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에서 빛이 번쩍였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와 현충의 어깨를 베어냈다.‘천인의 경지란 이런 건가?’그는 순간 자신이 천인의 경지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며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었다.역시 천인의 경지란, 이리 쉽게 도달할 리 없었다.“끄윽!”중상을 입은 현충이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저주한다! 평생 네가 불행하길 저주한다!”현충은 이 말을 끝으로 눈을 뒤집으며 숨을 다했다.무리안을 휘어잡았던 전설적인 인물이 그렇게 염구준의 손에 저물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가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먼저 염구준을 건드리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었으니까.“후….”염구준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전주님!”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달려왔다.“걱정할 것 없어. 좀 지친 것뿐이지, 잠깐 쉬면 괜찮아질 거야.”염구준이 그들을 향해 손을 들어올리며 다가오는 것을 제지했다. 지금 몸 주변에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체가 명확해지기 전까진, 홀로 있는 편이 나았다. 처음 이 기운을 감지했던 게 현충이 죽기 직전 저주를 퍼부었을 때였으니까.“저주의 힘!”주술사였던 수안이 상황을 알아차리곤 먼저 입을 열었다.“음? 너는 뭔가 알고 있는 것 같네. 설명해봐.”염구준은 흥미로웠다.“쌍두성사, 사실 이 뱀에겐 또다른 별칭이 있습니다. 불운의 뱀, 그래서 대부분 다가가는 것조차 꺼려합니다. 어쩌면 현충이 쌍두성사의 힘을 흡수하면서 이것도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있어요.”수안은 솔직하게 자신이 아는 것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발생할 수 있는데?”염구준이 물었다.“불운이 따라다니며, 계속해서 상상할 수 없는 재앙이 일어나게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덩달아 주변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요.”수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저주의 힘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지는 그녀도 정확히 알지
“오라버니, 거긴 절대로 가면 안 됩니다. 삼색꽃은 무리안에서 성물이라 불리고 있긴 하지만, 수백 년 동안 그 누구도 성공적으로 손에 넣었다는 기록이 없을 정도면 말 다했죠.”수안의 표정은 좀 전에 현충과 전투를 치를 때보다 더 긴장되어 보였다. 흑풍존주는 염구준을 함정에 빠뜨렸다. 알고서도 피할 수 없는 함정, 지금 그에겐 달리 해결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색꽃이 저주를 풀 수 있긴 해?”염구준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정보의 신뢰성이었다. 잠시 갈등하던 수안이 표정을 굳히며 사실대로 말했다.“이론적으론 그렇죠. 저주를 푸는데 가장 효과적인 물건이라 알려져 있으니까요.”그녀는 염구준이 위험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막고 싶었지만, 거짓말할 수는 없었다.“그렇다면 됐어. 흑충곡 지도 가지고 와봐.”염구준은 이미 결심한 듯 보였다. 그리고 그는 한번 결정한 일을 절대로 번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불운을 안고 사랑하는 가족 곁으로, 또는 지인들 곁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청용, 이 두 상자, 이제마에게 전해. 어떻게 해야 할지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거야.”“알겠습니다, 전주님.”청용이 조심스레 상자를 받아들이며 공손히 대답했다. 상자 안엔 천형의 해독제와 쌍두성사의 영단이 들어 있었다. 이어서 염구준이 다시 지시를 내렸다. “백호, 일단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들, 죽이지 말고 데려가 치료해줘. 그리고 다 나으면 화장실 청소를 시키던, 나무를 가꾸게 하든, 알아서 잔일거리 시켜.”“네, 알겠습니다!”명령을 받은 백호는 곧바로 부하들을 데리고 남은 사람들을 수송하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이들 대부분 전신전의 무서움을 직접 경험한 터라 그 누구도 반항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죽어가는 쌍두성사 뿐이었는데, 염구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한테 맞겨주세요. 제가 치료할 수 있습니다.”옆에 있던 수안이 쌍두성사를 들어올리며 염구준을 향해 기대 어린 눈빛을 보냈다. 사실 처음 쌍두성사를 본 순간부터 그녀는 이 생물이 마
