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젖힌 채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다. 절대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듯 마지막까지 이를 악물고 참아내다 끝내 남설아는 배서준을 바라보았다.“못 믿겠죠? 그럼 나 따라와요. 직접 보여줄 테니까. 당신 눈으로 보면 이제는 믿겠죠?”“남설아, 날 속이기라도 하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남도일까지도.”남도일.이 세상에서 남설아에게 남은 마지막 혈육이자 유일한 약점이었다.배서준은 언제나 노련했다. 사람을 어떻게 몰아붙여야 하는지 어디를 건드려야 무너지게 할 수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정작 그는 아직도 남설아가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삼촌은 무슨,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남도일 따위에는 관심을 끊었다.아니, 차라리 그 인간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했다.한 번도 배서준을 돌아보지 않은 채 남설아는 그를 데리고 배나은의 학교로 갔다.그러고는 화실로 갔다.나은이가 가장 좋아하던 디저트 가게도 갔다.그리고 나은이가 좋아했던 놀이공원으로도 갔다.마지막으로 별장의 공원으로 돌아왔다.하지만 어디에도 배나은의 흔적은 없었다.이건 배서준이 처음으로 배나은의 삶에 가까워진 순간이었다.처음으로 아이가 살아온 세상을 직접 마주한 순간이었다.그러나 배나은이 가장 자주 머물렀던 이곳들에서 아무도 배서준을 알아보지 못했다.더욱이 그가 나은이의 아빠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유치원 선생님은 몇 번이고 말했다.배나은이 학교에서 아빠가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놀림받고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고.그리고 그 아빠라는 사람이 얼마나 무책임한지를 질책했다.이 모든 것들을 배서준은 몰랐다.아니, 애초에 알고자 한 적조차 없었다.그는 계략이 많은 여자가 싫었고 자신에게 들러붙는 남설아가 싫었다.그와 함께 그녀가 낳은 아이도 싫었다.그러나 오늘 처음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죄책감이 피어올랐다.그토록 많은 것들을 놓쳐버린 자신이 처음으로 후회되었다.“남설아, 우리 얘기 좀 하자.”공원의 벤치에 앉은 배서준은 처음으
“남설아, 네가 감히 이따위 태도를 보여?”배서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죄책감이 단숨에 사라졌다.이전에는 그저 교활한 여자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성은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미쳐버린 게 분명했다.“누가 누굴 보고 집착한다고 하는 거야? 우린 이미 이혼했어. 그런데도 아직도 이러고 있는 의도가 뭔데?”“설마 이제 와서야 날 잃고 나니 사랑했던 걸 깨달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나한테 매달리겠다고요?”“그럼 당신 옆에 있는 그 귀한 서유라 씨는 어쩌고요?”남설아가 갑자기 비웃음을 터뜨렸다.그 시선 속엔 혐오와 조소가 뒤섞여 있었고 그녀의 차가운 눈빛은 서유라의 가슴을 단숨에 도려냈다.“서준아, 만약 정말 설아 씨를 사랑한다면 난 물러나도 돼.”“난 그저 널 좋아했을 뿐이야. 다른 건 바라지 않아. 만약 날 원하지 않는다면 그냥 솔직하게 말해.”서유라는 말을 하면서 눈물을 떨궜다.그러나 황급히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배서준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배서준은 그런 서유라의 모습을 보자 순간 가슴이 아려왔다.하여 곧바로 서유라의 허리를 감싸 안고 차가운 눈빛으로 남설아를 내려다봤다.“네 착각이야.”“나은이가 아니었다면 난 널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어.”그는 코웃음을 쳤다.“이 아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는 너도 알잖아. 그건 너 스스로 꾸민 일이었고 책임도 네가 져야 해.”“설아 씨, 난 설아 씨가 줄곧 서준이가 날 좋아하는 걸 질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를 이용해서 협박하는 건 선을 넘은 거야.”서유라는 가식적인 한숨을 쉬며 마치 안타까운 사람을 바라보듯 남설아를 내려다보았다.그 태도는 마치 ‘승자의 여유’라도 된 듯했다.그녀가 지금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오로지 남설아를 도발하기 위한 것뿐이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설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지금 이 순간 이 모든 게 한심하게 느껴졌다.‘이딴 여자 때문에 예전에 그렇게
