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셋
“싫어.” 파리다의 미소가 살짝 사라졌다. “무릎 꿇으라고 했잖아.” 나는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피로가 너무 심하게 몰려와 하마터면 다시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내 결혼식, 내 배우자, 내 작위까지 뺏어갔으면서 이제는 내 존엄성까지 빼앗으려는 거야?”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욕심쟁이군.” 방 안에 날카로운 웅성거림이 퍼졌다. 파리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말조심해.” “오, 이제 와서 예의범절을 따지는 거야?” 나는 부드럽게 물었다. “마취 없이 뼈를 맞춰본 적도 있고,” 나는 상냥하게 말했다. “한밤중에 역아를 받아낸 적도 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혼자 강을 건너지 않도록 곁에 있어 준 적도 있어.” 나는 그녀처럼 고개를 갸우뚱했다. “평생 피 흘려본 적 없는 사람한테는 무릎 꿇지 않아.” “물웅덩이에 서 있는 주제에 뻔뻔스러운 말을 하는군.” 파리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뻔뻔스럽군." 내가 쏘아붙였다. "자격도 없는 주제에." 한 장로가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루나 파리다 씨, 저희는 사과드립니다…" 나는 그 말에 크게 웃었다. "그녀에게 사과한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서 흠뻑 젖은 채 살인 혐의로 기소된 건 나인데, 당신들은 그녀에게 사과한다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그 침묵은 모두의 충성심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보여주었다. 나는 그를 향해 돌아서서 두 손을 펼쳤다. "좋습니다. 증거를 제시하십시오. 증인을 지명하십시오. 시작합시다. 제가 마땅히 받아야 할 심문을 받으십시오."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면 당신들이 이미 무죄라고 결정한 사람들에게만 적법 절차가 적용되는 겁니까?" 침묵. 또 다른 장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와 함께 방 안은 조용해졌다. "에메랄드 다이아몬드 팩의 레일랩 스타크," 그가 엄숙하게 말을 시작했다. "당신은 코란 장로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늑대풀을 투여하여 그의 죽음을 초래한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당신은 살인, 치료사 권한 남용, 그리고 치료사 중립성 배신 혐의로 기소됩니다." 그 말이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늑대풀이요." 나는 장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는 외과의입니다. 8년 동안 외과의로 일해 왔습니다. 늑대풀이 인체 세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아십니까?"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저는 늑대풀을 만져본 적도, 처방한 적도, 의료 가방 3미터 이내에도 두지 않았습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 보고서를 쓴 사람은 진짜 치료사를 만나본 적이 없는 겁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말릭에게로 돌아섰다. "몇 시간 동안이요."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몇 시간 동안 자리를 비웠었어요, 말릭. 오늘 아침 당신의 짝으로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그녀가 제 자리에 있었어요." 나는 웃었지만, 그 웃음에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당신은 그녀에게 표식을 남겼고, 왕관을 씌워줬어. 그 모든 걸 나와 함께 하기로 했던 바로 그날에 해버렸잖아." 목이 메였다.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하찮은 존재였길래, 단 몇 시간과 누군가의 한마디로 모든 걸 지워버릴 수 있었던 거야?"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그가 할 수 있는 어떤 말보다도 더 타오르는 듯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 남자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 모든 미래를 그와 함께 만들어왔다. 다른 무리들, 다른 기회들, 다른 삶들을 포기했던 것도 그를, 우리를,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던 모든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내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모든 것을 무너뜨려 버렸다. "좋아, 대답하지 마. 알 필요 없어. 하지만 그냥 내 모습만 봐줘." 나는 속삭였다. 눈가에 새로운 눈물이 맺혔고, 나는 그 눈물이 싫었다. 그가 내 눈물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모든 일이 있은 후에도 그가 여전히 내 눈물을 흘리게 할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싫었다. "이걸 믿는다고 말해줘. 지난 8년간의 내 모습을 보고 내가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해줘." 나는 불안하게 숨을 내쉬었다. "말릭, 그녀가 당신에게 뭐라고 했어?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이렇게까지 한 거야?" 그는 한참 동안 내 시선을 응시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누가 뭐라고 했길래 이러는 거야?" 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럼 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건데?" 나는 날카롭게 물었다. 말릭의 표정이 굳어졌다. "존중하는 태도로 말해."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존중하는 태도로?" 나는 되물었다. "내가 집에 오기도 전에 당신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대체했잖아." 파리다는 그의 옆에서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지만, 이번에는 그녀를 완전히 무시했다. 그녀를 너무 오래 쳐다보면 정말로 방을 뛰쳐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말릭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늘 아침, 당신은 나를 당신의 미래라고 불렀잖아요." 