이 남자의 정체는 바로 염구준이었다. 저주의 여파는 대단했다. 겨우 하루만에 그는 거지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음식을 먹어도, 물을 마셔도, 목구멍에 뭔가를 넣기만 해도 사레가 걸렸으며, 화장실 근처에만 가도 변기가 폭발하는 등, 기상천외한 불행들이 따라붙었다. 반보천인이 아닌 일반인이었다면, 진작에 어디 하나 크게 다치거나 죽었을지도 몰랐다. 저주는 정말 신비로웠다. 그 어떠한 힘에도 굴하지 않고 끝끝내 따라다녔다. 그러나 염구준은 차라리 다행으로 여겼다. 그가 만약 이 사실을 간과하고 청해시로 돌아갔다면, 가족들도 함께 피해를 봤을 게 아닌가?“선생님, 흑충곡으로 들어가실 건가요?”이때, 한 인물이 접근해왔다. 흑충곡은 굉장히 위험한 곳이었기에 팀을 이루어 떠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맞아요.”염구준이 상대를 훑어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좀 전에도 남자와 같은 인물이 접근해 왔었다. 하지만 대부분 흑충곡 안에 사는 희귀한 벌레나 곤충이나 약초를 얻는 등 가벼운 목적뿐, 그 누구도 삼색꽃을 찾으러 가려 하지 않았다. 그의 시큰둥한 태도를 본 남자가 웃는 얼굴로 말을 꺼냈다.“저희는 삼색꽃을 찾으러 흑충곡에 가려 하는데, 혹시 함께 할 의향 있습니까?”그 말을 들은 염구준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역시 하늘이 나를 버렸을 리 없어!’“저, 선생님?”상대가 굳은 채 말이 없자, 남자가 다시 재촉하듯 물었다.“가야죠! 암, 가고 말고요!”처음으로 듣게 된 삼색꽃의 이름, 염구준은 흥분에 휩싸였다. 그는 얼른 이 지긋지긋한 불운을 떨쳐내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좋아요, 그럼. 저희 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열 두시 정각까지 오세요.”남자가 환한 얼굴로 통보했다. 분명 꿍꿍이가 있는 듯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염구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무엇이든 그는 목적을 이루면 그만이었으니, 과연 누가 이용당하고 이용할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이때, 갑자기 도로에서 한 차량이 그를 향해 돌진해 왔다. 염구준은 재빨리 손을
오합지졸들을 이렇게 많이 모으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어 보였다.‘고기 방패로 사용하려는 거겠지.’염구준은 의도를 간파하고도 밝히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섞였다. 잠시 뒤, 녹독산장 대표로 보이는 사람이 나와 선두에서 사람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이번 흑충곡 진입을 위해 저희 녹독산장이 특별히 미리 안전한 길을 물색했으니, 여러분들에게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저희는….”하지만 대표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어디선가 곤충의 날개짓 소리와 함께 검은 구름이 나타났다.독침벌!윙윙거리는 날개짓 소리와 함께 검은 무리 떼를 본 순간 사람들은 직감했다. 한 번 움직이면 최소 천 마리, 공격도 굉장히 조직적이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깨닫곤 사방으로 흩어졌다. 쏘이면 즉사였다. 하지만 염구준은 태연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반보천인으로서 겨우 벌 따위에 겁을 먹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자신이 지금 저주받은 상태라는 것을.“여러분,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우리 녹독산장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처법을 가지고 있습니다.”독산이 크게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녹독산장의 위세를 보여줄 순간이었다. 부하들을 향해 손짓하는 독산, 곧 녹독산장의 사람들이 화염방사기를 들고 하늘을 나는 벌들을 향해 뿜었다. 불꽃은 벌들의 천적이었고, 화염방사기로 인해 대부분의 벌들이 소탕되었다. “하하, 보셨습니까? 저희 녹독산장이 함께인 이상, 두려워하실 거 아무것도 없습니다.”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역시 녹독산장, 생각보다 믿음직스러웠다. 그런데 이때, 잠시 숨돌리는 사이 멀리서 아까보다 더 웅장한 날개짓 소리가 들려왔다. ‘왔군!’염구준은 남들보다 뛰어난 오감을 가지고 있어 진작에 이 움직임을 예측하고 있었다. 최소 십만 마리, 제대로 벌집이 터져 나온 것 같았다.“계속 불태워라!”독산이 어두워진 얼굴로 명령했다. 매우 강하고 큰 불꽃이 독벌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염구준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흑충곡으로 출발하기도 전에 이미 인원중 3분의 1이 죽었다. “음?”가까운 곳에 연못이 있었다. 염구준의 시선이 이상하게 자꾸만 그쪽으로 향했다.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독벌이 물러간 데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그는 허리에 매달려 있는 물병을 꺼내 한 모금 수분을 보충한 뒤, 경계 태세로 전환했다. 그런데 저주에 걸린 뒤, 처음으로 사례에 걸리지 않고 물을 마셨다. 그는 의아했다. “야, 물병 좀 넘겨.”