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강사리는 그저 편하게 살다 가고 싶은, 줏대 없는 재벌 3세다. 한량인 재벌 2세 아버지는 그녀가 창업에 손대는 것만 빼면 무엇이든 다 허락해 주었다. 다른 사고는 일절 치지 않는 그녀였지만, 단 하나, ‘미남’을 밝히는 버릇만큼은 고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호화 크루즈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유흥을 즐기던 중 해저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가 그녀를 덮쳤다. 선박이 난파되는 대참사 속에서 그녀는 대옹(大雍) 왕조의 말 못 하는 과부에게 빙의하게 된다. 그녀는 하늘이 그동안 자신의 행실이 너무 방탕해 이곳에 떨어뜨려서 정신을 차리게 만들려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로 조정의 권력을 쥐고 흔드는 섭정왕과 하룻밤 불장난 같은 인연을 맺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최원헌: 수년 동안 마음 깊이 품어왔던 그녀를 마침내 아내로 맞이했다. 그녀가 예전의 그녀가 아님을 알면서도, 그에게는 오직 그녀뿐이다. 소승기: 그저 하룻밤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매일 밤 남모르게 밀회를 갖고, 일부러 그녀의 부군을 멀리 발령 보내며 매일같이 살을 맞대다 보니… 결국 미련을 버리지 못한 쪽은 그였다. 배소연: 고고하고 청렴하기로 이름난 배 승상은 처음에 강사리를 가소롭게 여겼다. 훗날 소승기가 그에게 “그녀가 무엇을 원하든 다 줄 셈인가?” 하고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저는 무엇이든 줄 것입니다.” 소묵정: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혹한 황자. 그가 인질까지 잡아가며 협박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그녀의 시선을 붙잡기 위해서다. …
더 보기사실 권력의 중심지인 한양 바닥에서는 알려지고 밟히는 것이 주상이 봉한 숙인의 고명이었기에, 딱히 대단할 것도 없었다.막상 궁궐에 들어가고 나면 눈에 띄지도 않을 하층 품계에 불과했으나, 기왕 이렇게 된 거 바깥세상 구경이나 하며 견문이나 넓히는 셈 치면 그만이었다.그나저나 그 인색한 노부인이 친히 자신의 옷까지 한 벌 맞추어 대기시켜 놓았다니?보아하니 이건 강사리가 이 집안에 갓 시집왔을 무렵부터 꿍꿍이를 품고 기획해 둔 함정이 분명했다.족제비가 닭에게 세배하는 꼴이니, 진정 음흉한 수작질이 아니고선 설명이 안 됐다.궁으로 행차하는 당일에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폭설이 쏟아졌다.주학은 갑자기 몸이 좋지 않아 거동이 힘들다는 핑계를 대며, 이번 궁궐 나들이에는 동행하지 않겠다며 발을 뺐다.강사리는 넌지시 그녀의 진짜 정체를 추궁해 보았다. 대체 과거 얼마나 대단한 신분이었기에 이 삼엄한 구중궁궐 안마당에까지 자신을 알아보는 지인이 존재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최원헌은 강사리의 망토 깃을 꼼꼼히 여며주고 모자까지 정성스레 씌워준 뒤, 그녀의 손을 꼭 쥔 채 처소 문을 나섰다.연말이라 한양 곳곳에서 대궐로 입궁하는 고관대작들의 마차 행렬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기에, 강사리는 법도상 시어머니인 노부인과 동석해야만 했다.최원헌은 강사리를 안아 마차 상석에 곱게 앉힌 뒤, 처소 문간에 꼿꼿이 서서 노부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눈발이 워낙 굵고 빽빽하게 쏟아진 탓에, 잠깐 사이 그의 머리 위로 하얀 눈꽃이 수북이 쌓여갔다.젊은 장수의 칠흑 같은 머리카락은 높게 묶여 있었다.본래 사대부 가문에서는 장가를 들고 나면 상투를 틀고 관을 쓰는 것이 법도였으나, 강사리는 이 훤칠하고 깔끔한 머리 모습이야말로 소년 장수의 기개와 날 선 분위기를 가장 완벽하게 살려준다고 생각했기에, 혼인 후에도 줄곧 그가 상투를 틀지 못하게 억지를 부려왔다.노부인은 나이가 지긋한 탓에 거동이 느렸고, 두 사람은 마차 안팎에서 한참을 대기했음에도 노부인은 코빼기조차 보이
강사리는 감격에 겨운 듯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 나서야 마침내 입을 열었다.“저... 소리가... 들립니다...”하지만 자신의 목구멍을 뚫고 나온 자신의 목소리를 들은 강사리는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이 무슨 웅얼거리는 갓난아기 같은 소리란 말인가.단 한 글자도 정확하게 발음되지 않는 데다, 소리 자체가 너무나도 작아서 정작 말을 뱉은 본인조차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 지경이었다.하지만 아무리 모기만 한 소리일지언정, 드디어 어둠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본 셈이었다.강사리는 최원헌의 목덜미를 와락 끌어안았다.순간 눈시울이 시큰하게 달아올랐다.2년이었다.그녀는 장장 2년이라는 세월 동안 철저하게 귀머거리이자 벙어리로 살아왔다.시냇물이 졸졸 흘러가는 소리도, 산간벽지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했다.그녀가 갇혀 있던 세계는 지독하리만치 외롭고 폐쇄적이었다.“앞으로 점점 더 좋아질 것이오.”최원헌은 이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이 순간 그의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희열과 날아갈 듯한 기분은, 과거 그녀를 처로 맞이해 첫날밤을 치를 때와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이윽고 의성 무도 영감이 처방한 약을 달여, 이번에 새로 뽑혀 들어온 ‘오복’이라는 이름의 시녀가 쟁반을 받쳐 들고 안방으로 들어섰다.“마님, 약 드실 시간이옵니다.”강사리는 침상 위에서 살을 섞는 치병 외에 ‘진짜 먹는 약’까지 대기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녀는 여전히 모락모락 뜨거운 김을 내뿜고 있는 탕약을 확인하자마자, 본능적으로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최원헌의 품으로 머리를 더 깊숙이 박았다.침 맞는 것도 싫고, 약 먹는 건 더 싫었다!그녀는 그냥 침상 위에서 서방님과 적당히 몸만 비비면 만사 그만인 줄 알았거늘, 대체 왜 입안이 타들어 갈 것처럼 쓴 약을 꾸역꾸역 들이켜야 한단 말인가.“약은 저기 내려두고, 바닥에 널브러진 사기 파편들부터 깔끔하게 치우거라.”최원헌은 처를 품에 안은 채 의자에 걸터앉아, 한 손으로 숟가락을 들어
