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 세워진 여러 대의 랜드로버를 보며 주세호는 점점 더 어리둥절해졌다.하지만 이내 차량마다 두 명의 까만 슈트를 입은 천하회 조직원이 서 있는 게 보였다.그들은 차가운 표정으로 목석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이상한 사람과 이상한 차를 바라보던 주세호는 끝내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안녕하세요. 혹시 어떻게 오셨어요? 왜 여기에 차를 대고 있는 거예요?”질문을 받은 천하회 조직원은 차가운 표정으로 주세호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우리는 서경 천하회 사람입니다.”“서경 천하회요?”이를 들은 주세호가 화들짝 놀랐다.천하회가 무엇인지 당연히 주세호도 잘 알고 있었다.그것보다 천하회의 노정연, 서양 등 사람이 계속 윤구주와 친분을 쌓고 싶어 한다는 걸 더 잘 알고 있었다.용인 빌리지에 이렇게 많은 천하회의 조직원이 나타났다는 건 설마 윤구주를 만나러 온 걸까?이렇게 생각한 주세호는 바로 용인 빌리지로 달려갔다.용인 빌리지.백경재, 노정연과 서양 등은 아직도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이때 주세호가 아래서 다급하게 뛰어왔다.“주 회장님, 어쩐 일로 오셨어요?”백경재는 멀리서 달려오는 주세호를 발견하고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인사했다.“저하의 결혼식을 미리 준비하러 왔어요.”“아참, 아래에 천하회 사람들이 쫙 깔려있던데 무슨 일이에요? 서경에서 온 차량도 엄청나게 많던데.”주세호가 궁금해서 물었다.백경재가 웃으며 저편에 있는 노정연과 그 일행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저쪽에 물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주세호의 눈빛이 노정연 쪽으로 향했다.그러자 노정연이 웃으며 다가왔다.“회장님, 안녕하세요.”“정연 씨,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천하회 사람들이 왜 갑자기 용인 빌리지에 대거 몰려온 거예요? 서경 차량도 엄청나게 많던데.”주세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회장님, 오해하셨어요. 천하회 회장님이 강성으로 올라오셨어요.”노정연이 이렇게 설명했다.뭐라고?“천하회 회장님이 오셨다고요?”주세호가 놀라서 물
박창용의 말을 듣고 원성일과 주세호도 더는 인사치레를 하지 않았다.하지만 주세호는 여전히 어리둥절해서 물었다.“아까 사령관님께서 한 가족이라고 했는데 설마 원 회장님도 저하를 알고 계셨던 건가요?”“네, 주 회장님 말씀이 맞아요. 저하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 목숨도 저하가 구해주셨는걸요.”“저하가 없었으면 저 원성일도 오늘이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원성일이 이렇게 말했다.“이런 우연이 있다니.”주세호가 놀라며 말했다.“그러게요. 저도 아직 실감이 잘 안 납니다. 이번에 제 부하가 저한테 윤 선생님을 소개해 주지 않았으면 윤 선생님이 저하일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원성일이 감탄하며 말했다.그러더니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저하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서경에서 듣고 얼마나 자책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꼭 저하를 위해 복수하겠다고 생각했죠.”“반년 새에 10국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 외에 저하가 생전에 쓰던 물건을 찾고 있었습니다.”“그러다 찾아낸 정보라면 저하가 생전에 쓰시던 구주령이 판인국 놈들 손에 들어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여 강성에 사람을 보내 저하의 구주령을 어떻게든 찾아 모셔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하가 강성에 있을 줄이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원성일은 끝내 모든 걸 털어놓았다.주세호가 이를 듣더니 웃으며 말했다.“아, 그랬군요.”“하하, 왜 전에 노정연 씨가 그 가짜 구주령을 꼭 사들이겠다고 그렇게 아등바등했는지 알겠네요. 원 회장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었네요.”이를 들은 윤구주도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윤구주가 원성일에 대한 인상은 늘 좋은 편이었다.천하회는 종래로 힘을 무기로 사람을 괴롭히지 않았고 화진을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운 적이 있다.하지만 더 중요한 건 원성일이 윤구주에 대한 뜨겁고 진솔한 마음이었다.“음, 괜찮네요.”“이번에 상일이 동생도 왔고 주 회장님도 왔고 민도살도 강성에 있어요.”“만약 정태웅과 천현수, 그리고 저하의 곁을 따랐던 4대 장군도 있었다면 정
