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을 멈춘 기양의 차가운 시선이 현비의 얼굴을 스쳐 지났다. 더 나아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즉시 떠나지도 않았다. 그는 손량언에게 분부하였다. “네가 들어가 보아라.”“네.” 손량언은 명을 받고 현비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그녀를 지나쳐 별전 안으로 들어갔다. 현비는 긴장한 얼굴로 손량언을 보았으나, 얼굴에는 감히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못하였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누르며 몸을 굽혀 기양에게 죄를 빌었다.“신첩을 죽여주십시오. 후궁의 윗전으로서 폐하를 대신하여 육궁을 다스리면서도 황자를 제대로
풍귀인의 태아가 살 수 있을지 없을지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가 강만여를 어떻게 처분할지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밖에서 그녀가 나라를 망친 요괴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 지금, 풍귀인까지 유산하게 했으니. 만약 이 사실을 언관들이 알게 된다면 당장 그녀를 처형해달라고 간청할 것이다. 황제는 내일 아침 천단에 가서 제천기복을 올릴 것이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녀를 비호한다면 천지신명에 대한 성의가 부족하다고 비칠 것이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필시 명예를 잃고, 민심을 잃을 것이다. 황제가 이 이치
소란스러운 소리가 후궁 전체를 뒤흔들었고 모두 밖으로 뛰어나와 상황을 살폈다. 바닥에 쓰러진 풍귀인의 몸 아래로 피가 낭자하게 퍼지자, 그들은 각기 다른 표정을 지으며 몰려들었다. 현비도 너무 놀란 나머지 멍하게 있다가 주변이 소란스러워진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어찌 감히 이런 짓을 할 수 있느냐!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대놓고 견제를 하는 것이냐? 황자를 해친 죄가 얼마나 큰지 알고나 있느냐?”“아닙니다! 저희 마마께선 그런 것이 아닙니다.”자소가 나서서 말을 하자, 현비의
‘서북의 전황은 어떠한가? 심장안은 설 전에 돌아올 수 있을까?’생각에 잠긴 강만여의 팔을 자소가 흔들었다. “무슨 일이냐?”강만여의 시야로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오는 현비와 풍귀인이 보였다. “마마, 어찌해야 합니까?” 자소는 아랫배가 살짝 불러온 풍귀인을 긴장된 눈으로 노려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총관께서 풍귀인을 꼭 피하라고 당부하셨는데, 오늘은 피하기 어려울 듯합니다.”좁고 긴 길에는 갈림길이 없었고 상대는 그녀보다 지위가 높은 후궁이었기에 못 본척할 수도 없었다. 강만여는 사방을 둘러보다가 피할 수 없다는 것
기양의 안색이 변했다.강만여가 나라를 해친다는 유언비어가 이틀 전부터 도성에 퍼졌지만, 조정 대신들이 올린 상소를 기양이 철통 보안으로 막은 덕에 후궁에는 어떤 소문도 퍼지지 않았다. 하지면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하게 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두꺼운 휘장을 뚫고, 그의 귀로 들어왔다. 강만여의 얼굴은 먹을 묻히지 않은 성지처럼 창백해졌다. 기양도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그녀에게 자세한 설명은 해줄 수 없었다. “먼저 돌아가거라. 짐이 알아서 처리한다.”정신을 차린 강만여가 입을 열었다. “저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치자, 그는 어찌할 수 없이 연이어 기침을 토해냈다. 강만여는 애틋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서청잔은 손을 흔들러 보이며 걱정하지 말라는 뜻을 전했다. 강만여는 그제야 그의 손에 장식된 아름다운 장검이 쥐어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저건 폐하의 서안 위에 놓여 있던 상방보검이잖아?’강만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서 물었다. “폐하께서 무슨 임무를 맡긴 거야?’서청잔은 헐떡이며 답했다. “폐하께서 재해 지역으로 구제 식량과 자금을 운송하라고 하셨다. 상방보검을 가지고 가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