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남설아는 성큼성큼 다가가 그대로 서유라의 뺨을 후려쳤다.이어 머리채를 꽉 움켜쥐고 세차게 뒤로 잡아당기더니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입술을 톡 건드리며 낮고 날카롭게 말했다.“다시는 내 딸 얘기 한 마디라도 꺼내면 네 입 여기다 꿰매버릴 거야. 알겠어?”“네가 감히?”서유라는 코웃음을 치며 도발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서유라의 머릿속엔 아직도 남설아가 그저 순하고 무능한 가정주부일 뿐이었다.지금 이 상황에서도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처지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걸 보고 남설아는 갑자기 서유라와 말다툼을 벌이는 것 자체가 스스로 품격을 낮추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여 그녀는 힘껏 서유라를 옆으로 걷어차고는 싸늘하게 비웃었다.“기어들어가서 내 남편한테 고자질이라도 해봐. 과연 나랑 이혼하자고 할까?”예전의 남설아라면 ‘이혼’이라는 말만 들어도 두려워 벌벌 떨었을 것이다.배나은에게 상처 주기 싫어서였다.하지만 이제 배나은은 없으니 무서울 것도, 잃을 것도 없었다.정작 이혼을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바로 배서준이었다.“남설아! 두고 봐. 가만 안 둬!”서유라는 바닥에 엎어진 채로 욕설을 퍼부었지만 그 말은 남설아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이젠 그녀에게 서유라의 말은 그냥 소음일 뿐이었다.대표 사무실에서 나온 남설아는 곧장 강연찬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시간 돼? 나 오빠 좀 보고 싶어. 응, 우리 회사 앞으로 와줄래?”전화를 끊은 강연찬은 회의 중인 기술팀을 둘러보더니 헛기침을 한 번 했다.“난 급한 일 있어서 먼저 나갈게요. 다들 계속 회의해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진영을 한번 보고 말했다.“잘 들으면서 메모해.”“어디 가는데요?”서진영은 의아한 얼굴로 강연찬을 바라봤다.‘지금 연훈 그룹이랑 기술 회의 중인데 이 중요한 와중에 나간다고? 대표님 도대체 언제쯤 좀 정상적으로 일을 할까?’강연찬은 대답도 없이 웃으며 성큼성큼 회의실을 빠져나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배건 그룹 건물 앞에 도착한 강
“서도현, 너도 이제 어른이잖아. 네가 한 일에 대해서는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해. 내가 오늘 온 건 널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걸 말하러 온 거야. 너처럼 행동한 사람은 최소한 안에서 5년은 있어야 해. 나중에 만두는 보내줄게.”남설아는 수화기를 들고 차분한 어조로 그에게 앞으로의 미래가 어떤지 설명해주기 시작했다.며칠 동안 안에서 어떤 고생을 했는지 서도현은 말을 안 해도 얼굴에 다 드러나 있었다.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그를 때리고 걷어차기 일쑤였고 주변 사람들은 그걸 보고도 모른 척했다.그런데 지금 남설아를 보는 순간 서도현은 모든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너였지! 너지! 네가 시켜서 나 때리게 한 거잖아!”“남설아, 이 미친년. 그날 그냥 널 죽여버렸어야 했는데!”“내가 말해줄게. 우리 누나는 서준이 형한테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이야. 그 두 사람이 날 꼭 구해낼 거라고!”서도현은 차분하게 말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남설아는 오히려 더 침착해졌다. 감정의 흔들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네 누나가 정말 그렇게 대단했으면 네가 지금 여기 있겠어?”남설아의 한마디는 그야말로 직격이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쉼 없이 떠들어대던 서도현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빛이 확 달라지더니 이내 조용해졌고 눈빛이 바뀌어 남설아를 그대로 노려봤다.그 눈빛만으로도 남설아는 확신했다.‘얜 절대 반성 같은 거 하지 않을 거야. 내가 이 사람을 풀어준다고 해도 고마워하기는커녕 분명히 끝까지 날 물어뜯고 되갚으려 들 거야.’“서도현, 우리 아무 원한도 없었잖아. 네가 이렇게까지 한 데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서유라야! 그 미친년이 시켜서 너 혼내주라고 했어!”서도현은 남설아의 의도를 그제야 알아챘다.자신을 무너뜨리러 온 게 아니라 이 일의 진짜 시작점을 확인하러 온 거라는 걸.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유리창 너머로 주먹을 휘두르며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