나는 숨이 가빠진 채로 말했다. "몇 시간 후, 저는 살인 혐의로 기소되어 집에 돌아왔는데, 갑자기 그녀가 당신 옆에 앉아 제 자리를 마치 자기 자리인 양 행세하고 있더군요." "이 재판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말릭이 차갑게 대답했다. "이 재판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나는 폭발하듯 소리쳤다. 내 목소리의 크기에 나 자신도 놀랐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웃으며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는 다시 회의 참석자들을 바라보았다. "이 상황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 모르시겠습니까? 시기만 봐도 의심해 봐야 할 겁니다." "증거가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한 장로가 대답했다. "무슨 증거요?" 나는 즉시 따져 물었다. "지금까지 제가 들은 것은 권위로 위장한 소문에 불과한데요." 몇몇 사람들이 불편한 듯 몸을 움직였다. 말릭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코란 장로에게 배정된 마지막 치료사였습니다." "네, 그게 제 임무였죠!" 나는 쏘아붙였다. “내가 얼마나 많은 환자를 치료했는지 알아? 가까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유죄로 만들 수 있다면, 축하해. 이 왕국의 모든 치료사가 이제 용의자가 됐군.” 파리다는 마치 내가 그녀를 지치게 하는 것처럼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감정적으로 변했구나.” 나는 천천히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있잖아, 나 감정적이야.” 애써 감정을 다스리려 했지만 목소리는 떨렸다. “내 짝은 내 여동생을 내 곁으로 데려갔고, 내 무리는 나를 살인자라고 부르는데, 어째서인지 너희들이 내 인생을 파괴하는 동안 나는 여기 서서 얌전히 있어야 하는 거야?” 파리다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있잖아,”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몇 년 만에 네가 이렇게 솔직한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인 것 같아.”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뜻이야?” “그건,” 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넌 항상 치료사라는 가면 뒤에 진짜 네 모습을 숨겨왔다는 뜻이야. 차분하고, 온화하고, 이타적인 모습 말이야.”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잔인한 사람들은 종종 동정하는 척을 아주 잘하죠.” 방 안의 분위기가 흔들렸다. 사람들이 추악한 사실을 믿고 싶어 할 때 느껴지는 그 미묘한 분위기 변화를 나는 순식간에 감지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파리다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레이, 넌 항상 그런 면이 있었어. 다만 우리가 네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이제야 깨달았을 뿐이지.” 내 안에서 무언가가 너무 순식간에 끊어지는 바람에 나는 그 순간조차 느끼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그 자리에 서 있던 나는 순식간에 움직이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년아—” 분노와 절망이 격렬하게 뒤섞여 이성을 잃고 파리다에게 달려들자 방 안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파리다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고, 나는 거의 그녀에게 닿을 뻔했지만 누군가 나를 세게 붙잡았다. 말릭이었다! 그의 손이 내 팔을 움켜쥐었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내 몸은 돌바닥에 세게 부딪혀 숨이 막혔다. 맙소사. 그가 날 던졌어! 어깨에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고,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고 쏟아졌다. 방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루나를 공격했어!" "진정시켜!" "정신이 불안정해!"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순간 숨이 막혔다.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흐릿한 시야로 발밑의 돌바닥을 바라보며, 수치심이 온몸을 태우는 듯 속이 메스꺼웠다. 그때 고개를 들어보니 말리크가 내 위에 서서 파리다를 나에게서 막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텅 빈 공허함에 휩싸였다. "...네가 날 던졌어." 나는 절망에 빠져 속삭였다. 말리크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네가 어쩔 수 없었어."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 손은 여전히 배에 얹혀 있었지만, 곧 떼었다. 파리다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파리다는 눈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가 거의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가늘게 떴다. 공포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겨우 3주 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아직 생각조차 못 했다. 완벽한 순간을 만들고 싶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한 노인이 갑자기 일어섰다. "이런 행동은 당신의 불안정함을 더욱 증명하는 것이오—" 방 문이 벌컥 열리자 모두들 깜짝 놀라 돌아섰다. 한 여자가 문 앞에 나타났다. 나이가 많고 체구가 작은 그녀는 손을 살짝 떨며 걷는 모습이 순진해 보였고, 나는 그녀를 바로 알아봤다. 바로 마야, 외곽 시장에서 약초를 팔던 여자였다. 그녀에게서 열근초를 두세 번 정도 샀던 기억이 난다. 항상 급하게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을 사러 가는 길이었다. 그녀는 들어올 때 나를 쳐다보지 않았는데,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장로는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증언을 해 보시오." 증언이라고요? 뭐라고요? 마야는 두 손을 모으고 바닥을 보며 말했다. "몇 주 전에 그녀가 제게 왔어요. 강력한 약이 필요하다고 하면서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저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어요. 