평범하게 물을 마실 수 있게 된 것에 기뻐하던 찰나, 갑자기 어디선가 무례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염구준은 못 들은 척, 상대를 무시했다. “귀먹었어?”하지만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느닷없이 가루 한 웅큼 염구준을 향해 뿌렸다. 일반인이었다면 바로 즉사할 수도 있는 독 가루였다. 그러나 염구준이 아무렇지도 않고 몸을 비틀어 피해 버리는 바람에 뒤에 있던 사람만 봉변을 당하게 되었다. 흙가루를 맞게 된 남자는 온 몸이 부식되며 죽음을 맞이했다. 이 가루는 강한 부식성을 가진 황산과 맞먹었다. 갑작스러운 상황,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와 독을 뿌린 여자를 향했다. 여자의 정체는 독산의 여자, 흑주였다.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여자였다. “계속 쳐다보면 눈알 뽑아버릴 줄 알아!”자신 때문에 사람이 죽었음에도 흑주는 아주 당당했다. 독산의 여자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던 사람들은 아무것도 못 본 척, 얼른 고개를 돌렸다. “죽고 싶어?”하지만 염구준은 달랐다. 그는 냉랭하게 여자에게 물었다. 누군가를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본인도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흑주는 그가 원하던 대로 숙이지 않자, 곧바로 옆에 있던 독산을 향해 애교를 부렸다. “자기, 저 남자가 나를 죽이려고 해. 도와줘!”독산이 있는 앞에서 이런 험한 대우는 그녀도 처음이었다. 반면, 독산은 안 그래도 순탄치 못했던 출발을 한 터라 기분이 안 좋았는데, 또 일이 발생하자 짜증이 치밀었다. “형씨, 내 여자가
퍽! 길고 단단한 검은 창이 염구준의 머리를 향해 내리쳐졌다. 하지만 그는 침착하게 몸을 돌려 발차기로 창을 걷어찼고, 창은 순식간에 공격한 남자를 뚫고 뒤에 있는 나무에 뿌리깊게 박혔다. 독산이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호위병 중 한 명이 제대로 된 공격 하나 막아내지 못하고 즉사해 버린 것이다. 상대의 무공 실력이 예상을 뛰어넘었다. “약하군, 너무 약해.”염구준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서히 독산 쪽으로 걸어갔다. “형님, 제가 고수를 몰라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상황이 불리해지자 독산은 곧바로 굴복했다.“늦었어. 처음부터 그랬어야지.”염구준이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희망을 짓밟았다. 그런데 이때, 뽈록하고 연못 쪽에서 기포가 올라왔다. ‘뭔가 나오려나?’염구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연못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에 적잖은 수의 생명체가 점점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스윽-이때, 갑자기 물속에서 작은 송아지만 한 크기의 형체가 튀어나왔다. 온몸이 진흙으로 뒤덮인, 더럽기 짝이 없는 독을 품은 개구리였다. 개구리는 첫 목표로 염구준을 노리며 길다랗고 끈적한 혀를 뻗었다. “흥, 어디 한 번 살아남아 보시지?”그 모습에 독산이 크게 기뻐하며 환희에 가득한 눈빛으로 염구준을 바라봤다. 이 짧은 거리에서, 그것도 갑작스레 일어난 습격을 피할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죽고 싶구나?”염구준이 주먹을 뻗으며 강력한 펀치로 날아오는 독개구리의 혀를 날려 보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탄력 넘치던 혀는 갈갈이 찢어지며 바닥에 무참히 널브러졌다.개굴개굴!독개구리는 그 충격에 울부짖으며 다급히 연못 안으로 다시 피신했다. ‘인간이 맞아? 어떻게 저 상황에서 바로 반격할 수 있지?’독산은 경악한 얼굴로 염구준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제야 자신이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았다.함께 삼색꽃을 찾으러 가는 것은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상대에게 모두 빼앗길 게 뻔했다. 그가 잠시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연못
조용히 묻어가려 했더니,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강자는 세상이 내버려 두지 않는 법이었다. “때가 됐군.”염구준이 독산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며 곧장 뒤쫓아갔다. 삼색꽃을 찾기 위해 안내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지금이 적기였다. “선생님, 저희 좀 구해주세요!”몇몇이 염구준을 보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도움을 요청했다.“바빠, 알아서 살아남아.”염구준은 이 한마디만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숲속으로 살아졌다. 흑주에게 위협받았을 때,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으면서 도움을 바라다니, 염치가 없었다. 