두 사람의 눈빛과 행동을 보는 서도현은 분노가 극에 달해 몸부림쳤다.“남설아, 이 더러운 년! 밖에 이미 남자가 있으면서도 끝까지 사모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해? 너같이 천한 년은 그냥 죽어야 돼! 죽어버려야 마땅해!”강연찬은 반사적으로 남설아의 귀를 막았다. 이런 더러운 말들이 그녀를 더럽히지 않게 하고 싶었다.“우리 가자.”“응.”남설아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이제 손을 내려도 된다는 뜻이었다.배씨 가문에 있을 때는 훨씬 더 지독한 말도 들었기에 남설아는 이미 그런 것들에 대해 면역이 생긴 상태였다.지금 서도현이 내뱉는 욕설은 오히려 아무런 타격도 되지 않았고 그냥 시시하게 느껴질 뿐이었다.그녀의 그런 태도에 강연찬은 더 안쓰럽고 속상해졌다. 그는 남설아의 손을 꼭 잡고 빠른 걸음으로 바깥을 향해 걸어갔다.“설아야, 네가 배서준한테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했잖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강연찬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남설아를 바라봤다.배씨 가문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한심한 인간들밖에 없고 배건 그룹은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물 같은 곳이었다.남설아처럼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려는 사람은 조금만 방심해도 뼈도 못 추릴 만큼 위험했다.이제야 가까스로 그녀 곁에 돌아온 강연찬으로선 더는 그녀가 상처받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남설아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조용히 말했다.“겉으로 보면 배건 그룹은 화려하기만 해. 하지만 배서준은 지금 재산을 몰래 옮기고 있고 이사회에서도 반발이 심해. 내부는 이미 엉망이야. 원래 가족기업이라는 게 허점이 많잖아. 그래서 배서준도 그룹을 변화시키려고 신기술 쪽에 눈을 돌린 거야.”“내가 자료를 다 분석해봤는데 배건 그룹이 기술력은 없지만 하드웨어나 기반 설비는 꽤 괜찮더라고. 난 기술이 있고 그 설비들이 내 손에 들어오면? 서로 시너지를 낼 수밖에 없지.”“나는 유산에 기대서 이길 생각 없어. 내 힘으로, 내 이름으로 이기고 싶어.
대표가 샤브샤브 먹으러 나왔다가 직원한테 우연히 들킨 건 원래라면 별일도 아니었을 거다.그런데 문제는 이 직원이 평범한 직원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온몸에 분노가 가득한 그런 직원이었다.서진영의 표정을 본 남설아는 당황스러워서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마치 정말로 바람 피우다 걸린 사람처럼 괜히 움츠러들어 조심스럽게 서진영을 힐끔 보며 작게 말했다.“제가 강 대표님 모시고 샤브샤브 먹자고 한 거예요. 서 선배님도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드시고 가세요.”‘같이 먹자고?’서진영은 본래 거래처 미팅 때문에 이 근처에 온 거였는데 상대가 일방적으로 펑크를 내는 바람에 시간이 남았던 참이었다.‘이 둘은 대체 뭐지? 회사 일 제쳐두고 유부녀랑 밥 먹으러 온 거냐? 그게 지금 대표가 할 일이야?’서진영은 팔짱을 끼고는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강 대표님, 우리 지금 막 창립한 회사고 연훈 그룹이랑 계약도 이제 막 성사됐잖아요. 업계 전부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부녀랑 이런 식으로 엮이는 건 기업 이미지에 타격이 클 수 있어요. 나중에 연훈 쪽에도 설명하기 곤란해질 겁니다.”“그만해, 서진영.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강연찬은 더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눈빛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우린 그냥 정상적으로 밥 먹고 있는 거야. 아무 사이도 아니고 아무 문제도 없어. 지금 그게 무슨 말투야? 당장 사과해. 설아한테 사과해!”“사과 못 해요.”서진영은 단호하게 말했다.“전 도저히 납득이 안 되거든요. 근무 시간에 남녀가 구시가지에서 단둘이 샤브샤브 먹는 게, 어떻게 정상적인 교류입니까.”그는 남설아를 바라보며 분명한 경계심과 불쾌함을 드러냈다.지금 강연찬이 이끄는 주원 그룹은 배건 그룹과 정면으로 경쟁 중이다.‘이 여자 정체가 뭘까. 대체 무슨 의도로 다가온 걸까?’“서진영!”“그만해. 싸우지 마.”강연찬이 분노를 터뜨리기 직전, 남설아가 먼저 일어나 두 사람을 향해 웃었다.“맞는 말씀 하셨어. 우리 거리를 두는 게 좋겠네.
