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설아의 말을 들은 강연찬은 조용히 손을 거두고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좋아, 그럼 널 기다릴게.”이것이 배서준과 강연찬의 차이였다. 배서준은 오직 자기 자신만 생각했고 남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연찬은 존중했고 기다려 주었다.그런 그를 바라보며 남설아의 마음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선배, 돌아가. 앞으로의 일은 내가 잘 처리할게요.”“응.”강연찬은 억지로 머물지 않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남설아의 뺨을 쓰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문을 향해 걸어갔다.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남설아는 팔로 스스로를 꼭 감싸 안으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이내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다음 날 아침 배서준이 다시금 히아신스를 들고 찾아와서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늘은 어떤 것 같아?”그의 얼굴에는 한없이 다정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마치 남설아가 그의 세상 전부라도 되는 것처럼.예전 같았으면 남설아는 이런 그의 태도에 마음이 설렜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그의 본모습을 알고 있는 이상 이런 가식적인 모습이 우스울 뿐이었다.늦어버린 사랑과 관심은 하찮기 짝이 없었다. 하물며 그마저도 가짜라면 아무 가치도 없는 법이었다.남설아는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대체 뭘 원하는 거예요?”“네가 아이를 원하는 거 알아.”“임신하게 해 줄게.”그는 마치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진지한 표정을 지었고 마치 그녀에게 크나큰 은혜라도 베푸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그 오만한 모습이 역겨워 견딜 수 없었다!남설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이를 악물었다.“난 지금 몸 상태가 안 좋아요. 아이 가질 수 없어요. 그리고… 당신도 아이 싫어하잖아요. 굳이 억지로 만들 필요 있겠어요?"“남설아, 대체 뭘 바라는 거야?”배서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남설아가 전혀 기쁘지 않다는
배서준이 떠난 후 남설아는 책상 위의 히아신스를 그대로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역겨울 따름이었다!하지만 남을 불쾌하게 만드는 일이라면 그녀도 꽤 능숙했기에 그대로 위층으로 올라가 서유라의 방으로 향했다.지금 그녀 주변의 모든 사람은 강연찬이 미리 손을 써 둔 상태였으니 서유라를 만나는 것도 문제없었다.방에 들어서자마자 남설아는 팔짱을 낀 채 의자에 앉아 서유라를 비웃듯 바라보았다.“배서준의 운명적 사랑이 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어?”“남설아, 이 천박한 년아! 넌 천하의 개자식이야! 잔인하고 간교한 악녀라고!”서유라는 남설아를 보자마자 치를 떨며 이를 갈았고 욕설도 모자라 그녀를 저주하기까지 했다.예전 같았으면 남설아는 묵묵히 참거나 애써 못 들은 척했을지도 있었다. 하지민 지금은 가만히 당하기만 할 남설아가 아니었기에 그녀는 한 걸음 성큼 다가가 그대로 서유라의 뺨을 후려쳤다.“천박해? 대체 누가 천박한 년인데? 배서준은 가정이 있고 와이프도 자식도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창피한 줄도 모르고 달라붙은 건 너야. 진짜 뻔뻔한 건 너라고!”“잔인하다고? 감히 그런 말이 네 입에서 나와? 네가 뭘 했는지 모를 거라고 생각해? 나은이가 떠난 날 일부러 배서준을 붙잡아 둔 거 다 알아!”남설아는 그 일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분노로 터질 듯했다.서유라는 평소에도 늘 약한 척 가련한 척하며 동정을 샀지만 남설아는 그녀가 겉으로만 착한 척할 뿐 속은 시커먼 위선자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 모든 연약함은 고작해야 거짓된 가면일 뿐이었다.서유라는 눈앞의 남설아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언제나 비굴하게 당하기만 하던 남설아가 이렇게까지 날카로운 칼날을 세울 줄이야.서유라는 분을 참지 못한 채 이를 악물고 쏘아붙였다.“남설아, 배서준의 마음속엔 오직 나뿐이야. 그런데 네가 감히 나한테 이런 수모를 주겠다고? 좋아, 두고 봐.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내가 직접 배서준에게 이혼하라고 시킬 거야!”“내가 이혼을 두
