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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만보운단
주서용이 흠칫 놀라며 일어섰다.

“그건 규칙에 어긋나잖아.”

배진운은 한창 바삐 돌아다니는 김희영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여긴 원래 누이 자리니, 신경 쓰지 마.”

그러자 노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호통쳤다.

“진운, 소란 피우지 마라!”

배진운은 아주 당당하게 반박했다.

“조모! 오늘 잔칫상은 누이를 위해 차린 건데 오늘의 주인공으로서 당연히 여기 앉아야죠. 누이가 형을 위해서 5년이나 고생했는데, 이 자리가 뭐라고 못 앉히게 하세요? 조모는 누이가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말문이 막힌 노부인은 주서용을 내심 미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여기 앉거라. 그냥 자리인데 큰일도 아니잖아.”

미간을 찌푸리고 지켜보던 배진휘가 주서용을 막으려 했으나, 그녀에게 진 빚을 생각하고 묵인해버렸다.

배진운이 몰래 그의 반응을 살펴보더니 속으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역시 형은 지금도 누이를 좋아하고 있는 게 분명해. 나도 전에 그랬었지. 김희영은 누이한테 비교도 안 된다고!

그러고는 흐뭇하게 웃으면서 주서용의 옆에 앉았다.

배진휘는 늘 아주 자연스럽게 주서용에게 물과 국물을 떠주는 등, 무척이나 세심하게 돌보았다.

그동안 그렇게 살뜰히 보살핀 걸 온 식구들이 다 알았기에, 지금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주서용은 그런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때때로는 애정이 담긴 눈빛으로 배진휘를 쳐다보기도 했다.

마침 일을 마친 김희영이 돌아오자마자 두 사람이 다정하게 쳐다보는 모습을 목격하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의 자리에 앉은 주서용을 보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노부인이 당황해하더니 미안해하며 설명했다.

“오늘 잔칫상은 서용을 위해 준비한 것이니 희영은 오늘만 진휘 옆에 앉거라.”

곁에 있던 옥정은 눈물이 핑 돌았다.

‘이건 자리 문제가 아니잖아. 이런 식으로 번마다 부인이 양보해야 하나? 주서용이 나리를 구했다는 이유로 부인이 억울함을 당해야 해?’

이 순간 부인 대신 나서지 않는 나리가 원망스러웠다.

옥정이 기대하는 눈길로 쳐다봤지만 배진휘는 어떤 태도 표시도 하지 않고 여전히 주서용에게 음식을 집어 주었다.

울컥해진 옥정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몰래 눈물을 닦았다.

정작 김희영은 노부인에게 반박하지 않고 받아주었지만 배진휘의 곁에 앉지 않고 배진연과 자리를 바꾸었다.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배진휘는 술잔을 든 채 굳은 상태로 힐끗 쳐다보았다.

‘지금 내게 화난 건가?’

평소 다정하고 이해심이 많던 그녀가 며칠 사이에 왜 이토록 싸늘해졌는지, 대체 무슨 일로 삐졌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얼굴이 시커멓게 상기되어서 술로 가득 채운 술잔을 단번에 들이켰는데, 술 기운이 온몸에 확 퍼진듯 저도 모르게 속이 더더욱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잔치가 시작되자 식구들은 저마다 술을 권하며 즐겁게 마시기 시작했다.

마침 조 어멈이 탕약 한 그릇을 들고 주서용의 곁에 다가갔다.

“아가씨, 탕약을 마실 시간이에요.”

주서용은 고맙게 받고는 탕약을 들고 단숨에 마셨다.

곁에 있던 배진운은 눈치 빠르게 달달한 음식을 집어 그녀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누이, 달달한 걸 먹으면 쓴맛이 사라져.”

주서용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다과를 들고 먹으려는 순간, 뜨거운 액체가 코에서 흘러나와 하얀 접시에 뚝뚝 덜어졌다.

깜짝 놀란 배진운이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코를 틀어막았다.

“누이! 왜 코피를 흘려?”

“여봐라! 어서 의원을 불러와!”

