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이어 백경재는 몇 년간 보지 못한 동문 사형에게 연락했다.백경재의 말에 따르면 그의 사형은 명재철이라고 한다.당시 사문에서 백경재와 명재철의 사이가 가장 좋았다.그러나 명재철이 사문을 떠난 뒤 두 사람은 더는 만나지 못했다.2년 전, 백경재는 그 사형이 서남 군형에 왔고, 어느 한 큰 세력이 귀하게 모시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그래서 군형에 도착한 지금 갑자기 그 사형이 떠오른 것이다.연락한 뒤 백경재는 명재철과 내일 만나자고 연락했다.곧 다음 날이 되었다.백경재는 아침 일찍 새 도포로 갈아입고 깔끔히 단장한 뒤 윤구주와 함께 사형을 만나러 갈 예정이었다.“저하, 제 사형은 사문에 있을 때 저에게 굉장히 잘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재능도 저보다 훨씬 더 뛰어났어요. 그 사형이 지금 서남의 한 큰 세력에서 귀하게 모시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배경재는 윤구주의 앞에서 그 사형을 칭찬했다.윤구주는 그의 말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대꾸하지 않았다.잠시 뒤, 먼 거리에서 검은색 차량 두 대가 먼 곳에서부터 달려왔다.차가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정장을 입은 멀끔한 남자들이 차 문을 열어주었고, 회색 도포를 입은 키 작은 남자가 차 안에서 걸어 나왔다.그는 1m 50cm 정도로 보였는데 회색 도포가 너무 커서 웃겨 보였다.그러나 그의 고고한 분위기는 전혀 가려지지 않았다. 차에서 내릴 때 그는 아주 거만한 얼굴로 고개를 높게 쳐들고 있었다.그 키 작은 남자가 나타나자 백경재는 곧바로 그를 알아보았다.“사형!”백경재는 그렇게 말하면서 흥분한 얼굴로 빠르게 달려갔다.그 키 작은 남자가 바로 배경재의 사형이었던 것이다.명재철은 백경재를 보고도 별로 반가운 듯하지는 않았다. 그는 덤덤히 말했다.“역시 경재였구나!”백경재는 들뜬 얼굴로 말했다.“사형, 십여 년 만에 만나는 건데 예전보다 훨씬 더 좋아 보이시는군요.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하하!”칭찬을 받은 명재철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경재 너는 말을 예쁘게 잘하는구나
갑자기 사형이 백화궁에서 귀빈 대접을 받는다는 말을 듣게 되자 백경재는 침묵했다.“경재야, 내 지금 신분에 놀라서 그러는 거야? 하하, 멋쩍어할 필요 없다. 사람이라면 초라할 때가 있는 법이니 말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사형은 널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밑에 들어오고 싶다면 우선 네 내공이 어떤지부터 물어봐야겠다. 아무래도 우리 백화궁은 쓸모없는 사람은 받지 않아서 말이야.”키 작은 남자가 계속해 말했다.백경재는 쓴웃음을 지었다.“솔직히 얘기해서 전 이게 겨우 귀선 중기에 다다랐습니다.”‘뭐라고?’“귀선 중기에 다다랐다고?”키 작은 남자는 백경재의 내공 수준을 알고 깜짝 놀랐다.그는 백경재보다 재능이 더 뛰어났다.하지만 그각 작년에야 겨우 귀선경지에 이르렀고 지금은 귀선 초경이었다.그런데 백경재가 본인보다 더 내공이 높다는 얘기를 듣게 되자 어이가 없었다.“네!”백경재는 솔직히 얘기했다.윤구주를 따르게 되면서 백경재의 내공은 계속해 향상됐다.특히 저번에 윤구주가 직접 만든 한기단을 먹은 뒤에는 하루 만에 경지를 돌파하여 귀선 경지에 이르렀고 지금은 귀선 중기였다.“대단한데? 경재 네가 귀선 경지에 이르렀을 줄은 몰랐다.”명재철은 믿기지 않는 건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자신이 줄곧 무시하던 백경재를 위아래로 훑어봤다.백경재의 몸에서 현기와 함께 귀선 중기의 짙은 기운이 은근히 감지되자 명재철은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경재야, 대단하구나! 몇 년 못 본 사이 나와 비슷한 경지에 다다르다니, 아주 대단해!”백경재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과찬이십니다...”“난 진심이다. 경재야, 내가 너한테 그동안 꽤 잘해준 거 너도 알지? 이렇게 하는 건 어떻니? 너도 앞으로 서남에서 발전할 생각인 듯한데 네가 백화궁에 가입할 수 있게 내가 추천해 줄게. 경재 네 정도 실력이면 최고는 아니더라도 우리 백화궁에서 먹고 사는 것엔 문제없을 거야.”명재철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백경재는 그 말을 듣고 기가 막혔다.“사형, 사실 제