연못가엔 끊임없이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모두 이곳에서 살아나가기 그른 것 같았다.숲속엔 엷은 독안개가 퍼져 있었으며, 독충들이 사방에 돌아다녔다. 독산 일행은 확신 있는 발걸음으로 한 방향을 향해 돌진했다. “자기, 나 피곤해. 조금만 쉬자.”독산의 여자, 흑주가 지친 목소리로 애교를 부렸다. “닥쳐, 얼른 삼색꽃을 찾아야 해.”그러나 이번만큼은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통만 돌아왔다. 삼색꽃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자는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염구준이 등장한 뒤로, 묘한 불안감과 초조함에 휩싸여 있었다.“흥!”흑주가 토라진 얼굴을 한 채, 입을 다물었다. 반면, 염구준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심히 이들의 뒤를 미행했다. 수풀이 무성한 곳을 뚫고 지나가다 보니, 생각보다 흔적이 많이 남아 뒤쫓는 것이 쉬웠다. 그러나 앞선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에 실패한 독충들이 뒤늦게 따라온 그를 발견하곤 공격하기 시작했다. “성가시군.”염구준이 손을 휘두르며 손 쉽게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벌레들을 처리했다. 그런데 앞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저주의 힘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같은 시각, 흑충곡 절명충 분지 중심, 단풍 무의가 수놓아져 있는 검은 로브를 쓴 한 무리가 서 있었다. “좋아. 모든 장비 제대로 준비되었는지 확인했어?”흑풍존주가 축구장 열개 정도 정도 크
이 소녀는 겉으로 보기엔 매우 어려보였지만, 실제로는 스무살이 넘은 성인이었다. 이들이 대화하는 사이, 숲 속에서 인기척 여러 개가 느껴졌다. 바로 독산 일행이었다. 이들은 계속된 전투 상황에 많이 지쳐 있었다. 더군다나 불운을 불러오는 사내까지 뒤를 쫓고 있으니, 더 힘든 시간을 보냈다. “독매, 네가 왜 여기 있지?”독산은 좀 전까지 삼색꽃을 얻을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절명충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독매 일행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상대가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든, 절대로 자신에게 유리한 이유는 아닐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뭘, 물어? 널 죽이러 왔지.”독매가 웃으며 대답했다.“동생아, 나 농담할 기분 아니다. 우리가 비록 같은 배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정이라는 게 있잖아.”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독산이 침착하게 독매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살기를 내뿜기 시작한 독매의 얼굴을 보니, 자신의 말이 별로 설득력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빠, 너도 나를 죽이려고 삼색꽃을 찾으려는 거잖아. 이제 와서 발뺌해도 의미 없다는 걸 알 텐데? 연기하려면 좀 그럴싸하게 해.”독매는 이미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구태여 흑충곡 같은 곳에 발을 들일 이유 없었다.“….”독산은 계획이 들통나자,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다물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면, 강경한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가자, 먼저 삼색꽃을 찾아야 한다!”독산이 지시를 내리며 절벽 너머 우뚝 솟아 있는 절명충 분지를 향해 몸을 날렸다.“아가씨, 저들을 막아야 하지 않나요?”독산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독매 옆에 있던 부하가 물었다. “그럴 필요 없어. 알아서 사지로 굴러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니까.”독매가 웃으며 조용히 독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삼색꽃을 채취한다는 것은 불나방이 불에 뛰어드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귀했고 전설처럼 전해지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때, 수풀 사이에 또다른 존재가 나타났다. 바로