강연찬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설아는 이미 멀리 가버려 따라잡을 수 없었고 지금은 눈앞의 문제부터 정리해야 했다.“그때 유학 간 건 전적으로 내 결정이었어. 말도 없이 훌쩍 떠난 건 나였고 우리 사이는 서로 마음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어떤 약속도 한 적 없잖아. 설아가 날 기다려야 할 이유도, 나만 바라봐야 할 의무도 없었어.”“내가 아팠든 속상했든 그건 내 감정일 뿐이지 설아 책임은 아니잖아.”서진영은 연애에 눈이 먼 사람을 본 적은 있었지만 이 정도는 처음이었다.잠든 사람은 깨울 수 있어도 자는 척하는 사람은 깨울 수 없다는 말처럼, 연애에 빠진 사람은 그 누구도 못 말린다.결국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형 사생활은 나랑 상관없어요. 내가 설아 씨 싫어하는 것도 내 일이고요. 하지만 한 가지는 부탁하고 싶어요. 회사만큼은 진지하게 진짜로 책임감 있게 대해줬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형도 알잖아요.”하지만 강연찬은 물러서지 않았다.“그건 그거고 난 네가 사과하길 바란다.”서진영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더니 결국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알겠어요. 다음에 만나면 사과할게요.”하지만 그 ‘다음’이 올 일은 아마 없을 것이었다.점심시간이 끝나고 남설아는 정확한 시간에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이 팀에서 자신은 별 존재감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꼭 이런 사람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었다. 남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사람 말이다.서유라가 능청스럽게 조그만 초콜릿 케이크 한 조각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싱글벙글 웃었다.“아침에 서준이가 나한테 사줬는데 혼자 다 못 먹겠더라고. 설아 씨도 단 거 좋아한다길래, 하나 줄까?”“난 단 거 안 먹어.”남설아는 케이크를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잘라냈다.그러고는 살짝 눈썹을 올려 서유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그 시간에 서준 씨한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게 더 나을걸? 내가 제안한 조건 빨리 수락하게 만들어야, 유라 씨
서유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 자신이 준비한 한 수가 이렇게까지 아무 효과도 없을 줄은.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서유라를 보며 남설아는 헛웃음이 나왔다. 사실 함께 지내다 보면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금세 파악된다.서유라의 수법이 대단한 게 아니라 배서준의 사랑이 대단했던 거다.사랑하기에 그 연극에 기꺼이 눈감아준 것이었다.하지만 오늘은 무대 선택을 잘못했다.이곳은 회사였다. 일하는 자리에서 사적인 감정이나 뒷말은 아무리 크다 해도 ‘밥줄’만큼은 못하다.다들 외면하는 가운데 서유라는 더할 나위 없이 민망해졌고 이를 악물고 억지로 자신이 퇴장할 명분을 만들어냈다.“설아 씨가 지금 바쁘다면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게. 제가 모두를 위해 커피를 좀 샀는데 금방 도착할 거예요. 다들 고생 많으십니다.”체면 있게 퇴장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제로는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저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어설픈 광대였다는 걸.‘요즘 세상이 참 많이 변했네. 내연녀가 저렇게 당당하게 사무실 돌아다니는 시대라니... 도덕도 다 무너진 느낌이야.’직원들은 속으로 이렇게들 생각하고 있었다.회의실.“여러분은 이 소프트웨어 어떻게 보십니까?”배서준은 대형 화면에 떠 있는 수치들을 가리키며 특채로 데려온 기술진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가장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는 검은 뿔테 안경에 전형적인 공대생 복장이었고 안경을 끌어 올리며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조금 미숙하긴 한데 구조가 안정적입니다. 보기 드문 괜찮은 재목이에요. 실전에서 몇 번만 다듬으면 확실히 더 큰 성장이 있을 겁니다. 인상 깊네요. 다만 이 코드 구성 방식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요.”“혹시 이거 예전에 대학생 기술 경진대회에서 1등한 그 작품 아니에요? 여자 졸업생 작품으로 기억하는데...”다른 한 사람이 곧장 떠올리듯 말했다.“맞네, 기억났어요. 그때 그 학생 이름이... 남설아! 맞아, 남설아였어요!”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회의실은 금세 웃음과 고개 끄덕임으로 가득 찼다.“그
