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대가는 싱긋 웃었다.“전동규 씨가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니 이 일은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저희 용호산의 천암사는 줄곧 고씨 일가와 사이가 좋았으니 말입니다.”눈앞의 안 대가가 웃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 대가님!”그들은 대화를 나누며 밖에서 안으로 들어왔다.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온 뒤 진동규는 곧바로 안 대가를 대접하기 위해 최고의 자리로 안내해달라고 직원에게 말했다.안 대가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고시연을 보았다‘어?’“저 사람은...”고시연을 본 그는 흠칫했다.“안 대가님, 왜 그러십니까?”옆에 있던 전동규는 안 대가의 반응을 보더니 궁금한 듯 물었다.안 대가는 고시연을 찬찬히 살피다가 말했다.“저분은 존귀한 고씨 일가의 셋째 아가씨인데 왜 여기 계시는 걸까요?”전동규는 고씨 일가 셋째 아가씨라는 말에 곧바로 흥분해서 황급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정말로 셋째 아가씨군요!”안 대가는 고시연을 알아보더니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바르게 윤구주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전씨 일가의 전동규도 사람들을 데리고 달려갔다.“용호산 천암사 안경언, 셋째 아가씨를 뵙습니다.”안경언은 고시연이 있는 곳으로 다가간 뒤 곧바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고시연은 이 레스토랑에서 천암사 사람을 만날 줄은 생각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서 윤구주를 힐끗 보았다윤구주가 귀찮아서 시선 한 번 들지 않자 그녀도 말하지 못했다.“셋째 아가씨, 절 잊으신 겁니까? 전 천암사의 안경언입니다. 작년에 고씨 일가에 방문한 적도 있습니다!”안경언은 고시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계속해 말했다.고시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아름다운 눈동자로 눈앞의 윤구주를 바라볼 뿐이었다.안경언은 똑똑한 사람이었기에 고시연의 표정을 보고 저도 모르게 윤구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셋째 아가씨, 이분은 누굽니까?”그가 말하자마자 윤구주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비켜. 나 밥 먹는 데 방해하지 말고.”윤구
안경언과 전동규는 레스토랑에서 쫓겨났다. 천암사에서 온 안경언은 침울한 얼굴로 밖에 서서 중얼거렸다.“이상해. 정말 이상하단 말이지.”“안 대가님, 뭐가 이상하단 말입니까?”전동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안경언은 은월 레스토랑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셋째 아가씨께서 오늘 너무 이상한 것 같습니다.”“무슨 뜻이죠?”“제가 기억하기론 고시연 아가씨는 절대 오늘처럼 우물쭈물하는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계속 맞은편에 있는 청년의 눈치를 살피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전 고시연 아가씨가 그 청년에게 협박당하고 있다고 확신해요.”“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무려 고씨 집안의 고시연 아가씨가 아닙니까?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 아니라면 어떻게 감히 고시연 아가씨를 협박하겠습니까?”전동규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 고시연 아가씨께 분명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고 장담해요.”안경언은 그렇게 말하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레스토랑을 다시 바라봤다.“전동규 씨, 지금 당장 사람을 데리고 고씨 일가로 가서 오늘 있었던 일을 고씨 일가 가주님께 전부 얘기하세요.”안경언이 전동규에게 명령을 내렸다.“네, 지금 당장 가보겠습니다.”전동규는 그 말을 듣더니 서둘러 부하 몇 명을 데리고 고씨 일가로 향했다.전동규가 떠난 뒤 용호산에서 온 안경언이 눈빛을 번뜩이며 살기를 드러냈다.“이 자식,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감히 고시연 아가씨를 위협하는 거야?”레스토랑 안.윤구주와 고시연은 간단히 식사한 뒤 떠났다.레스토랑에서 나온 뒤 윤구주는 고시연에게 묵을 곳을 준비하라고 했다.고시연은 당연하게도 거절할 수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빠르게 윤구주를 위해 호텔을 예약했다.호텔 예약을 마친 뒤 고시연은 윤구주를 데리고 호텔로 향했다.거리가 비교적 가까웠기에 그들은 걸어서 갔다.그들이 앞에 있는 교차로를 돌아서 모퉁이 골목에 도착했을 때, 윤구주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호통을 쳤다.“쥐새끼처럼 따라다니지 말고 지금
