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 보니 안에 당근만큼 굵은 영지버섯 세 개가 들어있었다.박스 안에 다른 건 없고 당근처럼 생긴 영지버섯 세 개만 들어있는 걸 본 주세영은 버럭 화를 냈다.“여보, 이것 좀 봐. 소채은이 뭘 가지고 왔는지! 이게 뭐래? 당근도 아니고 나무뿌리도 아니고, 이걸 어디에다 쓴다고.”주세영은 화를 내면서 영지를 전부 바닥에 던졌다. 그러더니 발을 들어 영지를 힘껏 밟았다.순간 영지버섯 세 개가 짓이겨져서 토막 났다.컹!이때 천이경이 기르는 강아지가 달려와서 바닥에 있는 영지를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봤지? 이런 건 개들이나 먹는 거야.”주세영은 그렇게 말하더니 씩씩대면서 소파에 앉았다.주세영의 모습에 천이경은 한숨을 쉬었다.이때 또 한 번 벨 소리가 울렸다.“누구세요?”단단히 화가 난 주세영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소리를 꽥 질렀다.“접니다.”문밖에서 나이 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목소리를 들은 주세영은 서둘러 문을 열었다.문을 열자 점잖은 차림에 약상자를 등에 지고 있는 노인이 안으로 들어왔다.“황 선생님이셨군요. 얼른 들어오세요!”주세영은 그 노인을 정중하게 맞이했다.눈앞의 그 노인은 서남의 유명한 한의사였다.이번에 그는 천이경의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에 방문한 것이었다.황석훈은 미소를 지으며 주세영에게 인사한 뒤 집 안으로 들어왔다가 강아지가 바닥에 떨어진 영지버섯을 먹고 있는 걸 보았다.“정말 귀여운 강아지네요!”황석훈은 그렇게 말하면서 천이경을 치료해 주려고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가 갑자기 눈을 빛냈다.“아니, 이건?”그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더니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강아지가 먹고 있는 영지버섯을 바라보았다.“왜 그러세요, 황 선생님?”주세영과 천이경은 황석훈이 바닥에 쭈그리고 앉자 궁금한 듯 물었다.황석훈은 영지를 주우면서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세상에, 이런 귀한 것을 왜 강아지에게 먹이는 겁니까?”“귀한 거라고요? 황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황석훈의 말에 주세영은 이해가
“황 선생님, 거짓말하지 마세요. 이... 이... 이게 정말로 최상품 영지버섯이라고요? 당근이 아니라?”주세영은 울고 싶었다. 그녀는 흐느끼면서 황석훈에게 물었다.황석훈은 화를 냈다.“전 40년 넘게 한의사를 했어요. 그런 제가 당근과 영지버섯도 구분하지 못하겠어요?”그 말을 들은 주세영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정말 대단한 집안이군요. 몇십억짜리 영지버섯을 강아지에게 먹이다니 말이에요.”황석훈은 일부러 비꼬더니 몸을 돌려 천이경의 집에서 나갔다.천이경 부부는 완전히 절망에 빠졌다....천이경 부부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소채은은 윤구주를 데리고 그들의 집에서 떠났다.그들은 조용히 거리를 거닐었다.“구주야, 미안해! 오늘 너랑 같이 우리 외당숙을 만나고 싶었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소채은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윤구주는 그녀가 자신을 위로하려 한다는 걸 알고 말했다.“채은아, 괜찮아. 난 이런 일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아.”“휴, 나도 생각지 못했어. 아저씨는 아주 착한 사람인데 어쩌다가 저런 여자랑 결혼한 건지.”소채은은 탄식했다.“다들 각자의 삶의 방식이 있는 거지. 우리는 신경 쓰지 말자.”윤구주가 오늘 일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자 소채은은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구주야, 오늘 나랑 같이 와줘서 고마워. 그러니까 오늘은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좋아!”그렇게 소채은은 윤구주의 팔에 팔짱을 끼고 맛있는 걸 먹으러 갔다.서남에는 맛있는 음식이 많았고 그들이 있는 곳은 맛집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그곳에 도착한 뒤 소채은은 아주 근사한 레스토랑을 찾았다.그 레스토랑의 이름은 미향각이었는데 이름부터 예스러운 멋이 있었다.게다가 건물도 서남의 색이 짙게 담긴 독특한 건물이었다.“구주야, 우리 여기서 먹을까?”소채은은 예스러운 멋이 가득한 미향각을 가리키며 말했다.“좋아.”말을 마친 뒤 두 사람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미향각으로 걸어갔다.