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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첫 정사

작가: 도옌
last update 게시일: 2026-09-18 20:45:51

"승재, 오늘 하루는 어땠어?"

은영의 남편 태형은 언제나처럼 다정했다. 아이에게 물을 따라주었고 의자를 바로 해 주었으며 반찬을 이것저것 집어 밥 위에 올려주기도 했다.

"재밌었어요."

"선생님 말씀도 잘 들었어?"

"네."

"친구들하고도 잘 놀았고?"

"네."

"오늘 있었던 일 중에 뭐가 제일 재밌었어?"

"재영이가 레전드 풋볼카드 두 장 줬어요."

"그래? 그거 엄청 좋은 거 아냐? 근데 재영이가 왜 줬어?"

"재영이는 같은 게 두 장씩 있대요."

"그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다른 친구를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 승재한테 줬구나. 재영이가 승재 좋아하나 보다. 고맙다고 했어?"

"네, 당연하죠."

"그 풋볼카드 가지고 뭐 할 거야?"

"스크랩북에 넣어서 모을 거예요."

"그래? 몇 장까지 모을 건데? 모아서 뭐 할 거야?"

"백 장까지 모을 거예요. 모으는 동안 다른 친구들이랑 서로 더 마음에 드는 걸로 바꾸기도 할 거예요."

태형은 승재의 시시한 얘기도 진심을 다해 들어 주었다. 승재가 골고루 먹는지를 계속 예의주시하면서.

'예전에는 저런 다정함과 세심함이 다 나를 향했었지.'

은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굳이 섭섭하지는 않았다. 세월과 함께 자연스레 받아들여야 하는 거겠지, 생각했다. 자식에게조차 무심한 남자도 많다던데 이 정도면 선방하는 거지, 스스로 위로하기도 했다.

저 남자의 관심을 고스란히 받았던 시절이 있었지.

은영은 그들의 연애 시절을 떠올렸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뛰어든 어느 서점의 지붕 아래, 먹구름이 껴 갑자기 밤처럼 어두워진 그 한낮에 첫 키스를 나눴었다. 둘 다 서툴렀다. 엉거주춤 서서 입은 맞추고 있으나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허공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손. 먼저 그 손을 잡은 것은 은영이었다. 은영의 적극성에 마음을 놓은 태형은 이내 한 손으로 은영의 허리를 감쌌고 키스가 길어지는 동안 손은 은영의 엉덩이께로 내려와 부드럽게 움직였다.

"비 맞아서 옷이 다 젖었네. 춥지 않아?"

그들은 맞은편 건물에서 대낮에도 요란한 네온사인 등을 발산하고 있던 모텔로 향했다. 

소위 "나쁜 남자"와의 연애만 주구장창 하던 은영이 처음으로 마음을 풀고 성관계를 했던 상대였다. 태형은 꼼꼼하게 샤워했고 커튼을 완전히 쳐 방을 어둑하게 만들었으며 서둘지도 않았다. 

"내키지 않으면 그냥 티브이만 보다 나가도 돼."

태형은 수줍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들은 이를 깨끗하게 닦고 침대에 나란히 누워 진짜로 티브이를 봤다. 태형은 리모컨을 이리저리 눌러 예능 프로그램을 찾았다. 몇 번이고 재방송을 봤던 익숙한 프로그램이었다. 둘은 침대에 나란히 앉아 간간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티브이를 봤다. 소나기는 애저녁에 이미 그친 상태였다. 쏴아아 빗소리에 뭉개졌던 세상의 소리들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버스 소리, 발자국 소리, 신호등 초록 불 타이머 소리... 

은영은 목욕 가운을 살짝 펼쳐 허벅지를 드러내며 태형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리고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은영은 손을 태형의 다리 사이로 넣어 부드럽게 움켜쥐기 시작했다. 태형으로부터 미세한 떨림이 감지됐다. 이미 은영의 다리 사이에서는 따뜻하고도 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와 있었다. 은영의 그곳은 한없이 원하고 있었다. 

"넣어도 돼?"

태형은 바보같이 물었다. 은영은 짧은 한숨을 내뱉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태형은 손가락으로 은영의 클리토리스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은영의 젖꼭지를 혀로 애무하기도 했다. 은영은 내심 태형이 오럴을 해 주기를 바랐다. 말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만두었다. 너무 밝히는 여자 같이 보일까 봐서였다. 섹스에 있어서 당사자들이 백 퍼센트 완벽하게 솔직해지기란 어려운 일이다. 어느 정도는 다른 계산을 하기 때문이다. 