용호산의 안경언을 쫓은 뒤 윤구주는 계속해 전진했다.조금 전 그런 일이 있었지만 윤구주는 고시연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마치 그녀가 공기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곧 윤구주는 고시연의 안내에 따라 호텔에 도착했다.고시연이 윤구주를 위해 예약한 것은 스위트룸이었다. 그 스위트룸은 아주 크고 안에 없는 게 없었다. 심지어 서남에서 유명한 소금물 온천도 있었다.윤구주는 안으로 들어간 뒤 방 안을 쓱 둘러보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고시연은 겁먹은 얼굴로 옆에 서 있었다.“오늘 네가 한 일 모두 만족스러워. 이제 가서 물 받아.”윤구주가 갑자기 말했다.“네? 뭐라고요?”고시연은 당황했다.“온천물에 몸담고 싶어. 물을 안 받으면 어떻게 온천에 몸을 담가?”윤구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에 고시연은 어이가 없었다.그녀에게 온천물을 받아달라고 하다니.그녀는 무려 고씨 일가의 셋째 아가씨가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하인이나 할 법한 일을 한단 말인가?하지만 윤구주가 자신의 목숨을 장악하고 있다는 걸 떠올린 고시연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순순히 물을 받으러 갔다.콸콸콸...곧 고시연은 욕조 안에 온천물을 가득 받았다.그리고 난 뒤 윤구주는 곧장 옷을 벗고 온천에 몸을 담을 준비를 했다.고시연은 그가 자신의 앞에서 옷을 벗자 말문이 막혔다. 그러더니 서둘러 두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면서 속으로 욕했다.‘젠장, 젠장! 이 마귀, 감히 내 앞에서 옷을 벗어? 아아아아!’고시연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그러나 자신의 체내에 금안화련 낙인이 있다는 걸 떠올리고는 결국 참았다.윤구주는 고시연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마치 고시연이 공기인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툭툭.윤구주가 옷을 벗고 있을 때, 눈을 가리고 있던 고시연은 윤구주의 옷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자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살짝 벌리면서 손 틈 사이로 윤구주를 몰래 힐끔댔다.호기심 때문일 수도 있고, 윤구주가 너무 잘생겼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고시연
윤구주의 말에 고시연은 너무 무안했다.당당한 고씨 일가 셋째 아가씨인 고시연이 몰래 낯선 남자의 몸을 훔쳐보다니, 게다가 더욱 중요한 건 상대방에게 들켰다는 점이었다.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당장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었다.고시연이 뻘쭘해하고 있을 때 윤구주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뭘 넋 놓고 있어? 이리 와서 내 등이나 밀어.”고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윤구주는 정말로 그녀를 종으로 여기는 듯했다.그녀에게 그의 등을 닦으라고 하다니.비록 무척 화가 났지만 그녀의 체내에는 금안화련 낙인이 있었고, 또 윤구주의 완벽한 몸매까지 떠올린 고시연은 결국 짧게 대답하며 그에게 다가갔다.완벽한 남자를 위해 등을 밀어주는 것이니 손해 볼 것도 없었다.고시연은 그렇게 생각했다.욕조 안, 윤구주는 상의를 탈의한 채 그 안에 누웠다.그의 등에는 눈에 띄는 용 머리가 그려져 있어 시각적인 충격이 컸다.고시연은 다가간 뒤 조심스럽게 쭈그리고 앉아서 옆에 놓인 흰색 타월을 들고 마치 종처럼 윤구주의 등을 닦기 시작했다.윤구주는 편안하게 누워있었고 고시연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타월이 그의 피부를 조금씩 스쳤다. 고시연은 심장이 쿵쾅댔다.‘세상에!’그녀는 고씨 일가 셋째 아가씨로서 처음으로 낯선 남자의 등을 닦아줬다.심지어 화진의 4대 가문 출신인 그녀의 약혼자도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시간은 1분 1초 흘렀다.윤구주는 그렇게 편안하게 누워있었고 그의 뒤에 있는 고시연은 열심히 윤구주의 등을 닦아주고 어깨를 주물러줬다.고시연이 힘들어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때 윤구주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오늘 네가 종으로서 한 일에 난 아주 만족스러워.”윤구주의 어깨를 주물러주던 고시연은 그 말을 듣더니 말했다.“그러면 전 언제 풀어줄 거예요?”“이제 가 봐.”윤구주는 덤덤히 말했다.‘뭐라고?’“절 풀어주겠다고요?”고시연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아름다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앞의 윤구주를 바라보았다.“맞아. 이제 가보도 돼. 하지만 나