명재철이 군형 5대 가족 중 하나인 설씨 일가라고 하자 뒤에 있던 윤구주의 안색이 돌변했다.백경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윤구주가 말했다.“좋아요. 같이 가서 구경해 보죠.”윤구주의 말을 들은 명재철은 고개를 돌려 윤구주를 힐끗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경재야, 곱상하게 생긴 네 제자 꽤 적극적이구나.”“전...”백경재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명재철에게 제발 입 좀 다물라고 하고 싶었다. 윤구주는 그의 왕인데 말이다.물론 명재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그는 정말로 윤구주를 백경재의 제자로 여겼다.“네 제자는 우리랑 같이 가서 구경하고 싶은 듯한데 너도 같이 가자꾸나! 오늘 우리 백화궁의 멋진 모습도 한 번 보여주겠어!”말을 마친 뒤 명재철은 몸을 돌려 차에 올렸다.“저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형이 이렇게 멍청하게 변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저하,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윤구주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우리를 초대해 줬으니 한번 가보자고!”말을 마친 뒤 윤구주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백경재는 참지 못하고 탄식한 뒤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차 안에 앉자 키 작은 명재철이 허풍을 떨기 시작했다.그는 자신이 백화궁에서 얼마나 잘 나가는지, 얼마나 귀빈 대접을 받고 있는지 끊임없이 떠들어댔다.오늘 담판을 하는 이유는 군형 5대 가족 중 하나인 설씨 일가와 백화궁 사이에 얼마 전 갈등이 빚어졌기 때문이다.군형 5대 가족 중 하나인 설씨 일가는 5대 가족 중 평범한 편이었다.그들은 류씨 일가처럼 실력이 강하지 않고 길씨 일가처럼 지독하지도 않으며 전씨 일가처럼 사악하지도 않지만 돈이 많았다.군형 5대 가족 중 설씨 일가가 가장 돈이 많았다.소문에 따르면 서남의 불법 사업 중 반 이상이 설씨 일가와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이번에 백화궁과 갈등이 생긴 것도 설씨 일가의 한 자제가 백화궁의 룸살롱에서 자신의 돈과 권세에 기대어 여자에게 자기랑 꼭 자야 한다고 했다가 거절당해서 홧김에 여자의 얼굴을
절색의 미녀 중에 청색의 긴 치마를 입은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다.여자는 늘씬하고 예쁘장했으면 겉으로 드러난 두 팔에는 문신이 가득했다.그녀는 마치 영화 속 조폭처럼 그곳에 서 있었다.짙은 무도 기운이 느껴지는 데 대충 봐도 대가 경지였다.“누님, 제가 왔습니다!”이때 명재철이 여자의 앞으로 걸어가서 깍듯이 말했다.누님이라고 불린 여자는 백화궁에서 유명한, 잔혹한 나찰 인해민이었다.인해민은 고개를 돌려 명재철을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왜 이제야 온 거야?”“죄송합니다, 누님... 오는 길에 차가 막혀서...”명재철이 서둘러 말했다.명재철은 백화궁에서 아무 지위도 없는 허드렛일꾼 정도였다.인해민은 명재철을 무시하고 아름다운 눈으로 하늘을 보고 말했다.“시간이 다 된 것 같으니 들어가자.”말을 마친 뒤 그녀는 십여 명의 아름다운 여자들을 데리고 룸살롱 안으로 들어갔다.명재철은 마치 시종처럼 그녀의 뒤를 바짝 따랐고 윤구주와 백경재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금빛 찬란한 룸살롱 안, 윤구주는 안에 들어서자마자 로비에서부터 전해지는 음산한 기운을 느꼈다.시선을 들자 20여 명의 건장한 무인들이 서 있었다.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군형 전통 복장을 한 중년 남성이었다.