뚱땡이가 계속 욕설을 퍼부었다.말끔한 서생은 귀에 피가 날 것 같았는지 끝내는 늑대와도 같은 눈을 뜨더니 그 뚱땡이를 힘껏 노려봤다.“야 이 머리에 살만 찐 놈아, 돌대가리야?”“형님이 전보에서 어떻게 당부했는지 잊었어?”한 소리 들은 뚱땡이는 멈칫하더니 말했다.“음, 어떻게 당부했는데?”“형님은 우리더러 꼭 비밀리에 만나러 오라고 하셨어. 들키는 순간 죽음이라고도 하셨고.”“넌 그 대가리에 똥만 들었어?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우리 암부의 전용기를 타?”“네가 말해 봐. 만약 우리가 암부를 떠났다는 사실을 그 사악한 여자가 알기라도 하면 네가 감당할 수 있겠어?”자세히 보니 뚱땡이와 서생은 바로 화진 암부의 양대 지휘사 백곰과 늑대였다.되레 욕을 먹은 정태웅은 이제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윤구주에 관한 일이라면 그가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꼭 기억해야 한다.정태웅은 살이 잘 오른 머리를 긁적이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네 말이 맞아. 됐지? 나도 너랑 더는 입씨름하기 싫어. 스튜어디스 누나들 찾아서 농담이나 까먹어야지.”정태웅은 이렇게 말하더니 비즈니스석 뒤편으로 걸어갔다.화진 암부의 두 번째 수장으로서 정태웅은 적응력이 뛰어났다.제일 중요한 건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이었다.비즈니스석 뒤편으로 오자마자 정태웅은 아리따우면서도 청순한 스튜어디스와 열정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스튜어디스는 170은 되는 키에 몸매가 죽여줬고 볼륨감이 살아 있었다. 검은 스타킹을 신은 다리는 사람의 피를 꺼꾸로 쏟게 했다.이를 본 정태웅은 야릇한 눈빛으로 스튜어디스의 봉곳한 가슴을 바라봤다.이에 어여쁜 스튜어디스의 표정이 점점 난감해졌다.“승객님, 비행기가 곧 강성에 도착할 예정이오니 빨리 자리에 착석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다 난류로 비행기가 흔들려서 다칠까 봐 걱정입니다.”아리따운 스튜어디스는 어떻게든 이 뚱땡이를 밀어내려 했다.하지만 정태웅의 낯짝은 그 철판보다 두꺼웠고 헤헤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지방이 두꺼워서 다칠 수가
그저 한대 내리쳤을 뿐인데 대머리 사장의 머리가 산산조각났다.옆에 있던 스튜어디스가 그 피를 전부 뒤집어썼다.피로 물든 이 광경에 스튜어디스는 다리가 후들거렸고 “악”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정태웅은 단번에 대머리 남자를 때려죽이고는 시체를 힘껏 걷어찼다.“대머리 새끼가 감히 내 앞에서 설쳐?”“그리고 뭐? 뚱땡이?”“모르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뚱땡이인 거.”정태웅은 그 시체가 사람인지 동물인지 모를 정도로 걷어차고 나서야 동작을 멈추었다.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혼비백산한 채로 눈물만 흘리는 스튜어디스에게 말했다.“스튜어디스분, 놀라지 말아요. 이 대머리는 죽어도 싸요. 아참, 아까 주제로 돌아가면 왜 그렇게 피부가 하얀 거예요? 몸매는 왜 이렇게 좋고요?”“아아아아! 사람 살려!”아리따운 스튜어디스는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없었기에 놀라서 바로 울음을 터트렸고 크게 비명을 질렀다.하지만 정태웅은 소리를 지르는 스튜어디스의 새하얀 목을 단번에 부여잡더니 서늘한 눈빛으로 웃으며 말했다.“겁먹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소리는 왜 지르는 거예요?”“한 번만 더 소리 지르면 옷 홀딱 벗겨서 실컷 즐긴 다음에 죽이고 다시 즐긴 다음에 또 죽일 거예요.”이렇게 모진 말을 정태웅은 웃으며 말했고 스튜어디스는 그 자리에 기절했다.이때, 차가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뚱땡이, 또 사고 친 거야? 얼른 그 여자 풀어줘.”이때 늑대 천현수가 정태웅의 뒤에 나타났다.정태웅은 천현수를 보더니 웃으며 손을 풀었다.“그래, 그래, 네 말 들으면 되잖아?”천현수는 고개를 숙여 정태웅의 공격에 머리가 깨진 대머리 남자의 시체를 내려다보다가 놀라서 완전히 넋을 잃은 스튜어디스를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뚱땡이, 하루라도 얌전히 지나가는 날이 없지? 내가 너한테 얘기했잖아. 우린 비밀리에 강성에 가는 거라고. 그런데 여기서 사람을 죽이면 어떡해?”천현수가 욕설을 퍼부어도 정태웅은 딱히 화내지 않고 손에 묻은 피를 닦으며 대