그의 재력이라면 대형 수영장을 만들어 향유고래를 키울 수도 있지만 바다가 고래의 고향이라 그러지 않았다.“선장, 고래가 엄청난데 잡지 않아요?”갑판에서 몸이 건장한 흑인 선원이 불만을 토로했다.눈앞에서 헤엄치며 돌아다니는 것이 전부 돈이니 그럴만했다.“독수리, 주둥이 닥쳐!”선장은 아직도 누군가 향유고래에 미련을 두자 버럭 화를 냈다.염구준이 어디 출신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발산하는 기운은 보는 사람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독수리가 염구준을 힐끗 보고는 어쩔 수 없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나머지 선원들도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선장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저기, 아직 볼일이 남았어요?”선장은 염구준이 조용히 앉아 있자 조심스럽게 물었다.“여기서 가까운 부두로 데려다줘요.”염구준은 끝없는 바다를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이곳은 바닷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일단 상륙한 후에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울 생각이었다.“그게…”선장은 난처한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어려우면 말씀하세요. 그렇다고 폭행을 휘두르면서 강요하지 않으니까.”염구준은 선장의 태도가 이상한 걸 눈치채고 분명하게 말했다.선박은 어부들 것이니 강제로 빼앗지 않을 것이다.그의 말에 선장은 솔직하게 말했다.“우리는 고래를 잡아서 생계를 유지해요. 이제 나와서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이대로 돌아가면 손해가 엄청납니다.”그들은 염구준이 무섭지만 돈을 벌지 못해 가족들이 굶는 것이 더 무서웠다.“그런 거라면 어렵지 않아요. 얼마를 원하세요? 육지에 도착하면 내가 줄게요.”염구준에게 있어 돈으로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100만 달러.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선장은 믿지 않는지 거액의 가격을 부르면서 떠보았다.듣기에 높은 가격이지만 따져보면 수리비용, 연료, 인건비 등등 모두 제외하면 얼마 남지 않으니 합리적인 가격이었다.“이걸로 담보할게요. 어차피 당신네 선박에 있으니까 도망치지 않아요.”염구준은 상대방이 걱정하는 걸 알아차리고 딸에게 선물하려고 주은 주먹
이튿날, 미지의 바다에서 향유고래 한 마리가 헤엄치고, 등에 한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그 사람은 바로 염구준이었다.사방에 온통 푸른 바다라 지금 어느 곳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지금은 고래가 바닷가로 데려가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고래야, 잘 부탁한다.”“우웅!”둘은 서로의 말을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수시로 교류했다.염구준이 눈을 감고 운기조식하다가 배고프면 심해의 눈물로 에너지를 보충했다.신기한 것은 한 방울만 먹어도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뿌우우우웅!그때 멀리서 선박 소리가 들렸다. 염구준은 눈을 번쩍 뜨고 소리를 질렀다.“저기요! 여기 사람 있어요!”목소리에 기운을 담았더니 쩌렁쩌렁한 소리를 지를 때마다 수면이 음파에 진동하는 것 같았다.어디선가 나타난 선박에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슥!그런데 선박에 다가간 순간, 상대방이 고래를 잡는 쇠고랑을 발사하는 것이었다.염구준은 재빨리 검기로 밧줄을 잘라버렸다.선박은 그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향유고래를 잡으러 온 것이었다.생각하지 않아도 고래의 용연향을 얻기 위함일 것이다.스스슥!선박에 있는 사람들은 고장난 줄 알고 이번에 작살을 던졌지만 역시 염구준에게 잘려서 바다 밑으로 들어갔다.상대방과 가까워지자, 염구준은 그들의 선박에 번쩍 뛰어올라 엄숙하게 경고했다.“멈춰. 아니면 무력으로 대응할 거야.”선원들은 대부분 기운이 없는 평범한 어부였다.그들은 염구준이 먼 곳에서부터 뛰어올라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는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여기서는 고래를 잡는 걸 허락해요.”한참 뒤, 선장은 국제 감독기관에서 온 줄 알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이 고래는 내 친구예요. 어떻게 할지 잘 알겠죠?”염구준은 선장을 노려보며 차갑게 되물었다.“알았어요. 이 사람 말을 못 들었어? 당장 작살을 내려놔!”선장은 상대방이 보통이 아니란 걸 눈치챘는지 바로 선원들에게 지시했다.그러자 당황한 선원들은 정신을 차리고 지시대로 작살을 내려놓았다.염구
감히 그의 전우나 다름없는 고래를 잡아먹으려고 하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만약 향유고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지금쯤 심해 밑에서 죽었을 것이다.“염 선생님, 안 돼요!”당황한 노신기 일행이 다급히 나서서 말렸지만 염구준은 듣지 않았다.그는 요트를 타고 서해충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러 공격했다.“당장 토해!”염구준은 두 손으로 검을 들고 번쩍 뛰더니 위에서 서해충을 자르려고 했다.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고래를 살려낼 것이다.“하악!”뿔난 서해충이 나지막하게 울부짖더니 커다란 입을 벌이고 염구준을 통째로 삼키고는 물속으로 들어갔다.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모두 경악하고 말았다.심지어 천기문의 고위층들도 진정할 수 없었다.“염 선생님!”“안 되겠어. 모든 음성탐지기를 던져!”노신기는 당황한 마음에 맞서 싸우려고 명을 내렸다.