미향각 문 앞에 도착해서 보니, 문 앞에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무여 명의 건장한 경호원들이 미향각에서 나와 대스타 은설아를 경호하러 갔다.그 광경에 소채은의 눈빛이 빛났다. 그녀는 먼 곳에 있는 차를 보려고 발꿈치를 들면서 말했다.“와! 대스타 은설아 씨가 식사하러 온 거구나. 왜 대관 됐나 싶었는데.”윤구주는 자기가 구했던 연예인이 이곳에 밥을 먹으러 올 줄은 몰랐다.그는 미소 띤 얼굴로 소채은에게 말했다.“채은아, 너 저 연예인 알아?”“당연하지! 게다가 난 은설아 씨 엄청난 팬이라고!”소채는 들뜬 얼굴로 말하면서 발꿈치를 들어 먼 곳에 멈춰 선, 사람들에 둘러싸인 차를 바라보았다.소채은이 은설아의 팬이라는 말을 들은 윤구주는 코를 만지작댔다.“구주야, 넌 모르겠지만 은설아 씨 엄청 인기 많아. 은설아 씨가 찍은 영화들 국내에서도 엄청나게 흥행했고 이젠 할리우드에도 진출할 예정이래. 가장 중요한 건 은설아 씨가 다른 연예인들과는 다르게 가식적이지 않다는 거야. 인성도 그렇고 일하는 스타일도 그렇고, 그래서 국내 팬들이 엄청 많아! 작년에 있었던 국기 사건 기억해?”윤구주는 고개를 저었다.“작년 국제 영화제 때 주최 측에서 외국인들에게 잘 보이려고 은설아 씨에게 영어로 얘기해달라고 했거든? 그런데 은설아 씨가 어떻게 한 줄 알아?”소채은이 말을 이어갔다.“어떻게 했는데?”윤구주가 질문했고 소채은이 대답했다.“은설아 씨는 주최 측의 요구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어로 얘기했어. 더욱 대단한 건 은설아 씨가 소감까지 다 얘기한 뒤 우리나라 국기를 몸에 두르고 위풍당당하게 자리를 떴다는 거야!”그 말을 들은 윤구주는 눈을 빛냈다.윤구주는 연예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심지어 기차역에서 은설아를 구했을 때도 그녀와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그러나 소채은의 얘기를 들어 보니 은설아가 조금 달리 보였다.적어도 애국심만큼은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강한 듯했다.윤구주는 은설아를 태운 차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대스타 은설아가 도착하자 거리가 꽉 막혔다.
은설아가 차에서 내리자 근처에 있던 팬들은 열광했다.심지어 미향각 문 앞에 서 있던 소채은까지 흥분해서 발꿈치를 들고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다.“구주야, 어서 봐. 은설아 씨가 나왔어! 어머, 정말 너무 예쁘다. TV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예쁜 것 같아!”소채은은 들뜬 얼굴로 말하면서 휴대 전화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은설아의 사진을 찍었다.윤구주가 말했다.“채은아, 너 은설아 씨가 그렇게 좋아?”“응, 나 은설아 씨 진짜 엄청 좋아해!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연예인이 바로 은설아 씨야!”소채은이 말했다.윤구주는 그 말을 듣고 말했다.“네가 원한다면 내가 잠시 뒤에 만나게 해줄게.”“뭐?”소채은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줄로 알았다.“잠시 뒤에 은설아 씨랑 만나게 해줄게.”윤구주는 웃으며 말했다.그러나 소채은은 그 말을 듣더니 손을 들어 윤구주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구주야, 너 열 나는 거 아니지?”“아니, 왜 그래?”“어디 아픈 것도 아닌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은설아 씨가 얼마나 인기 많은 대스타인데. 국내 팬들도 엄청 많다고. 왜 나 같은 평범한 사람과 만난다는 거야?”소채은이 중얼거렸다.윤구주는 자신이 그녀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다고 말할 생각이었다.그러나 그는 결국 말하지 않았다.윤구주는 그저 미소 띤 얼굴로 사람들에 둘러싸인 은설아를 바라볼 뿐이었다.곧 은설아는 경호원들의 경호를 받으며 미향각으로 향했다.주변에 팬들과 경호원들이 너무 많아서 윤구주는 은설아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전혀 없었다.은설아는 미향각으로 들어갔고, 십여 명의 경호원들이 문 앞에 서서 열광하는 팬들을 막았다.“휴, 오늘 은설아 씨가 이곳을 대관했나 봐. 구주야, 미안해. 오늘은 여기서 먹지 못하겠다.”소채은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윤구주는 웃으며 대답했다.“사실 이 안에 들어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응? 여긴 이미 대관 됐는데? 게다가 밖에 경호원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떻게 들어간다는 거야?”소채은은 어리둥절했다.