정태웅은 사람을 죽이고도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리를 꼬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중얼거렸다.“곧 가성에 도착하니 저하를 만날 수 있겠네.”암부에는 세 미치광이가 있었는데 다 오너 9급 이상의 경지였다.호존은 용맹하고 백곰은 살인에 중독되어 있고 늑대는 계략에 능했다.이 사람들이 바로 화진에서 이름난 암부의 3대 지휘사였다....한시간 뒤.용인 빌리지 앞에 한 택시가 멈춰 섰다.거기에 차를 대고 있던 랜드로버 차량 행렬이 너무 이목을 끌었기에 원성일은 일단 차를 빼고 용인 빌리지에서 나가라고 명령했다.하여 지금 용인 빌리지는 깔끔하기 그지없었다.안개만이 빌리지를 맴돌고 있었다.택시가 멈춰서고 동글동글한 몸집의 남자가 깔끔한 서생 한 명을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두 사람은 바로 암부의 백곰과 늑대였다.“늑대야, 저하가 정말 여기 있는 거 맞아?”차에서 내린 정태웅은 흥분하며 눈앞에 보이는 용인 빌리지를 올려다봤다.“그럼 이 뚱땡이가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저하를 뵐 수 있게 된 거야?”정태웅의 소리가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그래.”“어머나.”“드디어 저하를 만나게 되었어. 아아아! 저하 혹시 살이 빠지거나 초췌해지지는 않았을까? 이렇게 오래 못 봤는데 우리가 보고 싶지는 않았을까?”정태웅은 이렇게 말하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그러면서 코까지 훌쩍였다.울면서 콧물까지 흘리는 정태웅을 보며 천현수는 그의 튼실한 엉덩이를 걷어찼다.“멍청아, 그만 울어.”“가자, 저하 뵈러.”천현수는 이렇게 말하더니 용인 빌리지로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던 정태웅은 엉덩이를 문지르며 얼른 그 뒤를 따랐다.용인 빌리지.암부의 백곰과 늑대가 도착했을 때 윤구주는 원성일, 박창용, 그리고 주세호와 거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이때 윤구주의 눈동자가 반짝 빛나더니 바깥쪽을 내다봤다. 익숙한 두 개의 기운이 순간 윤구주의 신경을 자극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입꼬리를 올리며 밖을 내다봤다.“왔네.”“저하, 누가 왔다는 거예요
잠깐 사이에 정태웅은 먼저 산 정상에 도착했다.그가 산 정상에 도착했을 때 절세의 그림자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윤구주였다.윤구주 뒤로는 창용 부대의 박창용과 천하회의 원성일, 그리고 강성 갑부 주세호도 있었다.윤구주를 발견한 정태웅이 “어머나” 하고 소리를 질렀다.“저하!”“정말 저하 맞아요?”“이 뚱땡이가 드디어 저하를 뵙습니다.”털썩.정태웅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엉엉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뒤에서 빠른 속도로 따라오던 늑대 천현수도 윤구주를 보고는 눈시울을 붉히며 무릎을 꿇었다.“천현수, 저하를 뵙습니다.”윤구주는 환한 미소로 옛 친우들을 맞이했고 그들이 무릎을 꿇는 걸 보고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부축했다.“일어나. 형제끼리 무슨 인사치레야.”정태웅은 바닥에 꿇어앉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오히려 윤구주의 다리를 끌어안더니 아들이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아버지를 만난 것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저하,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그거 아세요? 반년 전에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뚱땡이 그만 울다가 죽을 뻔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존경하고 숭배하던 왕이 10국의 왜놈들에게 당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어요.”“근데 그 모든 게 가짜였죠.”“10국의 졸병들이 어찌 천하무적의 저하를 무찌를 수 있겠습니까?”정태웅은 이렇게 구시렁거리더니 윤구주의 다리를 끌어안고 계속 울기만 했다.이 광경에 박창용 등은 폭소하기 시작했다.“태웅아, 콧물을 저하의 옷에 묻히면 어떡하니. 우리 저하는 화진의 제일 인왕이야. 한 개 군으로 10국의 전사와 대적했고 그 결과 10국의 전사들이 무기를 버린 채 땅을 내어주며 화해를 빌었지. 근데 무슨 수로 우리 저하를 무찔러?”박창용이 패기 넘치게 말했다.“어?”“사령관님, 사령관님이 왜 여기 계세요?”정태웅은 박창용의 목소리에 빨개진 눈으로 올려다봤다.“하하하하! 저하의 결혼식인데 안 올 수가 있나.”박창용이 박장대소했다.“네?”“저하께서 결혼하신다고요?”정태웅이 듣더니 넋