남자는 눈이 세모꼴이고 온몸에서는 사악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그리고 남자의 곁에는 경멸이 가득한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그도 군형 전통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중년 남성과는 달리 옷깃 쪽에 금색으로 ‘설’자가 수 놓여있었다.군형에서 혈맥과 성씨는 아주 중요했다.설씨 일가를 예로 들면 오직 설씨 일가의 피가 흐르는 자만이 이런 옷을 입을 자격이 있었다.인해민이 사람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온 뒤, 군형 전통 복장을 한 중년 남성이 입을 열었다.“명성이 자자한 잔혹한 나찰이 이렇게 여기까지 와주다니, 환영합니다!”인해민은 대꾸하지 않고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다른 여자들과 명재철 등 사람들은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말하세요. 설씨 일가에서는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셈
“하하하하!”인해민의 말에 설씨 일가 옷을 입고 있던 젊은 남자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몸 파는 천박한 X들을 감히 나랑 비교해?”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화궁에서 데려온 10여 명의 여자들이 바로 화가 난 목소리로 반박했다.“쓰레기 같은 X끼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난 설씨 일가의 주인이 될 몸이야. 오늘 내가 담판하러 나온 것만으로도 너희는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그런데 감히 내게 기어오르려고 해? 맞아, 그 천박한 X 내가 때렸어. 걔 얼굴도 내가 그렇게 만든 거고. 하하! 그런데 너희가 뭘 어쩔 수 있는데?”설유천이 광기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해민 누님, 저 짐승만도 못한 놈 제가 죽이겠습니다!”늘씬한 몸매의 여자가 품속에서 칼을 꺼내며 매섭게 말했다.인해민이 입을 열려는데 군형 옷을 입은 중년 남성이 입을 열었다.“인해민 씨, 우리를 공격할 생각이라면 잘 고민해 보시길 바랍니다. 전쟁이 시작되면 수습하기 어려워질 테니 말입니다. 우리 설씨 일가가 서남에서 어떤 실력을 지녔는지는 백화궁에서 제일 잘 알겠죠. 겨우 여자 하나 때문에 우리 설씨 일가와 척지려고 한다면 저희도 끝까지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잊지 마세요. 싸움이 시작되면 저희 군형 5대 가족은 백화궁을 모조리 없애버릴 테니 말입니다.”중년 남성의 말에 잔혹한 나찰 인해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대가 기운을 내뿜으며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왜요? 군형 5대 가족으로 저희에게 겁을 주려는 겁니까?”군형 옷을 입은 중년 남성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겁을 주는 거든, 위협하는 거든 뭔 상관입니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게 가장 중요할 텐데 말입니다. 인해민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설씨 일가의 중년 남성이 그렇게 마라자 인해민의 안색이 점차 어두워졌다.명성이 자자한 백화궁의 잔혹한 나찰 인해민은 당연히 눈앞의 설씨 일가가 두렵지 않았다.하지만 정말로 싸움이 번진다면 군형 5대 가족이 합심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초