매니저의 말에 은설아는 아름다운 얼굴을 들어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다.“난 그 사람들이랑 식사하고 싶지 않아.”매니저는 그 말을 듣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설아야, 네 마음 나도 이해해. 그렇지만 천음 엔터에서 우리 새로 찍는 영화에 투자했고 오늘엔 서남 상회 회장님과 시장님도 왔으니 네가 가야 하지 않겠어?”“내가 얘기했지. 난 그 사람들과 식사하고 싶지 않다고!”은설아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뚱뚱한 매니저는 조금 무안했다.그녀는 은설아를 힐끗 보며 말했다.“그래... 일단 쉬어. 내가 그 사람들에게 얘기할게.”말을 마친 뒤 뚱뚱한 매니저는 떠났고 은설아 혼자 화장실에 남았다.사실 오늘 이 식사 자리는 조금 전 그 뚱뚱한 매니저가 마련한 것이었다.은설아는 이런 식사 자리를 가장 혐오했다. 그런데 뚱뚱한 매니저는 그녀가 외출하고 나서야 오늘 함께 식사해야 할 상대가 천음 엔터 사장이라고 얘기했다.은설아는 뚱뚱한 매니저가 그녀의 신분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런 생각이 들자 은설아는 짙은 혐오감이 들었다.은설아 혼자 외롭게 거울 앞에 서 있을 때 갑자기 그녀의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누구예요?”은설아는 바짝 긴장하며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어느샌가 훤칠한 남자가 그녀에게서 2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어?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죠...?”준수한 얼굴의 남자가 윤구주임을 알아 본 은설아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윤구주가 저번에 기차역에서 그녀를 구한 뒤로 그녀는 줄곧 윤구주에게 보답하고 싶었다.그런데 오늘 이곳에서 그를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은설아 씨, 또 만났네요.”윤구주가 입을 열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윤구주를 본 은설아는 들떴다.“이곳에 밥 먹으러 왔다가 우연히 은설아 씨를 봐서요. 인사 나누려고 왔죠.”윤구주는 솔직히 대답했다.은설아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그렇군요. 어느 테이블에서 식사하는 건가
윤구주가 누구냐고 묻자 은설아는 황급히 말했다.“제 친구예요.”친구라는 말에 민머리 남자는 싸늘한 눈길로 윤구주를 힐끗 본 뒤 말했다.“은설아 씨, 저희 도련님께서는 은설아 씨를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 당장 그곳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희가 난처해집니다.”민머리 남자가 협박하듯 말하자 은설아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그래요, 알겠어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서둘러 품 안에서 금빛을 반짝이는 명함을 꺼내 윤구주에게 건넸다.“제 명함 가져가서 제 경호원이랑 얘기하면 들어올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잠시 뒤에 찾아갈게요.”윤구주는 명함을 받은 뒤 인사했다.“고마워요..”그리고 은설아는 민머리 남자를 따라갔다.민머리 남자를 보며 윤구주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미향각 문 앞.이때 그곳은 팬들로 붐비고 있었다.문 앞에 서 있던 십여 명의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은 바짝 경계했다. 혹시라도 팬들이 미향각 안으로 쳐들어올까 봐서 말이다.소채은은 여전히 원래 자리에 서서 윤구주를 기다리고 있었다.“채은아!”윤구주는 어느샌가 그녀의 뒤에 도착했다.“구주야, 어디 갔다 온 거야?”소채은이 물었다.“그냥 한 번 둘러봤어. 참, 채은아. 아까 여기 들어가서 밥 먹고 싶다고 했지? 그리고 은설아 씨도 보고 싶다고 했었고.”윤구주가 물었다.“그랬지.”“그렇다면 날 따라 와!”윤구주는 그렇게 말하면서 소채은의 손을 잡고 미향각 문 앞으로 걸어갔다.윤구주가 정말로 자신을 데리고 미향각으로 향하자 소채은은 당황스러웠다.“구주야, 뭐 하는 거야?”윤구주가 말했다.“안으로 들어가서 식사하려고 그러지.”소채은은 그가 어떻게 들어가려고 하는지 의문이었다.윤구주는 어느샌가 그녀를 데리고 문 앞에 도착했다.두 사람이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문가의 경호원이 그들을 막아섰다.“멈추세요. 오늘 이곳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그 경호원이 그렇게 말하자 윤구주는 금빛 명함 한 장을 꺼냈다.“이게