고씨 일가에서도 그녀의 할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윤구주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됐어. 이제 가봐.”윤구주는 욕조에서 나온 뒤 흰색 타월을 몸에 걸치면서 말했다.고시연은 그 자리에 서서 묵묵히 윤구주를 바라보다가 말했다.“네!”그렇게 그녀는 정말로 떠났다....남릉 고씨 일가는 수백 년 된 고대 무술 세가였다.서남의 다섯 개 도에서 고씨 일가의 세력은 군형 5대 가족보다 더 대단했다.그들은 서남 무도 연맹을 장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들의 재산도 서남에서 손꼽힐 정도로 많았다.고씨 일가의 어르신 고진용은 육신으로 신급 경지에 다다른 대단한 사람이었다.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무적의 육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게다가 화진 무도 연맹 천방에서 7위였다.고씨 일가는 남릉에서 세력이 대단했고 발 한 번 구르면 서남의 다섯 개 도가 전부 흔들릴 정도였다.그뿐만 아니라 고씨 일가는 저력이 대단하고 인맥도 넓어서 다른 이들은 따라갈 수 없었다.이번에 고씨 일가 어르신의 80세 생신 때, 서남의 다섯 개 도의 모든 문파가, 심지어 옛 세대인 용호산의 천암도에서도 그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선물을 보냈다.그런데 윤구주는 고씨 일가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보물을 원한다고 했다.게다가 내일 열 시에 직접 가지러 오겠다고 했다.널따란 고씨 일가의 장원은 남릉의 번화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수천 평에 달하는 고씨 일가의 장원은 기세가 웅장하고 아주 호화로웠다.고씨 일가 문 앞에는 두 개의 위엄 넘치는 사자 석상이 놓여 있었고, 그 주위에는 고씨 일가의 부하들이 가득했다.이때 고씨 일가의 웅장한 대전 안은 분위기가 삼엄했고 정중앙에 도포를 입은 도인이 서 있었다.자세히 살펴보니 전에 윤구주의 뒤를 밟았다가 그에게 죽을 뻔했던 용호산 천암사 출신의 안경언이었다.“안 대가님, 오늘 시연이를 만난 게 확실합니까? 시연이가 남릉으로 돌아왔다고요?”차가운 목소리가 정중앙 위쪽에 앉아 있는 건장한 중년 남성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그 남자는 분
고준형이 말을 끝맺자마자 내전 안에서 화려한 차림의 젊은 남자가 굳은 표정으로 나왔다.“아빠, 큰일이에요! 조금 전에 고도 4대 문파 쪽에 연락해 봤는데... 4대 문파 사람들이 몰살당했대요! 게다가 시연이도 실종됐대요!”그 말에 대전 안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전부 급변했다.고준형은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뭐라고? 고도 4대 문파 사람들이 전부 죽었다고? 확실해?”“확실해요!”화려한 차림의 젊은 남자가 말했다.그는 고준형의 둘째 아들 고해식이었다. 고해식의 말에 고준형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러면 시연이는?”고해식이 말했다.“시연이는... 실종됐어요. 지금까지 전화를 받지 않아요.”“그럴 리가 없는데.”고준형은 그 말을 듣더니 넙데데한 얼굴 위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안 대가님, 조금 전에 오늘 은월 레스토랑에서 시연이를 봤다고 했죠? 그리고 낯선 젊은 남자랑 같이 있었다고 했었죠. 맞아요?”고준형은 서둘러 용호산 천암사 출신의 안경언에게 물었다.“맞습니다, 가주님.”“젠장,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고도 4대 문파 사람들이 다 죽은 거지? 게다가 시연이는 왜 갑자기 남릉에 돌아온 거지?”고준형의 안색이 한없이 흐려지자 안경언이 말했다.“고 가주님, 설마 이 모든 게 그 무시무시한 젊은이랑 관련이 있는 걸까요?”“시연이랑 같이 있었던 그 젊은이 말이에요?”“네! 오늘 은월 레스토랑에서 시연 아가씨는 그 젊은이 앞에서 찍소리도 하지 못했어요.”안경언이 다시 한번 말했다.그 말에 고준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그가 탁자를 쾅 내리치자 단단한 강향단으로 된 탁자가 부서졌다.“젠장! 서남에 감히 나 고준형의 딸을 위협하는 놈이 있다니. 해식아, 해진아. 지금 당장 사람들을 소집해서 시연이를 찾으러 가!”고준형이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말했다.“명심해. 그놈이 감히 너희 여동생의 털끝 하나 건드린다면 그놈의 피부를 벗겨버려. 알겠어?”고준형은 분노에 차서 고함을 질렀고, 첫째 아들 고해진과 둘째 아들
그렇게 한참이 지난 뒤에야 고시연은 정신을 차렸다.그녀가 기절했던 이유는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린 지금은 별문제 없었다.“시연아!”“시연아!”옆에 있던 고준형과 고씨 일가의 두 형제는 고시연이 정신을 차리자 서둘러 걱정스럽게 그녀를 불렀다.고시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뒤 도우미에게 물을 한 컵 달라고 해서 물을 마셨다.그녀의 상태가 조금 호전된 것 같자 고준형은 그제야 걱정스레 물었다.“시연아, 괜찮니?”“괜찮아요.”고시연이 말했다.“아빠한테 얘기해 봐. 대체 고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가 듣기론 고도 4대 문파 사람들이 전부 죽임당했다면서?”