서유라는 속이 뒤틀릴 듯한 기분이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서준아, 미안해. 내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그래. 결국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널 조금 덜 사랑했다면 설아 씨가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눈빛이 한층 부드러워지더니 배서준은 품 안의 여자를 바라보며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어딘가에서 피어오르는 미세한 불편함이 있었다.그가 감지한 것은 분명한 짜증이었지만 그것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그래서 당장은 억눌러야만 했다.곧바로 핸드폰 꺼내 그는 비서 안민재를 호출했다.“나은이가 어디 있는지 찾아봐.”“알겠습니다.”서유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배나은은 이미 죽었으나 배서준은 아직도 그것을 믿지 않는 듯했다.이제 슬슬 그에게 확실한 현실을 깨닫게 해줄 때였다.그 애물단지가 완전히 사라지기만 하면 더 이상 남설아와 배서준을 엮어줄 연결고리는 없어진다.그때가 되면 서유라, 그녀 자신이 ‘배씨 가문 사모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그러나 그 전에 지금 남설아가 너무 기고만장해져 있으니 한 번 제대로 본때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남설아는 떠나려 했다.그러나 일정 변경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기진맥진한 상태로 작은 집으로 돌아왔다.그런데 문을 열자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 기다리고 있었다.“삼촌... 삼촌이 여긴 왜 있어요?”남설아는 손에 쥔 열쇠를 힘껏 움켜쥐었다.표정은 싸늘했고 눈빛은 더욱더 날카로웠다.남도일은 그녀의 반응에 순간 얼굴이 굳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나는 네 외삼촌이야, 이 버릇없는 년아. 네 부모가 일찍 죽었어도 기본적인 예의는 가르쳐줬어야 하는 거 아니냐?”그러자 남설아가 단호하게 말했다.“우리 사이? 그런 거 이제 없어요.”“그리고 삼촌은 여기에 앉아 있을 자격조차 없어요.”오늘만큼은 참지 않기로 했다.남도일은 그동안 자기 말 한마디면 고분고분 따르던 조카가 이렇게까지 정면으로 맞서는 모습을 상상조
지금 그 사람도 곁에 없고 결혼도 끝나버린 마당에 이 쓸모없는 물건을 굳이 계속 가지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남설아는 단숨에 반지를 빼내어 던지듯 남도일에게 건넸다.“이게 집보다 훨씬 비싸요. 팔아서 삼촌 마음대로 써요. 하지만 앞으로 다시는 나한테 연락하지 마요.”“설아, 이럴 줄 알았다! 네가 이렇게 철이 들었을 줄이야. 네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나 아니겠어? 걱정 마,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삼촌이 꼭 지켜줄게.”“보아하니 요즘 살도 많이 빠졌더라. 삼촌이 맛있는 거 사줄까? 우리 오랜만에 같이 밥이나 먹자.”그가 갑자기 친절을 베풀자 남설아는 순간 주저했다.사실 어릴 적엔 정말 그와 가장 가까웠다.항상 삼촌을 따라다녔고 그때만큼은 누구보다 의지하던 존재였다.문득 시선이 벽에 걸린 오래된 가족사진으로 향했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녀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 끼 정도는 괜찮겠지.’그러자 남도일은 기다렸다는 듯 단숨에 남설아의 손목을 붙잡고 집을 나섰다.그의 시선은 오로지 저녁 식사에만 쏠려 있었고 남설아의 손에 남은 상처도, 무릎에 흐르는 피도,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았다.처음에는 단순히 가까운 곳에서 대충 한 끼 때우는 줄 알았다.그런데 막상 도착한 곳은 고급 레스토랑이었다.남설아는 순간적으로 손목을 뿌리치고 한 발짝 물러섰다.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남도일을 노려보았다.“돈 없다면서요? 그런데 이런 데서 밥을 먹겠다고요?”남도일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고작 밥값 정도야 내가 감당할 수 있지. 너는 내 하나뿐인 외조카잖아? 삼촌이 제대로 대접해야지.”그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남설아를 안으로 끌어들였다.문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익숙하게 VIP 룸 번호를 불렀다.그 말을 들은 직원은 잠시 남설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그런 다음 고개를 끄덕이며 방 안으로 안내했다.순간 남설아의 등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직원의 눈빛이 어딘가 이상했고 이 분위기도 이상
“네 삼촌이 나한테 4억을 빚졌어. 그래서 널 대신 넘기겠다고 하더군!”원길호의 눈빛엔 탐욕이 가득했고 거칠고 위압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손을 뻗어 그는 남설아의 턱을 움켜쥐고 찬찬히 얼굴을 살폈다. 그러더니 고개를 저으며 비웃었다.“좀 마른 게 흠이긴 한데 그래도 얼굴은 괜찮네. 4억으론 좀 아까운걸?”“아, 아니에요! 제발 함부로 굴지 마요! 제가 줄게요. 4억, 제가 마련할 수 있어요!”“그러니까 제발 그러지 마요!”눈물이 한순간에 쏟아졌다. 목소리는 떨렸고 두려움에 몸까지 굳어버렸다. 반사적으로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어 마구잡이로 화면을 눌렀다.핸드폰이 바뀌었어도 시스템 설정은 동일했다. 배서준이 긴급 연락처로 등록되어 있었고 통화가 자동으로 연결됐다.하지만 여러 번 시도해도 돌아오는 건 ‘연결할 수 없습니다’라는 차가운 안내음뿐이었다.