그 말을 들은 소채은은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채은아, 네가 주문해!”윤구주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소채은은 무척 기뻤다.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더니 메뉴판을 들고 주문하기 시작했다.주문을 마친 뒤 소채은은 그제야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구주야, 대스타 은설아 씨 왜 우리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걸까? 너 뭘 했길래 저 사람들이 우리를 안으로 들여보낸 거야?”윤구주가 말했다.“내가 은설아 씨랑 아는 사이라고 하면 믿을 거야?”“뭐? 은설아 씨를 안다고? 말도 안 돼! 기억을 잃은 네가 언제 은설아 씨를 알게 된 거야?”소채은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윤구주가 말했다.“믿지 않는다면 그냥 흘려들어.”소채은은 확실히 믿지 않았다.그녀가 보기에 윤구주는 기억을 잃은, 자동차 정비와 싸움을 할 줄 아는 것 외엔 다른 건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그런데 갑자기 그가 대스타를 안다고 하니 쉽게 믿을 수 없었다.그러나 윤구주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잠시 뒤, 종업원이 맛있는 음식들을 들고 왔다.그것 외에도 직원은 몇천만 원짜리 와인 라피트를 두 병 가져왔다.“천천히 드세요.”직원이 와인을 들고 와서 말했다.“네? 전 이렇게 비싼 와인을 시킨 적이 없는데요?”몇천만 원짜리 와인을 본 소채은은 서둘러 말했다.직원이 말했다.“이건 위층에 계시는 은설아 씨께서 특별히 선물로 드리는 겁니다. 공짜예요!”‘뭐라고?’소채은은 입을 떡 벌렸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또 은설아 씨가 사주는 거라니? 대체 무엇 때문에? 설마 정말로 구주가 은설아 씨를 아는 걸까?’소채은은 고개를 들어 턱을 괸 채로 눈앞의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윤구주는 소채은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걸 보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채은아, 왜 그렇게 쳐다봐?”“헤헤, 내 남자가 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길래 은설아 씨가 우리에게 이렇게 잘해주는지 궁금해서 말이야.”윤구주는 웃었다.널따란 2층에는 윤구주와 소채은만이 조용히, 편하게 점심을 먹고 있었다.식사를
거나하게 취한 은설아는 룸 안으로 들어와서 윤구주를 바라보았다.“음식은 입맛에 잘 맞으세요?”소채은은 당황했다.윤구주는 곧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그러면 다행이네요. 혹시라도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저한테 예기해 주세요! 혹시 제가 술 한 잔 권해도 될까요? 그래도 제 목숨을 구해주신 은인이신데.”얼굴이 빨갛게 된 은설아는 술잔을 들고 윤구주에게 말했다.윤구주는 거절하지 않고 테이블 위 와인잔을 들어 은설아와 한잔했다.옆에 있던 소채은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대스타 은설아가 윤구주를 찾아와서 그에게 술을 권하다니, 게다가 그를 은인이라고 불렀다.이게 무슨 상황인 걸까?술을 다 마신 뒤 윤구주는 그제야 은설아에게 말했다.“은설아 씨, 이쪽은 제 여자 친구 소채은이에요. 은설아 씨 팬이라서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네요. 그리고 사인을 받을 수 있을까요?”은설아는 그 말을 듣더니 웃으며 말했다.“그럼요!”그녀는 그렇게 대답한 뒤 고개를 돌려 소채은을 바라보았다.처음으로 대스타를 가까이서 보게 된 소채은은 은설아가 자신을 바라보자 너무 기뻤다.“은설아 씨... 안녕하세요! 전 소채은이라고 해요. 전 은설아 씨 팬이에요. 전 은설아 씨를 첫 작품 때부터 좋아했어요!”소채은은 은설아 앞에 서자 말도 더듬었다.은설아가 말했다.“소채은 씨라고요? 반가워요! 소채은 씨, 정말 아름다우시네요.”은설아는 참지 못하고 칭찬했다.은설아의 말대로 비록 소채은은 은설아 만큼 꾸미지는 않았지만 외모만 보면 전혀 그녀에게 꿀리지 않았다.대스타에게 칭찬을 받은 소채은은 무척 신났다.그렇게 은설아는 윤구주가 있는 룸에 앉아서 소채은과 수다를 떨었다.소채은은 팬이라서 은설아에게 이것저것 물었고 가끔은 언제 새 영화를 찍냐고 묻기도 했다.대스타인 은설아는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폼을 잡지 않았고 오히려 진지한 얼굴로 소채은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했다.윤구주는 그런 그녀의 점이 마음에 들었다.그렇게 약 30분 뒤, 사람 몇 명이 위층에서 내려와 윤
