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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화

Author: 연무
강만여가 다시 건청궁으로 돌아왔을 때, 황제는 남쪽 서재에서 정무를 보고 있었다.

아직도 걷히지 않은 짙은 안개 속 건청궁의 모습은 여전히 화려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스산함이 느껴졌다. 거기에 미동도 없이 서 있는 환관들과 경비들의 모습까지, 얼핏보면 귀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반면, 궁 동쪽 있는 건물 회랑 아래, 궁녀들이 호진충을 에워싸며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강만여의 출궁일이 바로 다음 날인데, 아직도 위에서 누가 건청궁에 남을지 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들 어리 조급해해? 하루 이틀 앞당긴다고 일이 더 잘 풀리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남의 것이 내 것이 되는 법도 없고."

호진충이 특유의 가벼운 목소리로 얼버무렸다.

"강 상궁도 아직 근무 중이고, 설영도 병가 중이라 하지 않았나? 하루쯤 늦는다고 큰일 나나? 내일 아침이면 어차피 결론이 날 것이니, 조금 더 지켜보도록 하거라."

"저희가 꼭 여기에 남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세요? 뭐든 확답을 해주셔야 마음의 준비를 하죠."

"맞아요. 강 상궁님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총관님은 왜 아직도 말씀이 없으세요? 이총관님이 가서 좀 얘기 해주시면 안 돼요?"

"내가 무슨 자격으로? 일단 기다려 보거라."

이때, 멀리서 다가오는 강만여를 발견한 호진충이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궁녀들 사이를 빠져나와 말을 걸었다.

"강 상궁, 왜 이리 오래 걸렸느냐? 하마터면 직접 데리러 갈 뻔했잖아."

하지만 강만여는 대꾸도 하지 않고 그를 지나쳤다. 하지만 호진충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을 걸었다.

"강 상궁, 잠깐만. 상의할 것이...."

하지만 그녀는 걸음을 더 빨리할 뿐이었다. 그러나 호진충은 끈질기게 따라왔고, 인적이 드문곳에 다다르자 앞을 가로막았다.

"강 상궁이 진심으로 걱정되어 하는 말이야. 그쪽 사정은 대강 들었어. 첩실 소생이라고? 집에서도 그리 환영받는 처지 아니지? 지금 돌아간다 해도 고생길이 훤할 텐데, 혹시라도 본처가 홧김에 너를 마흔 넘은 노친네의 첩으로 보내기라도 한다면… 그땐, 누구도 너를 구해줄 수 없어."

그러자 강만여가 혐오가 가득 담긴 눈길로 그를 바라왔다.

"용모면 용모, 기골이면 기골, 거기에 그 누구도 견줄 수 없는 권력까지! 그런 분이 너를 마음에 두셨다는데, 왜 이리 목석같이 구는 것이냐? 다들 폐하의 총애를 받지 못해 안달인데… 지금이 얼마나 절호의 기회인데…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친다면, 너도 두고두고 후회할걸?"

강만여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 옆으로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호진충은 또다시 양팔을 벌려 그녀를 막았다.

"나는 어차피 내시인 몸, 너한테 뭘 원하겠느냐? 정말 진심으로 너의 앞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만일 남겠다고 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도와주마. 너는 그냥 훗날 폐하의 앞에서 내가 다음 총관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한 마디만 해주면 돼. 괜찮은 조건이지? 솔깃하지 않아?"

호진충이 흥분한 목소리로 과장되게 손짓발짓하며 말했다.

그런데 이때, 등 뒤에서 냉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진충, 참으로 포부가 대단하구나."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손량언이었다. 놀란 호진충은 펄쩍 뛰며 뒤를 돌아봤다.

"아니, 강 상궁. 총관님이 오셨으면 좀 알려주지...."

"이놈아. 만여 양이 말 못 한다고 실컷 헛소리를 퍼부었지? 네가 방금 한 말, 다 폐하께 일러바칠까? 그러면 폐하께서 널 가만 둘 것 같아?"

손량언이 꾸짖었다.

"아이고, 총관님!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

호진충이 고개를 조아리며 빌었다.

"그나저나, 폐하를 모시고 있어야 할 분이 여긴 어쩐 일입니까?"

"그런 너야말로 어딜 싸돌아다녔느냐? 폐하께서 돌아오셨는데, 너 때문에 따뜻한 차 한 모금 못 드셨다! 도대체 사람 관리 어떻게 한 것이냐!"

호진충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 망할 것들이 또 그새를 못 참고 자리를 비워! 제가 당장 가서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놓겠습니다!"

그리고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손량언은 그런 그의 뒤통수를 향해 욕설을 몇 번 쏟아부은 뒤, 강만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놈의 말은 신경 쓰지 말거라. 폐하께서 직접 언급하지 않은 이상, 예정대로 출궁하면 돼. 내가 아는 너라면 분명 좋은 배필을 만나 잘 살 거야."

하지만 강만여는 그의 말에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황제가 막지 않은 이상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건 황제가 돌연 생각을 바꾸면 그녀의 출궁길은 막힌다는 것이었다.

손량언이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무슨 큰 힘이 있는 건 아니지만, 손이 닿는 데까진 도와주마."

만여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손량언은 황제의 점심을 챙기러 떠났고, 그녀도 다시 업무에 복귀했다. 그렇게 침상을 정리하는데, 주변에 있던 궁녀들이 불안한 얼굴로 그녀에게 사과를 건넸다.

"죄송해요, 강 상궁님. 저희도 딱히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장 내일 강 상궁님이 출궁하시는데, 확답을 안 주시니 마음이 급해서 그만… 실례를 범했습니다."

강만여는 하던 일을 멈추고 아짓 앳된 얼굴의 궁녀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보기 드문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방행조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런 다음, 늘 지니고 다니는 작은 수첩에 목탄으로 걱정하지 말라고, 내일 새벽이면 떠날 거라고, 앞으로 그녀들에게 행운이 가득하길 바란다고 적었다.

하지만 막 이 글을 보여주려던 찰나, 궁녀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더니, 서둘러 무릎을 꿇는 모습이 보였다. 강만여는 본능적으로 몸이 굳으며 식은 땀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곧 길고 하얀 손이 조용히 뒤에서 뻗어나와 그녀의 수첩을 낚아챘다. 귀티 나는 황금색 수가 놓여 있는 소매가 흩날렸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 무릎을 꿀었다.

황제는 수첩을 가늘게 눈을 뜬 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황제가 정적을 깨며 차갑게 말했다.

"게으름 피우지 말라고 했는데, 출궁 준비를 했단 말이냐? 정녕 내 말을 우습게 여겼구나!"

강만여는 잠시 방심했던 자신을 탓했다. 출궁할 때까지 신경 썼어야 했는데, 황제가 이토록 이른 시간에 돌아올 것이라 예상치 못한 것이 실수였다.

그런데 지금은 황제의 손에 들려 있는 수첩보단, 다른 궁녀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잠시 꺼냈던 방행조가 더 신경 쓰였다.

그녀는 속으로 황제가 그것만큼은 발견하지 못했길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황제의 시선은 이미 그것으로 향해 있었다.

"손에 든 것은 무엇이냐? 이리 줘보거라."

강만여는 심장이 뛰다 못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곧 방행조를 들고 있던 궁녀가 천천히 일어나 황제에게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황제의 길고 가는 손가락이 그 종이에 닿았고, 강만여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그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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