 파혼할 수 있다면 부모님과는 이후에 사과를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윤구주는 별 다른 걱정 없이 앉아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혹시 주세호의 수양아들인척 거짓말 해서 무서웠어용?”소채은은 애교를 부리며 물었다.“무섭긴 뭐가 무서워요?”윤구주는 대답했다.‘헤헷!’“그러면 됐네. 이번일만 잘 마무리하면 이 누나가 꼭 잘해줄게요!”소채은은 웃으면서 말했다.이때 천희수와 소청하가 걸어 들어왔다.소청하는 소채은과 눈을 마주친 후 손짓하면서 말했다.“채은아, 나와 봐.”소채은은 걸어 나왔다.“아빠, 왜요?”소청하는 대답 했다.“아까 형님이랑 통화했는데 이따가 우리 집으로 온대. 그리고... 성훈 도련님도 같이
“그런데 아까 듣기로는 중해그룹이랑 DH그룹이 비즈니스 쪽으로 오랫동안 협업해 온 사이라던데요. 그러면 조성훈은 주세호를 알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우리가 계속 연기를 한다면 무조건 들킬 것 같아요.”“들키면 우린 진짜 끝이에요!”소채은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구주씨, 아니면 우리 지금 같이 도망가요!”‘지금?’윤구주는 눈썹을 치켜세웠다.“지금! 원래 이 일은 구주 씨랑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우리가 들키게 되면 구주 씨가 난감해질 뿐만 아니라 골치 아픈 일들만 가득할 거예요!”“말 좀 들어요! 빨리! 가요!”소채은은 윤구주를 끌어당기면서 말했다.하지만 윤구주는 전혀 갈 생각이 없었다.“내가 말했잖아요. 내가 있으니깐 걱정 말라고!”“하지만...”소채은이 더 말하려고 하는 순간 천희수와 소청하가 걸어 들어왔다.“채은아, 무슨 재밌는 이야기 하고 있어?”소채은은 천희수와 소청하를 보자 머쓱하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별거 아니에요. 저희 그냥 장난치고 있었어요.”윤구주가 먼저 말을 꺼내자 소청하는 더 캐묻지 않았다.“그래요.”소채은의 집.소채은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한편 윤구주는 너무 덤덤하게 앉아 있었다. 자기가 진짜 강성 제일 갑부인 주세호의 수양아들이 된 듯 마냥 여유로워 보였다.“기억을 잃은 거야 아니면 머리를 다친 거야?”“연기만 해라고 했지 진짜가 되어달라는 건 아닌데?”“어이가 없어!”소채은은 답답하기 그지없었으나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그래서 뻔뻔하게 계속 연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차들이 붐비는 거리.고급차 몇 대가 소천홍 부자 쪽으로 달려오고 있다.자동차 안에서.“아버지, 성훈 도련님, 제가 알아봤는데요. 강성 제일 갑부 주세훈은 수양아들을 둔적이 없어요. 주성훈은 딸만 한 명 있는데 이름은 주안나라고 쭉 외국에 있다가 작년에 한국으로 들어왔대요.”“그러니깐 소채은이 말한 거는 다 거짓말이에요!”소진은 소천홍과 조성훈에게 말했다.“참! 어디서 수작을 부려? 왠지 이상하다 했
“소채은, 그리고 그 개자식 딱 기다려! 나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오늘 제대로 보여주겠어!”그리고 한참 후 줄을 지은 고급차들이 차례대로 소채은의 집 앞에 멈춰 섰다.차문이 열리자 정장 차림을 한 조씨 가문 경호원들이 차에서 내렸다.그리고 조성훈과 소천홍이랑 나머지 사람들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그들 뒤에 서있는 제임스의 광기 어른 눈빛은 오늘따라 더 무서워 보였다.“성훈 도련님, 안으로 드시지요.”“채은이와 그 개자식이 바로 안에 있어요!”소천홍은 길을 안내하면서 조성훈의 뒤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조성훈은 시가를 던지고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소씨 저택.소채은, 윤구주, 그리고 천희수와 소청하도 모두 거실에 모여 있었다.이때 경호원들이 집으로 쳐들어왔다.그 모습을 본 천희수와 소청하는 의자에서 일어나 의아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소채은도 놀라움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런데 윤구주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여유롭게 앉아서 방금 우려낸 보이차를 마시고 있었다.“소채은, 나와!”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그러더니 소천홍, 소진, 그리고 중해그룹 조성훈이 집안으로 걸어 들어왔다.