담판은 설씨 일가의 귀선 후기의 장로와 젊은 후계자가 죽는 것으로 일단락됐다.피로 가득한 룸살롱 안, 백화궁의 미녀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들은 윤구주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긴 머리의 미녀가 입을 열었다.“조금 전... 그 사람 대체 누구죠? 한 방에 설씨 일가 귀선경지 후기의 장로와 젊은 후꼐자를 죽여버렸잖아요!”“그러니까요. 정말 무시무시하네요!”“그런데 너무 잘생기지 않았어요?”백화궁 사람들이 의논하고 있을 때 두 팔이 무신으로 가득한 인해민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명재철, 당장 나와!”명재철은 사람들 틈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누님... 여기 있습니다!”인해민은 화가 난 얼굴로 눈을 부릅뜨고 명재철을 노려보았다.“저 무시무시한 놈은 대체 누구야? 왜 네 곁에 있던 거야?”조금 전 명재철이 차에서 내릴 때, 인해민은 그의 곁에 있던 윤구주를 보았다.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윤구주의 남다른 분위기는 유독 눈에 띄었다.게다가 얼굴까지 잘생겼으니 인해민은 인상이 있었다.그러나 윤구주가 그 자리에서 설씨 일가의 귀선경지 후기의 장로와 젊은 후계자를 죽이니 기가 막혔다.불쌍한 명재철은 인해민의 앞에 털썩 무릎 꿇고 앉아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누님... 저랑 상관없는 일입니다. 저도 저 자식이 뭐 하는 놈인지 몰라요...!”인해민이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헛소리! 너랑 같이 왔는데 모른다고?”“누님, 제가 말한 건 사실입니다. 그 자식은 제 사제와 같이 온 자식이에요. 전 그 자식을 잘 몰라요! 참, 그 자식은 제 사제의 제자인 것 같던데...”명재철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인해민이 그의 뺨을 때렸다. 짝 소리 나게 뺨을 맞은 명재철은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늙어서 노망이라도 난 거야? 보잘것없는 실력을 지닌 주제에 저 사람이 네 사제의 제자라고? 발가락으로 생각해도 알겠다. 너와 네 사제의 실력으로 귀선 후기의 설씨 일가 장로를 상대할 수 있겠어?”명재철은 뺨을
“저하, 죄송합니다...”백경재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윤구주에게 사과했다.“왜 사과하는 거죠?”윤구주는 백경재를 바라보았다.“제가 정신이 나갔습니다. 그 멍청한 사형에게 연락해서는 안 됐습니다. 전 사형이 서남에서 꽤 잘 나가는 줄 알았는데 백화궁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게다가 저하를 무시하기까지 했으니 죽어 마땅하죠!”백경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윤구주는 웃었다.“난 그 사형이라는 사람 꽤 괜찮던데.”‘뭐라고?’“저하, 제 멍청한 사형이 저하에게 불경을 저질렀는데 괜찮다뇨?”백경재가 답답해서 물었다.윤구주는 웃었다.“그래.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난 오늘 군형 5대 가족 중 하나인 설씨 일가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괜찮지 않아?”윤구주의 말을 들은 백경재는 침묵했다.“저하, 그러면 이젠 어찌하실 생각입니까?”백경재는 당연히 지금 상황을 물은 것이다.“뭘 할 필요 없어. 그냥 기다리면 돼.”윤구주는 덤덤히 말했다.“기다린다고요?”백경재는 답답한 마음에 물었다.“그래. 이번에 군형에 온 이유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야. 5대 가족이 알아서 날 찾아올 거야.”윤구주의 말을 들은 백경재는 더는 캐묻지 않았다.신이 인간을 죽이려고 하는데 누가 말릴 수 있을까?시간은 계속해 흘렀다.윤구주의 말대로 그는 설씨 일가 사람을 죽인 뒤 계속해 그 호텔에서 군형 5대 가족이 자신을 찾아오길 기다렸다.백경재는 예전과 다름없이 윤구주의 곁에 있었다.저녁이 되고 방 안에 있던 백경재는 직원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문을 열자 호텔 직원이 입을 열었다.“백경재 님, 아래층에 계시는 명 선생님이 백경재 님을 찾습니다.”“명 선생님? 내 사형인가?”백경재는 그 말을 듣고 당황했다.“어디 있는데요?”“1층 로비에 계십니다!”직원이 대답했다.“그래요, 알겠어요.”백경재는 말을 마친 뒤 잠깐 고민하다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래층에는 도포를 입은 명재철이 홀에 서 있었다.백