고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그 말에 고준형은 곧바로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대체 어떤 놈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와서 감히 우리 무도 연맹의 사람을 죽인 거야?”고시연은 윤구주라고 바로 말하지 않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 일은 제 탓이에요... 제가 먼저 그 사람을 건드려서는 안 됐어요.”“누군데?”그녀의 말에 고준형은 흠칫했다.“전 그의 성만 알아요. 이름은 몰라요.”고시연은 윤구주를 떠올리면서 중얼댔다.“성이 윤씨라고? 설마 안경언 씨가 말했던 그 젊은이니?”고준형이 계속해 물었다.고시연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이 모든 걸 설명했다.“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네. 감히 우리 서남에서 그런 짓을 벌여? 심지어 내 딸까지 위협해?”분노에 찬 고준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맞아요. 그 자식 죽고 싶어서 그러는 게 틀림없어요. 아버지, 명령만 내리시면 저랑 둘째가 지금 당장 사람들을 데리고 그 자식을 찾아가서 갈기갈기 찢어 죽일게요!”옆에 있던 고해진이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다들 윤구주를 찾으려고 할 때 고시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아빠, 오빠, 그 사람을 찾아갈 필요 없어요.”“왜?”고해진은 답답하다는 얼굴로 갑자기 입을 뗀 고시연을 바라봤다.“그 사람이 내일 우리를 찾아올 거라고 했
고준형은 의아한 얼굴로 자기 딸을 바라보았다.고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자신의 미간을 가리키며 말했다.“아빠, 이것 보세요.”그 말에 고준형과 고씨 일가 형제들은 고시연의 미간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미간에 금빛 연꽃 낙인이 있었다. 그 낙인은 마치 불꽃 같아 보였는데 보일 듯 말 듯했다.“이게 뭐야?”화련 낙인을 본 고준형은 당황스러웠다.고시연의 입가에 비참한 미소가 걸렸다.“이건 그 사람이 제 몸에 남긴 생사 주술이에요.”“뭐? 생사 주술?”“네, 이제 그 사람 손에 제 목숨이 달려 있어요. 제가 살 건지, 죽을 건지는 그 사람 뜻에 달려 있죠.”고시연의 말을 들은 고준형은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빌어먹을 놈! 감히 나 고준형의 딸을 위협해? 내가 그놈은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옆에 있던 고씨 일가 형제들도 화를 내며 말했다.“맞아요. 정말 건방지고 악랄한 놈이네요. 감히 시연이를 협박하다뇨?”“시연아, 그 빌어먹을 자식 지금 어디 있니? 내가 지금 당장 널 위해 복수해 주마!”고준형은 화를 내며 말했다.고씨 일가의 현임 가주 고준형은 대가 8품 이상이었고, 육신을 단련한 무인이었다.대가 8품 이상이면 9품 태허 경지 법사를 상대할 수 있었다.고씨 일가 사람들이 화를 내는 건 서남 무도 연맹 전체가 화를 내는 것과 다름없었다.고씨 일가가 서남 무도계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누군가 고씨 일가에서 가장 아끼는 셋째 아가씨의 몸에 생사 주술을 걸었다고 하니 고준형은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따.“아빠, 아빠는 그 사람 상대가 안 돼요... 심지어 우리 서남 무도 연맹 전체가 그 사람 상대가 안 돼요. 유일하게 그 사람 사대가 될 수 있는 건 아마... 할아버지뿐일 거예요!”고시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고시연이 할아버지 얘기를 꺼내자 고해식이 제일 처음 입을 열었다.“시연아, 그게 무슨 말이야? 아버지는 대가 8품이야. 그런데 어떻게 아버지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이야?”“맞
“저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를 죽여야 합니까? 저자의 기운이 이토록 흉악한데 성수의 혈기로 진압할 순 없습니까?” 백호는 이미 싸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안 된다. 너희 네 명이 함께라면 잠시나마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너희는 그저 성수의 정혈을 가졌을 뿐이니 마인을 완전히 없애려면 성수가 직접 나타나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 성수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윤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을 마친 윤구주는 곧장 진요탑 쪽으로 향했다.백호와 임정설, 청해가 함께 가서 돕고자 했으나 장인 대진인이 그들을 가로막았다.“이 마인은 오직 구주만이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국주님, 곧 전투가 시작될 터인데 서요산의 진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호법의 중임을 몇 분께 맡기겠습니다.”장인 대진인이 임정설에게 경건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저 마인을 죽이고야 말겠다.” 