문 앞에 서서 안에서 들려오는 서유라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남설아는 온몸이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배서준도 똑같이 당해봐야 마땅했다.자신의 병실로 돌아오자 네 명의 스타일리스트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서자마자 모두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고 그중에서도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사모님, 저는 인성훈입니다. 오늘 스타일링을 맡게 되었습니다.”“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드레스와 액세서리입니다. 마음에 드시는 걸로 고르시면 됩니다.”인성훈이 뒤에 준비된 물품들을 가리켰는데 모두 최고급 명품 브랜드의 제품이었고 보석들은 국보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값비싼 것들이었다.그것들을 바라보며 남설아는 이번 기자회견과 저녁 연회가 꽤 중요한 행사라는 걸 직감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배서준이 이렇게까지 공을 들일 리가 없었다.그는 철저한 사업가라 이익이 보장될 때만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가장 비싼 걸로 할게요.”이미 차려진 밥상이라면 기꺼이 누릴 생각이었다. 지금 당장 배서준을 어떻게 할 수는 없어도 엿 정도는 먹일 수 있으니까.인성훈은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이전까지 남설아는 언제나 소극적이었고 선택하는 것도 최대한 보수적이며 저렴한 것들이었다. 그 때문에 스타일리스트들 사이에서도 그녀가 촌스럽고 격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 종종 오갔다. 배서준의 와이프로서의 품격이 부족하다는 수군거림까지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고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렬했다.그런 변화가 반갑기라도 하듯 인성훈은 망설이지 않고 강렬한 붉은색 드레스를 꺼냈다.이 드레스는 착용자의 몸매를 완벽하게 드러내는 디자인이었다. 노출이 상당한 편이었으며 특히 등이 거의 전부 드러나는 과감한 스타일이었다. 입어보지 않았는데도 남설아는 이 드레스가 얼마나 대담한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그녀는 앞으로 나아가 드레스를 바라보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
가볍게 화장을 마치자 더욱 완벽하고 세련된 얼굴이 드러났다. 인성훈은 자신의 작품을 보며 몹시 흡족해했다.그들은 분명 뛰어난 실력을 가진 스타일리스트였지만 그래도 타고난 외모가 좋은 사람을 손보는 게 더 즐거웠다. 없는 걸 창조하는 것보다 있는 걸 살리는 게 훨씬 쉬웠고 효과도 확실했으니까.마치 화장을 안 한 듯하면서도 완벽한 변화를 주는 것, 그게 바로 최고의 경지였다.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던 남설아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사실 그녀는 원래는 이렇게 눈에 띄는 색감을 좋아했었는데 배서준과 함께한 후부터 그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점점 자신의 색을 지워나갔다. 그가 저속하다고 평가한 후 무의식적으로 그의 눈치를 보며 칙칙한 색의 옷들만 골라 입게 됐다. 이제 와 돌아보니 그때는 자신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걸 전혀 깨닫지 못했다.“이거 아주 마음에 드네요, 계산은 배서준한테 하라고 하세요.”남설아는 당당하게 말했다.이 정도 돈은 배서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그 이상의 가치를 돌려줄 터였고 배서준이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으니까.거울 속 자신을 다시금 찬찬히 바라보던 남설아는 문득 자신이 상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배건 그룹.배서준은 곧바로 도착한 4억의 명세서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뭐야 이게?”“사모님께서 오늘 저녁 파티에 입을 드레스와 주얼리입니다.”천기준이 담담하게 보고했다.그는 오랫동안 배서준을 보좌해 왔지만 사모님이 이렇게 큰돈을 쓴 건 처음이었다.하지만 따지고 보면 같은 급의 사모님들은 매달 이 정도는 기본으로 지출하고 있었다.남설아가 배서준의 와이프로 살면서 감정적으로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배서준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불쾌하게 중얼거렸다.“이제 돈 쓰는 재미라도 붙인 건가?”솔직히 그녀가 이 정도를 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지금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면 자기한테도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기에 결국 마지못해 결제 서명을 했다.‘그래
“그래요? 이게 바로 방금 국제 슈퍼모델이 런웨이에서 입은 신상인데 뭐가 가볍다는 거죠?”“정말 고지식하다니까요.”남설아는 대놓고 눈을 굴리며 그의 가스라이팅을 단칼에 거절하고 한 마디로 맞받아쳤다.이건 정말 전례 없는 일이었다. 예전에는 배서준이 뭐라고 하면 그대로 따라야 했고 그는 온갖 방식으로 남설아를 깎아내렸지만 그녀는 감히 반박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스스로를 의심하며 자신이 정말 잘못한 게 아닌지 반성하곤 했다.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남설아는 더 이상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그녀도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니라 그저 사람이 잘못됐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아까 스타일리스트들조차 예쁘다고 감탄했는데 유독 이 남자만 혼자 시커먼 얼굴을 하고 불만을 늘어놓고 있었다. 정말이지 감도 없고 분위기나 망치는 수준이었다.