“형님... 형님이 어쩐 일로?”소청하는 소천홍을 보자 물었고 소천홍은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청하야, 나를 원망하지 말고 잘 들어. 이건 다 네 딸이 한 짓 때문이야!”“이 계집애가 우리 성훈 도련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어디서 망나니 같은 남자를 우리 소씨 가문에 데려와? 참! 집안이 돌아가는 꼴을 봐봐. 대체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해?”소청하는 황급히 대답했다.“당연히 형님의 말을 들어야죠.”“그런데 왜 이런 애를 우리 집에 데려와? 우리 소씨 집안은 개나 소나 다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야?”소천홍은 화를 내며 물었다.“형님...”소청하가 변명하려고 하는 순간 소채은이 말을 가로챘다.“큰 아버지, 말씀을 똑바로 하셔야죠? 누가 개고 누가 소인데요?”“계집애야! 내가 누굴 말하는지 너는 알 것
소채은도 당황했지만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이건 처음부터 소채은과 윤구주가 지은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소천홍 부자가 이렇게 빨리 주세호의 족보를 조사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심지어 꽤나 많은 돈을 써가면서 까지 수양아들의 여부를 조사하려고 했다.이미 엎질러진 물인 상황에 소채은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얘 봐라. 빨리 말 안 해! 도대체 누구냐고?”소청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소채은을 보면서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청하야, 채은이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대신 말해줄게!”“내가 이미 사람을 시켜서 다 알아봤어. 아쉽게도 저기 앉아있는 저분은 강성 제일 갑부 DH그룹 주세호의 수양아들이 아니야. 주세호밑에는 딸만 한 명이 있다고 하네.”소천홍은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이 말을 듣고 난 소청하와 천희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특히 천희수는 다리가 풀려서 털썩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소청하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고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었다.“계집애! 쟤가 주세호의 수양아들이 아니라고? 얘가 아주 남자에 눈이 돌아서 엄마 아빠를 속여?”소채은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소채은이 인정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윤구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저는 주세호의 수양아들이 아니에요.”“그리고 이 일은 은채 씨랑 아무 관련이 없어요.”윤구주는 우렁찬 목소리로 말하며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윤구주는 소채은 앞에 까지 걸어와 소채은을 뒤로 보호하듯이 숨겼다.이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윤구주에게로 집중됐다.윤구주가 주세호의 아들이 아니라는 걸 직접 인정까지 했기 때문에 소청하는 더 이상 화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계집애! 나를 속여?”“그것도 쟤랑?”“확... 확... 확 때려 부 쉴 거야!”소청하가 손을 들려고 하자 소채은 앞에 서있던 윤구주가 말했다.“아버님, 진정하세요. 제가 비록 주세호의 수양아들이 아니지만 제가 소씨 가문의 부귀영화를 책임질 거예요!”“하하하하!”윤구주의 말