천기준은 지금 어떤 말도 다 부질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아무 말 없이 남설아의 개인정보가 담긴 서류를 배서준 앞에 내밀었다.“대표님, 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사무적인 어조였다. 그런 천기준의 태도에 배서준은 괜히 마음이 상했다. 그는 자료를 들여다보자 본능적으로 거부감부터 들었다.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어떻게 저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속을 알 수 없는 여자가 능력까지 있다는 거지?’“그 정도로 유능하면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까지 해서 날 꼭 잡으려고 했던 거야!”“할아버지한테까지 그렇게 열심히 공들여서 결국 그 많은 걸 다 받아냈잖아!”배서준은 서류 위로 주먹을 세게 내려치며 계속해서 혼잣말처럼 불평을 쏟아냈다.요즘 들어 그가 받은 충격은 말 그대로 연달아 터지고 있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식의 좌절을 겪어본 적 없는 그였기에 버티기가 힘들 정도였다.그런 배서준의 모습을 보며 천기준은 지금은 조용히 있는 게 상책이라는 걸 직감했다.그래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조용히 방을 나섰다.이제 넓은 사무실에는 배서준 혼자만 남았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마음을 다잡고 그것을 들었다.서류 안의 한 글자, 한 글자가 마치 보이지 않는 손바닥이 되어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것 같았다.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대가 없이 얻으려는 여자’는 대학 시절부터 이미 눈에 띄는 존재였던 것이다.자료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배서준은 남설아와 자신 사이에 뭔가 커다란 오해가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그는 곧장 천기준을 다시 불러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사하라고 지시했다.대체 어떻게 해서 둘 사이에 그런 일이 생긴 건지, 왜 그렇게 정신없이 하룻밤을 보내고, 아이까지 생기게 된 건지 알고 싶었다.천기준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이 와중에 과거 일은 왜 또 들쑤시는 건데?’“대표님, 서유라 씨가 계속 울고 계십니다. 혹시 가서 보시는
남설아는 문 앞에 서 있었다. 손엔 결재를 받아야 할 서류가 들려 있었고 서로에게 온 신경을 쏟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마음속으로는 우스운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은 채 그녀는 손에 든 서류를 살짝 흔들었다.“대표님, 사인하시죠.”지극히 공적인 말투와 차가운 태도는 결국 배서준의 분노를 폭발하게 만들었다.“남설아, 이 못된 것아! 유라 피 흘리는 거 안 보여?”배서준은 이를 악물며 남설아를 노려봤다.“너만 아니었으면 유라 우울증 다시 도질 일도 없었어! 일부러 괴롭히고 밀어붙인 거잖아! 결국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어?”남설아는 배서준 품에 파묻혀 덜덜 떨고 있는 서유라를 보며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자신은 단 한 번도 배서준에게서 저런 눈빛을 받은 적이 없었다.다정함도, 걱정도, 오직 돌아온 건 늘 차가운 비난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보같이 수년을 사랑했던 자신이 한심할 따름이었다.예전 같았으면 배서준의 이런 비난에 말없이 참았겠지만 지금의 남설아는 손찌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참 많이 참은 셈이었다.그녀는 팔짱을 낀 채 위아래로 서유라를 훑어봤다. 손목에 상처가 조금 있긴 했지만 연기는 너무 서툴렀다.“서준 씨, 얼른 애인 안고 병원이나 가요. 이러다가 상처 아물겠어요.”“사내 규정집 다 읽어봤어요. 정신질환 병력이 있는 사람은 배건 그룹에 근무할 수 없어요. 대표란 사람이 앞장서서 규정 위반이라니 이건 좀 심한 거 아니에요?”남설아는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죽고 싶으면 조용히 멀리 가서 죽어. 괜히 여기서 죽어 건물에 흉한 기운 돌게 하지 말고. 피해 주지 말자고, 응?”그렇게 말한 뒤 남설아는 두 사람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하이힐을 또각이며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서준아, 놓아줘. 그냥 죽게 해줘...”“설아 씨는 진짜 나를 싫어해.”서유라는 두 손으로 배서준의 셔츠를 꼭 붙잡고 있었다.맞춤 제작된 고급 셔츠는 그녀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피가 물든 그 모습은 기괴할 정도로 아
“유라 씨였군요.”차혜미는 담담하게 말했다. 말투에는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졌다.“서준 씨도 같이 왔네요.”“사모님, 안녕하세요.”배서준도 서유라 뒤를 따라 인사를 건넸다.“유라 씨,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졌나요?”차혜미는 의례적인 말투로 물었다.“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많이 좋아졌어요.”서유라는 웃으며 대답했고 그 얼굴에는 자신감이 엿보였다.이번 기회에 차혜미 앞에서 이미지를 조금 회복해보려는 속셈이었다.그녀는 차혜미가 들고 있던 가방을 보며 곧장 칭찬을 시작했다.“사모님, 정말 안목이 좋으세요. 저 가방은 이번 시즌 신상인데 저도 얼마 전에 소개 영상 봤거든요.”서유라는 자연스럽게 자신도 그 가방에 관심이 있다는 듯 말하며 호감을 얻어보려 했다.하지만 차혜미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한 척 고개를 돌려 남설아를 향해 말했다.