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분 뒤, 굳게 잠겨 있던 그랜드 센트럴 호텔 옥상 문이 묵직한 발길질 한 방에 활짝 열렸다. 정신을 잃은 희주를 꼭 끌어안은 염구준의 몸에 백색 기운이 솟구쳤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마음이 더없이 초조해졌다. 희주가 무대에서 쓰러진 건 피곤해서가 아니었다. 이건 매우 드문 불치병인 '한열증'이었다. 아이의 맥박은 한없이 약하게 뛰다가 때로는 거세게 뛰었다. 체온도 차가웠다 뜨거웠다 들쭉날쭉했으며 호흡도 가빠졌다 느려지기를 반복했다. 이는 한열증의 발병 전조였다. 현재 염구준은 자신의 거대한 기력을 아낌없이 딸아이에게 전달하며 아이의 심맥을 단단히 보호하고 있었다. 아니라면 희주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주군." 염구준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기운을 보며, 뒤따르던 주작이 헛숨을 들이켰다.5년 내내 전쟁을 치르며 무수한 적들을 마주했을 때도 주군은 이렇게 긴장하지 않았었다. 그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공주님의 상태가 예사롭지 않았다."희주는 죽지 않아."염구준은 마치 자신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도착 시간은 얼마나 걸리나? 신의 이제마에게 당장 연락해. 긴급상황이야. 절대 지체되어서는 안 돼."주작이 다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이제마에게 연락했다. 그는 오늘날 용제국 최고의 의원이었다. 독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으며 해박한 의술로도 이름을 떨쳤다.10분 뒤, 전투기 '눈보라'가 그랜드 센트럴 호텔 옥상에서 이륙하며 눈 덮인 용제국 북부를 향해 날아갔다. ……3일 뒤. 청해. "구준 씨, 정말이야?"사람들로 붐비는 번화가, 염구준의 손목을 덥석 움켜쥔 손가을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 불신이 가득했다.생일 파티 현장에서 희주를 안고 훌쩍 떠났던 염구준은 무려 하루가 꼬박 지난 뒤 홀몸으로 돌아왔다. 염구준의 말에 의하면 희주는 용제국 북부에서 병 치료 중이라고 했다. 그곳에 남은 주작이 아이를 돌보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언제 완치될 수 있을지, 정확
현재 냉기와 열기를 번갈아 공급하며 아이 체내의 한열증을 치료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희주의 병은 반드시 나을 수 있을 터였다.여긴 보통 사람들이 견딜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손가을은 말할 것도 없었고, 실력이 막강한 주작이나 의술이 뛰어난 이제마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즉 한열증에 걸려, 냉기와 열기의 공급이 꼭 필요한 희주만이 그곳에서 편히 잠들 수 있었다."희주는 꼭 나을 수 있을 거야." 염구준은 손가을의 가느다란 손목을 그러쥐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용운 그룹과의 협력 프로젝트도 적당히만 해, 당신 힘들면 내 마음도 아프니까."끈질긴 위로 끝에 손가을을 안심시킨 뒤 두 사람은 길가에 주차된 포르쉐로 향했다.차 내부의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바라보면서 손가을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최근에 벌어졌던 일들이 모두 꿈 같이 느껴졌다."구준 씨, 정말 이 5년 동안… 군대에 있었어?"일개 군인이 어찌 이다지도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단 말인가? 뒤를 봐주고 있는 거대한 세력은 다 뭐란 말인가?염구준은 그저 조용히 웃었다."당연하지. 내가 왜 당신에게 거짓말하겠어?"손가을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달싹거렸다.염구준의 최근 행보는 그녀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빨간 포르쉐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머지않아 은빛 아파트가 눈앞에 보였다.은빛 아파트.손태석을 부축한 진숙영이 아파트의 작은 공원에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이때,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이웃이 그들을 향해 은근히 다가왔다."어머, 자기 오랜만이다?"진숙영과 비슷한 나이대의 이웃집 여인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비아냥댔다."참, 사위가 돌아왔다면서? 여기 같이 살아?"진숙영은 가볍게 코웃음 치며 별다른 말을 보태지 않았다."흥, 우리 사위가 얼마나 대단한데."하지만 사실 그녀의 가슴은 몹시 두근거리고 있었다. 염구준의 행보는 그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기에 어딘가 켕기는 느낌이었다.대체 그 많은 돈은 어디서 난