원길호는 남설아가 도움을 요청하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전화기에서 반복해서 들려오는 기계음에 비웃음을 터뜨렸다.“애송아, 아무도 널 구하러 올 사람 없나 보네?”남설아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원길호는 짜증이 난 듯 거칠게 그녀의 옷깃을 잡아챘다. 그러더니 단숨에 테이블 위로 내동댕이쳤다.그 바람에 탁자 위에 있던 그릇과 젓가락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남설아는 바닥에 내리 찍힌 통증에 몸을 움츠렸지만 그보다 더 절박한 상황이 닥쳐오고 있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그녀는 벽 쪽으로 움츠러들었다.“제발 이러지 마세요. 제발, 제가 돈 줄게요. 정말로 줄 수 있어요!”그녀는 단출한 셔츠 한 장만 걸친 상태였는데 원길호의 거친 손길에 단추가 튕겨 나갔다. 앞쪽이 벌어지면서 하얀 피부가 드러났고 그녀 특유의 은은한 향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여자의 향기 때문일까 원길호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다시 다가가더니 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돈? 돈은 이미 많아. 난 지금 너를 원해.”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압적인 키스가 쏟아졌다.“안 돼요!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날 놔줘요!”남설아는 숨이
등 뒤로 싸늘한 기운이 스쳤다. 남설아는 다른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온몸을 비틀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러던 중 본능적으로 다리를 들어 올려 원길호의 급소를 가격했다.“끄윽!”원길호가 순간적으로 몸을 웅크리는 틈을 타 남설아는 재빨리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마침내 열린 문 너머로 탈출의 희망이 보였다.그러나 바로 그 순간 머리카락이 세차게 잡아당겨 졌고 이어지는 원길호의 손길이 거칠게 뺨을 내리쳤다.“계집애, 죽고 싶어 환장했냐?”“살려주세요!”“놔요! 제발, 놓으라고요! 건드리지 마요!”눈앞에 탈출구가 보이는데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남설아는 문틀을 양손으로 붙잡고 있는 힘껏 버텼다. 절대 놓칠 수 없었다.“살려달라고? 이 가게는 전부 내 거야. 누가 널 구해주겠는데?”“고분고분하면 좋게 넘어갈 일을 괜히 어렵게 만드는구나. 어디 한 번 맛 좀 봐야 정신 차리겠어?!”원길호는 이를 갈며 그녀의 손을 밟았다.거친 신발 밑에서 손등이 짓눌려 떨렸다. 하지만 손을 놓는 순간 희망도 사라질 걸 알기에 남설아는 끝까지 버텼다.“그래, 그렇게까지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다면 나도 상관없어.”원길호는 비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머리채를 세차게 잡아챘다. 손이 문틀에서 떨어지는 순간 남설아는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두피가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남설아는 이를 악물고 다시 바깥으로 기어가려 했다. 문까지 겨우 몇 발짝 거리였다. 그 마지막 희망을 놓칠 수 없었다.“정말, 내가 본 여자 중에서 가장 지독하게 버티는군.”원길호는 허리띠를 풀어가며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단숨에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거칠게 끌어당겼다.“놔줘요!”남설아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원길호는 이미 인내심을 잃은 상태였다.머리카락을 다시 잡아 올리더니 그는 연이어 뺨을 후려쳤다. 뺨에 화끈한 통증이 번졌다.그리고 곧바로 원길호는 그녀를 테이블 위에 거칠게 던졌다.그의 손이 무자비하게 옷을 헤집었다. 차가운 공기가 닿는 순간 남설아
하지만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남설아는 스스로 억눌렀다.울 자격조차 없는 자신이 무슨 권리로 그의 품에 기대 울 수 있단 말인가?강연찬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조수석에 앉혔다. 얼굴을 눈물로 범벅이 된 채 웅크린 남설아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그만 울어. 병원부터 가자.”“나... 지금 너무 처참하지 않아?”남설아는 이미 답을 알면서도 그렇게 물었다.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지만 그 안에는 씁쓸한 자조가 가득했다.그러나 강연찬은 단호하게 말했다.“괜히 버티려 하지 마. 울고 싶으면 그냥 울어.”이 말을 하면서 그는 일부러 오디오의 볼륨을 최대로 높였다.“흑흑!”결국 남설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조수석에서 몸을 웅크린 채 오열했다.강연찬은 묵묵히 운전대를 잡았다.커다란 음악 소리 속에서도 그녀의 울음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절망과 슬픔이 뒤섞인 흐느낌이 그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이를 악물었다.‘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돌아올걸.’