배서준도 자신이 단 두 마디 던졌을 뿐인데 이렇게나 많은 말을 되돌려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그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남설아, 이게 네 새로운 수법이야? 이렇게 해서 내 관심이라도 끌어보겠다고? 헛꿈 꾸지 마.”“대체 누가 꿈을 꾸는 건지 모르겠네요. 갈 거예요 말 거예요?”남설아는 완전히 인내심이 바닥났다.오늘 화장이 너무 잘 돼서 이미지 망가질까 봐 참는 거지, 아니었으면 지금 당장 배서준의 대가리에 하이힐을 내리꽂았을 것이었다.‘보는 눈 하고는? 안과나 좀 가보시지? 대표라는 사람이 병 보일 돈은 없는 거야?’돈은 그렇게 많으면서 병원 갈 생각은 안 하나?속으로 배서준을 온갖 욕설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 후 그녀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그대로 지나쳤다.‘지금 여기 기자들도 없는데 쇼를 할 필요가 없잖아?’솔직히 남설아는 이제 배서준이 그냥 싫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혐오로 변해버렸다!이 남자와 닿기만 해도 역겨울 지경이었지만 배건 그룹의 핵심 자료를 손에 넣고 원래 자기 것이었던 걸 되찾기 전까지는 참아야 했다!남설아는 배서준 따위를 마음에서 지워버리기만 하면 인생이 이렇게도 평온할 수 있다
이게 바로 남설아가 원하던 결과였다. 서유라가 이제 와서 평온한 나날을 보내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남설아와 배나은을 끊임없이 괴롭히며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게 만들었으니 이제는 그 고통을 똑같이 돌려받을 차례였다. 이제는 서유라가 밤잠 한 번 제대로 못 이루는 게 어떤 기분인지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이다!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지만 남설아는 여유롭고 품위 있는 태도로 대응했다. 그 덕분에 그녀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한층 더 올라갔다. 이 기회를 틈타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공식적으로 밝혔고 자신이 단순히 배서준의 와이프가 아니라 스스로 빛나는 사람이라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남설아에게 이번 일은 절호의 기회였다. 그녀는 온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고 싶었다. 더 이상 배서준의 와이프 따위로 불리고 싶지 않았다!행사장은 그녀의 주도 아래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배서준은 그런 그녀를 곁에서 지켜보며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남설아가 그저 슈퍼에서 채소와 과일 가격이나 따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이토록 능숙하게 상황을 이끌어가는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어쩐지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배서준은 지금의 남설아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예전의 그녀는 자아도 개성도 없었고 아이와 남편만을 위해 존재하는 그야말로 영혼 없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배나은이 떠난 후 그녀는 마치 껍질을 깨고 나온 듯 눈부시게 변해버렸는데 그 모습이 너무 낯설고 또 너무도 빛났다.배서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보호하며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함께 차에 올랐다.차가 한참을 달린 후에야 남설아는 배서준이 여전히 자신의 손을 잡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하며 즉시 손을 빼냈다.“대표님, 이 뉴스가 곧 인터넷을 도배하겠네요. 당신 애인이 보고 질투하는 거 아니에요?”“만약 그녀가 질투라도 해서 난리를 치면 난 두 번 다시 도와줄 생각 없어요.”그녀는 차 안에서 자세를 바꿔 의도적으로 그와 거리를 벌렸다.남
카메라 앞에서 남설아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대범한 태도를 보였다. 사적인 문제를 들킨 당혹스러움 따위는 전혀 없어 보였고 마치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 듯했다.원래 배서준은 이렇게 분별 있고 프로페셔널한 태도의 남설아를 원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생기 없는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부터 어딘가 불쾌한 감정이 피어올랐다.예전엔 그녀가 모든 관심을 자신에게 쏟는 게 가장 싫었는데 이제는 아예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는 상황이 되자 오히려 더 견디기 힘들어졌다.“사모님, 서유라 씨와 대표님의 관계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서유라 씨는 서유라 씨일 뿐이지만 저는 사모님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서준 씨는 제 곁에 있죠. 이보다 더 명확한 답이 있을까요?”남설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배서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기자들 앞에서 열 손가락을 깍지 끼고 커다란 제스처로 결혼반지를 과시했다.