“설아 씨, 이 가방은 설아 씨가 추천해준 거잖아요. 어때요, 괜찮죠?”“네, 사모님께 정말 잘 어울리실 거예요.”남설아는 차분하게 대답했다.“그렇죠, 나도 마음에 들어요.”차혜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이걸로 하죠.”그녀는 점원에게 말했다. “이 가방 포장해주세요.”“네, 사모님.”점원은 공손하게 대답했다.서유라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차혜미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그녀를 무시할 줄은 몰랐다.게다가 사람들이 많은 매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자 그녀는 공개적으로 망신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욕감과 질투심이 동시에 끓어올랐다.서유라는 남설아를 향해 노골적으로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지금이라도 당장 남설아를 물어뜯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배서준 역시 표정이 굳어 있었다.차혜미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남설아를 편들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자신들과의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한 태도에 그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서유라의 얼굴을 바라보던 차혜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여전히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유라 씨, 아직 몸도 다 회복 안 됐을 텐데 무리하지 마세요.
식탁 위에서 남설아는 정신없이 밥을 먹고 있었다.식사 예절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서둘러 먹는 모습이었다.마치 무언가 급하게 가야 할 일이 있는 듯했다.강연찬은 그녀가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설아야, 좀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그는 말하며 조심스럽게 물 한 잔을 따라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오빠, 괜찮아.”남설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하며 계속해서 음식을 입에 넣었다.“서강 그룹 사모님이랑 쇼핑 약속이 있어서 빨리 먹고 가야 해.”“쇼핑?”강연찬은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눈치였다.“너랑 사모님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어?”“회사 일 때문이지.”남설아는 밥을 삼킨 뒤 설명했다.“서강 그룹이 우리 쪽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여. 이런 기회는 꼭 붙잡아야 하잖아.”“그렇구나.”강연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되는 마음에 덧붙였다.“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안전도 챙기고.”“응, 알겠어.”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 음식을 다 삼킨 후 그녀는 먼저 제안했다.“쇼핑 끝나면 오빠가 데리러 와줄래?”“응, 당연하지.”예상하지 못한 제안에 강연찬은 기분이 좋아졌고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오빠는 천천히 먹어. 과일 좀 준비해올게.”남설아는 차혜미와 시내 중심에 있는 대형 쇼핑몰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한 그녀는 쇼핑몰 입구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췄다.차 문이 열리고 차혜미가 차에서 내렸다.“사모님, 오셨어요.”남설아는 서둘러 다가가며 밝고 단정한 미소를 지었다.“설아 씨, 오래 기다리셨죠?”차혜미는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아니에요,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남설아가 대답했다.“그럼 들어가 볼까요?”“네.”두 사람은 웃으며 함께 쇼핑몰 안으로 들어갔고 본격적인 쇼핑이 시작되었다.차혜미는 비록 연배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전혀 거들먹거리는
전화를 끊자마자 남설아는 기쁨에 겨워 벌떡 일어났다.그녀는 이 좋은 소식을 곧바로 강연찬에게 알렸다.“오빠, 서강 그룹이 우리랑 협력하기로 했어!”남설아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해냈어!”“정말이야?”강연찬도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정말 잘 됐다. 난 처음부터 네가 잘 해낼 거라 믿었어.”“이건 다 오빠 덕분이야.”남설아는 진심으로 말했다.“오빠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이렇게 순조롭진 않았을 거야.”“나한테 그럴 필요 없어.”강연찬은 웃으며 말했다.“이건 우리 둘이 함께 이뤄낸 성과잖아.”“응!”남설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서강 그룹이라는 큰 파트너를 얻었으니 오늘은 제대로 축하해야겠어.”“좋아.”강연찬이 말했다.“어떻게 축하하고 싶어?”“오빠가 정해줘.”남설아가 웃으며 말했다.“난 오빠를 믿어.”“그럼 내가 준비할게.”강연찬이 말했다.“분명 마음에 들 거야.”