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라의 얼굴빛은 잿빛으로 질려 있었다.입술을 꾹 다문 채 눈동자엔 끝없는 갈등과 망설임이 어렸다.한편으로는 손에 들어온 부와 명예를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 없다는 분노가, 다른 한편으로는 이명수의 말이 주는 현실적인 공포가 그녀를 붙잡고 흔들고 있었다.그녀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이번 일이 들통나기라도 하면 기다리고 있는 건 파멸뿐이라는 걸, 되돌릴 수 없는 낭떠러지라는 걸.“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럼 뭐 어떡할 건데요?”이명수의 목소리엔 냉소가 섞여 있었다.“설마 아직도 무모한 도박 계속할 생각이에요? 배서준이 평생 바보짓만 할 거라고 믿어요? 그 사람 지금 벌써 의심하기 시작했잖아요. 지금도 손 떼지 않으면 결국엔 전부 들통난다니까요!”“하지만...”서도현이 뭔가 반박하려는 순간 이명수의 싸늘한 목소리가 그 말을 잘라냈다.“하지만은 없어요.”그의 말투가 한층 강경해졌다.“마지막으로 말할게요. 약물 증량은 당장 멈춰요. 무슨 수를 써서든 배서준을 진정시키고 최대한 빨리 이 판에서 손 떼고 빠져나가요. 이게 지금 두 사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게 싫으면 누구도 구해주지 못해요.”서유라는 몸을 살짝 떨었다.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지금 계속 버티는 건 무덤을 파는 거나 다름없다.마침내 오랜 침묵 끝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선생님. 말씀대로 할게요. 당분간은 손 떼겠습니다.”그 말에 이명수의 말투도 조금 부드러워졌다.“현명한 선택 한 거예요. 상황 파악이 빠른 사람이 끝까지 살아남는 법이죠. 이번 일은 두 사람한테 값비싼 교훈이 될 겁니다. 앞으론 더 조심해서 움직여요.”“교훈이라고요?”서도현이 코웃음을 쳤다.“이번 교훈은 값이 너무 비싼 것 같은데요. 우리가 쏟아부은 시간, 노력, 자금... 다 헛수고예요. 남는 게 뭐 있습니까?”“헛수고?”이명수의 말투엔 묘한 뉘앙스가 실려 있었다.“뭘 남겼냐고요? 적어도... 두 사람 목숨은 남았잖아요? 그것만으로도 본전은
“누나, 지금도 망설이고 있는 거야?”서도현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였다.“설마 진짜 배서준이 진실을 다 알아내고 우리를 감옥에 처넣는 걸 눈 뜨고 보겠다는 거야?”“나도...”서유라는 말끝을 흐렸다.감옥에 가고 싶은 마음은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모한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도 않았다.“누나, 내 말 들어. 약 용량을 늘리는 게 유일한 방법이야.”서도현의 말투는 단호했고 어떤 이의도 용납하지 않았다.그렇게 서유라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전화기 너머로 갑자기 나이 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약을 늘리자고요? 미쳤어요, 지금?”이명수의 격앙된 목소리가 서도현의 말을 가로막았다.“선생님? 거기 계셨던 거예요?”서유라가 깜짝 놀라 물었다.“난 줄곧 듣고 있었어요.”이명수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방금 두 사람이 나눈 얘기 전부 들었어요. 마지막 경고예요. 약을 늘리기라도 했다간 배서준은 죽어요. 그렇게 되면 두 사람 다 끝장나는 거라고요.”“그럼 어쩌란 말이에요, 선생님?”서도현은 조급하게 외쳤다.“배서준이 이미 의심을 품었는데 우린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 없잖아요!”“이미 말했잖아요. 지금 당장 손 떼고 빠져나와요.”이명수의 목소리는 짜증 섞인 어조로 이어졌다.“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약 투여를 멈추고 배서준 몸이 서서히 회복되도록 두는 거예요. 그리고 그럴듯한 핑계를 대서 그 곁을 떠나요. 멀리 도망쳐요. 그게 목숨을 보전할 유일한 길이니까.”“손을 떼라고요? 도망치라고요?”서도현의 목소리는 억울함과 분노로 떨렸다.“우리가 지금까지 얼마나 공들여 왔는데 이제 와서 다 포기하라니... 너무 허무하잖아요!”“허무하다고요?”이명수의 목소리는 더없이 냉정해졌다.“그쪽 목숨이 달린 문제예요. 죽고 나서 후회할 거예요? 다시 말하지만 배서준을 더 이상 어찌 해보겠다는 생각, 이제 완전히 접어요. 위험이 너무 커요.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아무도 두 사람을 구해줄 수 없습니다.”그제야