너무 밝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너무 경험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너무 쑥맥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너무 변태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이 상대와는 결혼까지 할 수 있을까?

만약에 결혼할 때를 대비하여 어느 정도는 순진한 척을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이런 온갖 계산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것이다. 완벽하게 솔직한 몸의 언어는 어쩌면 원나잇같은 일회성 만남에서나 가능할지도 모른다. 기대할 것도 희생할 것도 없고 예측할 미래조차 없는 관계. 그래서 솔직할 수 있는 관계.

사랑이 배제된 성관계에서나 사람은 비로소 솔직해질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한 원나잇에서조차 어느 한 쪽이 다음 만남을 어렴풋이라도 소망하게 된다면 솔직함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다른 마음이 끼여 들기 때문이다. 

은영은 끝끝내 그 말을 하지 못했다. 

"네가 나의 그곳을 핥아줬으면 좋겠어." 라는 말.

"네가 내 그곳에 말랑한 뭔가를 집어넣어서 혀로 찾아 먹었으면 좋겠어."라는 말.

은영은 항상 그런 상상을 했었다. 몰캉하고 끈적한 젤리 같은 것을 자기의 음부에 집어 넣어 남자가 혀로 그것을 휘휘 찾아 맛있게 먹어 줬으면 좋겠다는 상상. 언젠가... 누구한테든 그런 부탁을 하게 되는 날이 올까. 혹은, 만에 하나라도 그런 걸 먼저 제안해 오는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뜨거운 액체가 물컹,하고 쏟아져 나올 정도로 흥분되는 느낌이었지만 말하지 못했다. 태형은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번듯하고 훤칠한 남자였기 때문에. 그저 쾌락을 좇아 여자를 만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은영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결혼 적령기의 여성이었고 태형은 어쩌면 프러포즈를 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섹스에 솔직하지 못했다.

어쩌면 태형도 핥고 싶지는 않았을까?

태형이 은영의 몸 위에 올라간 체위로 그들은 사랑을 나눴다. 흥분한 거친 숨소리를 귓가에 느끼며.

은영은 완전히 절정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태형의 그것이 나무랄 데 없는 크기였고 어깨가 떡 벌어지고 엉덩이가 봉긋 솟은 태형은 몸은 아름다웠고 무엇보다 섹스하는 내내 배려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은영은,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좋은 직장에서, 벌 만큼 벌고, 집안도 탄탄하고, 막내 아들이었으며, 허튼 짓은 안 하는 성격인 태형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섹스에 대한 얼마간의 불만족은 그냥 조금 참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번듯한 가정을 갖고 싶었다. 어쩌면 섹스를 희생하는 대신 다른 모든 걸 얻을 수 있는 상대. 

어쩌면 더 나은 남자를 평생 못 만날지도 모른다. 쉽게들 농담처럼 얘기하지만 하나의 진실이라 느껴지는 말 중에 '모든 건 타이밍이다'라는 말이 있다. 은영은 자주 그 말이 가슴에 새겨졌다.

뜨거운 잠자리를 원하는 만큼, 남들 보기에 번듯한 가정도 갖고 싶었다. 실패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누구한테 그렇게 보이고 싶은지는 몰랐다. 그저, 불쌍한 여자처럼 보이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이십 대 후반부터 시작해서 삼십 대 후반 정도 나이의 여자가 짝이 없고 살림을 할 가정이 없고 자식이 없다는 것은 종종 동정심의 대상이 된다. 적어도 은영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리고 그 이후 나이가 되면 사람들의 관심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그것은 안도가 되는 일일까 비참해지는 일일까.

"좋아?"

태형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으..으응."

은영은 머릿속으로는 딴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약간의 연기를 가미해서. 흥분했다는 듯이, 느꼈다는 듯이.

좋긴 했다, 태형과 그렇게 섹스를 했다는 것이. 절정에 이르지는 못했을지라도 어쨌든 둘은 섹스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그것만으로 어떤 허들 하나를 넘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은영은 오르가즘을 느껴본 적이 있다.

어떤 여자는 일평생 한 번도 못 느껴본다는 그 오르가즘을, 삽입을 통해 느껴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크나큰 행복이라고 여겼던 것이, 삶의 고통이 되었다.