단 한 걸음,그 한 걸음만 넘기면, 그는 곧 성급 바로 직전 경지에 이른다.그리고 그 마지막 문턱을 박살내는 순간 반쯤 성인이 된 경지, 반성급이다!지금 이 자리, 그 반성급 경지에 선 자는 바로 인마라고 불리는 무명이었다.“과연... 화진의 인황, 구주왕이라 불릴 자격은 있군. 하지만 너도 알겠지. 지금 네 수준으론 몸을 직접 이 판에 던지지 않는 이상 나랑 맞붙을 자격조차 없어. 네가 그 잘난 원신출체를 어떻게 하겠다는지 구경이나 해보자고. ”무명이 입꼬리를 비틀며 코웃음쳤다.팔기귀일에 도달한 윤구주의 전투력은 이미 황의 지경을 뛰어넘었다.하지만 무명과의 경지 차이는 여전히 너무 컸다.실력은 분명 엄청났지만 격이 다르였다.지금 상태로도 보통의 황자의 경지까지 초월한 상태지만 무명을 상대하긴 아직 한참 부족했다.심지어 무명이랑 싸울 실력은커녕 참마검조차 손에 제대로 못 잡는 게 현실이었다.“팔기로 부족하다면... 제구기는 어때? 구기:적선!”부우우우웅!윤구주의 온몸을 하얀 선기가 감싸는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웃고 있던 무명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뭐라고? 이건 네 따위가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잖아! ”그 순간, 무명조차 숨을 삼켰다.이건 상식의 틀을 깨부수는 광경이었다.근대에 들어서면서 도에 대한 수련는 사실상 약해졌다.그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세상에 흐르는 천지영기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봉신전쟁 당시, 상상을 초월하는 영기가 소모됐고 그 전쟁이 끝난 후 곤륜구역은 세상의 영기 90%를 신계에 봉인해버렸다.거기서 마음껏 영기를 탕진한 것도 모자라 바깥의 산수들까지 무분별하게 빨아들인 탓에세상의 영기는 걷잡을 수 없이 줄어들고 말았다.결국 세상은 고위 수련자가 태어나기 어려운 구조가 되었다.그래서 화진에선 500년에 한 번 황자가 나올까 말까 할 정도이고 황자의 경지에 도달하는 건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었다.임정설이 황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처음부터 그가 강해서가 아니라 윤구주를 돕기 위해 왕
마기가 검종 제자들의 혼백에 침투하자 그 순간 제자들의 몸에서 시커먼 마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이를 목격한 장인 대진인은 망설임 없이 즉시 결단을 내렸다. 오염된 제자들을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정화해 버린 것이다.“모든 제자들아, 입문 첫날 내가 분명히 말했을 것이다. 서요산은 찬란한 성지 화진 정통의 계승지다. 정은 사악함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정은 사악함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서요산 제자들이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는 도의였다.입문과 동시에 깨달음을 얻은 그들은 언젠가 반드시 도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저 화진 정통의 수호자가 되기 위해서였다.그 순간 진요탑 외곽에서는 7대 진인을 중심으로 전 종문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진요탑을 사수하고 있었다.하늘을 뒤덮을 듯한 마기의 기세는 점점 거세져 어느새 검종의 경내 전역을 삼켜버렸다.검종 제자들은 마기를 막아내면서도 동시에 진요탑의 결계를 유지해야 하는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정도를 지키는 일은 그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투쟁이었다.산 아래 상황도 마찬가지로 치열했다.온갖 요괴와 귀신들이 들이닥치는 가운데 임정설은 황운을 등에 업고 이씨 가문의 국운을 모두 모아 홀로 수백만 마기를 막아서고 있었다.백호는 마인으로 완전히 변신해 광란의 충격 속으로 몸을 던졌고, 스스로 마를 품은 채 적진을 난도질했다.청해는 천뢰신술을 펼쳐 수만 개의 천뢰를 무기로 변환시켜 온갖 사도와 악귀를 쓸어내기 시작했다.그 무렵 진요탑 내부에서 풍무극의 기세는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구주야, 내 한계에 도달했다. 이제 내 500년 수련의 혼을 너에게 바치겠다."”풍무극의 준비는 이미 완료되었다.그는 미리 준비해 둔 제천 법기를 꺼냈고 전법이 발동되는 순간 그의 육신은 산산조각 부서졌다.그의 정기와 천지 정기를 모두 품은 찬란한 진신 영혼은 한 자루의 참마검으로 변해 윤구주 앞에 떠올랐다.“풍 종주...” 윤구주는 입술을 깨물었다.슬프고 아쉬
윤구주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새로운 국운의 기운이 그의 발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그가 진요탑의 문에 도달했을 무렵 모든 국운이 윤구주에게 집중되었다.윤구주의 주변으로는 천인신광이 펼쳐져 있었다.이 순간만큼은 그가 천지의 주재자 화진의 영겁을 관통한 유일한 존재였다.윤구주는 홀로 진요탑 안으로 들어섰다.겉보기에 거대한 산 같았던 진요탑의 내부는 참혹한 말세의 풍경이었다. 땅은 끝없이 펼쳐진 용암으로 뒤덮여 있었고 하늘에서는 강줄기가 거꾸로 흘러내리고 있었다.불과 물이 충돌할 때마다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격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거꾸로 흐르는 강물 위에 한 노인이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백발이 성성한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서요산 검종의 종주였다.