그녀는 핸드폰을 바닥에 내던졌다.“쾅!”순간 핸드폰 화면이 산산조각났다.“망할 배서준! 감히 날 의심해?”서유라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배서준이 이렇게 까다롭고 예민하게 돌변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그녀는 줄곧 믿어왔다.배서준은 자신에게 절대복종하며 자신만을 사랑하고 의심 따윈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하지만 지금 배서준의 태도는 명백히 달라져 있었다.만약 배서준이 정말 무언가를 알아낸다면 그동안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게 단 한 번에 물거품이 되어버릴지도 몰랐다.‘안 돼... 절대 그런 일은 생기게 할 수 없어!’어떻게든 진정하기 위해 서유라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그리고 다른 핸드폰을 집어 들고 서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누나, 어떻게 됐어? 배서준 쪽에서 이상한 기척 있어?”전화기 너머로 서도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큰일 났어!”서유라의 목소리엔 당황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서준이가 날 의심하기 시작했어. 방금 전화해서 약에 대해 캐물었고 의사 정보까지 알려달라고 하더라고.”“뭐? 의심했다고?”서도현의 목소리도 곧장 긴장으로 바뀌었다.“누나한텐 절대복종하는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나도 몰라. 갑자기 완전히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예민해지고 경계심도 엄청 세졌어.”서유라는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이었다.“지금 어쩌지? 진짜 뭐라도 알아내면 우리 다 끝이야!”“누나, 진정해. 괜히 혼자 겁먹지 말고.”서도현은 애써 침착하려 애썼다.“아직 의심만 하는 거잖아? 증거는 없어. 누나만 잘 버티면 돼. 절대 흔들리면 안 돼.”“근데 어떻게 버텨? 벌써 조사에 들어갔는걸...”서유라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 통화 내역이나 돈 거래 내역까지 뒤지면 어떡해? 들키면 우리 진짜 끝장이야!”“통화 내역이랑 자금 거래?”서도현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그런 거야 우리가 철저하게 관리했잖아. 안심해. 아무 증거도 안 남기게 처리했으니까.”“그래도 세상일은 모르는 거
“이 선생님은 당연히 전문의시지!”서유라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그 안엔 분명 당황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서준아, 쓸데없는 생각 좀 하지 마. 이 선생님은 내가 잘 아는 친구가 소개해준 사람이야. 정신과 쪽에선 꽤 유명한 전문가라고 해서 너 잘되라고 데려간 거잖아. 널 위해 그런 건데 어떻게 그렇게 의심할 수 있어?”“날 위해서?”말을 되받아 읊조리는 배서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너 자신을 위해서였던 건 아니고?”“배서준!”서유라의 목소리가 결국 날카롭게 치솟았다.“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지 정말 몰라? 널 위해서 내가 얼마나 많은 걸 포기하고 얼마나 많은 걸 해왔는지 다 잊은 거야? 지금 네 몸 상태 좀 괜찮아졌다고 나부터 의심하고 따져 묻는 거야? 그게 네가 날 대하는 방식이야?”서유라의 목소리는 점점 울먹거리는 듯했고 듣는 사람마저도 눈물이 맺힐 정도로 서러워 보였다.예전 같았으면 이런 서유라의 반응에 배서준은 당장이라도 마음이 약해졌을 것이다.사과하고 잘못을 인정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그의 가슴속엔 오직 마비된 감정과 깊은 의심뿐이었다.“유라야, 너를 의심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진실이 알고 싶을 뿐이야.”배서준의 목소리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담담했다.“정말 날 위한 거라면 약의 성분이랑 그 의사에 대한 정보를 나한테 알려줘. 그래야 내가 마음이 놓이지 않겠어?”한동안 전화기 너머는 아무 말이 없었다.더욱 무겁고도 길게 침묵하는 것으로 보아 서유라는 무언가를 따지고 계산하고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배서준의 마음도 그 침묵과 함께 점점 더 가라앉았다.그는 느낄 수 있었다.그 긴 침묵이 이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걸.“서준아, 이제 정말 날 믿지 못하겠다는 거야?”서유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지만 그 속엔 절망과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널 믿을 수 있게 해줄 이유를 줘.”배서준의 목소리는 싸늘하고 단호했다.“알겠어, 이제 이해했어.”