몰랐다면 그저 그렇게 살아갔을 텐데.

알고도 채워지지 않는다는 건 다르다.

세월이 한참 지나고도 그 느낌이 너무 생생했기 때문에 은영의 일상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고통을 동반했다. 아니, 고통이라기보다는 어떤 실망감 같은 것. 끊임없이 느껴야 하는 어떤 실망감 같은 것.

왜 더 이상은 그걸 느끼지 못하게 된 걸까?

은영 자기 자신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딜도 같은 섹스토이로는 느꼈기 때문에. 숨겨 뒀다가 집에 혼자 있을 때 한 번씩 꺼내서 사용해 보는 그런 토이로는 충분히 느꼈기 때문에 몸에 이상이 있어서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된 건 아닌 것 같았다.

태형은 잠자리에서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다. 태형은 은영에게도 충분한 시간을 주기 위해 속도를 조절하고 다정한 말도 했다. 

그러나 충분치 않았다. 

딜도로 느끼는 절정은 사람과의 섹스에서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 딱 한 순간, 절정을 맛보고 나서는 어느 정도의 공허함이 남는다. 현타가 와서 헛헛 웃음이 새어 나오기도 한다. 

다시, 사람과의 섹스에서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을까? 그것은 오랫동안, 은영의 삶에 커다란 화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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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완벽했던 밤   24. 섹스 온 더 비치

    네온사인이 하나 둘씩 켜지기 시작하자 거리는 색다른 생동감으로 가득 찼다. 늦은 오후의 피곤해 보이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새로이 씻고 꾸미고 나온 사람들이 일제히 재잘대며 어디론가 바쁘게 걷는 모습이었다. 신 과장은 성큼성큼 걸어 어느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갔다. 좁은 계단을 올라가자 안이 컴컴한 바가 있었다. '아일랜드'라는 간판을 단 바였다. 이제 막 영업을 시작했는지 안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앳된 남자가 은영과 신 과장을 맞았다. 은영과 신 과장은 창 밖이 보이는 창가의 구석 자리에 앉았다.신 과장은 올드 패션드를 주문했다. 은영이 뭘 주문해야 할지 몰라 머뭇대자 신 과장이 말했다."같은 걸로 드실래요?"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웨이터는 말없이 공손하게 그들의 주문을 받고 물러났다."그 날 제가 추천해 드린 향수 사셨어요?"은영은 불현듯 신 과장을 백화점에서 마주쳤던 날을 떠올리며 물었다."아, 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추천 감사했습니다. 아내가 좋아하더군요."은영은 신 과장이 '와이프'라고 하지 않고 '아내'라고 말하는 것이 왠지 근사하다고 생각했다."저도 같은 향수를 샀어요. 오늘도 뿌렸는데... 땀 냄새에 섞여서 이젠 향이 안 나겠지만.""아... 어쩐지 어디서 익숙한 향이 난다 했어요."신 과장은 웃으면서 얘기했다.올드 패션드는 쌉싸름한 위스키에 오렌지 제스트 향이 상큼하게 나는 칵테일이었다. 맛이 깔끔하면서 묵직했고 낮에 마신 소주나 맥주, 막걸리보다는 입을 개운하게 해 주었다."이 술 맛있네요."은영이 말했다. "마음에 드세요? 다행이네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입니다."신 과장은 웨이터에게 눈짓으로 같은 걸 두 잔 더 주문했다."아내분은 어떤 사람이에요? 사무실 책상 위에 두신 사진을 보니 미인이시던데요."신 과장은 잠시 침묵했다."아? 제가 너무 개인적인 걸 물었나요? 그렇다면 실례했습니다."은영이 신 과장의 표정을 살피고 재빨리 사과했다."아, 아니에요. 미인이죠. 어떤 사람이냐