남설아가 이런 일을 겪게 놔둘 바엔 차라리 모든 걸 내팽개치고서라도 곁에 있어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 도착했다.남설아는 이미 울음을 멈추고 차분해진 상태였다.조용히 문을 열고 내리려던 순간 강연찬이 한걸음에 다가오더니 다시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나 혼자 걸을 수 있어. 그러니까...”“닥치고 가만히 있어.”강연찬은 단호하게 말을 끊고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병원 안으로 걸어갔다.곧바로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찌르자 남설아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익숙하지만 너무나도 싫은 냄새였다.곧이어 간호사와 의사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상처 위로 소독약이 떨어지는 순간 남설아는 반사적으로 강연찬의 손을 꽉 붙잡았다.이내 수많은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그들은 대학 동기였는데 강연찬은 대학교 2학년 때 유학을 떠났다.그때부터 그녀가 마음에 품었던 감정들은 영영 묻혀버렸다.그러다 배서준을 만나 배나은을 가지게 되었다.그렇게 미처 꺼내 보지도 못한 사랑은
남설아는 뼈가 부러진 통증이 온몸을 찌를 듯했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그때 강연찬이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네 폰 계속 울리고 있어.”화면을 내려다보자 걸려온 번호가 눈에 들어왔다.남설아는 비웃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옆으로 던져버렸다.‘필요할 때는 없더니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어?’반면 배서준은 통화가 일방적으로 끊어진 화면을 보며 얼굴이 어둡게 굳어졌다.‘정말 끝까지 건방지군. 예전부터 내가 베푼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더니 이제는 대놓고 무시하는 건가.’그때, 비서인 천기준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대표님, 말씀하신 사항 다 조사해 왔습니다.”천기준은 머뭇거리며 조사 자료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사망 진단서, 화장 증명서, 병원 기록까지 모두 확인했습니다. 아가씨는... 확실히 세상을 떠났습니다.”말을 마치자마자 천기준은 한발 물러섰다.혹여나 폭풍이 몰아칠까 봐 미리 거리를 두려는 것이었다.배서준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책상 위의 서류들을 급히 뒤적이며 사실을 확인하더니 얼굴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곧이어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탁 던지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어쩜 이렇게 빨리!”나은이가 골육종을 앓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렇게까지 빨리 떠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이제야 떠오른 기억들이 차갑게 가슴을 내려 앉혔다.그날 남설아가 이혼을 조건으로 단 한 달만 나은이와 함께 있어 달라고 했던 일, 그녀가 그토록 애원하던 이유가 이제야 이해되었다.“남설아 지금 어디 있어?”배서준은 차갑게 비서에게 시선을 돌렸다.그러자 천기준은 급히 태블릿을 열어 위치를 확인했다.“지금... 제일병원에 있습니다.”“바로 제일병원으로 가지.”배서준은 더 이상 서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아이의 마지막 순간이 어떠했는지조차 관심이 없었다.만약 그때 1억 2000만 원이 있었다면 배나은은 그렇게 빨리 떠
그는 줄곧 자신과 남설아는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 생각해왔지만 지금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강연찬이 회복되자 모두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특히 남설아는 그동안 불안했던 마음을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었다.한편, 멀리 리조트에 머무르고 있던 서유라는 무척 불안하고 초조했다.서도현은 자신이 보낸 사람들이 전부 체포되어 한 명도 빠짐없이 구속되었다는 정보를 이미 입수했다. 남설아가 다치지 않은 것도 모자라 다친 사람마저 회복되었으니 그동안 벌인 모든 일이 헛수고가 되고 만 것이다.“뭐라고? 강연찬이 회복했다고?”서유라의 목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로웠다.“그 사람들이 엄청 대단하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여자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남설아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여자잖아. 그런데도 그 여자 하나 못 건드려서 이 지경이 된 거야? 돈을 그렇게 많이 받고는 뭐 하겠다는 거야? 적은 돈이 아니었잖아.”서도현은 배서준의 감시를 피해 몰래 리조트 안으로 숨어들어와 서유라와 만났다.그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누나, 나도 최선을 다했어. 그놈들이 이런 일 하나도 제대로 못 할 만큼 이렇게 쓸모없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 그래도 다행인 건 그놈들이 입이 무지하게 무겁다는 거야. 지금껏 한마디도 안 했어. 나도 계속 지켜볼 거니까 우리한테 불똥이 튀게 두진 않을 거야.”“쓸모없는 놈들! 전부 다 쓸모없어!”서유라는 온몸을 떨며 분노했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어 바닥에 힘껏 내던졌다.“이제 어떡해? 강연찬이 회복됐다고? 혹시 이 일을 남설아한테 말하면 어쩌려고? 남설아가 알게 되면, 나는...”“누나, 진정해봐.”서도현은 급히 달래며 말했다.“강연찬이 회복됐다고 해도 우리가 한 짓이라는 증거는 없어. 게다가 그 킬러들은 내가 따로 구한 사람들이라서 우리랑 직접적인 연결 고리는 없어.”“그래도...”서유라는 여전히 불안했다.“남설아 그 여자는 워낙 교묘해서 무슨 단서라도 찾아내게 되면 우리는 순식간에