결국 천현수가 뒤에서 정태웅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말했다.“뚱땡아, 그만 질척거려. 어렵게 저하를 만났는데 좀 진지해질 순 없니?”엉덩이를 맞은 정태웅은 그제야 아픈 곳을 주무르며 윤구주의 다리를 놓아주었다.“난 그냥 저하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랬을 뿐이야. 뭘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굴어?”“하하하하.”이 말에 사람들이 다시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암부의 3대 지휘사가 그렇게 한자리에 모였다.암부는 윤구주가 직접 창설했고 윤구주의 친위군이었다.민규현, 정태웅, 천현수는 윤구주가 직접 선발한 사람들이었고 끝내는 지금의 3대 지휘사가 되었다.그들을 윤구주가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또한 윤구주가 제일 믿는 친우기도 했다.지금 그들과 한곳에 모였으니 하고 싶은 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그 속에서 정태웅의 활약이 제일 돋보였고 기분도 제일 좋아 보였다.잔혹하고 살인에 중독되어 있었지만 윤구주에게만큼은 충성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의 말에 따르면 윤구주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 그는 윤구주가 살았던 구주전에서 지내며 단식으로 구주왕을 기렸다고 했다.“뚱땡아, 정말 저하를 위해 제사를 지내온 거야?”옆에 있던 박창용이 농담조로 물었다.“당연하죠.”“저하는 제게 부모님과 같은 존재고 평생 존경하는 분이지요. 그런 분을 기리는 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정태웅이 이렇게 답했다.하하하!박창용이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뚱땡이가 말이 많고 사고도 잘 치지만 저하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죽도록 슬퍼했어요.”늑대 천현수가 이렇게 말했다.“보세요. 늑대도 이렇게 말하는데 제가 헛소리 한 거 아니죠?”“저하, 저의 이런 충성심을 봐서라도 다리를 좀만 더 안게 해주면 안 될까요?”정태웅이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윤구주를 바라봤다.하지만 돌아온 건 윤구주의 차가운 한마디였다.“저리가.”사람들이 폭소를 터트렸다.사람들이 웃고 나니 정태웅이 다시 입을 열었다.“하지만 저하, 10국과의 전쟁은 어떻게 된 일이에요? 분명
진실을 알게 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저 여자라고? 저 여자는 저하의 약혼녀잖아!”정태웅이 첫 번째로 소리를 질렀다.늑대 천현수와 천하회의 원성일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윤구주를 바라보았다.당시 윤구주와 문아름의 결혼 소식은 화진 전체가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비록 그 결혼식은 결국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문아름이 윤구주의 약혼녀라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그렇기에 독을 써서 윤구주를 해친 사람이 문아름이라는 걸 알게 되자 다들 깜짝 놀랐다.“내 약혼녀기 때문에 내가 경계하지 않은 거야. 그게 아니었다면 이 세상에 누가 감히 날 독으로 해칠 수 있겠어?”윤구주가 매섭게 말했다.그 말에 사람들은 깨달은 얼굴을 했다.윤구주의 말대로 그의 실력이라면 독으로 그를 해친다는 건 말도 안 됐다.문아름이 윤구주의 약혼녀이기 때문에 방심해서 기린화독에 당했을 것이다.“빌어먹을!”“정말 못된 여자군요!”“정말 지독해요!”“저하를 해친 사람이 그 악독한 여자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정태웅은 펄쩍 뛸뻔했다.“그 지독한 여자가 자꾸 우리 암부를 견제하는 이유가 있었어요. 심지어 군부대 전체를, 저하를 따랐던 장군들을 전부 비밀리에 죽였어요.”“그 여자가 저하를 해쳤었군요!”천현수도 주먹을 꽉 쥐고 강하게 말했다.“정태웅, 천현수, 왜 비밀리에 서울로 와서 저하를 뵙게 된 건지 알겠지?”박창용이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정태웅과 천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원성일, 자네도 이젠 내가 왜 저하가 살아있다는 걸 소문내지 말라고 했는지 알겠지?”박창용이 다시금 천하회의 원성일을 바라보며 말했다.원성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저하, 이제 그 지독한 여자가 저하를 해쳤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지금 당장 병사들을 데리고 서울로 가서 그 지독한 여자를 죽입시다!”정태웅이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며 말했다.그가 말하자마자 천현수가 맞장구를 쳤다.“정태웅 말이 맞습니다!”“저하, 저하께서 명령을 내려주신다면 저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