방 안으로 슬그머니 걸어 들어오는 흰 수염 노인의 모습을 보며, 강사리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긴장된 마음을 억눌러야만 했다. 무도 영감 역시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동공지진이 일어나기는 마찬가지였다.허, 참.섭정왕 그놈은 역시 차원이 달랐다.명색이 일국의 섭정이라는 거물이 남의 집 유부녀를 야밤에 보쌈해 오는 도둑질을 태연하게 감행하다니.역시나 소문대로 사악하고 오만방자하며 음침하고 잔혹하기 짝이 없는 염라대왕다웠다.“이쪽은 저의 처이옵니다. 어려서 크게 앓은 뒤로 귀가 먹고 말문이 막혔사온데, 최근 들어 아주 미약하게나마 음성을 흘리는 것을 목격하였나이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혹여 완치할 방도가 있을지 진맥을 한 번 부탁드리옵니다.”무도 영감은 입술을 꾹 다문 채 흰 눈처럼 하얀 수염을 만지작거렸다.세상 모든 사내들이 다 소승기처럼 의원을 협박해 대는 무지막지한 저승사자는 아니지 않은가.그는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곁에 놓인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우선 진맥부터 짚어본 뒤에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소.”“당연한 말씀이십니다.”최원헌은 다급하게 강사리의 손을 이불 속에서 꺼내어 침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과거 섭정왕부의 내실에서는 늘 캄캄한 밤중인 데다 초라한 촛불 하나에 의지해야 했던 탓에, 무도 영감은 강사리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하오나 지금 최씨 저택의 안방은 채광이 아주 밝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노인은 살며시 눈꺼풀을 치켜들어 맞은편에 앉은 여인의 자태를 관찰했다.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에 밤하늘의 은하수를 통째로 박아 넣은 듯 별빛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안광, 오뚝하고 곧게 뻗은 콧날과 앵두나무 꽃잎처럼 붉고 보드라운 입술, 그리고 한겨울의 첫눈보다 더 뽀얗고 매끄러운 백옥 같은 피부까지.온몸에서 선녀 같은 기품과 화려함을 뿜어내는 통에, 과연 저 성질 더러운 염라대왕 놈이 왜 밤마다 체면 구겨가며 도둑고양이처럼 남의 집 안방을 넘나들었는지 단박에 이해가 가고도 남
두 사람은 일제히 문쪽을 향해 시선을 옮겼는데, 문을 거칠게 밀치고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최원헌이었다.그는 강사리가 이 깊은 밤까지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모습을 보더니 순간 멍하니 굳어졌다.“부인, 어찌 아직까지 자지 않고 있었소?”먼지 섞인 검은색 경장 차림을 보아하니, 노숙까지 하며 먼 길을 달려온 기색이 역력했다.그럼에도 특유의 꼿꼿하고 훤칠한 자태만큼은 가려지지 않아, 그야말로 기개가 당당해 보였다.“언니께서 서방님이 대체 어디로 가셨던 거냐고 물으십니다. 소식 한 자락 남기지 않으시고 말입니다.”주학이 재빠르게 강사리의 대변인을 자처하며 통역해 올렸다.강사리는 지금 목구멍에서 아주 미약한 쇳소리만 겨우 짜낼 수 있을 뿐, 온전한 글자는커녕 단어조차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내가 분명 사람을 시켜 의원을 찾아 떠난다고 구두 전갈을 남겼거늘, 아무도 부인에게 전하지 않았단 말이오?”최원헌은 그날 밤 그녀와 격렬하게 살을 부비며 얽혀 있을 때, 그녀의 목구멍에서 가녀린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똑똑히 들었었다.마침 귀신같이 천하의 의원이 나타났다는 첩보를 입수하자마자, 혹여 처의 병을 고칠 수 있을까 싶어 만사를 미뤄두고 은밀한 걸음으로 길을 나섰던 터였다.집을 떠나며 처소 하인들에게 ‘부인께서 깨어나시거든 수일간 출타한다고 전하라’고 분명 엄명을 내렸었다.그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휙 돌아 서늘하게 눈을 치켜떴다.“내가 떠나던 날 아침, 이 처소 안방을 지키고 있던 게 누구더냐?”그의 등 뒤로 주르륵 도열해 있던 하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무리 한가운데에 서 있던 길쭉한 얼굴의 시녀에게로 꽂혔다.그녀의 이름은 운하로, 최원헌의 처소에서 잔뼈가 굵은 일등 시녀였다.강사리는 애초에 말 한마디 못 하는 벙어리인 데다 이 저택 하인들과 살갑게 친목질을 하는 성격도 아니었기에, 이들은 대놓고 강사리를 무시해 왔었다.운하는 상전의 살기 어린 기세에 짓눌려 쿵 하고 무릎을 꿇었다.“도련님! 그날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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