유동심연의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이번에 오면서 대량의 음성탐지기를 챙겼었다.그러나 워낙 위력이 강한 무기라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염 선생님, 제발 잘 버텨줘요.’촤아악!이제 막 음성탐지기를 내려놓고 가동하려고 할 때 눈앞에서 거센 물보라가 솟구치는 것이었다.해저 지진으로 거센 파도가 밀려오면서 일으킨 쓰나미였다.“다들 선실로 들어가!”위급한 상황에서 노신기는 어쩔 수 없이 먼저 가문을 지켜야 했다.선박 세 척은 쓰나미에 밀려 먼 곳까지 흘러갔다.한편, 바다 밑은 난리도 아니었다.서해충 체내에 들어간 염구준은 선사 시대의 바다 생물과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그가 공격할 때마다 서해충은 심한 고통을 느꼈는지 커다란 몸집을 꿈틀거렸다.실은 서해충이 삼킨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도망칠까 봐 염구준이 스스로 잡혀 먹힌 것이었다.한참 공격하면서 돌진했더니 드디어 향유고래가 있는 곳까지 다가갔다.“구자검법! 검일참공!”그는 기운을 폭증시켜 강력한 살술로 서해충의 몸에 길이가 10미터되는 상처를 냈다.잘린 부위에서 바닷물이 역류하여 들어올 때, 염구
동물의 감각은 때론 인간보다 훨씬 뛰어났다.특히 바다에서 자란 생물이라면, 웬만한 레이더보다도 훨씬 빨리 감지할 수 있었다.쿠쿵!혹시라도 싸울 수 있기 때문에 다들 몸에서 기운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아래쪽에서 뭔가 빠르게 올라오고 있어.”염구준은 날카로운 눈으로 바다밑을 바라보며 말했다. 작은 검은 점 하나가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었다.아직 수면까지 오지도 않았는데, 그 그림자는 이미 성체 향유고래와 맞먹는 크기였다.‘설마, 진짜 서해충이 있는 건가?’“목표가 공격 범위에 진입했습니다. 모든 작살 준비 완료했습니다.”대원들은 지시가 떨어지고 나서 3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내에 모든 준비를 마쳤다.“쏴!”노신기는 참을성 없이 바로 명령을 내렸다.‘망했다!’염구준은 말리려고 했지만 결국 말리지 못했다.물속의 거대한 생물체는 어선보다도 커서 자칫하다간 오히려 배가 끌려갈 수도 있었다.슥! 슥! 슥!고래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세 척의 어선에서 수십 발의 대형 작살이 물밑의 검은 그림자를 향해 발사되었다.타겟의 몸집이 컸기 때문에 대부분의 작살이 정확하게 꽂힐 수 있었다.“끌어 올려!”노신기는 고래 잡이를 할 때 쓰던 방식을 운용하며 숙련하게 명령을 내렸으나 기계를 최대치로 올려도 타겟을 끌어오리지 못했다.이에 조타실에서 다급하게 소식을 전했다.“큰일입니다. 어선이 저것에 의해 유동심연 쪽 소용돌이로 끌려가고 있어요!”배는 엄청난 속도로 끌려갔다. 배 자체가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속도였다.“밧줄을 끊어!”염구준은 노신기의 무전기를 낚아채고 지휘권을 넘겨받았다.“속도가 너무 빠른 탓에 꽉 감겨서 끊을 수가 없습니다.”조타실에서 절박한 답변이 돌아왔다.현대식 어선은 전부 인공지능 시스템이라 이 상황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우웅!염구준은 결국 검기를 날렸고, 날카로운 검광이 연달아 번쩍이며, 단숨에 밧줄들을 잘라냈다.이에 배가 거대한 관성에 휘청이며 흔들렸고, 균
오늘 만약 염구준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전부 물고기들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빨리 항행하라고 하세요. 뭔가 이상합니다.”염구준의 갑작스러운 말에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아 어리둥절해졌다. “네, 말하고 오겠습니다!”그러나 눈치가 생긴 사람들은 염구준의 뜻을 알지 못해도 그대로만 하면 된다는 걸 알고 있어 곧바로 달려갔다.그들은 염구준을 한치도 의심하지 않았다.염구준은 흡족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면을 바라보며 물었다.“스텔라성의 성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으십니까?”이번에 스텔라성의 성주는 두 개의 판을 짰는데, 하나는 겉면으로 보이는 부성주 베르였고, 다른 하나는 오랫동안 숨어있던 노대영이었다. 다른 걸 다 따지고 나서 판을 짠 것만 본다면 정말 훌륭한 계획이었다.그랬기에 염구준은 그를 중시했다.노신기와 아타는 미간을 찌푸리고 서로를 바라본 뒤, 늙은 아타가 입을 열었다. “성주의 이름은 노세입니다. 압도적인 실력의 소유자로, 진 적이 없습니다.”“하지만 지난 20년간, 외부에서는 그의 모습을 본 이가 없습니다. 폐관 중이라는 소문도 있고, 이미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지요.”“그의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라, 저희도 아는 게 많지 않습니다.”이야기를 들은 염구준은, 오히려 흥분한 듯한 웃음을 지었다.“흐음, 전부 사실이라면 꽤 괜찮은 상대가 되겠군요.”방금, 막 육체의 극한을 돌파한 염구준은 적당한 시험 상대가 필요했다.‘대단해.’주변 고위 간부들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염구준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다만 약간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었다.스텔라성 성주 같은 괴물은, 대부분 기겁하며 피하려 하는데, 정면 승부를 기대한다니까 말이다.“그나저나 염 선생님, 전에 올라오실 때, 인원이 적던데, 혹시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노신기는 다른 걸 얘기하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아, 이거 아십니까?”그의 손에는 투명한 비닐에 담긴 작은 물방울이 들려 있었는데, 외부에는 진기가 감돌았다.‘어라?’조금 더