“오늘부터 저만 믿으세요. 누구도 은채 씨를 괴롭히고 이용하지 않게 할 자신 있어요.”“저만 믿으신다면 지금부터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드릴게요.”“영원히!”‘뭐지 얘? 완전 다른 사람 같은데?’윤구주의 반짝이는 눈, 조각 같은 얼굴 그리고 카리스마까지 어우러져 마치 한 나라의 군주같은 아우리를 뿜어냈다.그리고 윤구주가 방금 했던 말은 소채은이 지금까지 들어봤던 말들 중에서 제일 달콤한 말이었다.“채은 씨,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물을게요. 저를 믿어요? 저의 손을 잡을 건가요?”윤구주는 매력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말이 끝나자마자 윤구주는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보면서 소채은은 많은 생각에 잠겼다.소채은에게는 어릴 적부터 이런 말을 해주는 남자가 없었고 자기를 잘 대해 주겠다고 맹세하는 사람도 없었다.하지만...‘윤구주는 기억을 잃은 사람이잖아! 나한테는 그저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낯선 사람이잖아! 도대체 누군데? 뭐 하는 사람인데?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도 모르는데?’소채은은 윤구주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지만 윤구주가 자기를 바라보는 그윽한 시선에는 왠지 모를 안점감이 있었다. 그 순간, 소채은의 마음은 흔들기 시작했다.운명일 수도 있고 충동일 수도 있고 또 가족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멀뚱 거리던 소채은은 끝내 윤구주의 손을 잡았다!두 손이 맞닿은 순간 윤구주는 웃었다.소채은의 얇고 고운 손을 꼭 잡고 윤구주가 갑자기 말했다.“소채은, 지금부터 넌 내 여자야.”“절대 네가 억울해하지 않게 그리고 누구도 너를 함부로 대하지 않게 내가 널 지켜줄 거야.”“널 건드리는 사람은 내가 다 죽일 거야!”“그게 신이든 사람이든 귀신이든 모두 죽일 거야.”윤구주의 말을 들은 소청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 계집애! 미쳤어?”“이 거짓말쟁이랑 같이 있겠다고?”천희수는 심지어 울면서 말했다.“채은아!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 쟤가 너를 속인 것도 모자라 지금
무섭게 달려오는 경호원들을 보면서 소채은은 무서움에 입을 틀어막았다.하지만 윤구주는 당황하지도 않고 썩소를 짓더니 발로 바닥을 힘껏 내디뎠다. 그러자 바닥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되었다.신비한 기류가 파도처럼 밀려오다가 또다시 사면팔방으로 흩어졌다.“아아아아!”윤구주를 향해 달려가던 경호원들은 신음소리와 함께 모두 날려갔고 그 충격으로 인해 누구도 일어설 수 없었다.이 모습을 보던 소천홍은 충격에 빠졌다.‘헐! 이 사람 뭐지? 아니! 사람이 맞아? ’뒤에 서있던 조성훈의 얼굴색도 어두워졌다.“누가 나를 또 막을 거야?”윤구주는 한 나라의 제왕인 듯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조성훈이 갑자기 걸어 나오면서 말했다.“어이! 이 새끼가 나를 기억하려나? 모르겠네.”윤구주는 조성훈을 슬쩍 바라봤다.“내 여자랑 잤어? 그리고 지금은 아예 데려가자고?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를 아주 쉽게 보네!”“똑바로 말할게. 오늘 살아서 여기를 떠날 생각 하지 마!”“제임스!”조성훈은 큰 소리로 제임스를 불렀다.쾅!얼굴에 칼자국이 선명한 190센티미터 덩치의 제임스가 조성훈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제임스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와 당장이라도 사람을 죽을 것 같은 매서운 눈빛으로 윤구주를 바라봤다.“제임스, 네가 우리 집에 온 지도 삼 년이 됐네. 오늘 그동안의 은혜를 보답할 때가 된 것 같구나!”“저 새끼 손발을 부수고 엎드려 절하게 만들어!”오래 동안 이 바닥에서 피 비린내를 맡고 자란 제임스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제임스는 덤덤하게 대답했다.“네. 도련님!”그리고 성큼성큼 윤구주에게로 걸어갔다.샥!제임스는 많은 사람의 목숨이 오고 갔던 그 칼을 집어 들었다.칼등에는 마른 피자국들이 선명했다.“우리 도련님이 네 손발을 원하시는데 네가 직접 움직일래? 아니면 내가 손 써 줄까?”제임스는 음흉하게 웃었다.윤구주는 덤덤하게 웃으면서 말했다.“내 두 손 두 발을 원하신다? 그러면 직접 와서 가져가!”“그래!”제임스는 눈
