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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Author: 잔영
염구준의 넓은 어깨를 뒤에서 바라보던 손태석과 진숙영은 말문이 턱 막혔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위 녀석이 지금 그들의 편을 들어주고 있는 건가?

"구준 씨."

입술을 깨문 손가을이 염구준 곁으로 다가가며 그의 옷소매를 슬며시 끌어당겼다. 눈빛이 어쩐지 퍽 간절해 보였다.

부모님에겐 이 일자리가 꼭 필요했다. 용운 그룹과의 중요한 거래인만큼 손씨 어르신도 안달 내고 있을 게 뻔했다.

"괜찮아."

염구준은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으며 손가을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윽고 출입문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손혜린, 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지 말고 썩 꺼져. 아니라면 거기서 경호원 노릇이라도 할 셈이야? 어쩌지, 너 같은 건 필요 없는데."

손혜린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살면서 이딴 취급은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그녀였다. 그러나 손태석 부부를 데려가지 못한다면 손중천이 그녀를 죽이려 들 것이다.

"염구준!"

화를 억누른 그녀가 짓씹듯 말했다.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야? 우린 부부의 인연도 맺었던 사이잖아. 아무리 형식적인 부부였다지만 난 당신 전처라고! 당장 두 사람 내보내. 그럼 우리 사이의 빚도 없던 셈 칠게."

전처라고? 어찌 이런 뻔뻔한 말을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이혼 서류가 청해의 길거리 어딘가에 날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애초에 잘못된 이 결혼은 이혼 도장을 찍은 날 완전히 깨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의 아내는 오직 손가을 한 사람뿐이었다.

"간단해."

아이를 품에 안은 염구준이 출입문을 향해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부탁할 땐 성의를 보여줘야지. 다시 싹싹 빌어. 이건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라는 걸 명심해. 설마 내가 비는 방법까지 가르쳐 줘야 하나?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네가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손혜린이 악에 받친 눈빛으로 이를 꽉 악물었다. 피처럼 붉은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이 당장이라도 손바닥을 파고 들어갈 것 같았다.

감히 염구준 따위가, 자신에게 부탁을 운운하는 건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자식.'

"염 서방...."

염구준의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손태석과 진숙영도 무언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당장이라도 승낙하려던 그들은 입을 꾹 다물며 문밖에 서 있는 손혜린의 반응을 묵묵히 지켜봤다.

난처할 그녀의 처지에 속이 다 시원했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악독하기 이를 데 없는 여자가 친히 그들을 찾아왔겠는가. 5년 동안 겪었던 수모를 갚아줄 때가 온 것 같았다.

"염구준...!"

손혜린은 분노로 호흡마저 가빠졌다. 머릿속에서 바쁘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2조의 수익, 손중천의 협박, 그리고 앞으로 그녀가 누릴 모든 것들...

크게 심호흡한 그녀가 텅 빈 허공을 향해 잔뜩 일그러진 미소를 만들어 냈다. 꼿꼿하게 세웠던 고개를 슬쩍 숙인 그녀가 가장 비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제가 경솔했습니다. 죄송해요. 용운 그룹과 5조짜리 계약을 체결해야 하는데 두 분의 도움이 꼭 필요해요. 그래서 이렇게 모시러 온 겁니다. 그동안 제가 너무 철이 없었어요. 두 분께 무례했던 점,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세요."

말을 마친 그녀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러나 형형한 눈빛과 꽉 움켜쥔 주먹은 변함없었다.

"사죄한다고?"

손태석과 진숙영이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이윽고 염구준과 손가을을 힐끗 쳐다본 그들의 얼굴에 망설임이 서렸다.

이 정도면 된 것 아닐까?

지금이라면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도 어쩔 수 없는 손씨 집안 핏줄이었다.

이건 손영 그룹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계약이 아니던가!

"서두르실 필요 없습니다."

그제야 미소를 지은 염구준이 벽시계를 가리켰다.

"진심인지 아닌지는 시간이 증명해 줄 겁니다. 5조짜리 사업이니 5시간 정도 두고 보죠."

"다, 다섯 시간이라고?"

문밖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손혜린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염구준, 이 잡종 새끼가!'

감히 저더러 이딴 곳에서 다섯 시간이나 손태석과 진숙영에게 머리를 조아리라고?

"버러지 같은 자식."

턱을 꽉 다문 손혜린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당장이라도 염구준의 멱살을 잡은 채 온갖 저주를 퍼붓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용기까진 없었다. 지금은 고개를 드는 것조차 불가능했으니까.

만약 손태석과 진숙영을 데려가는 데 실패해서 용운 그룹과의 계약을 체결하지 못한다면 손씨 집안에서 쫓겨나는 건 물론이고 손중천이 그녀를 죽이려 들 것이다.

십분, 반 시간, 한 시간...... 시간은 더디게도 흘러갔다.

한편, 손태석과 진숙영은 어딘가 불안한 표정으로 TV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태연자약하게 아이와 함께 거실에서 놀아주며 즐겁게 웃고 있는 염구준과는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손가을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진정시킨 그녀는 가족들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얼핏 보면 참으로 화기애애한 풍경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손태석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염 서방, 두 시간이나 지났는데 그만 회사에 가보는 게 좋지 않겠나? 이건 아주 중요한 계약이네, 더 이상 지체할 순 없어."

염구준의 품에 안긴 채 장난치던 아이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염구준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장인어른, 장모님, 진정하세요. 두 분께서 움직이지 않는 한 아무도 용운 그룹과 계약을 체결할 순 없습니다. 게다가 용운 그룹도 두 분이 회사로 가기 전까진 따로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할 말을 잃은 손태석과 진문영은 아연한 표정으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대체 염구준은 뭘 믿고 이렇게 자신만만하단 말인가? 이 도시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는 용씨 집안 용운 그룹이 이를 두고 볼 것 같진 않은데...

차를 따라주며 손가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구준 씨, 설마 용운 그룹 높으신 분들과 아는 사이인 거야?"

찻잔을 받아 든 염구준이 피식 웃었다.

아는 사이냐고? 자신은 전신전 전주라는 고귀한 신분을 갖고 있었다. 용운 그룹 같은 지방 기업이 고분고분 그의 지시에 따르게 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그들은 전신전 전주를 따르는 걸 영광으로 여겼으니까.

"용운 그룹 임원이 제 전우의 친척 되는 사람입니다."

염구준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준비된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니 두 분은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이번 계약 건은 오로지 두 분 손에 달렸으니까요. 저 여자더러 계속 기다리라 하십시오. 다섯 시간을 모조리 채워야 할 겁니다."

손혜린은 두 주먹을 꽉 움켜쥐며 이를 갈았다. 하필이면 염구준의 빌어먹을 전우가 용운 그룹 고위직 임원의 친척이었다니! 자신을 쫓아냈던 용운 그룹의 강경한 태도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제까짓 것이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다고. 염구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자식. 두고 봐, 반드시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게 해주겠어!'

세 시간, 네 시간...... 어느덧 정확하게 다섯 시간이 지났다.

여전히 90도로 허리를 숙이고 있는 손혜린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마치 수만 마리의 개미가 심장을 후벼파는 것만 같았다. 줄줄 흘러내린 땀이 값비싼 원피스를 흠뻑 적셨다.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팠다.

그리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어느새 깔끔한 정장으로 갈아입은 손태석과 진숙영은 잔뜩 흐트러진 손혜린의 모습을 보고는 어쩐지 기분이 오묘해졌다.

자그마치 5년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모욕과 수모를 겪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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