“응, 기다릴게.”남설아가 환하게 웃었다.그날 저녁, 강연찬은 직접 요리를 해 한 상 가득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다. 또한, ‘협력 성사 축하’라는 문구가 적힌 케이크도 샀다.“와 너무 푸짐하다.”남설아는 차려진 음식을 보고 감탄했다.“오빠, 진짜 대단해.”“맛있게만 먹어주면 돼.”강연찬은 웃으며 말했다.“얼른 먹어봐.”“응.”남설아는 젓가락을 들고 한입 먹어보았다.“맛있어. 오빠, 요리 실력 엄청나게 늘었네.”“맛있다니 다행이다.”강연찬이 말했다.“앞으로 자주 해줄게.”“좋아.”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나는 매일 맛있는 거 먹겠네.”두 사람은 식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분위기는 무척 따뜻하고 편안했다.“이번 일도 오빠가 곁에서 도와준 덕분이야.”남설아는 기쁜 얼굴로 잔을 들며 말했다.“오빠가 함께해줘서 나도 버틸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워, 오빠.”남설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오빠가 있어서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야.”“설아야, 넌 원래부터 훌륭한 사람이야. 난 단지 옆에서 조금 도왔을 뿐이야
서유라는 병원에서 며칠 더 머물렀고 그 며칠 동안 배서준은 거의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그녀 곁을 지켰다.그 모습에 서유라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역시 이 계략은 언제 써도 효과 만점이다.하지만 그녀도 단순히 아픈 척만 해서는 오래 가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배서준이 완전히 자기에게 빠지도록 더 확실한 방법이 필요했다.이날도 배서준은 평소처럼 병상 옆에 앉아 사과를 정성스레 깎고 있었다.서유라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서준아, 나 계속 민폐만 끼치는 거 같아. 회사 일은 괜찮아?”“괜찮아, 신경 쓰지 마.”배서준은 깎은 사과를 서유라에게 건네며 말했다.“회사는 내가 알아서 할게. 넌 몸이나 잘 추슬러.”“하지만...”서유라는 말을 맺지 못하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왜? 무슨 일 있어?”배서준은 다정하게 물었다.“그냥 내가 이렇게 아프기만 해서 너한테 짐이 되는 건 아닐까 해서.”서유라는 눈을 내리깔며 연약한 모습을 보였다.“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배서준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넌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그런 널 짐처럼 느낄 리가 있겠어?”“그래도...”서유라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회사 상황이 안 좋다는 말도 들리고 다 나 때문인 것 같아서...”“그런 소리 하지 마.”배서준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회사의 일은 나 혼자 감당 못 해서 그런 거야. 너랑은 아무 상관 없어.”“날 위로하려는 거라면 그런 말 안 해도 돼.”서유라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도 알아. 결국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까지...”“유라야, 그건 진짜 네가 오해하고 있는 거야.”배서준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회사 일은 내가 잘 정리할 테니까 넌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응.”서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무척 기뻐했다.역시나 배서준은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에 가장 약했다.불쌍한 척, 약한 척, 조금만 애교를 부리면 뭐든 들어줄 것이다.“난 처리할 일
“설아는 잘못한 게 없어요. 배 대표님이 뭔데 이렇게 몰아붙이는 거죠?”강연찬이 단호하게 말했다.“이건 나랑 남설아 사이의 일이에요. 강 대표님이 끼어들 일은 아닙니다.”배서준은 냉랭하게 응수했다.“지금 설아는 내 파트너이자 내 친구입니다.”강연찬의 말투는 확고했다.“배 대표님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설아를 몰아붙이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요.”“몰아붙인다고요?”배서준은 비웃으며 말했다.“내가 언제 남설아를 몰아붙였다는 겁니까?”“아닌가요?”강연찬이 되물었다.“됐어, 오빠. 그만해.”남설아가 나섰다.“나는 괜찮아. 이런 사람들과는 굳이 말 섞을 필요 없어.”남설아의 말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그래도 나 지켜줘서 고마워, 오빠.”“우리가 그런 말 할 사이야?”강연찬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너만 괜찮으면 됐어.”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송우민은 조용히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그는 배서준이 아직 남설아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는 걸 눈치챘고 그 점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배서준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그런 그가 남설아에게 밀린다는 사실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만약 남설아가 아직도 배서준을 좋아한다고 믿게 만든다면 그는 분명 어떻게든 다시 붙잡으려고 할 것이다.