“알겠어.” 송우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희가 그렇게 말한다면 따를게.”“우민아, 고마워.” 남설아가 말했다.“네가 얼마나 복수를 원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우리는 냉정해야 해. 감정에 휘둘리면 안 돼.”“응, 알아.” 송우민이 고개를 끄덕였다.“너희 계획에 최선을 다해 도울게.”“좋아.”남설아가 미소 지었다.“우린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야.”세 사람은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더 논의한 후, 각자 맡은 일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연회가 끝난 후, 남설아는 사무실로 돌아와 밀린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그때 강연찬이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들어왔다.“설아야, 우유 좀 마시고 일찍 쉬어.”강연찬이 우유를 건네며 말했다.“요즘 너무 무리하고 있어. 몸을 챙겨야지.”“응, 고마워, 오빠.”남설아가 우유를 받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오빠도 일찍 쉬어.”“난 안 피곤해.” 강연찬이 말했다.“너 일 마칠 때까지 같이 있어 줄게.”“괜찮아, 오빠. 몸도 아직 완벽히 회복된 건 아니잖아. 푹 쉬는 게 좋아.”남설아가 말했다.“이 서류들은 나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어.”“그래도 옆에 있어 줄게.”강연찬이 말했다.“너도 너무 늦지 않게 마무리하고 쉬어.”“응, 알겠어.”강연찬이 나간 뒤에도 남설아는 계속해서 일을 처리했다.그녀는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더 강해져야만 배서준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나은이를 위해 복수할 수 있었다.깊은 밤이 되어서야 남설아는 마침내 모든 서류를 정리했다.그녀는 기지개를 켜면서 창가로 가서 불빛이 번쩍이는 도시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나은아, 보고 있어?”남설아는 혼잣말처럼 속삭였다.“엄마가 반드시 복수할 거야. 기다려줘.”다음 날, 남설아는 이른 아침부터 회사에 출근했다.그녀는 회사의 핵심 팀을 소집해 다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여러분, 우리 그동안 좋은 성과를 거뒀지만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남설아가 말했다.“배건 그룹은 지금 위기에 처해 있지만
“선배...”남설아는 강연찬을 바라보며 가슴 깊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송우민은 두 사람 사이의 다정한 분위기에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기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편이 허전했다.연회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던 중, 남설아가 잔을 들어 모두와 함께 축하의 건배를 하려는 찰나 강연찬이 재빨리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막았다.“설아야, 요즘 너무 무리했잖아. 술은 좀 줄여.”강연찬의 목소리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남설아는 그의 따뜻한 눈빛을 마주하며 마음이 포근해졌다.하여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대신 주스를 들었다.“알겠어. 선배 말 들을게.”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그 광경을 본 송우민은 잔을 들고 조용히 다가왔다.“남설아, 내가 한 잔 올릴게.”송우민은 잔을 들며 말했다.“이번 성공, 정말 축하해.”남설아는 주스를 들고 잔을 맞댔다.“고마워, 우민아.”남설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네 도움이 없었으면 이렇게 빠르게 결과를 얻진 못했을 거야.”“우린 친구잖아. 서로 도와야지.”송우민은 웃으며 말했다.“근데 정말 대단하다. 네가 이렇게 멋진 사람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우민아, 너무 띄우지 마.”남설아는 조금 쑥스러워하며 웃었다.“운이 좋았을 뿐이야.”“그건 아니지.”송우민은 단호히 말했다.“너의 실력, 결단력, 배짱, 모두 내가 본 사람들 중 최고야.”“그 얘기는 그만하고...”남설아는 말을 돌리며 미소 지었다.“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해보자.”“좋아.”송우민이 고개를 끄덕였다.“남설아, 내 생각엔 지금이 기회야. 우리가 배건 그룹을 한 방에 무너뜨리고 배서준한테 확실하게 복수해야 해!”그의 눈빛에는 분노와 집념이 가득했다.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배서준을 단죄하고 싶은 듯했다.그러나 강연찬은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난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왜?”송우민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지금 배건 그룹은 거의 끝장난 상태잖아. 이