“저하라니? 경재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난 한 마디도 못 알아듣겠다.”명재철은 백경재가 저하라고 하자 더 속이 터졌다.백경재는 당연히 멍청한 사형에게 더 설명할 마음이 없었다.그는 덤덤히 말했다.“사형,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일은 저희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요. 달리 볼 일 없으면 이만 돌아가세요.”백경재가 축객령을 내리자 명재철은 화가 났다.그러나 화가 났다고 해도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윤구주는 순식간에 설씨 일가의 구선경지 후기의 장로를 죽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명재철은 곧바로 분노를 잠재웠다.결국 명재철은 떠났다.바보 같은 사형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백경재는 그제야 호텔로 돌아갔다.밤은 더 깊어졌다.소채은을 치료한 윤구주는 잘 준비를 했다.이때 그의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졌다.“나와!”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창밖으로 손을 뻗었고 보이지 않는 현기가 난폭하게 뿜어져 나왔다.쨍그랑 소리와 함께 창문 유리가 전부 부서졌다.유리가 부서지면서 누군가 창밖에서 안으로 들어왔다.그 사람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무자비한 검은색 채찍을 휘둘렀고 독사 같은 채찍은 윤구주를 덮쳤다.윤구주는 차갑게 코웃음 치더니 오른손을 휘둘렀다. 순간 퍽 소리와 함께 독사 같던 긴 채찍이 그대로 날아갔다.“엄청 강해!”놀란 목소리와 함께 여자는 다시 한번 긴 채찍을 휘둘렀다.슉슉슉!촘촘한 채찍 그림자가 윤구주를 향해 덮쳐들었다.윤구주는 마치 산처럼 움직이지 않고 오른손으로 채찍 그림자를 가리켰다. 순간 태산도 쓰러뜨릴 듯한 광포한 기운이 그것을 제압했다.쿠구궁!무수한 채찍 그림자가 윤구주의 손가락 하나에 무너졌다.그리고 윤구주는 순식간에 사라졌다.“죽으려고!”이와 동시에 그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넘실거렸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힘을 지닌 오른손가락이 날아들었다.윤구주의 손가락에 목숨을 잃기 전, 여자가 갑자기 소리쳤다.“절... 살려주세요!”그 목소리를 들은 윤구주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그녀는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
네 사람은 비석을 지나자마자 환각의 전법에 부딪혔다. 이 전법은 우연히 들어오거나 경고를 무시한 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결국 서요산 밖으로 나가게 만드는 것이었다.의지력으로 환각의 전법을 통과하면 다음 전법이 기다리고 있었다.당연히 네 사람에게 환각의 전법은 통하지 않았다. 윤구주와 임정설은 물론, 백호와 청해도 곤륜에서 강자로 존경받는 존재들이었다.다음은 섭혼 전법이었다.전법에 들어가기 전부터 하늘을 찌를듯한 원한의 기운이 밀려왔다.그 기운을 느낀 임정설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수년간 왕궁에서 비술을 연구해서 알아본 건데. 이곳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거야. 반경 수천 리 이내의 원한의 기운이 모두 이곳에 모여있어. 내 치하에서도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그걸 내가 몰랐다니.”그는 깊은 자책에 빠졌다.“국주님, 인간이 있는 곳에는 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근대에 들어 큰 전쟁은 사라졌지만 소규모 충돌은 끊이지 않았죠.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게다가 이곳에 모여진 원한의 기운은 억울한 죽음뿐만 아니라 극형을 받은 흉악범들의 원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죠. 사랑 때문에 미워하고, 미움 때문에 미쳐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윤구주의 말을 듣고 임정설이 한마디 물었다.