밖에서 보이던 강건한 중년의 모습은 단지 화신에 불과했으며, 본체는 수백 년 전부터 이 진요탑에서 마인을 봉인해 왔다.서요산 검종 종주는 극도로 지쳐 있었고 이제는 마지막 호흡으로 버티고 있었다.“드디어 왔구나.” 서요산 검종 종주는 허약한 전음으로 말을 건넸다.“오백 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종주님.” 윤구주는 고개를 숙였다.풍무극은 현 서요산의 종주이자 당대 최고의 영웅, 화진 제일 검으로 불리던 남자였다.원래는 풍속을 다루는 수련자로 젊은 시절엔 검 하나로 화진을 호령한 사내로 알려졌다.그의 검은 아무도 궤적을 볼 수 없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500년 전 마인이 봉인되고 서요산의 조사가 승천한 후, 풍무극은 서요산의 거자로서 종주의 자리를 이어받았다.그날 이후 진요탑에 몸을 묻고 마인과의 싸움을 500년간 지속해 왔다.풍을 다루던 그였지만 지속적인 봉인을 위해 익숙하지 않은 수속까지 수련하며 지금까지 버텨왔다.그가 마도에 빠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이었다.“그래도 괜찮다. 다행히 이 시대에 또다시 인황이 나왔으니. 화진은 연달아 두 명의 인황을 배출했다. 임정설이 인황에 등극한 지금 쇠락하던 이씨 가문의 국운이 다시 살아났다. 그가 천지의
마인이 출현하면 곤륜 구역조차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서요산 검종의 진요탑은 이미 오백 년 동안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이는 곧 그 마인이 오백 년 동안 진요탑 안에 봉인되어 있었음을 의미했다.“우리가 가진 유일한 이점은 저 마인이 지난 오백 년간 수련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오백 년 동안 분명 무언가를 '깨달았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정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사도가 존재하는 법입니다. 만약 그가 이곳을 벗어나 다시 한번 돌파에 성공하여 진정한 성인의 경지에 오른다면…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 우리 종문의 선대 종주께서 이 마인을 직접 봉인하셨습니다. 하지만 선대 종주께서는 진요탑만으로는 그를 완전히 봉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아셨지요. 그래서 마침내 구천으로 비상하셔서 바깥 세계에 존재한다는 신기를 찾기 위해 떠나신 것입니다.”장인 대진인이 비밀을 털어놓자 임정설은 왜 그 옛날 서요산 검종을 창립한 선조가 갑자기 사라졌는지 이해했다.“구천을 비상했다고? 전설 속 그 이야기 설마 전부 사실이었단 말인가? 이 세상 위에 더 위대한 세계가 있다는 건가?” 임정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들은 바로는 성인이란 육지에서 신선이 된 자를 이르는 말이고 준성은 그보다 한 단계 아래 반쯤 신선이 된 존재라 하더군요. 우리보다 더 풍부한 영기의 세계가 과연 존재하는지는 이 몸 역시 감히 짐작할 수 없습니다.” 장인 대진인은 고개를 저었다.그때였다.진요탑이 거칠게 흔들렸고 모든 호법 제자의 얼굴이 딱딱해졌다.수련이 부족한 제자 몇몇은 그 자리에서 마기의 침식으로 피를 토했다.“모든 제자에게 고한다. 나와 함께 현문을 수호하라.” 장인 대진인이 친히 자리에 앉아 온 종문의 기운을 모아 마인을 억제하기 시작했다.마인은 일시적으로 제압되었지만 산 밖의 요괴들과 악귀들은 마기의 부름을 받아 사방팔방에서 서요산으로 몰려들고 있었다.임정설은 이제 자신이 이곳에 온 진짜 이
“저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를 죽여야 합니까? 저자의 기운이 이토록 흉악한데 성수의 혈기로 진압할 순 없습니까?” 백호는 이미 싸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안 된다. 너희 네 명이 함께라면 잠시나마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너희는 그저 성수의 정혈을 가졌을 뿐이니 마인을 완전히 없애려면 성수가 직접 나타나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 성수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윤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을 마친 윤구주는 곧장 진요탑 쪽으로 향했다.백호와 임정설, 청해가 함께 가서 돕고자 했으나 장인 대진인이 그들을 가로막았다.“이 마인은 오직 구주만이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국주님, 곧 전투가 시작될 터인데 서요산의 진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호법의 중임을 몇 분께 맡기겠습니다.”장인 대진인이 임정설에게 경건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저 마인을 죽이고야 말겠다.” 임정설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황자의 위엄을 한껏 드높였다.