제임스의 다른 쪽 팔이 부러지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몇 초 안 되는 사이에 많은 일이 벌어졌다.한때 이 바닥을 휩쓸며 십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제임스의 두 팔은 모두 부러졌다!이 모습을 바라본 조성훈은 무서움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그리고 소 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충격에 빠졌다.하지만 윤구주는 덤덤하게 말했다.“내 손발을 가져가고 싶다며?”“좋아!”“그럼 두 손은 이미 줬고 이젠 두발 차례이지!”말이 끝나자마자 눈 깜짝할 사이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조성훈 앞으로 날아가 떨어졌다.바로 제임스였다.두 손 두 발을 모두 못쓰게 된 제임스는 고통스러워하며 소리를 질렀다.한때 이 바닥을 휩쓸었던 일인자이자 조성훈이 가장 아끼는 일 번 타자가 이렇게 두 손 두 발을 못쓰게 된 채 조성훈 앞에 누워있다.조성훈은 이런 상황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충격이 가시지 않은 조성훈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을 쳤다.윤구주는 조성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이젠 네 차례야!”그리고 한걸음 한걸음 조성훈에게로 다가갔다.조성훈은 당황했다!“너... 너... 함부로 하지 마!”“나는 조성훈이야! 우리 아버지는 중해그룹 대표이고. 네가 내 털끝 하나 다쳤다간 우리 집에서 너를...”조성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구주는 조성훈을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아까 그렇게 내 손발을 부러뜨리고 엎드려 절하라고 큰소리를 치더니. 이젠 네 차례야!”윤구주가 손에 힘을 주는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중해 그룹 도련님인 조성훈이 죽은 개처럼 윤구주 앞에 엎드려 있었다. 조성훈은 무릎이 부서지는 아픔에 눈물 코물을 흘리면서 괴로워했다.“한 번만 말할게. 잘 들어!”“살려주세요라고 해봐!”“아니면 널 죽일 거야!”윤구주는 조성훈의 머리를 밟으면서 말했다.위풍당당하던 중해 그룹 도련님이 이렇게 머리를 땅에 박은채 비참하게 말했다.“제... 제... 발 살려주세요!”그제야 윤구주가 말했다.“그래도 눈치가 있는 걸 봐서 오늘은 살려
가출! 사기! 구타! 부모님이랑 손절. 소채은은 자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을 단어일 줄 알았는데 오늘 모두 체험하게 되었다. 그것도 오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이 모든 일들이 벌어졌다.차에 올라타 집을 떠나려고 하는 순간 소채은은 머리가 하얗게 되면서 놀라움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윤구주는 옆에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걱정스럽게 소채은을 바라봤다.이 모든 걸 받아들이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윤구주도 알기에 묵묵히 지켜만 봤다.둘은 스카이 가든으로 돌아왔다.문이 열리는 순간 소채은은 긴장이 풀렸는지 눈앞이 까맣게 보이더니 갑자기 쓰러졌다.윤구주는 얼른 소채은을 안고 괜찮은지 살펴보았다.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다행이다. 충격을 받아서 잠시 기절한 것 같네!”소채은을 침대에 눕히고 윤구주는 자신의 내력을 소채은에게 옮겨주며 묵묵히 깨어나기를 기다렸다.침대 위에서.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는지 소채은의 얼굴은 불그스레 생기를 띠였다.아기 피부 같은 얼굴에 지워지지 않은 눈물 자국이 유난히 눈에 띄였다.소채은은 사진처럼 아름다운 이목구비에 앵두 같은 입술 그리고 귀여움까지 더해져 그녀를 바라보는 윤구주의 심장은 쿵쾅거렸다.윤구주는 그렇게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권력의 상징인 구주왕으로써 수많은 여자를 봤지만 소채은만큼 윤구주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사람은 여태까지 없었다.그리고 소채은은 윤구주 신분도 모르고 기억을 잃은 자동차 수리원으로 알고 있는 것조차 귀여워 보였다.이런 생각을 하면서 윤구주는 피씩 웃었다.하지만 소채은의 지독한 친척들과 이기적인 부모님들 그리고 소채은을 괴롭혔던 사람들 생각만 하면 윤구주는 이를 갈았다.“바보야, 날 믿어. 지금부터 내가 널 지킬게!”윤구주는 혼자 중얼거렸다.시간은 똑딱똑딱 지나 벌써 해가 졌다. 이때 소채은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깨났어?”소채은이 눈을 뜨자 윤구주가 기뻐하며 물었다.소채은은 두리번 대다가 낯선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인식하고 깜짝 놀라면서 옷부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