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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05 09:29:26

다음 날 아침, 출근한 서린의 책상 위에는 거대한 서류 탑이 쌓여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전자 결재로 넘어오던 건들이 죄다 종이 뭉치로 돌아와 있었다.

매입 계약서, 성능 점검 기록부, 딜러 수수료 청구서. 수백 장은 족히 되어 보였다.

“이거, 오늘 오전까지 다 처리해 줘요.”

영업 1팀장 심재호가 지나가듯 툭 던지고 갔다.

그의 입가에는 비릿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서린은 말없이 서류 더미를 바라보았다.

‘이제 시작이구나.’

단순한 업무 지시가 아니었다.

일종의 시위였다.

‘감히 우리 밥그릇을 건드려? 어디 한번 당해 봐라.’

그러거나말거나.

오전 내내 사무실은 아수라장이었다.

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렸다.

“야! 경리! 내 돈 언제 들어와! 차 판 지가 언젠데 아직도 입금이 안 돼!”

“서류 반려됐다는 게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 다 이렇게 해왔는데!”

현장 딜러들이 사무실로 들이닥쳐 고성을 질렀다.

심 팀장은 그들 뒤에서 팔짱을 낀 채, 난처하다는 듯 연기를 했다.

“아니, 나한테 그러지들 말고. 저기 새로 오신 공 과장님한테 따져. 그분이 깐깐하셔서 결재를 안 해주신다잖아.”

화살은 정확히 서린에게로 향했다.

험상궂은 딜러 몇 명이 서린의 책상을 둘러쌌다.

책상을 쾅 내리치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어이, 신입. 펜대 좀 굴린다고 유세 떠나 본데, 우리 같은 현장직들 굶어 죽으라는 거야?”

“규정? 웃기지 마라 그래! 대표님도 안 건드리는 걸 네가 뭔데 막아!”

욕설이 섞인 고성이 서린의 고막을 때렸다.

보통의 여직원이라면 울음을 터뜨리거나 겁에 질려 도망쳤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서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소란 피우지 마세요. 업무 방해입니다.”

“뭐? 업무 방해?”

딜러 중 한 명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그때 심 팀장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는 딜러들을 진정시키는 척하며 서린의 책상 앞에 섰다.

“공 과장. 융통성 있게 갑시다, 좀. 현장 애들 다 죽어나가는 꼴 보고 싶어요?”

그는 몸을 숙여 서린에게만 들리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신입이 뭘 안다고 설쳐. 대표님 믿고 까부는 모양인데, 이 바닥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좋은 게 좋은 거로 가라고. 이 바닥에서 말 안 듣는 애들이 어떻게 되는지, 직접 보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해.”

서린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심 팀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긁어 부스럼이라뇨.”

서린은 서류 더미 맨 아래에 깔려 있던 파일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썩은 살은 도려내야죠.”

“뭐?”

딜러들 사이에서 낮은 욕설이 새어 나왔다.

누군가는 고개를 떨궜고, 누군가는 서린을 노려봤다.

“어제까지 들어온 정산 요청 내역입니다. 영업 1팀 소속 딜러 7명.”

서린은 파일을 펼쳤다.

형광펜으로 칠해진 내역들이 빼곡했다.

“차량 12대. 성능 점검부상 ‘무사고’ 판정. 하지만 보험 이력 조회 결과 전손 처리된 이력 있음. 딜러들이 공업사와 짜고 사고 이력 세탁해서 정상 매물로 둔갑시킨 겁니다.”

심 팀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거야말로 사기입니다. 고객한테 팔았다가 나중에 문제 터지면 회사가 전액 배상해야 하는 건 아시죠?”

“야, 그건… 관행적으로…”

“그리고,”

서린은 말을 끊지 않았다.

“수수료 내역. 딜러들이 가져가는 알선 수수료 외에, ‘진행비’ 명목으로 30만 원씩 추가 청구되어 있더군요. 영수증 증빙은 간이 영수증 하나. 날짜도, 품목도 불분명합니다.”

서린은 모니터 화면을 돌려 심 팀장에게 보여주었다.

“지난 1년간 영업 1팀에서 이렇게 빠져나간 돈이 2억 4천입니다. 팀장님 결재 도장 다 찍혀 있고요.”

사무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소리를 지르던 딜러들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명백한 횡령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이 데이터로 증명된 순간이었다.

심 팀장의 눈빛이 바뀌었다.

들킨 사람이 성내는 딱 그 눈빛.

“공 과장, 이거 어디서 가져온 자료야?!”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주먹을 쥐고 책상을 쾅 내리쳤다.

“이, 미친…! 야! 너 지금 나 감사하냐? 네가 뭔데 나를 조사해!”

그는 폭력적으로 돌변했다.

당장이라도 서린의 멱살을 잡을 기세였다.

서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심 팀장과 눈높이를 맞췄다.

“감사가 아니라, 제 일을 하는 겁니다. 회사 돈을 지키라고 이 자리에 있는 거니까요.”

“이게 진짜…!”

심 팀장이 욱해서 손을 치켜들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다들 모니터 뒤로 숨기 바빴다.

하지만 딱 한 사람,

정산팀의 김다은 대리가 잠시 망설이던 끝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 심 팀장의 갑질에 치를 떨던 직원이었다.

“팀장님, 그만 좀 하세요.”

김 대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단호했다.

“다 들리게 협박하시는 거,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규정대로 하자는 게 뭐가 문제라고요.”

“허, 이게 돌았나. 김 대리, 너도 저년 편이냐? 너희 팀 회식비도 다 까버릴까?”

심 팀장의 으름장에 김 대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입술을 꽉 깨물면서도 그녀는 주저앉지 않고 서린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서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하나가 새겨졌다.

이 회사에도 아직 규정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남아 있다는 것.

모두가 침묵을 선택한 자리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일어섰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서린의 시선이 파티션 너머 김다은 대리에게 닿았다.

겁은 나지만 외면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다.

서린은 그녀의 이름과 얼굴을 조용히 기억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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