존경받는 치료사였죠. 그래서 그녀를 믿었어요." "맞습니다."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열근초를 사 왔는데…" "그녀는 늑대풀을 달라고 했어요." 마야가 조용히 말했다. 방 안이 순식간에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거짓말입니다." 내 목소리가 소음을 뚫고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저는 열근초와 뼈풀을 달라고 했어요… 저는 단 한 번도…" "저는 그녀에게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마야는 여전히 나를 쳐다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찾아왔어요. 계속 달라고 했죠." 마침내 그녀는 고개를 들었고,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 눈물이 나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저는 제 손주들을 그녀에게 맡겼어요. 그녀는 제 막내아들을 치료해 줬거든요."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떨렸다. "그리고 그녀는 내 신뢰를 이용해서 원하는 걸 얻어냈어." 그 후 이어진 침묵은 내가 여태껏 들어본 그 어떤 소리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안 돼... 안 돼! 이럴 순 없어.레이랩의 시점머리카락이 욱신거리는 통증이 의식을 되찾았음을 알렸다. 둔하고 끈질긴 통증은 입안을 가득 채운 날카롭고 금속성 후회의 맛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몸을 움직여 손을 들어 통증을 없애려 했지만, 무언가가 손목을 파고들었다. 거친 천 조각이 살을 파고들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공포가 의식의 안개를 뚫고 들어왔다.눈을 깜빡이며 억지로 눈을 떴다. 더러운 창문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와 방을 회색빛으로 물들였다. 먼지 알갱이들이 드문드문 난 전등줄 사이로 춤을 추듯 움직였고, 오래되고 갈라진 마룻바닥 위로 흩날렸다. 나는 바닥에 벽에 기대어 누워 있었고, 다리와 팔은 천 조각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촉감으로 보아 낡은 옷가지인 듯했다. 입에는 거친 재갈이 물려 있어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다.메스꺼움이 밀려왔다. 요즘 들어 익숙한 증상인데, 방금 나를 쓰러뜨린 충격 때문에 더욱 심해졌다. 그 악당. 그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의 으르렁거림, 필사적인 발버둥, 눈이 멀 것 같은 고통,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손목을 비틀어 묶인 끈을 풀어보았다. 꽉 조여 있었고, 풀리지 않았다. 소용없었다. 퀴퀴한 나무 냄새와 썩은 냄새 같은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곳은 단순히 낡은 곳이 아니었다. 버려진 곳이었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느껴졌다.그때, 낮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목소리들. 가까이서.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가운데, 나는 움직이지 않고 기절한 척했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꼬맹이." 거친 남자의 목소리였다. "네가 깨어 있는 거 다 알아."눈이 번쩍 뜨였다. 희미한 불빛 아래 두 사람이 내 위로 서 있었다. 너무 크고, 너무 건장했다. 악당들이었다. 여기서는 희미해졌지만, 그 냄새는 분명했다. 야생적이고 길들여지지 않은, 어딘가 역겨운 기운이 감도는 냄새였다.말을 걸었던 자가 내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얼굴에는 흉터가 가득했고, 입가에는 잔혹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바로 그였다.
엘리엇의 시점서재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무 의자가 돌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났다. "사라졌다니, 무슨 소리야? 레일랩은 어디 있어?"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가슴속에서는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치밀어 올랐다. 마크는 움찔했지만, 내 시선을 똑바로 응시했다."알파, 그녀가… 그녀가 잠시 속이 메스꺼웠어요." 그는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 듣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말을 시작했다. "알다시피, 그녀의 상태 때문에요. 그녀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숲 가장자리 쪽으로 갔어요. 리카네 현관에서 토하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내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런데 넌 그냥 그녀를 내버려 뒀어? 우리가 도망자들을 쫓는 동안?"마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알아요, 알파. 따라가 보려고 했지만, 마지막으로 그녀를 봤던 곳에 도착했을 때는 그녀가 없었어요. 그때 어떤 냄새가 났어요. 세 가지 냄새가, 다른 모든 냄새를 뚫고 나올 만큼 강렬했어요."숨이 턱 막혔다. "세 가지? 무슨 냄새?"“두… 그건 정체를 알 수 없는 냄새였어요. 틀림없어요. 세 번째는… 알파님, 그건 그녀의 냄새였어요. 빠르게 사라지고 있지만, 분명히 그녀의 냄새였어요. 제 생각엔… 아니, 그들이 그녀를 데려간 게 확실해요.” 마지막 말은 두려움에 가득 찬 속삭임이었다.얼마 전의 분노와는 다른 종류의 차가운 공포가 나를 덮쳤다. 원초적이고 깊숙이 자리 잡은 두려움이었다. “리카!” 나는 그녀에게 소리치며 돌아섰다. “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알고 있어? 모든 집을 다?”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엘리엇. 우리 집에서 이렇게 가까운 집은 네 채뿐이에요. 그 집 사람들은 모두 알아요.”“좋아.” 나는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마크,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곳으로 안내해 줘. 리카, 너와 카밀은 그 네 집에 조용히 연락해. 만약 저항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강제로 데려올 권한을 줄게.”마크는 서둘러 내 말에 따르며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그를 따라갔다.