임정설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황자의 위엄을 한껏 드높였다.화진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면 임정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하지만 마기가 몰려와 서요산 전체를 뒤덮고 세상이 오직 흑백 두 가지 색깔만으로 변해버리며 그 끔찍한 살기가 강림했을 때 임정설마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떨렸다.“이 마인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이야.” 임정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기로 가득 찼고 윤구주마저 그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진요탑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실체가 되어 넘쳐흘렀다. 마기가 나타나자 서요산을 지키는 모든 검종 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어떤 제자는 순간적으로 십여 년을 늙어버렸다.수련이 부족하면 수명으로라도 채워야 하는 참혹한 상황이었다.웅웅.하늘에는 먹구름이 밀집했고 그 안에서 요괴의 번개가 끊임없이 터졌다.“이젠 영기조차 요기로 변하고 있다. 풍수 비술로 보건대 머지않아 이곳에서 요마가 출현하겠구나.” 임정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요산 외부에서 짙은 요기
도가는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대단히 중히 여긴다.그의 한 번의 인연, 한 번의 생각은 곧 만백성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윤구주가 정상에 오르자 앞서 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서요산 검종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이 경배한 대상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구주의 저하, 화진의 인황, 오방 천지의 주재자였다.“모두 일어나십시오. 제가 오늘 서요산에 온 이유는 오직 진요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진요탑 안의 마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문 씨 세가의 역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마인을 죽여야만 문 씨 세가의 야심도 함께 근절할 수 있습니다.”윤구주는 서요산 검종의 모든 제자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이번 서요산 행차의 목적은 바로 문 씨 세가의 역심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검종 제자들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고 모두가 금정을 지나 뒷산으로 향했다.뒷산에 막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후산 중앙에는 높이 오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 서 있었는데 그 산은 무려 구백구십구 개의 쇠사슬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이 쇠사슬은 그저 평범한 사슬이 아니었다. 절반은 땅속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 높이 떠올라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이런 수준의 봉인이라면 설령 윤구주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다고 해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처럼 견고한 고진마저 지금은 마인의 사기로 조금씩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는 영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이었으나 지금은 온 서요산이 마인의 기운에 물들어 음침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 강렬한 악기운을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솟구치는 사기를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최근 몇 대에 걸쳐 입종한 서요산의 제자들은 이런 마인의 사기와 요마의 위협 속에서 수련해야 했다.천지의 영기조차 마인의 기운에 오염되어 수련에 큰 지장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남은 현