그 여인은 계속 빈정거렸다."차 렌트했어? 빨리 돌려줘, 긁히면 어쩌려고."그녀는 포르쉐를 알고 있었다. 재개발로 벼락부자가 된 친척이 이 브랜드의 차를 뽑았는데 아마 2억원 정도 들었을 거다. 손가을의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참시 멈칫한 손가을은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제가 선물한 겁니다."염구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딱딱하게 굳은 여인이 눈을 대굴대굴 굴렸다. 염구준이 선물한 거라고?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양반이? 듣기론 밥벌이도 제대로 못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맞아요, 구준 씨가 사줬어요. 더 안전한 차로 출퇴근하라고요."손가을이 이웃집 아줌마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여인은 그 자리에 완전히 굳어버렸다.고작 출퇴근을 위해서 이렇게 비싼 차를 뽑아줬다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라 하지 않았던가? 직업도 없는데 이렇게 많은 돈은 어디서 났을까. "우리 장모님과 무슨 얘기 중이셨습니까?"염구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니, 별 얘긴 안 했어요... 난 이만 돌아가서 상이나 차려야겠네."난처한 표정을 짓던 여인이 휙 자리를 떠났다. 진숙영에게 뱉었던 말들을 되돌려 받는 느낌에 두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진숙영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렇게 서둘러. 좀 더 얘기 나누지."살이 피둥피둥 찐 여인은 황급히 꽁무니를 뺐다.그동안 쌓였던 억울함이 한순간 해소되었다. 눈앞의 다정한 부부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자신의 사위는 딸아이에게 차를 사줬을 뿐만 아니라 손녀를 위해 성대한 생일 파티도 준비했다. 그는 꼭 마치 비밀을 숨기고 있는 사람 같았다.손태석이 혀를 차며 말하길, 오늘 그들이 포르쉐를 몰고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저 이웃집 여자 때문에 심장병이 도졌을지도 모른다고 했다.진숙영도 할 말이 많은 눈치였으나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손태석을 부축해 집으로 돌아갔다."방금 당신, 일부러 그 아줌마 약 올렸지?"손가을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그게 뭐라고.
하지만 집밥은 몇 년 동안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진숙영의 요리 솜씨도 매우 훌륭했기에 식사 시간은 언제나 즐거웠다.염구준이 식사하는 모습은 우아하지 못했다. 사실 게걸스럽게 먹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처음에 진숙영은 그 모습에 매우 놀랐으며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했었다.인정하기 싫지만 그래도 자기 사위가 아니던가. 아마 5년 동안 밖에서 갖은 고생을 했을 터였다."염 서방, 이 일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네."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밥을 먹던 손태석이 마침내 결심을 내리고 그에게 따져 물었다."지난번 파티 때, 자네 친구들 말이야. 대체 언제 그런 실력 있는 친구들을 사귄 것인가?"염구준이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일전의 전쟁터에서 한 전우의 목숨을 구해준 적 있는데, 나중에 그 친구가 어마어마하게 출세했거든요. 제가 돌아왔다는 걸 전해 들은 그 친구가 손을 쓴 겁니다."염구준은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자신의 신분이 알려지게 되면 처가에 득 될 것이 없었다.그렇게 된 거로군.가족들은 안도의 숨을 내뱉는 한편 어쩐지 조금 실망스러웠다.진숙영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그럴 줄 알았지. 남들이 도와준 거였어."그러면서도 염구준에게 고기 한 점을 더 얹어 주었다.손태석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언제까지 신세만 지고 살 순 없잖나. 그러니 스스로 할 일을 찾아보게.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지는 말아야지."염구준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퍼먹었다.손태석이 또 질문했다."그럼 포르쉐를 구입한 돈은 어디서 났는가?""군 복무도 오래 했었고, 또 선박 일을 하면서 모은 돈이 꽤 됩니다."손태석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반신반의하며 염구준을 쳐다보았다.히긴, 군 생활도 5년이나 했고 어쩌면 정말로 원양어선에서 돈을 많이 줬을지도 몰랐다."장인어른. 차는 정말 제 돈으로 샀어요. 다리 다 나으시면 제가 장인어른께도 차 한 대 뽑아 드릴게요."수저를 내려놓은 염구준이 장난스레 말했다.거실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한편, 손영 그룹, 손태진 사무실."