레이랩의 시점"돈이 없어요." 손이 떨리기 시작했지만, 내 목소리는 무미건조하고 차분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발치에 무성한 야생 열매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여기 나와서 이걸 따고 있는 거예요. 무리 시장에 팔아서 먹을 것을 사려고 했거든요."그 떠돌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그림자가 내 위로 드리워져 햇빛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의 시선이 무겁고 불안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가 나를 특별히 지목한 것 같았다. 그의 관심이 이제 악의적으로 온전히 내 앞에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돈이 없다고?" 그의 목소리는 낮게 으르렁거렸고, 역겹도록 달콤한 무언가가 스며들어 있었다. "그렇게 예쁜데 안됐군."나는 움찔했지만 몸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등골이 오싹했다. 그는 거칠고 긁는 듯한 소리로 땅을 울리며 웃었다.“자네를 봐.” 그가 말을 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참 예쁘군, 아가씨.”내 턱이 굳어졌다. 온몸의 근육이 도망치고 싶어, 으르렁거리고 싶어, 내 본모습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어 비명을 질렀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여기서는 안 돼. 지금은 안 돼. 숨어 있어야 했다.“느낄 수 있어.” 그가 덧붙였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져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지만, 고요한 숲속 공터에서는 또렷하게 들렸다. “일 년 동안 먹고 살 돈은 거뜬히 줄 수 있지. 아주 간단한 일 하나만 해주면 돼.”그 말은 마치 직격탄처럼 내 피부를 태우는 듯했다. 차가운 공기에도 불구하고 피가 끓어오르는 듯했고, 내 안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간헐천이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고, 무표정을 유지하며 숨을 고르게 쉬었다. 손에 쥔 야생 열매를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진정해, 레이랍. 진정해.*"난 만족해." 나는 거의 속삭이듯 말했지만, 단호함을 잃지 않았다. "내 노력으로 얻은 작은 것에 만족해."그는 코웃음을 쳤고, 그 거친 숨소리가 주변 나뭇잎을 흔들었다. "너 같은 여자는 열심
레이랩의 시점차가운 가을 공기는 점점 심해지는 메스꺼움을 가라앉히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엘리엇을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는 동안 속은 점점 더 울렁거렸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얼굴을 찡그렸다. 리카의 집 앞 정원은 흠잡을 데 없이 깔끔했는데, 갑자기 아프다는 이유로 그 정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집 가장자리의 무성한 잡초 덤불 속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좀 편히 쉴 수 있기를 바랐다.거친 나무줄기에 기대어 심호흡을 했다. 세상이 살짝 빙빙 도는 듯한 불쾌한 느낌이 최근 들어 너무나 익숙해졌다. 몇 분 후, 메스꺼움은 가라앉았고, 기력은 빠졌지만 더 이상 토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무에서 내려와 배를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엘리엇을 기다리려고 다시 앞마당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메스꺼움이 다시 밀려왔다. 이번에는 훨씬 더 심했다. 나는 배를 움켜쥐고 비틀거렸다. 경비를 감독하던 마크가 내 괴로움을 알아차렸다."괜찮아, 레이랩?"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입안 가득 짠맛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고개를 저었다."여기 있어."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부드러웠다. "너무 많이 움직이지 마."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이고 장식된 돌담에 기대섰다. 눈을 감고 속이 불편한 것을 애써 감추려던 그때, 어렴풋이 무언가 들려왔다. 낮고 속삭이는 목소리였지만,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다. 내가 방금 전에 나왔던 덤불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호기심, 혹은 불길한 예감이 메스꺼움보다 더 강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몸을 일으켜 벽에서 살짝 떨어졌다. 발걸음은 소리 없이 움직였다. 오랫동안 눈에 띄지 않게 움직여 온 습관이었다. 목소리가 점점 더 또렷해지더니, 곧 어떤 냄새가 느껴졌다. 처음엔 희미했지만, 곧 압도적인 냄새로 변해 마치 물리적인 타격처럼 나를 덮쳤다. 역겹고 끈적거리는 냄새에 순식간에 구역질이 났다. 몇 주 전 국경에서 나를 공격했던 악당들에게서 풍기던 바로 그 악취였다. 속이 울렁거렸지만, 이