사실 그녀의 반지는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렸기에 지금 손에 낀 건 그냥 온라인 쇼핑몰에서 산 저가형 짝퉁일 뿐이었고 그야말로 한 푼의 가치도 없는 물건이었다.배서준은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는데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의 눈빛도 어느새 부드러워졌고 남설아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은근한 온기와 묘한 감탄이 서려 있었다.애초에 사람들은 이 해명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하지만 이 장면이 생방송으로 송출되자 배서준의 눈빛을 따로 편집한 짧은 영상들이 각종 SNS를 뒤덮었다. 수많은 크리에이터들이 이를 활용해 2차 콘텐츠를 만들어냈고 이윽고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그 결과 전 국민이 배서준의 가짜 정체성과 가식적인 다정함에 현혹되어 버렸다. 일부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어떤 이들은 심지어 부러워하며 감싸기까지 했다.온라인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홍보팀에서 올린 피드백을 확인한 천기준은 이번 이미지 세탁이 꽤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직감했다. 배건 그룹이 직면한 명예 실추 위기도 일단락된
원래는 긴급한 일이었지만 배서준은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다지 급해 보이지 않았다.그는 잠시 멈춰 서서 남설아를 힐끗 바라봤다. 그녀가 왜 갑자기 더 이상 자기에게 휘둘리지 않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 시선을 느낀 남설아도 똑같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결국 손을 휘휘 내저었다.“살펴 가세요. 배웅은 못하겠네요.”“올 때까지 기다려.”배서준은 단호하게 말을 던지고는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남설아는 코웃음을 치며 옆에 서 있던 천기준에게 시선을 돌렸다.“뭘 멍하니 서 있어요? 당장 차 준비해요. 우리 늦으면 안 돼요.”“하지만 사모님, 대표님이 기다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천기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언제부터 사모님이 이렇게 자기주장이 강했지?’남설아는 그런 천기준의 반응이 우습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그쪽 대표님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요? 돌아올 것 같아요?”이런 일이 처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동안 약속의 대상이 배나은이었을 뿐.하지만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었다. 처음엔 나은이가 순진하게 기다리곤 했지만 몇 번을 겪고 나니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그러나 어린이들은 감정을 잘 숨기지 못했기에 남설아는 나은이가 매번 기다림과 실망에 지쳐 나중에는 울지도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나연이 생각이 들자 남설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그녀는 단숨에 치맛자락을 손으로 쥐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천기준은 방금 전까지 온화하던 사모님이 한순간에 날카로워진 이유를 몰랐지만 일단 급히 따라붙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모님이 택시를 타고 행사장에 가게 둘 순 없었다.그럼 사람들 웃음거리가 될 테니까.행사장 입구에 도착한 남설아는 핸드폰을 조용히 집어넣고 곧장 미소를 띠며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순간 천기준은 절망했다.‘대체 누가 기자들을 부른 거야?!’‘방금까지만 해도 대표님과 사모님이 금슬 좋은 부부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한 사람만 덩그러니 등장하다니. 이건 대놓고
그는 줄곧 자신과 남설아는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 생각해왔지만 지금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강연찬이 회복되자 모두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특히 남설아는 그동안 불안했던 마음을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었다.한편, 멀리 리조트에 머무르고 있던 서유라는 무척 불안하고 초조했다.서도현은 자신이 보낸 사람들이 전부 체포되어 한 명도 빠짐없이 구속되었다는 정보를 이미 입수했다. 남설아가 다치지 않은 것도 모자라 다친 사람마저 회복되었으니 그동안 벌인 모든 일이 헛수고가 되고 만 것이다.“뭐라고? 강연찬이 회복했다고?”서유라의 목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로웠다.“그 사람들이 엄청 대단하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여자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남설아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여자잖아. 