화진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면 임정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하지만 마기가 몰려와 서요산 전체를 뒤덮고 세상이 오직 흑백 두 가지 색깔만으로 변해버리며 그 끔찍한 살기가 강림했을 때 임정설마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떨렸다.“이 마인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이야.” 임정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기로 가득 찼고 윤구주마저 그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진요탑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실체가 되어 넘쳐흘렀다. 마기가 나타나자 서요산을 지키는 모든 검종 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어떤 제자는 순간적으로 십여 년을 늙어버렸다.수련이 부족하면 수명으로라도 채워야 하는 참혹한 상황이었다.웅웅.하늘에는 먹구름이 밀집했고 그 안에서 요괴의 번개가 끊임없이 터졌다.“이젠 영기조차 요기로 변하고 있다. 풍수 비술로 보건대 머지않아 이곳에서 요마가 출현하겠구나.” 임정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요산 외부에서 짙은 요기
도가는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대단히 중히 여긴다.그의 한 번의 인연, 한 번의 생각은 곧 만백성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윤구주가 정상에 오르자 앞서 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서요산 검종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이 경배한 대상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구주의 저하, 화진의 인황, 오방 천지의 주재자였다.“모두 일어나십시오. 제가 오늘 서요산에 온 이유는 오직 진요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진요탑 안의 마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문 씨 세가의 역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마인을 죽여야만 문 씨 세가의 야심도 함께 근절할 수 있습니다.”윤구주는 서요산 검종의 모든 제자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이번 서요산 행차의 목적은 바로 문 씨 세가의 역심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검종 제자들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고 모두가 금정을 지나 뒷산으로 향했다.뒷산에 막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후산 중앙에는 높이 오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 서 있었는데 그 산은 무려 구백구십구 개의 쇠사슬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이 쇠사슬은 그저 평범한 사슬이 아니었다. 절반은 땅속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 높이 떠올라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이런 수준의 봉인이라면 설령 윤구주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다고 해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처럼 견고한 고진마저 지금은 마인의 사기로 조금씩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는 영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이었으나 지금은 온 서요산이 마인의 기운에 물들어 음침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 강렬한 악기운을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솟구치는 사기를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최근 몇 대에 걸쳐 입종한 서요산의 제자들은 이런 마인의 사기와 요마의 위협 속에서 수련해야 했다.천지의 영기조차 마인의 기운에 오염되어 수련에 큰 지장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남은 현