그러면 그 틈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연회가 끝난 후, 배서준과 서유라는 차로 돌아왔다.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서준아, 나 너무 쓸모없는 사람이지?”서유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계속 너한테 민폐만 끼치고, 나 너한테는 짐 같은 존재지?”“바보야, 그런 말 하지 마.”배서준이 다정하게 달랬다.“넌 짐이 아니라 내 소중한 사람이야.”“하지만 난 자꾸 널 힘들게 하고 화나게 하잖아.”서유라의 눈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나 진짜 무능한 사람 같아.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울지 마, 유라야. 울지 마.”배서준은 그녀를 안으며 애틋하게 말
배서준은 고개를 홱 돌려 남설아를 노려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거기서 뭐 해? 빨리 의사부터 부르러 가야 할 거 아냐!”남설아는 이 광경을 바라보며 속으로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서유라의 연기는 참으로 어설펐다.이렇게 진부한 수법으로 배서준을 속이려 들다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하지만 굳이 그녀를 들춰내고 싶지도 않았다.어차피 배서준은 이미 모든 게 자기 탓이라고 믿고 있었고 무슨 말을 해도 변명으로밖에 안 들릴 것이다.“알겠어요, 의사 부를게요.”남설아는 담담히 대답하고 돌아섰다.그녀는 한쪽 구석으로 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끊은 뒤, 입가에는 비웃는 듯한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서유라, 이번에는 네가 망가질 차례야. 기다려 봐.’연회장 안은 서유라의 모습으로 인해 술렁이기 시작했다.여러 사람이 몰려와 그녀의 상태를 걱정하며 물었다.“유라 씨, 괜찮아요?”“병원 가야 하는 거 아냐?”“배 대표님, 유라 씨 빨리 병원으로 모셔야겠어요.”사람들이 각자 떠들어대며 현장은 점점 어수선해졌다.배서준은 서유라를 품에 안고 초조함에 휩싸였다.그는 서유라가 왜 갑자기 아픈 건지 몰랐지만 속으로는 분명 남설아가 무슨 말을 해서 그녀를 자극한 게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그렇게 생각하자 남설아에 대한 미움은 더욱 깊어졌다.“비켜주세요. 다들 좀 비켜줘요.”배서준은 크게 외쳤고 그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 실려 있었다.“유라가 쉬어야 하니까 제발 좀 그만들 하세요.”사람들은 그의 기세에 눌려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길을 비켜주었다.배서준은 서유라를 안은 채 서둘러 연회장을 빠져나갔다.그는 그녀를 차에 태우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가는 내내 그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 있었고 운전대를 쥔 손에는 핏줄이 불쑥불쑥 솟아 있었다.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조수석에 기댄 서유라는 슬며시 배서준의 표정을 살폈다.그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걱정하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는 의기양양했다.예상대로였다. 자신이 아픈 척
서유라는 싸움에서 진 사람처럼 기가 죽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배서준의 이미지도 사람들 눈에 한순간에 추락했고 그는 무척이나 난처하고 부끄러웠다.그는 점점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기 시작했다.만약 그때 남설아와 이혼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초라해지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연회가 끝난 뒤 배서준과 서유라는 함께 차에 올랐다.“서준아, 미안해.”서유라는 고개를 숙인 채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오늘 내가 괜히 설아 씨한테 차를 우리라고 제안했어. 설아 씨가 그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어...”“너 잘못 아니야.”배서준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피곤한 어조로 말했다.“남설아가 괜히 잘난 척을 한 거지.”그는 서유라가 마음 아파하는 게 안쓰러워 모든 잘못을 남설아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그래도 난 아직도 미안해.”서유라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내가 너를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당하게 했잖아.”“바보야, 네 탓이라고 한 적 없어.”배서준은 그녀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응.”서유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배서준의 품에 안겼다.하지만 배서준의 마음은 딴 데로 향하고 있었다.그는 과거의 남설아를 떠올리고 있었다.