엘리엇의 시점말려가는 허브 향이 짙게 공중에 감돌았다. 평소 같으면 내 본능의 거친 부분을 진정시켜 주던 익숙한 향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마치 휘몰아치는 폭풍우를 가리는 얇은 장막처럼 느껴졌다. 리카는라벤더와 금잔화 줄기 사이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었고, 미간에는 무언가에 집중하는 듯한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날카로워지자 놀란 기색이 고요한 마당에 퍼져 나갔다."엘리엇? 레일랩? 대체 무슨 일이야?" 평소 부드러웠던 그녀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걱정이 가득했다.레일랩의 손이 여전히 내 코에 살짝 닿아 있었다. 피는 멈췄지만 마치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재킷 자락으로 내 턱의 피를 닦아주었는데, 작고 조용한 그 행동이 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희미하지만 철 냄새가 여전히 윗입술에 남아 있었다."리카,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레일라프의 목소리는 낮게 떨렸고, 그 속에는 미세한 떨림이 서려 있었다. 그녀가 마침내 손을 떼자, 나는 숨을 죽이고 얼마나 긴장했는지 깨달았다. "엘리엇... 코피가 났어요."리카가 더 가까이 다가와 내 얼굴을 훑어보고는 레일라프를 살폈다. 리카는 언제나처럼 예리하고 관찰력이 뛰어났다. "코피? 그것 때문에 이렇게 난리야, 얘야?""날씨 때문이라고 했어요." 내 목소리는 내 귀에도 거칠게 들렸다. 내가 그녀를 걱정시킨 게 너무 싫었다.레일라프가 나를 돌아보며 눈빛을 번뜩였다. "날씨 때문이라고? 엘리엇, 피를 토했잖아! 얼굴이 엉망이었단 말이야!"리카는 레일라프의 팔에 다정하게 손을 얹었다. "둘 다 진정해. 엘리엇 말이 맞아, 레일라프. 공기가 너무 건조해. 가끔 이런 일이 생기기도 해. 특히 우리처럼 점막이 예민한 사람들은 더 그래." 그녀는 내 안의 늑대를 말없이 인정하듯 윙크했다."내가 말한 그대로야." 순간 가슴을 쫙 펴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곧 꾹 참았다. 지금은 자존심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하지만 레일라프는 납득하지 못한 듯했다.
엘리엇의 시점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마지막으로 단정하게 정리한 후, 이제야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다. 어두운 색 튜닉은 피부에 닿는 감촉이 좋았고, 완벽하게 재단되어 있었으며, 튼튼한 바지는 편안했다. 꽤 신경 써서 입었다는 걸 스스로 인정했다. 레일랩이 함께 간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깔끔하고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 그랬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려 애썼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그 말은 내 머릿속에서조차 공허하게 느껴졌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파 엘리엇? 준비됐어?" 마크였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굵었다."거의 다 됐어." 어깨를 펴며 대답했다. 화장대 위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나쁘지 않았다.마크가 들어와 나를 훑어보았다. 살짝 찡그린 표정이 스쳤지만, 금세 감췄다. "알파, 괜찮아?""완벽해. 그냥… 준비하는 중이었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은 살짝 가늘어졌다. "레일라프도 우리와 함께한다고 들었소?""네." 나는 너무 성급하게 대답했다.마크의 입술이 얇아졌다. "알파,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죄송하지만, 그녀가… 당신 곁에 설 자격이 있습니까?" 그의 말투는 최대한 중립적이었지만, 나는 그 속에 담긴 말 없는 질문과 판단을 느꼈다. 그것은 내 늑대 본능을 자극했다.내 턱이 굳어졌다. "그녀는 자격이 충분해요, 마크. 그녀의 조언은 매우 귀중했습니다. 그녀는 관찰력이 뛰어나고 총명하죠. 저는 그녀의 관점을 높이 평가합니다."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움찔했다. "죄송합니다, 알파.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다만… 최근의 소요 사태 때문에 당신과 그녀의 안전이 걱정되었을 뿐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알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말했다. "가죠."우리는 웅장한 계단을 내려갔다. 공기 중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미 일어나 있던 몇몇 무리 구성원들은 호기심과 판단을 담은 조용한 웅성거림을 내뿜었다. 모든 시선은 계단에 쏠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