갑작스러운 상황에 하인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노부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냐? 잘 있다가 왜 갑자기 피를 흘려?”

배진휘가 벌떡 일어서서 주서용의 상황을 살피었다.

“오라버니, 나 무서워!”

주서용이 그의 손을 잡더니 마치 연약한 여인이 곧 죽어가는 것처럼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배진휘는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심시켰다.

세상 다정한 모습을 지켜보던 김희영은 입술을 오므리고 눈을 감아버렸다.

사랑하는 여인과 사랑하지 않는 여인을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녀에게 단 한 번이라도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대한 적이 없었다.

코피를 흘리는 주서용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배진운은 갑자기 무엇인가 떠올랐는지 버럭 화를 내며 김희영에게 삿대질을 했다.

“저 여인이에요! 저 여인이 탕약에 손을 대서 누이를 해친 것이 분명해요.”

그 한마디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더니 모두가 일제히 김희영을 쳐다보았다.

당황한 옥정이 미간을 찌푸리며 바로 반박했다.

“둘째 도련님, 무슨 소리하세요? 서용 아가씨가 코피 흘리는 게부인과 무슨 상관인데요?”

배진운이 시큰둥하게 웃으면서 설명했다.

“누이는 방금 조 어멈이 가져온 탕약을 마시자마자 코피를 흘렸어. 이 탕약에 백 년 산 인삼이 있는데, 누가 손을 댔는지 굳이 물어봐야 알겠어?”

조 어멈이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눈빛을 반짝이더니 이내 맞장구를 쳤다.

“둘째 도련님 말씀이 맞아요. 탕약에 인삼이라는 변수만 있습니다. 나리, 즉시 사람을 보내 조사해야 합니다.”

주서용은 고개를 숙여 검붉은 피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 인삼에 독이 있었다면 검보라색 피를 흘려야 하는데, 피 색깔이 이상해.’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과는 관련이 없을 거예요. 어쩌면 제가 몸이 너무 허약해서 코피를 흘렸을 수도 있어요.”

코피가 지금도 흘러서 손수선이 흠뻑 젖을 정도였다.

노부인은 검붉은 피를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닦아주었다.

“몸이 허약한 데 인삼은 최고 약재야. 내 몸이 안 좋을 때도 이렇게 피를 흘리지 않았어.”

그녀는 가슴이 너무 아픈듯 목소리까지 울먹거렸다.

주서용이 태어나서부터 어엿한 아가씨로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았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노부인은 아들을 잃은 슬픔에 빠져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나중에 주서용이 큰손자를 위해 죽은 것이 너무 안타까워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결국 배진휘가 무릎을 꿇고 제발 자기 삼남매를 위해 버텨달라고 애원한 바람에, 이를 악물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었다.

그러니 주서용이 살아 돌아온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주서용은 노부인에게 있어 되찾은 보물이나 마찬가지여서 누가 해친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이상한 것을 발견할 겨를도 없이 심문하듯 김희영에게 따져 물을 뿐이었다.

“희영아, 솔직하게 말해. 네가 인삼에 손을 댔느냐?”

김희영은 노부인이 자신을 의심할 줄 몰랐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조모도 제가 그랬다고 생각하세요? 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모르세요? 제가 왜 서용 아가씨를 해치겠어요?”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노부인은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망설이더니, 이내 혼란스럽던 머리가 맑아졌다.

‘코피를 흘리는 건 인삼과 관련이 없어. 어쩌면 서용의 말처럼 몸이 너무 허약해서 인삼을 받아들이지 못해 이런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어.’

그때 배진운이 눈빛을 반짝거리더니 김희영에게 망신을 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부러 애매모호하게 말했다.

“그동안 제가 누이가 인삼 탕약을 마실 때마다 관찰했는데 안색이 점점 초췌해졌어요. 역시 여인들은 연적이 나타나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네요. 어쩌면 내가 잘못 짚었을 수도 있겠지만, 혹시 알아요? 사람 마음이 쉽게 변해서 이런 짓을 벌였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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