  • 그 완벽했던 밤   23. 삶은 가끔 예기치 않게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공간 안에 앉아 있는 그 상황에서 승희와 신 과장 사이에 흐르는 긴장된 분위기를 감지한 은영은 혼자 속이 탔다. 혹시라도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됐다. 다행히 더 이상의 불상사는 없이 자리가 파했다. 모두 거나하게 취해 그 식당을 나왔다. 그 식당은 산자락 아래에 있었는데 미니 버스 서비스가 있었다. 사장님이 손님들을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태워 줬다. 등산에 거의 모든 직원이 참여했기 때문에 미니 버스에 모든 인원이 다같이 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센터장을 위시한 윗선들이 먼저 내려갔고, 대리나 평사원급들은 식당 마당 평상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사장님이 돌아오면 두 번째 라운드에 타서 지하철역까지 가기로 했다. 택시를 부르기도 애매한 위치였고 지하철역까지 내려 가기에는 모두가 술에도 취하고 피곤한 상태였다.신 과장은 첫 번째 라운드 미니 버스에 탈 수도 있었는데 한사코 양보해서 남았다. 승희랑 신 과장은 문자로 싸우고 있는지 승희는 식당 마당의 오른편 끝에, 신 과장은 식당 마당의 왼편 끝에 서서 폭풍 문자짓을 하고 있는 것이 은영의 눈에 보였다.식당 사장이 와서 나머지 인원들을 미니 버스에 태웠다. 신 과장은 운전석 옆자리에 앉았고 승희는 맨 뒷자리 창가에 앉았다. 은영은 그 날이 어떻게 끝날까를 상상하며 그 둘을 남몰래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미니 버스 안은 왁자했다. 초저녁밖에 안 된 시각이었기 때문에 다른 약속이 없었던 사람들은 삼삼오오 2차 갈 계획들을 세우고 있었다."주임님, 저희랑 한 잔 더 하고 가시죠? 아직 시간이 이른데.""그래요 주임님. 남편분한테는 아직 회식 중이라 빠질 수가 없다고 하면 되지 않아요?""모처럼 토요일에 이렇게 만났는데 같이 맥주나 한 잔 더 하고 가요.""말은 고마운데 난 그냥 일찍 가서 쉴까 봐. 등산하며 땀을 많이 흘렸는지 몸도 너무 찝찝하고 해서.""에이, 같이 가시지! 저희도 다 땀 많이 흘렸어요.""나한테도 같이 가자 해 줘서 고마워. 근데 오늘은 자기들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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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완벽했던 밤   21. 고독

    은영은 집에 가는 길에 속옷과 향수와 와인을 사러 백화점에 들렀다. 승재의 학원비가 생각나서 잠깐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언제까지고 아이만 생각하며 자신의 행복을 담보 잡힐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아이가 소중한 거는 소중한 거고, 나는 늙어간다.하루하루.내 행복을 찾는다고 해서 아이를 내팽개치는 건 아니다.결연한 마음을 먹고 빨간 립스틱을 꺼내 발랐다. 백화점에 가는데 너무 추레하게 가고 싶지는 않았다. 백화점 1층 화장품 코너에서 혼자서만 겉돌고 싶지는 않았다. 백화점 직원들은 자기들도 서비스 업종 종사자의 저임금을 받으면서 자기들과 비슷한 임금을 받을 법한 소박한 외양의 고객들을 무시했다. 어쩌면 당연하다. 열과 성을 다해 세일즈를 해도 공짜 기프트에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대다수일 확률이 높으니까. 외모와 차림새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것은 소득 없는 일에 세일즈와 고객 서비스의 에너지를 다 쏟고 싶지 않다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발로이다. 많이 당했기 때문에. 사람을 상대한다는 건 그렇지 않아도 진이 빠지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가방이나 구두, 시계나 코트 같은 걸 슬쩍슬쩍 보고 누구한테 아양을 떨고 누구한테는 그저 미소만 띄울지 판단한다. 어찌 보면 직업적 노련함이다. 그 판단이 항상 딱 들어맞는 건 아니지만.은영은 향수 코너에서 이것저것 시향해 봤다. 아무래도 달콤한 향이 좋을 것 같았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시향지를 흔들며 향을 느껴보고 있는데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뜻밖에도 신 과장이 있었다. "과장님, 여기서 뭐 하세요?""어, 배 주임님. 배 주임님은 여기서 뭐 하세요?""아, 그냥 향수 구경하고 있었어요. 과장님 향수 사시는 거예요?""네, 제 건 아니고 아내 하나 사 줄까 해서요.""아, 네. 아내분이 좋아하시겠네요. 향수 사는 남자 새롭네요, 호호."은영은 신 과장의 얼굴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화점 1층의 환하디 환한 조명 아래 신 과장의 얼굴이 모공 하나하나까지 적나라하게 보