알아보라는 건 어떻게 됐어?"손태진이 탁자 위에 찻잔을 툭 올려놓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아물지 못한 흉터가 그의 얼굴 곳곳에 나 있었고 팔도 깁스를 한 상태였다.수감된 며칠 동안 그는 지옥을 맛보았다. 곽승환의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그를 처참하게 짓밟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염구준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가 갈렸다."알아냈습니다."책상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그의 양아들 손호민이었다. 그가 이를 갈며 욕설을 퍼부었다."뇌물을 먹이는 데만 거의 1억을 썼어요. 용준영 부하를 잔뜩 취하게 만들어서 겨우 얻어낸 정보입니다. 예전에 용준영이 군 복무를 했었는데, 아마 염구준과 함께 근무했을 겁니다. 그 등신 새끼 도움을 꽤 많이 받은 것 같더라고요."손태진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손가을이 용준영의 침대로 기어들어 간 게 아니었다. 이번 협력의 배후에는 뜻밖에도 염구준이 있었다. 그 등신이 뒤에서 몰래 손을 썼던 것이다."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용준영은 야심가예요. 고작 그 정도의 친분에 얽매일 자가 아닙니다. 이번 프로젝트 협력을 끝으로 더 이상 접점이 없을 겁니다."손태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용준영 같은 자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체면을 중요시했다. 이번에 손가을을 도와준 것으로 신세를 갚았으니 남들 눈에는 은혜를 절대 잊지 않고 보답하는 좋은 사람으로 비칠 터였다. 명성이 올라가는 건 덤이었다. 그러나 용준영이 평생 염구준을 싸고돌진 않을 것이다.염구준이 자신의 체면을 잔뜩 구겨 놓았으니 이 원한은 반드시 갚아줘야 했다."공사장 쪽은 다 세팅해 뒀지?""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완벽하게 준비해 놨거든요. 손가을도 곧 깨닫게 될 거예요. 이 프로젝트를 맡은 게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는 걸요."손호민의 서늘한 눈동자에 독기가 잔뜩 서렸다.잠시 휴식을 취했던 염구준은 손가을을 차에 태우고 프로젝트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엄마랑 무슨 얘기 나눴어?"손가을이 무척 궁금
노랑머리의 표정이 대번에 험악해졌다."겁대가리를 상실했네. 감히 경찰을 부르시겠다? 얘들아, 모조리 때려 부숴버려."한 무리의 양아치들이 우르르 몰려와 저마다 쇠파이프나 몽둥이를 휘두르며 돌진했다."저년은 내 거야."음험하게 웃은 노랑머리가 손가을의 머리를 향해 손에 들고 있던 쇠파이프를 휘두르려 했다. 기절시켜 데려가면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있을 터였다. 예쁜 여자는 따먹어야지 않겠는가.창백하게 질린 손가을이 쇠파이프를 피해 몸을 비틀려는 찰나,우드득-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노랑머리가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우람한 체구의 사내가 손가을의 앞을 막아섰다.바로 염구준이었다.노랑머리는 바닥에 패대기쳐진 채 고통스러워했다. 그의 두 다리는 모두 부러져 있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군."염구준이 싸늘하게 일갈하며 노랑머리의 팔을 지그시 밟았다. 밀려오는 끔찍한 고통에 노랑머리는 하마터면 그대로 기절할 뻔했다."뭐야, 저 새끼 막아!"분노에 찬 한 무리의 불량배들이 염구준에게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들은 모두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이곳에서 대놓고 소란을 피우는 중이었다. 돈 되는 일이라면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고 덤벼드는 자들이었다. 쪽수도 자기들이 더 많았으니 전혀 두려울 게 없었다."구준 씨…."안색이 퍼렇게 질린 손가을은 당장이라도 염구준을 끌고 도망가려 했다.그러나 낮게 웃음을 터뜨린 염구준이 그들을 향해 날렵하게 달려들었다. 사나운 맹수 같은 기운을 풍기며 불량배들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 속도는 눈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열 명이 넘는 불량배들은 도미노처럼 픽픽 쓰러졌다. 저마다 바닥을 구르고 코피를 줄줄 흘려대며 고통에 몸부림쳤다.불량배들을 가볍게 처리한 염구준이 손바닥을 툭툭 털었다. 마치 개미를 손가락으로 짓이기듯 손쉬워 보였다."……" 손가을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공사 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어안이 벙벙했다.염구준과 손가을을 번갈아 쳐다본 그들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용맹한 보디가드가 미녀를