이 독에 중독된 무인은 일시적으로 기운이 흩어지고, 단전이 봉쇄되어, 꼼짝없이 폐인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만약 과다 복용할 경우,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이런 희귀한 독약은 스텔라성 성주가 준 거겠지?”염구준이 흥미롭게 물었다.그는 이번에 처음으로 진짜 산기봉단을 보았고, 게다가 그 양이 상당했기 때문에 꽤나 관심이 갔다.“맞아. 얼른 저 녀석을 잡아!”노대영은 승리자처럼 손을 휘저으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그는 희귀한 독약인 산기봉단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에휴.”아타 등 사람들은 이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염구준마저 당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이제 구세주가 사라졌으니, 최악의 경우 전부 몰살당할 수도 있었다.“가서 두들겨 패! 나 아까 진짜 쫄아서 오줌 쌀 뻔했단 말이야!”몇몇이 소리치며 달려들었고, 염구준을 한껏 때려서 화풀이를 하려 했다.반보천인급 고수를 때릴 기회는 흔하지 않으니까 말이다.우웅. 그러나 그 순간, 검광이 번쩍이더니 달려들던 사람들 전부가 쓰러졌다. 그들의 목에는 옅은 혈흔이 있었는데, 상처는 아주 작았지만 모두 목숨을 잃었다.“이 독이 아무리 강해도, 나를 상대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어.”염구준은 조용히 진기를 운용하며, 체내에 남아 있던 독기를 모두 없애버렸다.육신이 이미 반보천인의 극한의 경지에 다다른 탓에 약물 저항성도 엄청나게 강해져 그는 산기봉단 같은 독약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너... 이건 말도 안 돼!”노대영은 절규하듯 외쳤다.희망이 눈앞에서 산산조각 나자, 정신이 붕괴되기 직전이었다.곧 있으면 승리할 수 있었는데, 이젠 그게 다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그는 차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스텔라성 성주랑 뭘 꾸민 거지?”염구준은 서두르지 않고 물었다.해독제 같은 건 이제 관심 없었다. 상대가 정직하지 않으니까 말이다.“난 진작 그분의 문하로 들어갔어. 언젠가는 그분이 내 복수를 도와줄 거다!”“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데, 내가 무슨 잘못이 있어
염구준은 주머니를 집어 들어 곁에 있던 그레이에게 휙 던져주며 분부했다.“먼저 기운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독제를 나눠줘.”“네.”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노대영을 흉악하게 노려보았다.반보천인으로서 이런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게 조금 창피해서였다.노대영은 사태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흘러가는 걸 감지하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할 말이 있습니다.”“해.”염구준은 싸늘한 표정으로, 단 한 마디만 툭 내뱉었다.그레이와 다른 이들이 힘을 회복하고 나면, 그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기에 곧 죽을 이의 유언쯤은 들어줄 수 있었다.노대영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얼른 말을 이었다.“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원수에게 복수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그래.”염구준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딱히 다른 변수가 없다면, 이 말을 부정할 이유가 없어서였다.‘어라?’이에 주변 사람들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말투로만 보면, 염구준이 노대영의 편을 들어주려는 것 같아서였다.그러나 방금 전에는 또 그들을 구해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염구준이 무슨 생각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노대영은 염구준의 마음을 돌린 줄 알고 속으로 기뻐하며 바로 말을 이었다.“이 도리를 알고 계시니, 그럼 행동에 옮겨도 되겠죠.”노대영은 혹여나 다른 변수가 있을까 두려워 단검을 꽉 쥐고 중상을 입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노신기에게 달려들었다.그레이 등이 조금 있다가 어떻게 나올지는 크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복수를 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말이다.쾅!하지만 달려가자마자 염구준의 발에 얼굴을 맞아서 옆으로 나가떨어졌다.그의 코와 입에서는 순식간에 피가 줄줄 흘렀다.“날 가지고 노는 거냐, 염구준!”“허, 내가 나설지 안 나설지 짐작이 안 됐나봐?”염구준은 비웃으며 말했다.그는 노대영의 말을 부정하진 않았지만 상대방의 행위를 몹시 혐오했다.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대놓고 복수하는 건 괜찮지만, 그 아비가 악행을 일삼던 사람이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방식에,