“구주야, 너는 문아름을 미워하지 않느냐?”문아름의 이름을 들은 윤구주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번뜩였다.“당연히 미워하죠. 저 윤구주는 순수하게 사랑하고 미워하는 인간입니다. 사랑은 사랑, 증오는 증오에요. 그녀를 위해 변명 같은 건 하지 않겠습니다. 문아름이 저를 배신했으니 저에게 당연히 미워할 권리가 있죠. 하지만 문아름을 사랑한 걸 후회하지는 않아요. 문아름이 제게 사랑이 무엇인지, 인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으니깐요. 가려는 길이 다르면 미래를 함께할 수 없죠. 저희는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걸었어요. 저희의 만남 자체가 잘못이었지만 문아름이 저를 구주왕으로 만든 것도 사실이죠. 그리고 제가 문아름을
“저하와 생사를 함께할 수 있다니. 그건 제 영광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만약 전하와 제가 정말로 서요산에서 죽게 되면 청룡이 돌아온다 해도 성수가 한자리 비게 되는 건데 그분을 어떻게 소환하시렵니까?”백호가 의혹이 담긴 표정으로 물었다.윤구주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그걸 설명하려면 너를 실험체로 삶고 실험을 진행할 때부터 얘기해야 해. 정확히 말하면 청룡, 현모, 주작의 몸속에는 네 피가 흐르고 있어. 네가 성수의 피를 융합한 첫 번째 수련자야.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직 너만이 진정한 융합에 성공했지. 네 피를 빌려 그들에게 성수의 정수를 주입했던 거야.”“백호,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다. 네가 이런 괴물 같은 모습이 된 건 전부 내 탓이야. 그러니 나를 원망해도 좋아.”백호는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어떻게 저하를 원망하겠습니까? 게다가 당시 저하께서는 제 목숨을 구하려고 그러신 거였잖아요. 제가 고마워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첫 번째로 융합에 성공한 수련자는 제가 아닐건데요? 저하께서도 성수의 피를 다루시지 않았습니까?”그 말을 들은 윤구주가 고개를 저었다.“아니. 달라. 그건 그냥 성수의 피를 통제하는 것 뿐이야. 진짜 융합했으면 나도 네 꼴이 됐을 거야.”백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됐다. 옛날얘기는 그만하고 얼른 서요산으로 떠날 준비나 해.”며칠 후, 윤구주는 임정설 국주, 청해, 백호와 함께 서요산으로 향했다.비 오는 밤, 연기를 뿜는 수송기가 짙은 구름을 뚫고 산을 향해 돌진했다.비행기가 산에 충돌하기 직전, 수많은 바람의 부적이 나타나 비행기를 강제로 선회시켜 간신히 산기슭에 착륙했다.비행기가 막 착륙하자 비행기 문이 누군가의 주먹 한 방에 박살 났다. 멀미로 비틀거리던 청해가 나오더니 몸을 움츠린 채 구토를 멈추지 못했다. 뒤이어 내린 임정설도 배를 움켜쥐며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억지로 참는 모습이었다.그들과 달리 윤구주는 멀쩡한 상태로 내려와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백호의 질문에 윤구주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네가 진짜라 믿는다면 그것은 진짜야. 초심을 잃지 않아야 길이 열리는 법이지.”이 말은 백호에게만이 아닌 자신에게도 하는 것이었다.서울의 위기는 해결되었지만 윤구주는 이 모든 것이 문씨 가문의 그 여자의 계획 중 하나임을 알고 있었다.“국주님, 이제 서요산으로 갈 때입니다.”그가 임정설을 바라보며 말했다.“서요산을 지키려는 거니? 마인이 나타날 거란 말이야?”임정설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요탑 아래에는 천년 동안 갇힌 수많은 마인들이 있었다.“맞아요. 서요산의 지맥 영기가 거의 고갈되었습니다. 만약 진요탑이 무너지면 큰 재앙이 찾아올 것입니다.”윤구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요탑이 붕괴하여 마인들이 쏟아져 나오면 윤구주라도 그들을 처리하기 힘들 것이다.“좋아. 내가 같이 가주마. 이 늦은 재앙은 언젠가 닥칠 운명이니 우리가 짊어져야 해. 