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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가문에서 쫓겨나 이곳 청해에 정착하여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왔다. 가까스로 이류 가문으로 거듭난 그의 총자산은 1조를 조금 넘어섰다. 이번 계약이 무사히 체결된다면 손씨 집안의 지위가 상승하는 건 물론 당당히 청해의 일류 가문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계약... 얼른 계약을... 잠깐!"

떨리는 입술로 연신 계약을 중얼거리던 손중천이 불쑥 고개를 돌리며 양진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중요한 소식을 내가 몰랐다는 게 말이 되나! 책임자가 누구야? 혜린이 아니었나? 어찌 내게 일언반구도 없어!"

양진이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혜린 아가씨께서 직접 어르신을 뵙고 말씀드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제가 연락해 볼까요?"

"됐어."

손중천이 고개를 저었다. 손씨 집안의 미래가 걸린 일인데 고작 통화로 끝낼 수는 없었다.

"혜린이 호출해."

다시 소파에 앉은 손중천이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반 시간 내로 당장 달려오라고 해."

양진이 서둘러 손혜린에게 연락했다. 어르신은 어쩐지 잔뜩 화가 난 것 같았다.

......

반 시간 뒤, 시퍼렇게 질린 손혜린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별장에 들어섰다.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망친 것 같아요."

진작 알아챘던 손중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눈빛만으로도 손혜린을 찢어 죽일 기세였다.

쓸모없는 것!

손혜린의 본명은 진혜린이었는데 사실 손씨 집안의 먼 친척이었다. 손씨 집안은 자손이 부족했다. 수없이 많은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자식을 볼 수 없었던 맏아들 손태진은 하는 수 없이 방계의 사내아이를 양자로 입양했다. 둘째 아들 손태산은 주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작년에 겨우 결혼했다. 그리고 그의 셋째 아들 손태석은 다리를 절었으며 슬하에 딸 하나밖에 없었다.

5년 전, 그는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진혜린을 손씨 집안의 아가씨로 들였다. 그녀의 부추김으로 손태석 일가는 가문에서 쫓겨났으며, 어처구니없는 가짜 결혼 사건도 그해 벌어진 일이었다. 손중천은 자기 친손녀보다 그녀를 더 아꼈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용운 그룹의 투자를 받아 일류 가문으로 거듭날 기회가 눈앞에서 사라지게 생겼다. 고작 손혜린 때문에.

손중천이 노발대발하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버러지 같은 것. 당장 이실직고하지 못해! 어쩌다 망친 게야! 투자금 5조에,우리한테 떨어지는 수익은 2조나 된다고. 이게 뭘 의미하는지 정녕 몰라? 당장 바른대로 고하지 않으면 네년을 산채로 찢어버릴 줄 알아!"

허옇게 질린 손혜린이 털썩 무릎을 꿇으며 눈물을 줄줄 흘려댔다.

그녀는 대뜸 옷깃을 잡아 뜯었다. 용씨 집안 경호원에게 밀쳐지면서 시퍼렇게 멍이 들었던 부위를 손중천에게 내보이며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르신, 오늘 계약 건으로 용운 그룹에 찾아갔었는데 글쎄 그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거예요. 저를 사옥 밖으로 마구 쫓아내는데 그때 힐까지 부러졌어요. 아직도 몸이 너무 아파요. 흑흑...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감히 거짓을 입에 올려?"

분노를 못 이긴 손중천은 손혜린을 향해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그가 사자처럼 포효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손영 그룹에 관련된 일을 알아보는 것쯤은 그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

용운 그룹과의 협력은 애초에 손태석과 진숙영이 반년 동안 공을 들여 준비한 것이었다.

용운 그룹 회장 용성우와 대표 용준영이 어떤 인물이던가!

그들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손태석 부부의 공을 가로채는 건 말도 안 됐다. 용씨 집안은 원칙을 매우 중시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이 지경이 됐는데 아직도 거짓말을 해!"