“서준아, 나 너무 힘들어...”서유라는 침대에 누운 채 핏기없는 얼굴로 힘없이 중얼거렸다.“유라야, 어디 아파?”깜짝 놀란 배서준은 침대로 다가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온몸이 다 불편하고 아파...”서유라는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얼른 의사 부를게!”배서준은 급히 몸을 일으키며 나가려 했다.“안 돼...”하지만 서유라가 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의사 부르지 마. 나 병원 가기 싫어...”“근데 지금 상태가... 그냥 둘 수 없잖아.”배서준은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정말 괜찮아. 그냥... 네가 곁에 있어 주면 돼...”서유라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겠어, 옆에 있을게.”그렇게 배서준은 서유라의 손을 살며시 잡고 말했다.“아무 데도 안 갈게. 여기서 널 지킬 거야.”“응...”서유라는 그의 품에 기대며 살짝 웃었고 그 입가엔 희미하지만 분명한 만족감이 스쳐 지나갔다.배서준은 서유라의 달콤한 말과 애정 어린 행동에 완전히 빠져 있었고 그녀의 진짜 속내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여전히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있었다.한편, 남설아의 세심한 간호 아래 강연찬의 몸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그는 점차 회사 일에도 다시 참여하기 시작했고 남설아와 함께 나란히 전선에 서며 경영에 힘을 보탰다.그 사이 남설아는 잇따라 중요한 프로젝트들을 따내며 사업적으로 완전한 전성기를 맞이했다.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성과가 이어졌고 배건 그룹은 연일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이러한 성과를 기념하고 고생한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남설아는 대규모의 축하 연회를 열기로 했다.연회는 고급 호텔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고 현장은 화려하게 꾸며졌으며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직원들은 모두 정장을 차려입고 참석했고 모두의 얼굴엔 성취와 기쁨이 가득했다.그들은 서로 잔을 부딪치며 축하했고 성공의 기쁨을 나누었다.남설아는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한가운데에 서서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천기준은 조용히 배서준의 현재 상황과 결정을 남설아에게 전했다.“대표님, 이제 배 대표님은 완전히 사방에서 외면당하고 있습니다.”천기준의 말투에는 깊은 체념과 실망이 묻어났다.“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그 여자 곁에 붙어 있으려 하네요.”“후, 그야말로 자업자득이죠.”남설아는 비웃듯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자기가 아직도 예전처럼 뭐든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착각하나 본데 지금의 배서준은 그냥 여자한테 정신 팔린 멍청이일 뿐이에요.”“대표님,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천기준이 물었다.“지금처럼 그 사람이 회사에 없는 틈이야말로 우리가 움직일 절호의 기회입니다.”“당연히 병들었을 때는 끝장내는 게 기본이죠.”남설아의 눈빛엔 싸늘한 결의가 번뜩였다.“이젠 그 인간도 잃는 게 뭔지 뼈저리게 느껴봐야 해요.”“역시 대표님답습니다.”천기준이 말했다.“지시하신 대로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좋아요.”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 듯 말했다.“기억해요. 이번엔 반드시 속전속결로, 숨 돌릴 틈도 주지 마요.”“네, 대표님!”남설아와 송우민이 손을 잡고 본격적으로 움직이자 배건 그룹의 위기는 한층 더 깊어졌다.남설아의 회사는 굶주린 늑대처럼 배건 그룹의 시장을 빠르게 잠식했고 원래 배건 그룹 쪽에서 따냈던 주요 프로젝트들마저 차지해버렸다.그 결과, 배건 그룹의 주가는 폭락했고 시가총액은 대폭 줄어들었으며 고객사들은 잇따라 이탈했고 사내 분위기는 혼란과 불안으로 가득 찼다.주주들의 손실은 상상을 초월했고 배서준에 대한 불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배서준, 진짜 쓸모없네!”“회사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도 어떻게 대표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지?”“당장 끌어내려야 해!”“그래! 더는 회사 말아먹게 놔두면 안 돼!”분노한 주주들의 외침은 마치 화산처럼 폭발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천기준은 그 상황을 남설아에게 보고했고 남설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내렸다.“계속 감시해요. 그 둘이 무슨 짓을