지금의 희생은 후손들을 위한 것이야.”임정설의 눈빛이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화진을 위해, 백성들을 위해 그는 언제든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윤구주는 현모에게 연락을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뭐라고요? 저하께서 서요산으로 가신다고요? 그렇다면 저희도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현모와 주작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특히 주작은 서요산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천년 동안 축적된 재앙을 겨우 수십 년 수련한 윤구주 혼자서 떠맡기엔 버거웠다.“괜찮아. 너희에게는 따로 시킬 일이 있어. 내가 서요산에 있는 동안 너희는 국경을 지켜줘. 청룡의 행방은 잠시 접어두고 내가 시킨 일에 몰두해. 난 문아름을 그 여자를 잘 알고 있어. 문아름은 일이 내 뜻대로 되게 놔두지 않을 거야.”“추가로 부탁이 있는데 만약 내가 전사한다면 그때쯤 청룡이 모습을 드러낼 거야. 청룡을 불러내는 게 복인지 화인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그 상황이 오면 너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거야. 문아름이 결정을 내리겠지. 그러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둬.”유언을 남기는 듯한
‘헐, 대박.’진동왕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윤구주를 신처럼 떠받들었다.‘이게 진짜 신이지. 곤륜에 있는 그 자식들은 모두 가짜 신들이었어. 허위적이기 그지없지.’오늘 밤 그는 여러 강자의 싸움을 직접 목격하고 강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문경우도 아주 강했지만 윤구주가 나타나자 문경우는 도망조차 제대로 치지 못하고 영혼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윤구주의 술법에 의해 영혼도 남기지 못하고 진정한 죽음을 맞이했다.승리는 결국 화진에게 돌아갔다. 화진을 무너뜨리려는 역적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윤구주는 자신의 힘으로 화진의 막강한 실력을 전 세계에 알렸다.문경우를 처단한 윤구주는 즉시 임정설의 치료에 돌입했다.“짐은 별일 없으니 먼저 왕숙과 네 친구를 치료해줘라.”임정설이 임성진과 청해를 가리키며 말했다.청해는 이미 정신을 차렸다. 비록 상처가 심해 반쯤 죽은 상태였지만 화진 국주에게 인정받은 첫 순간이었다. 묘한 영예감이 그의 마음을 꽉 채우며 날아갈 듯 기뻤다.“이 두 사람 모두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은 아닙니다. 오히려 국주님이 더 위험하십니다. 경지를 무리하게 넘어서셨고 섭혼번 아래서 정기를 너무 많이 잃으셨습니다. 지금 국주님의 기운이 안정하지 않으니 제 도움이 없다면 폭주 할수도 있어요. 그때가 되면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윤구주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임정설은 결국 윤구주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도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있었다. 윤구주의 치료를 거부한 이유는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황자급 경지에 오르긴 했지만 예전보다 죽음에 대한 집착이 강해져 있었다. 윤구주는 임정설에게 풀지 못한 원한이 있음을 눈치채고 치료를 해주며 화진으로 압박했다.“국주님께서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화진에게는 국주님이 필요합니다. 국주님은 30년 동안 화진을 지켜오셨잖아요. 지금 승부가 달린 이 중요한 시점에서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시면 안 됩니다.”임정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