그런데도 그 여자 하나 못 건드려서 이 지경이 된 거야? 돈을 그렇게 많이 받고는 뭐 하겠다는 거야? 적은 돈이 아니었잖아.”서도현은 배서준의 감시를 피해 몰래 리조트 안으로 숨어들어와 서유라와 만났다.그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누나, 나도 최선을 다했어. 그놈들이 이런 일 하나도 제대로 못 할 만큼 이렇게 쓸모없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 그래도 다행인 건 그놈들이 입이 무지하게 무겁다는 거야. 지금껏 한마디도 안 했어. 나도 계속 지켜볼 거니까 우리한테 불똥이 튀게 두진 않을 거야.”“쓸모없는 놈들! 전부 다 쓸모없어!”서유라는 온몸을 떨며 분노했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어 바닥에 힘껏 내던졌다.“이제 어떡해? 강연찬이 회복됐다고? 혹시 이 일을 남설아한테 말하면 어쩌려고? 남설아가 알게 되면, 나는...”“누나, 진정해봐.”서도현은 급히 달래며 말했다.“강연찬이 회복됐다고 해도 우리가 한 짓이라는 증거는 없어. 게다가 그 킬러들은 내가 따로 구한 사람들이라서 우리랑 직접적인 연결 고리는 없어.”“그래도...”서유라는 여전히 불안했다.“남설아 그 여자는 워낙 교묘해서 무슨 단서라도 찾아내게 되면 우리는 순식간에
“알겠어.” 송우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희가 그렇게 말한다면 따를게.”“우민아, 고마워.” 남설아가 말했다.“네가 얼마나 복수를 원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우리는 냉정해야 해. 감정에 휘둘리면 안 돼.”“응, 알아.” 송우민이 고개를 끄덕였다.“너희 계획에 최선을 다해 도울게.”“좋아.”남설아가 미소 지었다.“우린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야.”세 사람은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더 논의한 후, 각자 맡은 일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연회가 끝난 후, 남설아는 사무실로 돌아와 밀린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그때 강연찬이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들어왔다.“설아야, 우유 좀 마시고 일찍 쉬어.”강연찬이 우유를 건네며 말했다.“요즘 너무 무리하고 있어. 몸을 챙겨야지.”“응, 고마워, 오빠.”남설아가 우유를 받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오빠도 일찍 쉬어.”“난 안 피곤해.” 강연찬이 말했다.“너 일 마칠 때까지 같이 있어 줄게.”“괜찮아, 오빠. 몸도 아직 완벽히 회복된 건 아니잖아. 푹 쉬는 게 좋아.”남설아가 말했다.“이 서류들은 나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어.”“그래도 옆에 있어 줄게.”강연찬이 말했다.“너도 너무 늦지 않게 마무리하고 쉬어.”“응, 알겠어.”강연찬이 나간 뒤에도 남설아는 계속해서 일을 처리했다.그녀는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더 강해져야만 배서준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나은이를 위해 복수할 수 있었다.깊은 밤이 되어서야 남설아는 마침내 모든 서류를 정리했다.그녀는 기지개를 켜면서 창가로 가서 불빛이 번쩍이는 도시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나은아, 보고 있어?”남설아는 혼잣말처럼 속삭였다.“엄마가 반드시 복수할 거야. 기다려줘.”다음 날, 남설아는 이른 아침부터 회사에 출근했다.그녀는 회사의 핵심 팀을 소집해 다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여러분, 우리 그동안 좋은 성과를 거뒀지만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남설아가 말했다.“배건 그룹은 지금 위기에 처해 있지만
“선배...”남설아는 강연찬을 바라보며 가슴 깊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송우민은 두 사람 사이의 다정한 분위기에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기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편이 허전했다.연회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던 중, 남설아가 잔을 들어 모두와 함께 축하의 건배를 하려는 찰나 강연찬이 재빨리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막았다.“설아야, 요즘 너무 무리했잖아. 술은 좀 줄여.”강연찬의 목소리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남설아는 그의 따뜻한 눈빛을 마주하며 마음이 포근해졌다.하여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대신 주스를 들었다.“알겠어. 선배 말 들을게.”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그 광경을 본 송우민은 잔을 들고 조용히 다가왔다.“남설아, 내가 한 잔 올릴게.”송우민은 잔을 들며 말했다.“이번 성공, 정말 축하해.”남설아는 주스를 들고 잔을 맞댔다.“고마워, 우민아.”남설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네 도움이 없었으면 이렇게 빠르게 결과를 얻진 못했을 거야.”“우린 친구잖아. 서로 도와야지.”송우민은 웃으며 말했다.“근데 정말 대단하다. 