불량배들이 꼬리를 말고 도망갔지만 손가을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녀가 의문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구준 씨, 사실 희주 생일 파티 때부터 묻고 싶었는데... 대체 이런 격투 기술은 어떻게 익힌 거야?" 순식간에 불량배들을 제압하던 모습은 가히 두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딸아이의 생일 파티에서 보여준 실력은 또 어떠한가. 주먹 한 방에 백 명이 넘는 경호원들이 모조리 바닥을 굴렀다. 액션 영화 감독도 감히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 수 없으리라. "별거 아니야. 오랫동안 군에 몸담았는데 망나니조차 처리하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개망신이지." 염구준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벌레보다 못한 놈들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감히 손가을을 넘보다니, 아주 죽여달라고 고사를 지내는 거나 다름없었다. 염구준은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가차 없이 죽여버리겠다고 결심했다. 입술을 달싹이던 손가을은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시공팀에게 다가간 그녀가 본격적으로 이것저것 지시하기 시작했다.몇몇 책임자들은 손영 그룹에서 아무런 지위도 없는 손가을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상황이 퍽 불만이었다. 수많은 프로젝트를 맡았던 베테랑들이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가 고까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그러나 염구준이 떡하니 버티고 있자 그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순순히 손가을의 말에 따랐다."두 달 안에 완공하고, 석 달 뒤에는 공장을 가동할 거예요." 기한을 정하는 손가을 앞에서 몇몇 담당자들은 고장 난 인형처럼 연신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손가을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생산라인만 잘 건설하면 절반은 성공한 셈이에요. 또한 후반에는 각 부서와 협력하여 고품질 제품을 생산해야 하는데, 여러분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협력이 필요합니다!" 손가을은 뭐든 진지하게 임하는 스타일이었다. 무엇하나 대충 얼버무리는 법이 없었다. 꼼꼼하고 때론 박력이 넘쳤으며 신중하면서도 결단력 있었다. 그녀는 타고난 엘리트였다. 가만히 앉아
돈이 너무 적어서 귀찮은 게 틀림없었다. "고객님, 잠시만요." 잔뜩 흥분한 은행 직원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받들고는 진숙영에게 양해를 구했다. 마치 보물을 감싸 안듯이 카드를 소중하게 품은 은행 직원이 재빨리 지점장에게 달려갔다. 문을 두드리는 것도 잊은 채 다짜고짜 쳐들어간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지점장에게 말했다."지점장님. 큰... 큰일 났어요!"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던 뚱뚱한 중년 남성이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냈다."웬 소란이야. 무슨 일인데." "이것 좀 보세요." 여직원이 급히 카드를 내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중년 여성분께서 이 카드 안에 있는 돈을 전부 출금하려고 해요." 은행 카드를 힐끗 바라본 지점장이 둔중한 몸을 움찔거렸다. 손에 쥐고 있던 물고기 사료가 와르르 어항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수습할 겨를도 없이 블랙카드를 홱 낚아챈 지점장은 1분 동안 카드를 뚫어지게 관찰했다. 모든 디테일을 꼼꼼하게 살펴본 그가 마침내 결론에 다다랐다.이건 VVIP 블랙 카드였다. 전국 은행에서 통용되며 안에는 적어도 2000억이 들어있었다. 이 많은 액수를 전부 인출한다고? 현금 2000억을 보유한 은행이 대체 어디 있다고? "그 고객님 옷차림은 어땠어?" 간신히 냉정함을 되찾은 지점장의 머리가 그제야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나 신청할 수 있는 카드가 아니었다. 신청인은 매우 고귀한 신분을 갖고 있어야 했다. 상사의 말만 들어보았을 뿐, 그로서는 처음 실물로 접해보는 카드였다. "딱히 특별한 건... 사실 좀 초라해 보이긴 했어요." 진숙영이 입은 외투는 십여 년 전에 유행했던 스타일이었다. 즉, 지금은 구할 수조차 없는 옷이었기에 여직원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설마, 카드를 주운 건 아니겠죠?" 이윽고 짧게 감탄사를 내뱉은 여직원이 되는대로 지껄였다."훔친 걸 수도 있고요… 지점장님, 어떡해요?" "젠장,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거야? 어떻게 이런 걸 훔칠 수가 있어!" 지점장이 분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