  • 그 완벽했던 밤   20. 포도 봉봉

    "어머, 주임님! 머리 하셨네요? 너무 잘 어울려요.""주희 씨가 역시 눈썰미가 있네. 살짝만 다듬은 건데 알아보겠어?""알아보다 마다요. 완전 상큼한데요? 꽤 자르신 거 같은데요?""고마워. 잘 어울린다니 다행이네.""어려 보여요!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하하, 그런 건 없고 그냥 기분 전환차."은영은 어려 보인다는 말에 기분이 좋았다. 그냥 하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월요일의 사무실은 활기가 넘쳤다."다들 주말 잘 보냈어? 주말에 뭐 했어?"젊은 여자가 많은 사무실이라 화제는 자연스레 주말에 한 데이트 이야기, 클럽에 가서 부킹한 이야기, 소개팅한 이야기로 모아졌다. 마흔 초반이었을 뿐이지만 은영은 어느 정도 소외감을 느꼈다. 물론, 기혼 직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혼 직원들은 기혼 직원들끼리 모여 주말에 시댁에 호출되어 간 이야기, 시어머니가 냉장고 속 간섭한 이야기, 자녀들의 친구 부모들과의 트러블,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공동 복도에 내어 놓은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 등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은영은 문득 자신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젊은 미혼 직원들의 대화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지도 못 했고, 그렇다고 나이가 좀 있는 기혼 직원들간의 대화에도 썩 공감이 안 됐다. 아마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원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이 든 기혼 직원들간의 대화에 끼고 싶지 않다는 생각. 험담이거나 체념이거나 울분이거나 박탈감이거나 후회로 수렴되는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정작 그저 재미로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진심이 아니면서도. 사실은 결혼 생활에 만족하고 있고 한 사람과 결혼까지 가서 자녀를 낳고 사회에서 말하는 완벽하게 제도권 안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데에 우월감을 느끼면서도. 가끔 사람들은 거짓으로 불행을 지어낸다. 이유는 다양하다. 그렇게 해야 집단 생활 내에서 미움을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입으로는 불행을 이야기하면서도 눈은 웃고 있다. 은영은 속 없는 사람처

  • 그 완벽했던 밤   19. 일상의 섹스

    "승재 이제 아빠랑 자러 갈까?"저녁 식사 후 아이와 한참 퍼즐을 같이 해 주던 은영의 남편 태형은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아빠, 이거 조금만 더 하고 싶어요.""우리 승재 눈에 잠이 그렁그렁한데?""아니에요! 잠 없어요. 눈에 잠 없단 말이에요."승재는 돌연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태형은 승재가 귀여워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내일 일어나서 축구 교실 가려면 이제 자러 가야 돼. 일찍 자야 우리 승재 아빠만큼 키 큰다. 일찍 자야 키 요정이 승재한테 오는 거야. 자, 우리 이거 정리할까?"태형은 '장난감을 정리하자'라는 문장을 마음대로 음을 넣어 노래를 부르며 나서서 치우기 시작했다. 태형의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노래에 승재는 웃음을 터트렸다. 승재도 이내 태형을 따라 고사리손으로 바닥에 흐트러져 있던 퍼즐 조각과 듀플로 더미들, 장난감 자동차들을 하나 하나 주워 각각 알맞은 상자에 넣기 시작했다. 은영은 둘의 말소리, 노랫소리를 건너 들으며 행복한 마음이 됐다.이윽고 태형은 승재를 들어 올려 품에 안고는 승재의 방으로 향했다. 승재 방의 블라인드를 내리고 은은한 빛의 램프를 켜고 승재를 침대에 내려 눕혔다. 태형은 사이드 테이블에 놓여 있던 동화책을 펼쳐 승재에게 읽어 주기 시작했다.은영은 태형의 기척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다시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 후 화장실에 갔었기 때문에 다시 아래를 깨끗이 씻고 싶었던 것이다. 은영은 꼼꼼하게 세정제를 발라 따뜻한 물로 씻고 보송한 수건으로 세심하게 닦았다. 몸에 바디로션을 바르고 향수도 뿌렸다. 야한 팬티를 입고 슬립 드레스 란제리를 입은 뒤 램프의 조도를 낮췄다.은영은 티브이를 켜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볼 만한 프로그램을 찾았다.태형의 잠자리 동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은영은 조바심이 났다.티브이의 볼륨을 줄여 승재 방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태형은 사자도 되었다가 선생님도 되었다가 코알라도 되었다가 개구쟁이 소년이 되기도 하면서 열성적으로 동화 구연을 해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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