네가 이렇게 멋진 사람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우민아, 너무 띄우지 마.”남설아는 조금 쑥스러워하며 웃었다.“운이 좋았을 뿐이야.”“그건 아니지.”송우민은 단호히 말했다.“너의 실력, 결단력, 배짱, 모두 내가 본 사람들 중 최고야.”“그 얘기는 그만하고...”남설아는 말을 돌리며 미소 지었다.“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해보자.”“좋아.”송우민이 고개를 끄덕였다.“남설아, 내 생각엔 지금이 기회야. 우리가 배건 그룹을 한 방에 무너뜨리고 배서준한테 확실하게 복수해야 해!”그의 눈빛에는 분노와 집념이 가득했다.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배서준을 단죄하고 싶은 듯했다.그러나 강연찬은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난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왜?”송우민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지금 배건 그룹은 거의 끝장난 상태잖아. 이
“서준아, 나 너무 힘들어...”서유라는 침대에 누운 채 핏기없는 얼굴로 힘없이 중얼거렸다.“유라야, 어디 아파?”깜짝 놀란 배서준은 침대로 다가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온몸이 다 불편하고 아파...”서유라는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얼른 의사 부를게!”배서준은 급히 몸을 일으키며 나가려 했다.“안 돼...”하지만 서유라가 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의사 부르지 마. 나 병원 가기 싫어...”“근데 지금 상태가... 그냥 둘 수 없잖아.”배서준은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정말 괜찮아. 그냥... 네가 곁에 있어 주면 돼...”서유라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겠어, 옆에 있을게.”그렇게 배서준은 서유라의 손을 살며시 잡고 말했다.“아무 데도 안 갈게. 여기서 널 지킬 거야.”“응...”서유라는 그의 품에 기대며 살짝 웃었고 그 입가엔 희미하지만 분명한 만족감이 스쳐 지나갔다.배서준은 서유라의 달콤한 말과 애정 어린 행동에 완전히 빠져 있었고 그녀의 진짜 속내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여전히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있었다.한편, 남설아의 세심한 간호 아래 강연찬의 몸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그는 점차 회사 일에도 다시 참여하기 시작했고 남설아와 함께 나란히 전선에 서며 경영에 힘을 보탰다.그 사이 남설아는 잇따라 중요한 프로젝트들을 따내며 사업적으로 완전한 전성기를 맞이했다.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성과가 이어졌고 배건 그룹은 연일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이러한 성과를 기념하고 고생한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남설아는 대규모의 축하 연회를 열기로 했다.연회는 고급 호텔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고 현장은 화려하게 꾸며졌으며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직원들은 모두 정장을 차려입고 참석했고 모두의 얼굴엔 성취와 기쁨이 가득했다.그들은 서로 잔을 부딪치며 축하했고 성공의 기쁨을 나누었다.남설아는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한가운데에 서서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천기준은 조용히 배서준의 현재 상황과 결정을 남설아에게 전했다.“대표님, 이제 배 대표님은 완전히 사방에서 외면당하고 있습니다.”천기준의 말투에는 깊은 체념과 실망이 묻어났다.“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그 여자 곁에 붙어 있으려 하네요.”“후, 그야말로 자업자득이죠.”남설아는 비웃듯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자기가 아직도 예전처럼 뭐든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착각하나 본데 지금의 배서준은 그냥 여자한테 정신 팔린 멍청이일 뿐이에요.”“대표님,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천기준이 물었다.“지금처럼 그 사람이 회사에 없는 틈이야말로 우리가 움직일 절호의 기회입니다.”“당연히 병들었을 때는 끝장내는 게 기본이죠.”남설아의 눈빛엔 싸늘한 결의가 번뜩였다.“이젠 그 인간도 잃는 게 뭔지 뼈저리게 느껴봐야 해요.”“역시 대표님답습니다.”천기준이 말했다.“지시하신 대로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좋아요.”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 듯 말했다.“기억해요. 이번엔 반드시 속전속결로, 숨 돌릴 틈도 주지 마요.”“네, 대표님!”남설아와 송우민이 손을 잡고 본격적으로 움직이자 배건 그룹의 위기는 한층 더 깊어졌다.남설아의 회사는 굶주린 늑대처럼 배건 그룹의 시장을 빠르게 잠식했고 원래 배건 그룹 쪽에서 따냈던 주요 프로젝트들마저 차지해버렸다.그 결과, 배건 그룹의 주가는 폭락했고 시가총액은 대폭 줄어들었으며 고객사들은 잇따라 이탈했고 사내 분위기는 혼란과 불안으로 가득 찼다.주주들의 손실은 상상을 초월했고 배서준에 대한 불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배서준, 진짜 쓸모없네!”“회사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도 어떻게 대표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지?”“당장 끌어내려야 해!”“그래! 더는 회사 말아먹게 놔두면 안 돼!”분노한 주주들의 외침은 마치 화산처럼 폭발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천기준은 그 상황을 남설아에게 보고했고 남설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내렸다.“계속 감시해요. 그 둘이 무슨 짓을