천기준은 눈앞의 광경을 보며 깊은 무력감에 휩싸였다.소파에 앉은 배서준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고민에 잠겨 있었고 서유라는 그의 곁에 꼭 붙어 앉아 힘없이 기대어 있었다.“대표님, 이대로는 안 됩니다!”천기준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지금 회사 상황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더 늦기 전에 돌아가셔서 직접 수습하셔야 합니다. 이러다 진짜 배건 그룹이 무너집니다!”“근데 유라가 지금 몸이 안 좋아. 어떻게 이럴 때 내가 유라를 혼자 두고 가겠어.”배서준의 말투에는 깊은 피로와 한숨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대표님...”천기준이 설득을 이어가려던 순간, 서유라가 조용히 말을 가로막았다.“서준아, 천 비서님 탓하지 마.”서유라의 목소리는 마치 곧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나약했다.“회사 일이 중요한 건 나도 알아. 그냥 돌아가. 난 괜찮아.”“유라야, 무슨 소리야.”배서준은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제일 중요한 건 네 건강이야. 내가 어떻게 널 놔두고 가.”“그래도...”서유라의 눈가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내가 네 일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 미안해.”“바보야, 너 하나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어.”배서준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회사 일은 내가 방법을 찾을게.”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천기준은 속으로 실소를 터뜨렸다.‘정말 기가 막히네. 내가 본 배 대표님 중에 제일 한심한 버전이야. 예전엔 그렇게 단호하고 냉정했던 사람이 이젠 여자가 곁에만 있으면 정신줄을 놓고 있잖아.’“대표님, 진짜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천기준은 다시 입을 열었다.“주주들은 이미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어요. 계속 이렇게 계시면 정말로 해임당합니다!”“알아, 나도 알아.”배서준은 초조한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그렇지만 유라가...”“서준아, 돌아가.”서유라가 조용히 말했다.“나 혼자서도 괜찮아.”“유라야, 너 지금...”배서준은 놀란 눈으로 서유라를 바라봤다.“정말
“네.”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명심해요. 이 일은 최대한 시끄럽게 만들어요. 배서준이 모두의 표적이 되도록 말이에요.”“알겠습니다, 대표님. 바로 처리하겠습니다.”천기준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남설아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싸늘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봤다.‘배서준, 당신이 의리를 저버렸으니 나도 더는 자비를 베풀지 않을 거야.’곧이어 배서준이 리조트에서 서유라와 밀회를 즐기고 있다는 소문이 각종 언론을 통해 퍼지기 시작했다.여론은 순식간에 들끓었고 배서준의 이미지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무능하다’, ‘책임감 없다’는 비난이 쏟아졌다.“배서준, 진짜 너무하네!”“회사는 지금 무너지고 있는데 밖에서 여자나 만나고 앉았어?”“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표 자리에 앉혔는지 이해가 안 가.”“저 사람한테 회사를 맡긴 게 큰 실수였지.”“이참에 그냥 물러나게 해야 돼!”결국 회사는 긴급 주주총회를 소집했다.얼마 전, 배서준이 자신의 자금을 담보로 위기를 넘기겠다고 한 뒤 감쪽같이 사라졌고,오히려 남설아가 한발 물러나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간신히 버텨온 상황이었다.하지만 정작 의사결정을 할 실권자는 자리에 없고 남은 이사들은 완전한 권한도 없는 상태라 회사 운영은 갈수록 마비되어가고 있었다.거기에 이번 스캔들까지 터지자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됐다.“이게 지금 어느 땐데 여자를 챙겨?! 본인 위치도 잊었나?!”“천 비서님, 배 대표님 떠나기 전에 천 비서님한텐 아무 말도 안 하고 갔어요?”천기준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사실 함께 일한 지 오래됐지만 배서준이 모든 걸 공유하진 않았다.“지금 당장 리조트로 가서 배 대표님 데려와요!”한 이사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든 끌고 와야 해요. 회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요!”“네, 이사님. 바로 다녀오겠습니다.”천기준은 피곤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답했다.‘정신적으로 남 대표님한테 매일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 두 사람을 만나러 내가 가야 한다고? 이게 대체 무