이 말을 듣자 모든 이들은 천 년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그 성인이 바로 서요산 검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짐은 서요산 검종의 선대 종주께서 우화등선하셨다고만 들었는데 그저 떠도는 신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것이었군.” 임정설이 깊은 감탄과 함께 말했다.구백 계단 윤구주는 이미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백삼십 계단 사십 계단을 오르면서 윤구주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욱 가벼워졌고 그가 세우는 기록은 사람들의 상식을 계속해서 뒤흔들었다.구백팔십 계단을 지나 정상까지 겨우 십여 계단만 남은 그 순간 윤구주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구백구십구 계단에 이르러 결국 완전히 멈추었다.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모두가 숨을 죽이고 윤구주를 지켜봤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험일 터였다.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십여 분을 견뎌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다시 계단을 오를지 초조하게 기다렸다.마침내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습니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포기하지요.”말을 마치고 계단에서 내려서는 순간 청석 계단 아래에서 강력한 영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고 곧바로 서요산을 감싸던 어둠의 기운을 깨끗이 몰아냈다.오랫동안 음울했던 서요산 상공은 순식간에 환해졌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서요산의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져 넋을 잃었다.그제야 그들은 윤구주가 왜 그토록 여유롭게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서요산의 청석 계단이 가진 진법의 힘을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었다.“참으로 대단하신 신위군요! 우리 서요산의 청석 진법마저 제압하셨다니! 마지막 한 걸음을 분명 넘으실 수 있었을 텐데 혹시 강제로 넘었다가 진법이 견디지 못해 영기가 새 나가고 진법이 무너져 진요탑까지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신 건 아닌가요?” 장인 대진인이
도법의 깊이는 워낙 심오해서 임정설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쉽게 말씀드리자면 구주는 천지의 운기를 완전히 장악한 데다가 하늘이 직접 영광을 내리신 거죠.” 장인 대진인이 말했다.임정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한 듯 말했다.“대진인의 말은 윤구주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는 뜻인가?”“맞습니다. 우리 화진 사람들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면 본심에 따라 도법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는 다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윤구주는 분명 큰 복을 타고났지만 그 엄청난 복을 감당할 힘도 필요합니다.”대진인이 설명했다.말이 끝날 무렵 윤구주는 이미 육백삼십 계단을 거뜬히 올라와 있었다.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더욱 확고한 걸음으로 계속 전진했다.그의 발걸음마다 천지의 기운이 응축되었다.어느 순간 서요산의 계단조차 윤구주의 기세를 가두지 못했다. 그는 마치 천지를 밟으며 오르는 듯했다.곧이어 그는 칠백 계단마저 돌파했다.칠백 계단이란 천 년 전 서요산의 전성기에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지금 만약 윤구주가 구주왕이 아니라 일반 수련자였다면 이 기록만으로 서요산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다. 만일 윤구주가 서요산에 입문을 원했다면 서요산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그를 키웠을 것이며 서요산 검종의 다음 종주 자리는 당연히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칠백 계단에 이르렀음에도 윤구주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칠백오십 계단 팔백 계단 팔백오십 계단!그는 끊임없이 정상의 기록을 깨며 전설을 써 내려갔다.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윤구주 앞에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장인 대진인조차 감히 그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겨우 칠백 계단에 그쳤으니 팔백 계단을 오른 사람을 감히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마치 천지를 흔들어 이 강산을 뒤엎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그리고 마침내 구백 계단에 이르렀다.“구백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