천기준은 눈앞의 광경을 보며 깊은 무력감에 휩싸였다.소파에 앉은 배서준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고민에 잠겨 있었고 서유라는 그의 곁에 꼭 붙어 앉아 힘없이 기대어 있었다.“대표님, 이대로는 안 됩니다!”천기준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지금 회사 상황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더 늦기 전에 돌아가셔서 직접 수습하셔야 합니다. 이러다 진짜 배건 그룹이 무너집니다!”“근데 유라가 지금 몸이 안 좋아. 어떻게 이럴 때 내가 유라를 혼자 두고 가겠어.”배서준의 말투에는 깊은 피로와 한숨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대표님...”천기준이 설득을 이어가려던 순간, 서유라가 조용히 말을 가로막았다.“서준아, 천 비서님 탓하지 마.”서유라의 목소리는 마치 곧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나약했다.“회사 일이 중요한 건 나도 알아. 그냥 돌아가. 난 괜찮아.”“유라야, 무슨 소리야.”배서준은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제일 중요한 건 네 건강이야. 내가 어떻게 널 놔두고 가.”“그래도...”서유라의 눈가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내가 네 일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 미안해.”“바보야, 너 하나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어.”배서준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회사 일은 내가 방법을 찾을게.”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천기준은 속으로 실소를 터뜨렸다.‘정말 기가 막히네. 내가 본 배 대표님 중에 제일 한심한 버전이야. 예전엔 그렇게 단호하고 냉정했던 사람이 이젠 여자가 곁에만 있으면 정신줄을 놓고 있잖아.’“대표님, 진짜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천기준은 다시 입을 열었다.“주주들은 이미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어요. 계속 이렇게 계시면 정말로 해임당합니다!”“알아, 나도 알아.”배서준은 초조한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그렇지만 유라가...”“서준아, 돌아가.”서유라가 조용히 말했다.“나 혼자서도 괜찮아.”“유라야, 너 지금...”배서준은 놀란 눈으로 서유라를 바라봤다.“정말
“네.”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명심해요. 이 일은 최대한 시끄럽게 만들어요. 배서준이 모두의 표적이 되도록 말이에요.”“알겠습니다, 대표님. 바로 처리하겠습니다.”천기준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남설아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싸늘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봤다.‘배서준, 당신이 의리를 저버렸으니 나도 더는 자비를 베풀지 않을 거야.’곧이어 배서준이 리조트에서 서유라와 밀회를 즐기고 있다는 소문이 각종 언론을 통해 퍼지기 시작했다.여론은 순식간에 들끓었고 배서준의 이미지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무능하다’, ‘책임감 없다’는 비난이 쏟아졌다.“배서준, 진짜 너무하네!”“회사는 지금 무너지고 있는데 밖에서 여자나 만나고 앉았어?”“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표 자리에 앉혔는지 이해가 안 가.”“저 사람한테 회사를 맡긴 게 큰 실수였지.”“이참에 그냥 물러나게 해야 돼!”결국 회사는 긴급 주주총회를 소집했다.얼마 전, 배서준이 자신의 자금을 담보로 위기를 넘기겠다고 한 뒤 감쪽같이 사라졌고,오히려 남설아가 한발 물러나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간신히 버텨온 상황이었다.하지만 정작 의사결정을 할 실권자는 자리에 없고 남은 이사들은 완전한 권한도 없는 상태라 회사 운영은 갈수록 마비되어가고 있었다.거기에 이번 스캔들까지 터지자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됐다.“이게 지금 어느 땐데 여자를 챙겨?! 본인 위치도 잊었나?!”“천 비서님, 배 대표님 떠나기 전에 천 비서님한텐 아무 말도 안 하고 갔어요?”천기준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사실 함께 일한 지 오래됐지만 배서준이 모든 걸 공유하진 않았다.“지금 당장 리조트로 가서 배 대표님 데려와요!”한 이사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든 끌고 와야 해요. 회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요!”“네, 이사님. 바로 다녀오겠습니다.”천기준은 피곤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답했다.‘정신적으로 남 대표님한테 매일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 두 사람을 만나러 내가 가야 한다고? 이게 대체 무