손중천은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용준영 대표가 친히 손태석과 진숙영을 지목하면서 계약은 두 사람하고만 진행하겠다고 했을 테지! 수익금이 자그마치 2조야, 이것아! 우리 집 총자산보다 많은 금액이라고! 당장 가서 두 사람을 데려오지 않고 뭘 꾸물거리는 거야? 설마 내가 직접 가리?"

무릎을 꿇고 있던 손혜린의 얼굴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그녀는 휘청거리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 하는 상태였는데, 지금 이 상황이 퍽 억울한 눈치였다.

그러나 곧 섬뜩한 눈빛을 번뜩였다.

계약이 체결되는 즉시 바로 손태석과 진숙영을 내쫓으면 그만이었다.

'상여금? 꿈도 꾸지 마. 손씨 집안에 다시 기어들어 올 생각도 버리는 게 좋을 거야.'

"다... 다녀올게요, 어르신."

비틀거리며 일어선 손혜린이 시치미를 뚝 떼며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요... 거절하면 어떡해요? 그 사람들이 저를 얼마나 미워하는데요. 잘 아시면서..."

짝-

매서운 소리와 함께 한쪽 뺨에 타는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손중천이 험상궂은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네가 아주 배가 불렀구나. 당장 데려오지 못해? 태석이도 쫓아냈는데 너라고 다를까. 네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걸 언제든지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이 나라는 걸 명심하거라. 설령 너를 죽여버린다 해도 말릴 사람은 없어. 서재원 나부랭이가 널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아?"

호되게 혼이 난 손혜린은 찍소리도 못했다.

"당장 가서 데려올게요!"

혼비백산한 손혜린은 눈물을 훔치며 도망치듯 거실을 벗어나 은빛 아파트로 향했다.

지금으로선 손태석과 진숙영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용운 그룹과의 계약을 진행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은빛 아파트.

무거운 안경을 코에 건 손태석이 청해 석간신문을 뒤적거렸다. 구인 광고에 나열된 정보에 동그라미를 치는 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불과 3일 사이에 흰머리가 눈에 띌 정도로 늘어났다. 분명 50대 초반이건만 꼭 마치 60대 노인을 방불케 했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이따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일자리를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나이대 사람들에게 주어진 일이라곤 달에 백만 원도 못 버는 낡은 아파트 경비원뿐이었다. 공장에서 일할 수도, 공사장 벽돌을 옮길 수도 없었다. 그건 진숙영도 마찬가지였다. 막다른 골목길에 내몰린 그들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엄마, 아빠..."

구직 앱을 뒤적이는 손가을도 심란하긴 마찬가지였다. 태평하게 아이와 놀아주는 염구준을 흘깃거린 그녀가 이내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삼켰다.

염구준이 서석호를 걷어차서 뼈까지 부러뜨렸으니 서씨 집안에서 언제 어떤 식으로 보복해 올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염구준은 일자리를 찾으려는 노력조차 없었다.

"구준 씨..."

입술을 질끈 깨문 그녀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누군가 요란하게 문을 두드렸다.

"문 열어요!"

세 가족의 시선이 동시에 문 쪽을 향했다. 날카로운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는 건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다. 바로 손혜린이었다.

"널 반길 사람은 없어."

아이를 안아 든 염구준이 문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할 말 있으면 거기서 해."

손가을의 등신 같은 남편, 염구준의 목소리를 들은 손혜린은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태석 씨, 진숙영 씨, 잘 들어요."

몇 번 심호흡한 손혜린이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 테니 지금 당장 회사로 복귀해요. 당장 용운 그룹과의 계약을 체결하란 말이에요. 프로젝트에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기면 당신들이 감당할 수나 있겠어요?"

협박 비슷한 말을 내뱉은 그녀가 몸을 휙 돌렸다.

"부사장님!"

손태석은 너무 반가운 마음에 얼른 몸을 일으키며 손혜린을 간절하게 불렀다.

"부사장님, 저희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염구준이 손태석을 막아섰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그가 냉소했다.

"손혜린, 주제 파악 좀 해. 그게 사람을 모셔가는 태도야? 당장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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