한때 그녀는 단지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매일 자신과 아이만 바라보며 살아가던 그녀가 도대체 언제 다도를 배운 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다도 실력이 이 정도라니, 서 회장 부부가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지금 저 여자가 내가 알던 남설아가 맞는 건가?’그는 마음속 깊이 혼란스러웠다.남설아는 분명 변해 있었다. 더 이상 자신이 쉽게 이해하거나 조종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서유라는 배서준의 시선이 자꾸만 허공으로 향하는 걸 느끼고는 그가 또다시 남설아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그녀의 마음속에 위험 신호가 울렸다. 그녀는 반드시 이 둘의 접촉을 막아야만 했다.‘남설아, 가만 안 둬. 네가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서유라는 속으로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그녀의
“서 회장님, 사모님, 과찬이세요.”남설아가 겸손하게 말했다.“그냥 가볍게 내린 것뿐이에요.”“남 대표 너무 겸손하시네.”서기찬이 말했다.“이건 아무렇게나 내려서 나올 맛이 아니야. 확실히 기본기와 실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그러게요, 설아 씨.”차혜미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차 내리는 솜씨가 정말 대단해요. 제가 제자로 들어가고 싶어질 지경이에요.”“사모님, 또 농담하시네요.”남설아가 고개를 숙이며 미소 지었다.“이런 사소한 재주가 어찌 사모님의 눈에 찰 수 있겠어요?”“설아 씨가 너무 겸손하신 거예요.”차혜미는 찻잔을 바라보며 더욱 남설아에게 호감을 드러냈다.“차를 이렇게 잘 내리시는 걸 보니 정말 감탄밖에 안 나와요.”“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모님.”남설아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유라는 마음속에 질투심이 더욱 불타올랐다.남설아가 이렇게까지 다도에 능할 줄은 몰랐다.게다가 자신이 의도한 모욕은커녕 오히려 남설아는 그 자리에서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칭찬을 독차지하고 있었다.서유라는 쉽게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설아 씨의 다도 실력 정말 대단하네. 그런데 듣기로 다도도 여러 유파가 있다고 하던데 설아 씨는 어느 쪽이야?”그녀는 남설아의 다도를 비하하려는 의도로 체계 없는 아마추어 수준이라고 암시하고자 했다.“특정 유파를 따로 배우진 않았어.”남설아는 침착하게 말했다.“그저 내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내 느낌에 따라 우려내는 것뿐이야.”“그래?”서유라는 다시 비웃듯 말했다.“그럼 설아 씨만의 파가 생긴 거네? 대단해.”그녀는 남설아만의 파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며 남설아의 다도가 비전문적이라는 뉘앙스를 풍겼다.“유라 씨, 또 농담하네.”남설아는 작게 웃으며 조롱이 섞인 말투로 답했다.“나는 그냥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일 뿐이야. 감히 한 유파라니.”“남 대표님 너무 겸손하세요.”차혜미가 곧장 나섰다. 그녀는 서유라의 말에 담긴 악의를 알아차리고
“고마워.”남설아가 말했다.“설아 씨, 예전에 서준이 곁에 있을 때도 이렇게 늘 꾸미고 다녔어?”서유라가 불쑥 물었다. 말투에는 살짝 떠보는 뉘앙스가 묻어 있었다.그녀는 일부러 남설아가 한때 배서준의 곁에 있었던 시절을 언급하며 남설아의 과거를 상기하려 했다.남설아는 서유라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유라 씨, 농담이 지나치네. 그때의 나는 그저 서준 씨의 아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했을 뿐이야.”“그래?”서유라는 다소 우쭐한 말투로 말했다.“나는 설아 씨가 차를 따라주고 시중드는 데 능한 줄 알았어. 내조를 하는 데는 정성이 필요하잖아?”그녀는 차를 따라주고 시중든다는 것을 일부러 강조해서 말하며 남설아를 모욕하려 했다.“유라 씨 말이 맞아. 내조를 하는 데는 정말 정성이 필요해.”남설아는 차분하게 말했다.“하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는 사업을 하는 데 더 능한 편이야.”“그래?”서유라는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그럼 오늘 설아 씨가 잘해야겠네. 여기 모인 분들 다 업계 내로라하는 분들이니까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겠어.”“걱정해줘서 고마워, 유라 씨.”남설아는 작게 미소 지으며 빈정거림이 담긴 말투로 답했다.“하지만 나는 유라 씨를 실망하게 할 일은 없을 거야.”“그래야지.”서유라는 속으로 비웃으며 남설아가 뭘 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는 듯 말했다.“설아 씨, 차 따르는 데 능하다니까 오늘 여기서 차 한 번 내려보지?”서유라가 제안했다. 말투에는 노골적인 도발이 묻어 있었다.“여기 좋은 차도 있고 멋진 다기 세트도 있어. 설아 씨의 손재주로는 딱 어울릴 것 같네.”그녀는 손재주라는 말을 다시금 강조하여 말하며 남설아를 하찮은 시중 드는 사람으로 몰아가려 했다.하지만 남설아는 그런 의도를 바로 눈치챘음에도 전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도전을 받아들였다.“좋아, 유라 씨가 이렇게 운치 있는 제안을 하니 한 번 해볼게.”남설아는 여유 있는 말투로 대답했다.“다만 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