“서준아, 제발 이번만은 내 말 들어줘, 응? 그냥 나를 위해서 우리 미래를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잠깐이라도 푹 쉬면 안 돼?”서유라는 눈물을 글썽이며 배서준을 올려다봤다.그 애처로운 눈빛에 배서준의 마음도 조금씩 흔들렸다.“알겠어, 네 말대로 할게.”결국 배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서유라는 곧장 환하게 웃으며 배서준을 꼭 껴안았다.“역시 나를 제일 아껴주는 사람은 서준이 너야.”배서준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안아주었지만 눈빛은 복잡하기만 했다.회사의 상황은 이미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남설아와 송우민의 공격은 날이 갈수록 거세졌고 배건 그룹의 주가는 연일 하락 중이었다.시장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고 내부는 불안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대로라면 배건 그룹은 정말 그의 손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서유라의 모습을 보면 차마 그녀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배서준의 가슴속은 끝없는 갈등과 번민으로 뒤엉켰고 도대체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었다.그때, 그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이번엔 천기준이었다.배서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배 대표님, 도대체 언제 돌아오실 겁니까?”천기준의 목소리엔 조급함과 절박함이 가득 묻어났다.“지금 회사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에요. 주주들도 다 대표님만 기다리고 있습니다!”“나, 나도 지금...”배서준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서유라가 손을 뻗어 전화기를 낚아챘다.한편, 천기준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통화 종료’ 소리에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그는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리찍을 듯 내려놓으며 이를 악물었다.“이 서유라란 여자는 정말 재앙이라니까!”천기준은 이를 갈듯 말했다.“배 대표님도 왜 저 여자 말만 듣는 건지...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도 모르나?”곁에 있던 다른 비서도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천 비서님, 우리 이대로 괜찮을까요? 주주들한테 뭐라고 설명해야 하죠?”“설명할 방법이 어딨어요...”천기준은 허탈하게 웃으며 고
“네, 송 대표님!”모두가 힘찬 목소리로 외쳤고 회의실 안은 결의에 찬 열기로 가득 찼다.송우민의 지휘 아래 남설아의 회사는 굶주린 늑대처럼 배건 그룹의 시장을 거침없이 잠식해 들어갔다.배건 그룹의 주가는 연일 하락했고 시가총액은 크게 줄어들며 내부 분위기는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흩어진 조직력에 동요하는 임직원들 사이로 불만이 번졌고 결국 주주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배서준에게 줄줄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배 대표님, 도대체 언제 돌아오실 겁니까?”한 주주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이 완전히 개판이에요! 더 늦으면 정말 끝장납니다!”“맞아요, 대표님! 이대로 가다간 정말 회복 불가능합니다!”또 다른 주주도 강하게 덧붙였다.“지금 당장 돌아와서 진두지휘하셔야 합니다!”끊임없이 쏟아지는 전화에 배서준은 머리를 싸매고 이마를 짚었다.그 역시 당장 회사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문제는 서유라였다.그녀는 절대 그를 보내려 하지 않았다.“서준아, 가지 마...”서유라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배서준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나 너무 힘들어. 옆에 있어 줘야 버틸 수 있어.”“유라야, 네가 힘든 거 알아. 하지만 회사도 지금...”배서준은 난처한 얼굴로 말을 흐렸다.“몰라! 나한테 중요한 건 네가 곁에 있어 주는 거야! 너 없이 나는 단 하루도 못 버텨!”서유라는 울먹이며 소리를 질렀다.“그런 말 하지 마.”배서준은 가슴 아프다는 듯 그녀를 껴안았다.“널 내버려 두고 갈 수 없지. 하지만 회사 쪽 상황도 정말 더는 미룰 수가 없어.”“결국 날 버릴 거지? 날 두고 가겠다는 거잖아!”서유라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며 말했다.“내 몸은 누가 챙겨? 나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해... 넌 가면 안 돼!”“유라야, 그러지 마.”결국 배서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좋아, 당분간은 여기 있을게. 회사 일은 전화랑 화상회의로 처리할 테니까 괜찮지?”“진짜지?”서유라는 눈물로 젖은 눈을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