“서준아, 제발 이번만은 내 말 들어줘, 응? 그냥 나를 위해서 우리 미래를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잠깐이라도 푹 쉬면 안 돼?”서유라는 눈물을 글썽이며 배서준을 올려다봤다.그 애처로운 눈빛에 배서준의 마음도 조금씩 흔들렸다.“알겠어, 네 말대로 할게.”결국 배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서유라는 곧장 환하게 웃으며 배서준을 꼭 껴안았다.“역시 나를 제일 아껴주는 사람은 서준이 너야.”배서준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안아주었지만 눈빛은 복잡하기만 했다.회사의 상황은 이미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남설아와 송우민의 공격은 날이 갈수록 거세졌고 배건 그룹의 주가는 연일 하락 중이었다.시장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고 내부는 불안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대로라면 배건 그룹은 정말 그의 손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서유라의 모습을 보면 차마 그녀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배서준의 가슴속은 끝없는 갈등과 번민으로 뒤엉켰고 도대체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었다.그때, 그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이번엔 천기준이었다.배서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배 대표님, 도대체 언제 돌아오실 겁니까?”천기준의 목소리엔 조급함과 절박함이 가득 묻어났다.“지금 회사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에요. 주주들도 다 대표님만 기다리고 있습니다!”“나, 나도 지금...”배서준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서유라가 손을 뻗어 전화기를 낚아챘다.한편, 천기준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통화 종료’ 소리에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그는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리찍을 듯 내려놓으며 이를 악물었다.“이 서유라란 여자는 정말 재앙이라니까!”천기준은 이를 갈듯 말했다.“배 대표님도 왜 저 여자 말만 듣는 건지...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도 모르나?”곁에 있던 다른 비서도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천 비서님, 우리 이대로 괜찮을까요? 주주들한테 뭐라고 설명해야 하죠?”“설명할 방법이 어딨어요...”천기준은 허탈하게 웃으며 고
“네, 송 대표님!”모두가 힘찬 목소리로 외쳤고 회의실 안은 결의에 찬 열기로 가득 찼다.송우민의 지휘 아래 남설아의 회사는 굶주린 늑대처럼 배건 그룹의 시장을 거침없이 잠식해 들어갔다.배건 그룹의 주가는 연일 하락했고 시가총액은 크게 줄어들며 내부 분위기는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흩어진 조직력에 동요하는 임직원들 사이로 불만이 번졌고 결국 주주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배서준에게 줄줄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배 대표님, 도대체 언제 돌아오실 겁니까?”한 주주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이 완전히 개판이에요! 더 늦으면 정말 끝장납니다!”“맞아요, 대표님! 이대로 가다간 정말 회복 불가능합니다!”또 다른 주주도 강하게 덧붙였다.“지금 당장 돌아와서 진두지휘하셔야 합니다!”끊임없이 쏟아지는 전화에 배서준은 머리를 싸매고 이마를 짚었다.그 역시 당장 회사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문제는 서유라였다.그녀는 절대 그를 보내려 하지 않았다.“서준아, 가지 마...”서유라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배서준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나 너무 힘들어. 옆에 있어 줘야 버틸 수 있어.”“유라야, 네가 힘든 거 알아. 하지만 회사도 지금...”배서준은 난처한 얼굴로 말을 흐렸다.“몰라! 나한테 중요한 건 네가 곁에 있어 주는 거야! 너 없이 나는 단 하루도 못 버텨!”서유라는 울먹이며 소리를 질렀다.“그런 말 하지 마.”배서준은 가슴 아프다는 듯 그녀를 껴안았다.“널 내버려 두고 갈 수 없지. 하지만 회사 쪽 상황도 정말 더는 미룰 수가 없어.”“결국 날 버릴 거지? 날 두고 가겠다는 거잖아!”서유라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며 말했다.“내 몸은 누가 챙겨? 나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해... 넌 가면 안 돼!”“유라야, 그러지 마.”결국 배서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좋아, 당분간은 여기 있을게. 회사 일은 전화랑 화상회의로 처리할 테니까 괜찮지?”“진짜지?”서유라는 눈물로 젖은 눈을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