이제부터는 진짜 막이 오른 셈이었다.천기준이 사무실을 나간 뒤에도 배서준은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얼굴빛을 바꿔가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그리고는 핸드폰을 들어 서유라에게 전화를 걸었다.몇 번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됐다.“서준아, 왜? 일 끝났어?”서유라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이 다정하고 부드러웠다.살가운 말투 속엔 여전히 애정과 배려가 묻어났다.배서준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일부러 담담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유라야, 내가 요즘 먹는 약... 그거 정확히 무슨 약인지 말해줄 수 있어?”더는 돌려 말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서유라는 순간 말을 멈췄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던 듯했다.잠시 뜸을 들인 뒤, 그녀는 평소처럼 부드럽게 대답했다.“서준아,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봐? 의사 선생님이 말해줬잖아. 불안이랑 우울 완화해주는 약이라고.”서유라의 말투는 여전히 상냥했지만 그 안에 어색한 위화감이 묻어났다.매끄러워야 할 말들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의사야 그렇게 말했지. 불안 완화, 우울 억제... 근데 정확한 약 이름이나 성분은 하나도 안 알려줬어. 유라야, 우리 사이에 감출 게 더 있어?”배서준의 말에 살짝 날이 서기 시작했다.그 말에 서유라는 한동안 침묵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서준아, 일부러 숨긴 건 아니야. 네가 괜히 걱정할까 봐 그랬어. 그 약들이 부작용이 좀 있긴 해. 근데 의사 선생님이 그랬잖아. 정해진 양만 지키면 괜찮다고. 그리고 너 요즘 상태도 많이 나아졌잖아. 안 그래?”“나아졌다고?”배서준은 코웃음을 쳤다.“머리는 점점 더 아프고 밤마다 잠도 안 오는데? 그게 나아진 거야?”서유라는 다급하게 변명했다.“그러지 마. 그건 약 줄인 뒤에 생기는 일시적인 반응일 수도 있어. 의사 선생님도 말했잖아, 조금만 참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제발 나 좀 믿어줘. 우린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나를 위해서?”그 말이 이제는 너무 공허하게 느껴졌다.“유라야, 넌
천기준은 자신이 해야 할 말은 모두 다 했다고 생각했다.이제 남은 건 배서준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었다.사무실 안은 숨조차 쉬기 힘들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였다.배서준은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더니 쉰 듯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천 비서, 나가 있어. 혼자 좀 생각하고 싶으니까.”“네, 대표님.”천기준은 마치 짐을 내려놓은 듯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사무실에는 배서준 혼자만 남았다.그는 책상 앞에 앉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바쁘게 흔들렸다.천기준의 말은 마치 도화선처럼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의심을 완전히 폭발시켰다.익명의 문자, 천기준의 경고, 갈수록 악화되는 몸 상태...모든 퍼즐이 하나로 맞춰지고 있었다.그리고 그 결론은 단 하나의 끔찍한 진실이었다.‘유라가 정말 날 속이고 있는 걸까?’이러한 생각이 가슴을 후벼 팠다.어떤 육체적 통증보다도 훨씬 더 깊고 날카로운 고통이었다.그는 누구보다 서유라를 믿었다.그녀의 말이라면 뭐든 따랐고 인생의 전부라 여겼다.그런데 그런 서유라가 자신을 속이고 약을 먹이고 있었다면 그동안의 사랑과 믿음은 모두 우스운 희극에 불과했던 걸까?믿고 싶지 않았지만 부정할 수도 없었다.모든 정황이 그 잔혹한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으니 말이다.분노와 수치심이 한꺼번에 몰려왔다.누군가에게 뺨을 세게 얻어맞은 듯 머릿속이 하얘지고 숨이 턱 막혔다.그 시각, 근처 카페.남설아와 강연찬은 천기준에게서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배서준 쪽, 반응이 있을까?”송우민이 다소 초조하게 중얼거렸다.창밖을 바라보던 남설아는 차분하게 말했다.“걱정 마. 배서준 성격에 저 정도면 충분히 의심할 거야.”“그러길 바라야지...”송우민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남설아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천기준에게서 온 것이었다.[남 대표님, 배 대표님이 정신과 약물 관련 정보 검색을 시작했고 방금 저한테도 약 부작용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