이 말을 듣자 모든 이들은 천 년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그 성인이 바로 서요산 검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짐은 서요산 검종의 선대 종주께서 우화등선하셨다고만 들었는데 그저 떠도는 신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것이었군.” 임정설이 깊은 감탄과 함께 말했다.구백 계단 윤구주는 이미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백삼십 계단 사십 계단을 오르면서 윤구주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욱 가벼워졌고 그가 세우는 기록은 사람들의 상식을 계속해서 뒤흔들었다.구백팔십 계단을 지나 정상까지 겨우 십여 계단만 남은 그 순간 윤구주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구백구십구 계단에 이르러 결국 완전히 멈추었다.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모두가 숨을 죽이고 윤구주를 지켜봤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험일 터였다.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십여 분을 견뎌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다시 계단을 오를지 초조하게 기다렸다.마침내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습니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포기하지요.”말을 마치고 계단에서 내려서는 순간 청석 계단 아래에서 강력한 영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고 곧바로 서요산을 감싸던 어둠의 기운을 깨끗이 몰아냈다.오랫동안 음울했던 서요산 상공은 순식간에 환해졌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서요산의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져 넋을 잃었다.그제야 그들은 윤구주가 왜 그토록 여유롭게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서요산의 청석 계단이 가진 진법의 힘을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었다.“참으로 대단하신 신위군요! 우리 서요산의 청석 진법마저 제압하셨다니! 마지막 한 걸음을 분명 넘으실 수 있었을 텐데 혹시 강제로 넘었다가 진법이 견디지 못해 영기가 새 나가고 진법이 무너져 진요탑까지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신 건 아닌가요?” 장인 대진인이
도법의 깊이는 워낙 심오해서 임정설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쉽게 말씀드리자면 구주는 천지의 운기를 완전히 장악한 데다가 하늘이 직접 영광을 내리신 거죠.” 장인 대진인이 말했다.임정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한 듯 말했다.“대진인의 말은 윤구주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는 뜻인가?”“맞습니다. 우리 화진 사람들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면 본심에 따라 도법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는 다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윤구주는 분명 큰 복을 타고났지만 그 엄청난 복을 감당할 힘도 필요합니다.”대진인이 설명했다.말이 끝날 무렵 윤구주는 이미 육백삼십 계단을 거뜬히 올라와 있었다.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더욱 확고한 걸음으로 계속 전진했다.그의 발걸음마다 천지의 기운이 응축되었다.어느 순간 서요산의 계단조차 윤구주의 기세를 가두지 못했다. 그는 마치 천지를 밟으며 오르는 듯했다.곧이어 그는 칠백 계단마저 돌파했다.칠백 계단이란 천 년 전 서요산의 전성기에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지금 만약 윤구주가 구주왕이 아니라 일반 수련자였다면 이 기록만으로 서요산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다. 만일 윤구주가 서요산에 입문을 원했다면 서요산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그를 키웠을 것이며 서요산 검종의 다음 종주 자리는 당연히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칠백 계단에 이르렀음에도 윤구주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칠백오십 계단 팔백 계단 팔백오십 계단!그는 끊임없이 정상의 기록을 깨며 전설을 써 내려갔다.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윤구주 앞에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장인 대진인조차 감히 그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겨우 칠백 계단에 그쳤으니 팔백 계단을 오른 사람을 감히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마치 천지를 흔들어 이 강산을 뒤엎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그리고 마침내 구백 계단에 이르렀다.“구백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