그러나 몸속에 독이 퍼진 탓에 기운을 끌어올릴 수가 없어 모두 답답하게 속만 태울 수밖에 없었다. 노대영이 혓바닥을 자르려고 할 때, 멀리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대영 문주님, 염구준인 것 같습니다!”이름을 듣자마자, 노대영의 얼굴에서 희열이 싹 사라지고, 이내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기습에 성공한 후 바로 도망쳤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고래를 타고 쫓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염구준 한 사람만으로 충분히 그들을 몰살할 수 있었다.“어서 고래잡이 작살이랑 그물 그리고 멀리에서 공격할 수 있는 무기들을 준비해.”노대영의 가슴 깊은 곳에서 두려움이 급속히 퍼져갔다.허겁지겁 지시를 내리긴 했지만 겨우 쇳조각 몇 개로 염구준을 막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휙휙!염구준은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는 작살, 그물, 조명탄 따위를 보며 입꼬리를 비웃듯이 끌어올렸다.아직 사격거리에도 들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공격을 했기 때문이었다.‘적지 않게 겁을 먹었나 보네.’그는 생각했다. 역시나 첫 번째 공격은 전부 허탕이었다.염구준은 거대한 향유고래를 타고 빠르게 이동했고, 이윽고 두 번째 공격이 시작됐다.커다란 작살 하나가 고래의 머리를 향해 곧장 날아들었는데, 맞으면 죽지 않더라고 심각한 부상을 입을 게 뻔했다.우웅!염구준은 검기 한 줄기를 내보내 날아오던 작살을 두 동강 낸 뒤, 작살에 묶인 쇠사슬 위로 몸을 던져, 빠르게 어선으로 돌진했다.풍덩!향유고래는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물속으로 잠수했다.노대영은 염구준이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걸 보자마자 다급히 소리쳤다.“어서, 어서 배에 못 올라오게 사슬을 끊어!”그도 자신이 염구준과 맞서봤자, 단 한 줌의 승산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구자검법, 검일참공!”염구준은 배 위 인원들의 움직임을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강한 검술을 발동해 검기를 날렸다.제대로 검기를 축적하진 못했기에, 완벽하게 완성된 검일참공은 아니었고, 약간의 반동
파악!곧이어 물기둥이 하늘로 솟구치며 거대한 향유고래가 염구준과 멀지 않는 곳에 떨어진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마치 떠나기 아쉬워하는 듯했다.촤악!염구준은 몸을 날려 향유고래의 머리 위로 뛰어오른 뒤, 세 척의 어선 쪽으로 진기를 날려 물보라 일게 했다.이에 향유고래는 곧장 방향을 틀고, 어선을 향해 빠르게 헤엄치기 시작했다.말이 통하지 않아 이런 방식으로 밖에 교류할 수 없었지만 별로 큰 문제는 없었다.그 시각, 1호 어선은 다른 어선보다 조금 더 시끌벅적했다.노대영은 배의 지휘권을 장악한 뒤, 끝까지 저항한 소수만을 제거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포로로 붙잡아두었다.물론 그가 자비로워서가 아니었다.그저 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어떻게 복수하는지 지켜보게 하기 위해서였다.“대영 문주님, 준비 완료됐습니다. 언제든 시작 가능합니다.”노대영에게 붙은 아첨꾼 하나가 다가와 공손하게 말했다. 이번에 출정한 천기문 문도 중 절반 이상이 이미 노대영 편이었다.쿵!노대영은 부도 갑옷을 입은 채로 웃으면서 팔을 휘둘러 노신기를 바닥에 내던졌다.“악독한 놈. 네가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난 오늘 아버지의 복수를 할 거다.”며칠 전에 대의를 위해서라면 혈연관계는 얼마든지 끊을 수 있다는 그의 말은 그저 노신기를 안심시키기 위함에 불과했다. 그의 가슴 속에 맺힌 복수심은 한순간도 식지 않았었다.“하아...”노신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의 창백한 얼굴엔 깊은 후회가 서려 있었다.‘그때 불쌍해 보인다고 해서 검은 머리 짐승을 거두는 게 아니었는데.’그는 생각했다. “모든 일은 내가 벌인 거니까 찢어죽이든, 뭘하든 나한테만 해.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 건드리지 말고.”지금 이런 상황에 이른 이상, 그는 더 도리를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전에 이미 노대영에게 그의 출신을 말해주며 그의 아버지가 눈 깜빡하지 않고 살인을 저지르는 변태 악마라고 말해주었으나 그는 전혀 듣지 않았기 때문에 말해봤자 쓸모가 없다는 걸 알아서였다.스승과 제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